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1. 제주도 푸른 밤-81-
“응?”
“너랑 키스하고 싶어.”
도훈은 이내 정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보미와 입술을 맞추었다. 섹스 중에 다른 여자를 떠올리는 것은, 상대는 물론 당사자에게도 실례가 될 것 같았다.
‘그래. 지금은 보미한테만 집중하자. 이 세상에 여자가 보미밖에 없는 것처럼.’
도훈은 키스를 해주면서도 밑으론 박음질을 멈추지 않았다. 두 손은 어느새 큼직한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아아, 도훈아 너랑 이렇게 있으니까 너무 행복해.”
보미는 감정이 벅차오르는지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플레이어의 삶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저주였다.
역사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플레이어 역시 대부분 불우하게 생을 마감했다. 사명을 이루기 위해 모든 걸 다 던진 뒤 자신의 인생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장렬히 산화한 것이다.
그렇게 역사책에 이름이 올라봐야 죽고 나면 끝이었다. 인류의 진보를 위해 개인의 삶은 철저하게 부정되었다. 보미는 플레이어의 삶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도훈을 만나기 전까지는.
“오늘이 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날이야.”
보미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녀는 모태 미인으로 태어나고도, 스스로 선택한 사명을 지키기 위해 거죽을 뒤집어썼다.
못생긴 얼굴로 인한 차별은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억울하고 분했다. 자신은 절대 그런 대접을 받아선 안 되는 사람이었다. 더 많이 사랑받고, 모두의 부러움을 사도 마땅했다.
겉으론 아닌 척했지만, 억울한 감정이 켜켜이 쌓여갔다.
그것이 조금씩 그녀의 감정을 갉아먹었다.
하지만 보미도 결국엔 여자였다.
20대 나이에 죽어라 일만 하다가, 피곤해진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와 혼자 맥주나 한 캔 마시고 잠이 드는 삶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남자에게 사랑받고, 알콩달콩한 연애를 하고 싶었다.
억압되어 있던 그녀의 본능에 도훈이 불을 붙였다.
그녀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 깨닫게 했다. 도훈은, 그녀에게 떨어진 보물이었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보미가 도훈을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등에 손톱이 박힐 만큼.
도훈도 그녀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것처럼 뜨겁게 마주 안아주었다.
“네가 행복하다니 나도 기뻐.”
도훈은 입맞춤하며 계속 보미를 몰아붙였다. 점점 신호가 오고 있었다.
“으으으!”
마음 같아선 한 번 더 질싸를 해주고 싶었지만, 약속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도훈이 급히 잦이를 뽑았다.
“지금!”
“어, 어?”
“입!”
“아!”
보미가 겨우 몸을 일으켜 잦이를 입에 넣는 순간, 도훈의 정액이 폭발했다.
부왘-!
어젯밤 두 번이나 쌌음에도 또다시 엄청난 정액이 뿜어져 나왔다. 내공으로 신진대사가 활성화된 이후 도훈의 정자 생산력은 보통 사람보다 배는 증가한 상태. 연거푸 사정해도 빈 그릇이 빠르게 채워졌다.
“욱!”
정액을 처음 맛보는 보미가 특유의 비린 맛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녀는 도훈을 위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삼켰다.
꿀꺽.
“헤-. 다 마셨다.”
보미가 입을 벌리며 깨끗이 정액을 삼켰음을 인증했다.
‘맞다. 근데 마법의 정액 효과가 플레이어끼리도 적용되려나?’
[그렇습니다. 주인님의 정액은 일종의 포션으로 취급되니까요.]
‘포션? 물약 말이야?’
[네. 다른 세계관에서는 체력 회복이나 마나 회복을 위한 포션을 직접 만드는 제작자들이 존재합니다. 주인님의 정액도 자양 강장 및 피부 개선의 효과가 있으니 포션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죠. 회복효과는 거의 없지만요.]
‘헐, 그럼 이거 담아다 팔면 나도 떼 돈 벌 수 있는 거야?’
[아니, 그건 좀.]
사정을 마친 도훈이 보미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아무리 그라도 해도 연속된 사정은 탈력감을 불러왔다. 특히 어젯밤 텐트에서 잠을 거의 못 잤기 때문에 몸에 점점 피로감이 쌓이고 있었다.
“하아-. 이제 좀 괜찮아졌어?”
“응, 너무 좋았어. 나 때문에 많이 피곤하지?”
보미는 섹스가 끝나자 도훈과 달리 온몸에 활기가 넘쳤다. 잠을 못 잔 건 똑같은 상황이었는데, 섹스가 끝나고부터는 보미 쪽이 훨씬 쌩쌩해 보였다.
“응, 이제 자야지.”
“블라인드 쳐줄게.”
보미는 도훈이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안방의 블라인드를 모두 접었다. 그리고는 도훈의 옆에 딱 붙어 누웠다.
“얼른 자, 도훈아.”
“넌? 안 자?”
“난 바로 잠이 안 올 것 같아. 너 잠드는 거 보고 있을게.”
“풉-. 마음대로 해.”
도훈이 눈을 감고 잠을 청하자 보미가 옆에 누워 그 모습을 사랑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애정이 뚝뚝 떨어졌다.
* * *
“하암-. 대체 몇 시간이나 잔 거지?”
블라인드가 쳐진 안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혼자서 침대에 누워 있던 도훈은 옆에 보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응? 보미는 어디 갔지?”
그때 거실 밖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고 일어나서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도훈이 로시에게 물었다.
‘보미 뭐하는 거야?’
[2시간 전 먼저 일어나더니 밖에서 물건을 좀 사 온 것 같더군요.]
‘물건이라니?’
[냄비랑 그릇···. 그리고 이런저런 식재료를 사 오셨습니다. 주인님이 잠든 것을 확인하느라 다시 방에 들어오셨을 때 제가 봤습니다.]
‘엥? 근데 보미 요리 못한다지 않았나? 그래서 저녁도 맨날 시켜먹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긴 한데, 아마도 주인님을 위해 직접 저녁을 차려주려는 의도가 아닐까요? 성의를 보이기 위해서요.]
‘그렇다고 무슨 식기까지···. 근데 저녁이라고? 지금 몇 신데?’
[오후 5시입니다. 간만에 푹 주무시더라고요.]
‘헐, 아예 뻗어버렸구나.’
도훈이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피로가 말끔히 풀렸는지 몸이 평소보다 가벼웠다. 알몸인 상태라 민망해진 도훈이 속옷을 찾았다. 그러나 어젯밤 텐트에 버려두고 왔기 때문에 속옷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도훈은 알몸 상태로 거실로 나갔다. 요리를 하고 있던 보미가 도훈을 보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일어났어?”
“뭐하고 있어 지금?”
“음, 간만에 요리를 해볼까 하고. 레시피 보고 따라 하는 중인데 맛은 장담 못 해.”
도훈이 슬쩍 보니 보미가 태블릿에 설명을 띄워놓고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었다. 도훈은 생전 요리도 안 해봤을 보미가 자신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저녁을 준비하는 모습에 기분이 묘해졌다.
‘흐음, 이것 참 말릴 수도 없고.’
“난 그럼 속옷 좀 입고 올게.”
도훈이 두 손으로 잦이를 가리며 말했다.
“속옷? 없을 텐데?”
“내 팬티가 없다니? 가방에 하나 더 있어.”
“어? 그거 입고 벗어놓은 건 줄 알고 빨아놨는데? 베란다에 널 어놓긴 했는데 아직 다 안 말랐을 거야.”
“아니, 그러면···.”
도훈은 몹시 난처했다. 여분의 팬티는 그게 전부였다. 여차하면 새로 사 입을 생각이었으니까. 어젯밤 텐트에 하나 버리고 오고, 챙겨온 나머지 하나마저 빨아버렸다면 남는 팬티가 한 장도 없다는 소리.
도훈이 난처해 하자 보미가 말했다.
“그냥 편히 지내도 돼.”
“으, 응?”
“알몸으로 지내도 난 상관없다고.”
보미가 잦이를 가리고 선 도훈을 야릇하게 쳐다보았다.
그 눈길에 섬뜩함을 느끼 도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그래도 이건 좀 경우가 아닌 것 같아.”
“왜?”
“아니, 내가 무슨 갓난애도 아니고 집에서 알몸으로 지낸다는 게 말이 돼?”
“혹시 민망해서 그래? 뭐하면 나도 벗을까?”
보미는 요리 중에 당장 옷을 벗을 기세였다. 안 그래도 섹스 중독을 우려하던 도훈으로선 그것만은 어떻게든 말리고 싶었다.
“아, 아니야. 그럴 필요까진 없고. 그냥 노팬티에 반바지라도 입고 있을게.”
“그래, 너 편할 대로 해.”
“어, 그러면 난 잠깐 샤워 좀.”
도훈은 아침에 샤워를 못 한 게 생각나서 급히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욕실로 들어가면서도 뒤통수가 계속 따가웠다. 보미가 자신의 알몸을 계속 쳐다보는 것 같았다.
욕실 문을 걸어 잠근 도훈은 찬물을 틀어놓고 머리를 식혔다.
‘휴우- 깨어나니까 정신이 확 드네.’
보미의 태도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젠 아예 집에서 벗고 다니라고 말할 정도였다.
의도는 뻔했다. 틈만 나면 자신을 따먹을 계획인 것이다.
[보미양은 주인님을 완전히 지아비로 여기고 있는 것 같더군요.]
‘지아비 소리 그만 해. 섹스 한 번 했다고 결혼까진 에바 아니냐?’
[그러게 왜 감당도 못 할 짓을 저지르셨습니까? 아침에 제가 분명 말렸던 것 같은데요.]
‘그땐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고. 죽자고 달려드는데, 그걸 어떻게 내쳐?’
[시작할 땐 분명 손하고 입으로만 해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그걸로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다면서요?]
‘나도 될 줄 알았지. 근데 막상 상황이 닥치니까 도저히 거부를 못 하겠더라고. 그걸 참았으면 내가 부처게?’
[신성 모독입니다!]
찌릿-
간만에 전기 충격에 도훈이 움찔 몸을 떨었다.
‘부처님도 신님이셨어?’
[당연한 말씀을.]
도훈은 계속 찬물에 머리를 식히며 생각했다.
계속 이대로 지내다간 보미에게 완전히 코를 꿰일 게 분명했다.
그녀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도훈도 이렇게까지 우려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인연의 붉은 실 가위도 통하지 않는 플레이어였고, 자신보다 강력한 마법사이기도 했다. 만약 그녀를 배신하고 다른 여자와 자는 것을 들킬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차라리 호감도를 아예 100으로 만들어 버리는 건 어때?’
[네? 여기서 역배를 건다고요?]
‘아니. 호감도 100이라는 건 목숨 걸 만큼 사랑한다는 뜻이라면서? 설마 그런 연인을 칼로 찔러 죽이진 않을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주인님 파트너를 대신 죽여버릴 수도 있죠.]
‘무,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을. 보미는 민중의 지팡이를 자처하는 정의로운 경찰이라고. 설마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고.’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만, 그녀는 주인님보다 살인에 더 무감각한 것 같더군요. 경찰이 된 것도 악인을 직접 처단하려는 사명 때문이었다고 하니까요.]
‘······.’
도훈은 오랜만에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녀는 사랑스럽고, 오랫동안 파트너쉽을 유지해야 할 강력한 동료는 맞지만, 막상 배신이 들켰을 때 벌어질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근데 생각해보면 주인님 말마따나 안 들키면 장땡 아닙니까?]
‘뭐라고?’
[보미 양이 천리안을 가진 것도 아니고, 주인님이 제주도를 벗어난 이상 감시할 방법이 없다는 거죠.]
‘계속해봐.’
[알다시피 보미 양은 당분간 제주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랭커를 목전에 두고 있기 때문에 직장을 떠날리 없으니까요.]
‘그렇지. 경찰 플레이어로서 주어지는 업적이니까.’
[하지만 주인님의 경우엔 이번 PK단 건만 무사히 지나가면 결국 대학으로 복귀하시겠죠. 대학생이 출결을 포기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니까요.]
‘그것도 맞아.’
[따라서 두 분은 당분간 떨어져 있어야 할 상황이 올거고, 그렇게 되면 장거리 연애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죠. 그때 주인님이 다른 사람과 마음껏 바람 피우고 다닌들, 보미 양이 알아낼 방법이 있습니까?]
‘만약 보미가 말도 없이 나를 찾아오면? 그땐 진짜 빼도 박도 못하고 걸릴 텐데?’
[주인님은 참 운도 좋으시단 말이죠?]
‘내가? 뭔 소리야? 지금 보미한테 코 꿰이게 생긴거 안 보여?
[이번 중수 2단계 진급하면서 받은 아이템 기억 안 나십니까?]
‘···위치 추적기?’
[네. 주인님은 보미양이 어디 있든지 실시간으로 감시가 가능합니다. 그녀가 주인님께 알리지 않고 깜짝 방문해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럴싸한데?’
[게다가 보미양은 포털 같은 마법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법의 문고리 같은 아이템이 있었다면, 3년 전 제주도에서 죽을 뻔했을 때 이미 써먹었을 테니까요.]
‘맞네! 내가 왜 그걸 생각 못 했지?’ 로시의 조언을 받은 도훈은 그럴듯한 아이디어에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보미가 자신을 너무 좋아하고, 또 PK단에 대항할 목적으로 사귄다고 한들, 업적이나 미션을 해치우는 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장거리 연애를 핑계로 거리를 두면서 새로 받은 위치추적기 아이템을 이용해 안 들키면 그만이니까.
“이야! 로시 넌 역시 천재야!”
그때였다.
갑자기 보미가 욕실 문을 두들겼다.
똑똑-
“도훈아? 아직도 씻고 있어?”
“···어, 어.”
“그래? 내가 도와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