1660. 제주도 푸른 밤-90-
보미는 도훈이 짬이 날 때마다 담배를 태운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흡연을 관대하게 허용하는 편이었다.
보미가 먼저 식당에 들어간 사이 도훈은 급히 인벤토리에서 대포폰을 꺼내 들었다.
‘이 전화로 연락이 왔었다고?’
[네. 아까 운전 중에 계속 울리더라고요. 주인님이 곤란할까 봐지금 말씀드립니다.]
‘잘했어. 보미 앞에서 투 폰이 걸리면 곤란하니까. 괜히 바람피운다고 오해할 거야.’
도훈이 부재중 전화에 남은 연락처를 확인했다. 해당 폰으로 전화를 걸 사람은 미호밖에 없었다.
‘역시나 미호구나. 특임대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 허탕 치고 물러났다는 연락이었으려나?’
도훈이 대포폰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미호의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응? 왜 전화기가···.”
도훈은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부재중 전화가 찍힌 시간은 지금부터 10분 전.
그러나 현재 상대방 전화기는 꺼진 상태였다. 도훈은 다시 전화 걸기를 중단하고 로시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먼저 전화를 건 사람이 갑자기 폰을 꺼뒀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흐음. 일단 전화는 다시 걸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미호가 놈들에게 걸렸다는 뜻일까?’
[아직 단언할 상황은 아닙니다만, 최악의 경우 그런 가정도 가능합니다.]
‘이런 젠장. 대체 뭐지?’
도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자신을 숨겨준 미호가 놈들에게 걸렸다면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할 수 있었다.
[침착하십시오. 단순히 전화를 못 받는 상황일 수도 있으니까요. 폰을 꺼둬야 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고요.]
‘그랬으면 정말 좋겠는데.’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미호 양이 정말 스파이 행위 중 걸린 상황이라면 주인님이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상대방을 확인하기 위해 통화 연결을 시도했을 겁니다. 하지만 전화기가 바로 꺼졌다는 말은, 최소한 주인님의 존재가 아직 놈들에게 노출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건 오히려 긍정적인 사인이죠.]
‘내가 위치를 들키고 말고가 아니라 미호가 붙잡힌 게 더 문제란 말이야. 어쨌든 미호는 나를 숨겨주려다 잡힌 거니까.’
[아직 단언할 정도는 아닙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 침착하셔야 합니다.]
‘젠장. 짜증나는구먼. 내가 힘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그냥 확 다 때려잡아 버리는 건데.’
[진정하시고 우선 보미양에게 돌아가십시오. 사태를 좀 더 지켜보고 행동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알았어.’
[표정 관리 잘하시고요. 주인님이 초조해하시면 보미양도 불안해할 겁니다.]
‘응.’ 도훈은 최대한 감정을 숨긴 채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 * *
PC방으로 들어온 창범은 여느 때처럼 야식으로 컵라면을 하나 먹고 게임을 시작했다. 게임을 하다 담배를 피우러 흡연실에 갔다가, 다시 게임을 하고 이번엔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마우스를 잡기를 장장 5시간.
구석에 숨어 지켜보던 미스터 엑스는 지루함에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대체 뭐하는 새낀데 하루 종일 게임만 처하는 거지? 잠도 없나?’
창범이 일하는 공장에서부터 이어진 그의 감시는 어느덧 16시간째를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특이사항이라 부를만한 기미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혹시나 게임 채팅창으로 뭔가 메시지를 주고받나 싶어서 창범이 게임 하는 자리 바로 뒤로 접근해 채팅 내용도 확인했으나, 창범이 열을 올리고 채팅을 치는 내용은 대부분 상대방 부모의 안부를 묻는 패드립 뿐이었다.
미스터 엑스는 그 순간 자신이 대체 왜 이런 비생산적인 감시활동을 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특임 조장이 잘못 짚은 거 같은데. 이 자식은 그냥 순수한 게임 폐인일 뿐이잖아?’
하지만 하루 만에 밀착감시를 포기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미스터 엑스의 감시는 그 후로도 3일간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3일째 되는 날, 미스터 엑스는 마침내 두손 두발 모두 들고 말았다.
‘···완전 또라이네. 종일 공장 일하고 저녁엔 PC방 달려와서 게임하는 게 인생의 전부일 줄이야. 어떻게 이런 놈이 PK단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거지?’
물론 그의 패턴에 변화가 있을 때도 있었다.
공장 잔업이 없는 날 일찍 PC방에 도착할 때였는데, 그때는 조소연이라는 이름의 알바생과 1~2시간가량 카운터 앞에서 시시덕거리며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미스터 엑스는 조소연에 대해서도 의심했지만, 자신이 코 앞에서 있어도 감지도 못하는 순수한 민간인일 뿐이었다. 결국 미스터엑스는 3일 간의 밀착감시를 끝내고 김태홍에게 보고내용을 알렸다.
-이창범은 절대 배신자가 아님. 그보다는 PK단 단원으로서 결격사유를 재고해봐야 할 정도로 생활 리듬이 엉망인 게임 폐인임.
근무 태만으로 본사에 보고하겠음.
투명화 능력자 미스터 엑스가 창범을 감시하는 사이 미호 역시 임시연의 감시망에 걸려있었다.
임시연은 김태홍에게 입은 내상을 치료하느라 치유계 마법을 쓰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미호의 감지에 빠르게 걸리고 말았다.
미호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스터 엑스의 존재감을 알아챌 정도로 기감이 뛰어난 마도사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었다.
내상을 치료하기 위해 마력을 주입하는 순간, 미호는 누군가 멀리서 자신을 지켜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기감은 무척 예민한 편이었기 때문에 대기 중에 흩어진 마나의 인위적인 이동을 곧바로 캐치해냈다.
미호는 한동안 눈치를 못 챈 척 하고 평소대로 행동했다.
상대방은 무척 재빨랐는지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도 순식간에 거리를 두고 따라붙을 만큼 신속한 기동력을 자랑했다.
그리고 이런 능력자가 특임대에 속해 있다는 것을 떠올린 미호는 자신이 김태홍으로부터 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미호는 도훈에게 부재중 전화를 남기고, 곧바로 휴대폰을 꺼둠으로써 몰래 경고를 날렸다. 도훈이 자신이 보낸 경고의 의미를 알아차린다면 한동안 먼저 연락하거나 서울로 돌아오지 않을 거란 판단이었다.
‘혹시나 도훈이가 성급하게 되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미호는 상대의 감시를 역이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지루한 놈들의 감시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지만, 절대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만에 하나 들키게 된다면 피바람이 불게 분명했다.
* * *
식당으로 돌아온 도훈은 애써 표정관리를 했다. 미호가 남긴 부재중 전화가 마음에 걸렸지만, 당장 섣불리 움직일 단계가 아니었다.
“뭐 시켰어?”
“응. 은갈치 조림. 먹어봤어?”
“아니 아직.”
“이게 또 제주도 별미거든. 여기 되게 잘하는 음식점이야.”
보미가 애써 점심 메뉴까지 골라주었지만, 여전히 도훈의 신경은 미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젠장. 나 때문에 미호가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호는 주인님 앞에서나 순한 양이지, 실제론 굉장히 빼어난 마도사입니다. 심지어 9명의 영혼이 늘 함께하기 때문에 놈들에게 쉽사리 당하진 않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도훈이 식탁 아래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긋지긋한 PK단과의 악연을 끊어내려면 결국 방법은 역시 한가지 뿐이었다.
‘내가 힘만 길러봐. 싹 다 부숴버릴 테니까.’
[혼자서는 무립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랄까요. 하루 빨리 함께할 동료를 모으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두 명 확보한 셈인가? 미호랑 보미까지.’
[하지만 미호양이 과연 PK단에 대적할 수 있을까요? 주인님께 협조하긴 하겠지만 조직을 배신할 성향으로 안 보이던데요.]
‘정확히는 조직 전체가 아니라 자기랑 친한 PK단원들이지. 그들과 적대하지만 않으면 딱히 반대하지도 않을걸?’
[흐음. 어쨌든 주인님이 더 강해지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그걸 위해선 미뤄놓은 업적도 최대한 빨리 해결하셔야 하고요.]
‘근데 보미가 랭커에 오르면 얼마나 강해지는 거야? 고수에서 랭커가 그렇게 많이 차이가 나?’
[당연하죠. 랭커부터는 PK단원들도 쉽게 건드리지 못합니다.
지부 하나 정도는 단신으로 날려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죠.]
‘호오. 보미는 지금도 충분히 강해 보이는데.’
[랭커 특전으로 부여되는 스킬과 아이템이 무려 전설급이라 그렇습니다.]
‘전설급?’
[네. 일종의 필살기라고 할 수 있죠. 강력한 스킬과, 전설급 아이템 하나를 갖추게 되면서 고수 등급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게 되는 거죠.]
‘나중에 나도 그렇게 되려나?’
[흐음, 아쉬운 건 주인님이 이제껏 받아온 스킬로 미루어 볼 때 아마 전설급 스킬과 아이템이라도 크게 기대할 건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왜?’
[주인님은 애초 전투 클래스가 아니다 보니, 섹서에 특화된 스킬을 부여받겠죠. 무한 질싸라던가, 24시간 발기 유지 같은···.
아이템도 뭐 뻔하지 않겠습니까?]
‘젠장. 그럼 섹서를 고른 것이 패착인거야?’
[꼭 그렇다고 볼 순 없습니다. 주인님은 무공을 통해 부여된 클래스와 별도로 강해지고 있으니까요. 오히려 주인님의 비정상적으로 빠른 성장은 주인님이 선택한 독특한 클래스에 기인합니다 즉, 섹서로 레벨 업을 가속시키고 그로 인한 부가적인 포인트와 미션을 통해 전투력을 끌어 올리는 특수한 방식의 성장인 셈이 죠.]
‘그래도 난 다른 랭커들에 비해서 필살기 하나가 없는 셈이잖아. 보나마나 로시 네가 말한 것처럼 섹스에 특화된 스킬일 텐데 그걸 가지고 PK단하고 전투 때 어떻게 써먹겠어.’
[아니죠. 주인님이 랭커가 되면 가장 유리한 것은, 다른 플레이 어들과 교류가 가능 하다는 부분입니다.]
‘교류라고?’
[네. 일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랭커부터는 타 플레이어와 접촉이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세상의 절반이 여자인 것처럼, 플레이 어의 절반도 여자니까요.]
‘오옷!’
[이해하셨습니까? 여성 플레이어라면 주인님이 얼마든지 동료로 포섭가능하지 않을까요? 이번에 보미양을 끌어들인 것처럼요.]
‘그게 더 대박이네!’
도훈이 혼자서 로시와 대화를 하면서 깨달음을 얻는 동안 말수가 없자 보미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기, 혹시 입맛에 잘 안 맞아?”
“응?”
“아니 계속 말없이 국물만 떠먹길래.”
“아, 어어. 아니야. 잠깐 딴 생각 좀 하느라.”
“무슨 생각?”
보미는 도훈이 평소와 달리 말수가 없어지자 유독 불안해했다.
자신이 뭔가 실수를 해서 도훈의 심정이 변한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것이었다.
“아니, 곧 서울 돌아가야 하는데 갑자기 밀린 리포트가 생각나서.”
“아! 그랬구나. 휴가 온 지 일주일 됐나?”
“내일 모레면 일주일째야. 근데 제출할 레포트를 아직 손도 못댔거든.”
“내가 도와줘?”
“아니야. 굳이 도와줄 필요까진···.”
“나 이래 봬도 공부 잘했어. 경찰대 졸업생이면 어디 가서 꿀리진 않는다고.”
“그야 그렇겠지. 그래도 전공이 전혀 다르잖아. 교육학에 대해서 좀 알아?”
“아···. 그래도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얼마든지 도와줄 테니까.”
“알았어. 근데 이거 갈치조림 맛있네.”
도훈은 다른 생각을 떨쳐버리고 눈앞의 보미에 집중했다. 미호의 상황이 궁금하긴 했지만, 당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두 사람은 점심을 먹고 나서도 순찰을 계속했다. 사실상 순찰을 빙자한 해안도로 드라이브였지만, 어쨌든 하루종일 붙어 있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순찰을 마친 두 사람은 지구대로 복귀했다. 보미는 경찰근무복을 갈아입기 위해 지구대를 들렀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김형사와 마주쳤다.
“어, 김형사님? 지구대엔 무슨 일로?”
“업무 협조차 잠깐 들렀어요. 광주에서 파견 나오신 형사님하고 순찰 나가셨다면서요?”
“아, 네···. 방금 순찰 끝내고 복귀했어요.”
도훈과 3일간 밤낮으로 살을 맞댄 이후로, 보미는 그의 존재를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하지만 낌새를 보니 김형사가 자신과 만나기위해 일부러 퇴근할 때까지 지구대에서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게 보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쩌지? 도훈이랑 같이 집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보미가 적당히 핑계를 대고 물러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김형사가 보미에게 물었다.
“윤경위님 혹시 저랑 오늘 저녁 같이 드실래요?”
“저, 저녁이요?”
“아니면 가볍게 맥주라도 한 잔···.”
“저, 그게···.”
보미는 갑자기 훅 들어오는 김형사의 대시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도훈을 만나기 전이라면 분명 승낙했을 테지만, 이제 그녀는 도훈밖에 모르는 도훈 바라기였다. 다른 남자와는 사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다만 김형사가 아직 도훈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고, 분명 지난주까지 그녀는 공식적으로 솔로 상태였기 때문에 불쑥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밝히기도 입장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그에게 거짓말을 한 것처럼 비칠 것이 부담스러웠다.
보미가 우물쭈물하며 김형사의 제안을 거절할 핑계를 찾고 있는데, 갑자기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훈이 두 사람 사이로 다가왔다.
“윤경위님? 거기서 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