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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647화 (1,627/2,000)

1647. 제주도 푸른 밤-77-

때마침 콩나물 해장국이 나오는 바람에 도훈이 황급히 정보창을 껐다.

그릇에 반찬이 담겨 나오자 보미가 직접 가위를 들고 김치와 깍두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도훈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내가 할게.”

“괜찮아.”

보미는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지극정성이었다. 갑자기 태도가 변한 모습을 보자 도훈은 살짝 식은땀이 났다.

‘이거 괜히 업적 하나 뚫으려다가 벌집을 건드린 게 아닌가 모르겠네. 이래서 처녀는 조심히 접근했어야 했는데.’

[주인님이 여자분에게 겁먹은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군요.]

‘윤보미 별명 몰라서 그래? 무려 제주도 학살자라고. 어제도 봤잖아. 장작 맨손으로 싹둑 잘라버리는 거.’

[설마 지아비를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갑자기 무슨 지아비냐고!’

도훈이 혼란스러워하는데 보미가 그를 향해 물었다.

“저 근데···. 도훈아.”

“응?”

도훈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어, 어?”

“아니···. 뭐. 어젠 정신없어서 말 못 했는데, 아무래도 앞으로 일을 논의해 봐야 하지 않을까?”

커다란 식재료 가위를 들고 쳐다보는 보미를 향해 도훈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못 대답했다간 저 큰 가위로 대번에 썰려 나갈 것 같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어, 어···. 그래. 얘기해봐야지.”

숟가락을 든 도훈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설마, 쫄?]

‘닥쳐.’

“음, 일단 호칭은 어떻게 하는 게 좋아? 실제론 서른 넘었다면서? 오빠라고 불러야 하나? 연상이 더 좋으면 누나라고 부르는 것도···.”

점점 불안감이 현실화되는 상황에 도훈이 허둥지둥 대답했다.

아찔한 마음에 식욕이 싹 가셨다.

“어, 어차피 몇 살 차이 안 나잖아. 그냥 편하게 해 지금처럼 불러.”

“그럼 반말로?”

“으, 응.”

[갑자기 왜 호칭을 신경 쓰는 걸까요?]

‘그러니까 말이야. 관계 정립 다시 하자는 것도 아니고.’

[어젯밤 이후부터 보미양이 주인님께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이겠죠?]

‘더 곤란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얼른 붉은 실 가위라도···.’

[안 됩니다.]

‘왜? 이젠 업적 도전도 아니잖아. 왜 아이템을 못 쓴다는 거야?’

[그 뜻이 아니라 플레이어 대 플레이어다 보니 몇몇 아이템과 스킬에 면역이 걸린 상태입니다. 대부분의 정신계 마법은 안 통하신다고 보면 됩니다. 주인님이 보미양의 암시 스킬에 아무 반응이 없으셨던 것처럼요.]

‘어···. 그럼 어떻게 해?’

[잘못하면 단단히 코 꿰실 것 같은데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도훈이 넌 지금 대학생이라고 했던가? 졸업은 그럼 언제야?”

“이제 2학년.”

“그렇구나.”

보미가 갑자기 손가락을 펴더니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년차를 계산하는 모습에 도훈의 불안감은 가중되었다.

‘아니 왜 갑자기 미래를 계산하는 거냐고!’

[어쩜 자녀계획까지 이미 다 끝난 게 아닐지.]

‘악담하지 마. 나 지금 심장마비 걸릴 것 같으니까.’

도훈은 극도로 당황하는 중이었다. 여차하면 기억을 지워버리는 식으로 불필요한 인연을 잘라냈던 도훈이지만, 보미는 같은 플레이어다 보니 필살기가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 떼려고 막대하기엔 너무나 위험했다. 제주도 학살자가 폭주한다면, 다음 참 수 대상은 자신이 될지도 몰랐다.

“그럼 졸업하면 발령은 어디로 나는 거야? 시험 합격하고 나면.”

“어, 그게. 보통은 거주지 주변으로 시험을···.”

“그건 뭐 상관없어. 나도 아마 2년 뒤에는 육지로 갈 수 있을 것 같거든. 제주도는 임지 점수가 높은 곳이라 원하는 곳 거의 다가능할 걸?”

‘나는 하나도 괜찮지가 않아!’ 도훈은 콩나물 국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점점 확실해지는 보미의 태도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업적을 위해 한 몸을 바치신 주인님의 희생정신은 높이 평가하겠습니다.]

‘아씨, 농담 그만 하라니까?’

“제, 제주도에서 나오려고? 그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

“나도 처음엔 많이 우려했는데, 막상 어제 네 말을 듣고 나니까 내가 너무 움츠려 지냈던 게 아닐까 싶어. 생각해보면 벌써 3년이나 지난 일이고, 내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말이야.”

“그, 그래도 기왕이면 안전한 곳이···.”

“아니야. 이제 업적 두 개만 더 해치우면 나도 랭커야. 랭커가 되면 놈들도 날 쉽게 못 건드릴 거야. 그땐 혼자가 아니니까.”

보미는 플레이어와의 교류를 말한 것이었지만, 도훈은 전혀 다른 식으로 이해했다.

‘호, 혼자가 왜 아니냐고! 나랑은 그냥 동료일 뿐이잖아!’

[주인님 그간의 업보를 세게 돌려받게 생겼는데요?]

‘아이씨, 넌 일도 도움 안 되니까 닥쳐!’

“그, 그래. 뭐 아직 시간 남아있으니···.”

“근데 너 왜 밥 안 먹어? 배고프다지 않았어? 여기 나름 유명한 식당인데? 맛이 별론가?”

“아니야. 먹고 있어. 열심히.”

도훈이 허겁지겁 숟가락을 뜨다가 국물이 뜨거웠는지 혀를 데이고 말았다.

“아뜨뜨!”

“괜찮아? 조심 좀 하지.”

보미가 직접 정수기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찬물을 가져다 바쳤다. 도훈은 그 행동마저 몹시 부담스러웠다.

‘미치겠네 진짜.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도훈은 콩나물 해장국을 제대로 맛보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가게를 빠져나왔다. 식사를 마친 보미가 크게 하품하더니 도훈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말했다.

“하아암. 밥 먹었더니 좀 피곤하다. 이제 집으로 갈까?”

“어, 어?”

“네 말대로 확실히 무리하긴 했나 봐. 집에 가서 한숨 자고 싶어.”

‘아니 왜 아침부터 쉬는 거냐고!’

“오늘 토요일인데?”

“토요일이니까 늦잠 자야지. 가자. 내가 운전할게.”

“···어, 어.”

보미의 차에 탄 도훈은 어제와는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어제 캠핑 장에 갈때만 해도 그녀를 놀리고 희롱했던 쪽은 도훈이지만, 지금의 모습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개돼지 신세였다.

‘좆됐다. 이건 엄청난 위기야.’

[정신 똑바로 차리십시오. 여지를 주면 안 됩니다.]

“도훈이 네가 와서 참 다행이야.”

“응?”

“실은 선수로 사는 거 되게 힘들고 외롭잖아. 잘못한 것도 없는데 PK단 놈들이 죽일 듯 달려들고. 놈들한테 걸리지 않기 위해서 본 모습도 숨기고 살아야 하고.”

“그건 그렇지.”

“난 그래서 평생 외롭게 살 운명인 줄 알았어. 솔직히 네 말이 맞아. 이 나이에 숫처녀라니. 무슨 천연기념물도 아니고.”

“그, 그런 사람도 있긴 있지. 그게 특별히 이상한 건 아니야.”

도훈이 부정했지만 보미는 계속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

“아니. 네가 해준 말 듣고 내가 얼마나 잘 못 살았는지 깨달았거든. 정말 새벽엔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니까?”

“무, 무슨?”

“인생 절반을 손해 본 것 같은?”

“······.”

운전 중이던 보미가 보조석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도훈을 보고 밝게 미소지었다.

화장을 안 했는데도 맑고 투명한 피부, 가지런하고 새하얀 치열, 그리고 영화배우 저리가라 할 정도로 예쁜 얼굴에 도훈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하아···. 예쁘긴 오지게 예쁜데···.’

“···고마워 도훈아.”

“어, 어.”

“너한테 이것저것 많이 배우고 싶어.”

“그래.”

‘예쁜데 무섭긴 또 처음이네.’

[하긴 주인님도 정착하실 때가 되긴 했죠.]

‘장난해? 내가 여자친구를 사귄다는 건 성장을 포기하는 거라고. 랭커 가야지!’

[평소 주인님 지론에 따르면 안 걸리기만 하면 장땡 아닙니까?]

‘걸리면 모가지 날아가는데? 손모가지 말고 진짜 모가지.’

[그거야 뭐···. 원래 플레이어의 길은 고단한 법이니까요.]

‘안 돼. 이렇게는 절대 못 살아. 아무리 예쁘고 몸매 좋아도 한 여자에 정착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도훈이 속으로 그런 결심을 하는데 보미가 갑자기 손을 뻗더니 도훈의 손등 위에 올렸다.

“나 많이 알려 줄 거지?”

“···어, 어.”

갑작스러운 보미의 스킨십.

남녀 역전의 세계가 도래한 기분에 도훈이 말을 아꼈다. 한마디만 실수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부족하지만 많이 배우고 싶어 너한테.”

“그, 그럴 필요까진 없어.”

“뭐?”

“그게 아니라 실은 보미 네가 나보다 더 등급이 높은 선수일 거야. 오히려 내가 너한테 배워야지.”

“너 고수 아니었어?”

“난 아직 중수야. 그것도 겨우 2단계 넘긴.”

“응? 진짜?”

“응.”

“그랬구나.”

보미는 약간 의외라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상관없다는 말했다.

“괜찮아. 혹시나 위험한 일이 생기면 내가 널 지켜줄게.”

“···어, 어.”

“나만 믿어. 난 네 생각보다 훨씬 강할지도 모르거든.”

‘안다고. 이 살인마.’

제주도 학살자.

도훈은 사이코메트리에서 보았던 그녀의 영상을 떠올렸다. 피하기도 힘든 마법의 원반이 PK단 3명의 목을 따버리던 장면을.

“그래.”

“잘 됐다. 난 널 지켜주고···. 너는 날 알려주면 되겠네.”

“어, 어 그러니까···.”

도훈이 계속 화제를 돌리려 했으나, 보미는 점점 노골적으로 물어왔다.

“어제 네가 그랬잖아. 나한테 알려주고 싶은 게 많다고. 기억나지?”

“그, 그랬어 내가?”

“뭐라고?”

보미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도훈을 확 노려보았다.

자꾸 말을 돌리는 도훈의 태도가 못 마땅한 모습이었다.

“설마 벌써 까먹은 거야?”

당장이라도 그녀의 손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도훈이 침을 꼴깍 삼키며 대답했다.

“아, 어. 그랬지 기억났다. 맞아.”

“히히. 안 잊어버려서 다행이야. 도훈아 벌써 집에 다 왔어.”

“버, 벌써?”

보미의 차는 어느새 관사로 제공된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고 있었다. 캠핑 장에서 고작 30분 거리였던데다, 콩나물 해장국을 먹는답시고 들른 곳이 하필 동네 근처라 동선이 줄어든 탓이다.

“응. 가깝지? 얼른 들어가자.”

“···그래.”

[왜 그렇게 죽상입니까 주인님? 얼굴 펴시죠?]

‘넌 지금 이게 재밌냐?’

[네? 제가 뭘요?]

‘아무리 봐도 놀리는 거 같은데? 너 진짜 내 편 맞아?’

[저야 늘 주인님 편이죠.]

‘그럼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지 얼른 방법을 생각해보라고.’

[그 분야는 주인님이 전문 아니셨습니까? 왜 그러십니까 아마추어같이. 처녀랑 처음 자본 것도 아니면서.]

한때 아다 폭격기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도훈은 과거를 후회하고 반성했다.

‘흑흑. 내가 미안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설마 보미양이 같은 동족을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지금 표정 보면 모르겠어?’

[뭘요?]

‘집에 들어가자마자 한 판 더 뜰 기세잖아. 말로는 피곤하다면서 집에 가까워 질수록 계속 표정이 살아나고 있다고!’

[그럼 어쩔 수 없죠. 주인님이 열과 성을 다해주는 수밖에야.

주인님도 어젠 좋으시지 않았습니까?]

‘누가 싫데?’

[그럼 뭐가 문젭니까?]

‘내 특성 알잖아.’

[어떤 특성요?]

‘마성의 지배자. 나랑 관계를 하면 할수록 보미는 나에게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단 말이야. 지금 끊어내지 않으면 보미는 더 나에게 집착하게 될 거야. 인연을 초기화하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호감도가 100이 찍혀 버릴 거라고.’

[흐음···.]

‘막말로 호감도 100 찍을 수 있다고 쳐. 근데 보미가 나에게 계속 매달리면? 집착해서 나한테 안 떨어지려고 하면 그땐 진짜로 망하는 거잖아. 내가 어떻게 계속 플레이 보이를 할 수 있겠어.’

[그건 확실히 문제로 군요.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섹스를 거부하는 수밖엔 없겠는데요?]

‘무슨 명분으로?’

[피곤하다고 먼저 주무시면 되죠.]

‘그게 통하면 다행이겠다만.’

차에서 내린 보미가 계속 벨트르 풀고 앉아있는 도훈을 불렀다.

“뭐해? 안 내려?”

“아, 어. 내려야지.”

집으로 들어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보미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도훈은 생전 처음 보는 보미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어떻게든 현상황을 벗어날지 고민했다.

“확실히 새벽에 나와서 그런지 피곤하네.”

“그치? 난 바로 씻고 싶어.”

“그, 그래. 그럼 보미 너 먼저 씻어.”

“넌 안 씻어?”

“어, 어? 난 자고 일어나서 씻으려고.”

“밖에 나갔다 왔는데 씻고 자야지.”

“아니 그게···. 일단 그럼 보미 너부터 씻어. 내가 기다렸다 씻을 게.”

집에 들어가자 보미가 샤워를 한다면서 곧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도훈은 어찌할 줄 모르고 갈팡질팡하다 옷 방에 들어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그냥 피곤해서 곯아 떨어진 척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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