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0. 제주도 푸른 밤-70-
신기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보미가 물었다.
"손은 안 뜨거워?"
"응. 불을 지피는 동안은 안 뜨겁더라고. 내 손이 더 뜨거워서 그런가?"
"이것도 내공인가 뭔가하는 기술이야?"
"맞아."
"응용법이 상당하구나. 내공이라는 것은."
"나도 사실 처음엔 이게 될 줄 몰랐어. 하나씩 깨달아 가는 중이야."
두 사람은 캠핑 의자에 앉아 한동안 타오르는 불길을 응시했다.
불을 보고 있으니 보미도 조금씩 심신이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지난 3년간.
제주도에 숨어 살면서 한순간도 이처럼 마음 편해 본 일이 없었다. 특히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고 하지만, 본인의 진짜 얼굴로 집 밖에 나온 것은 더더욱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기해. 내가 이렇게 편하게 밖에 앉아 있다니.'
캠핑장은 대체로 조용했고, 주변의 방풍림과 어우러진 바다 배경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 파도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다.
"커피 마실래?"
"커피?"
"응. 불멍엔 또 커피 한 잔 때려주는 게 국룰이거든."
도훈이 화로 대 위에 받침대를 설치했다. 석쇠 그릴을 깔아 고기를 굽거나, 냄비를 올릴 수 있는 다용도 받침대였다. 황동색 양은 냄비에 생수를 담은 도훈이, 뚜껑을 덮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종이컵을 두 개 꺼내 커피 믹스를 부었다. 이어서 물이다 끓자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붓고, 커피 믹스를 뒤로 돌려 휘휘저었다.
"이런 데서 먹는 커피가 또 맛있지."
"고마워."
보미가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어 조금씩 음미했다. 지구대 탕비실에서 흔히 굴러다니는 싸구려 믹스커피였지만, 도훈이 타 준 커피는 평소보다 훨씬 달짝지근한 것 같았다.
'···의외로 자상한 면이 있네, 도훈이는.'
어젯밤까지만 해도 변태처럼 보이던 도훈이 의외로 너무 멀쩡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뚝딱뚝딱 텐트를 치거나, 불을 피워 커피를 끓여주는 모습에선 치기 어린 대학생이 아니라 완숙한 사내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맞다. 실제 나이는 30대가 넘는다고 했던가? 얼굴이 어려 보여서 그런지, 자꾸 까먹게 되네.'
해가 슬슬 넘어가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보미의 눈동자는 완벽하게 가려져 있었다. 그녀는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는 척하며, 몰래 도훈을 응시했다.
'엄청 잘 생기긴 했단 말이야? 태어나서 거의 본 적 없는 것 같아. 저 정도 미남은.'
의식하지 않고 싶었지만, 자꾸 도훈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보통 때라면 부끄러워서 쳐다도 못 봤겠지만, 적당히 어두운 주변과 선글라스의 힘을 빌리자 몰래 훔쳐보는 게 가능했다.
물론 도훈은 보미가 자신을 힐끔거린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눈치를 못 채는 척했다.
'보미가 조금씩 마음을 여는 것 같군.'
[정말요? 별로 한 것도 없지 않습니까?]
'원래 여자들은 사소한 행동에도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는 법이거든. 거창한 선물이나, 대단히 영웅적인 행동뿐만이 아니고.'
[호오.]
'특히 보미에게는 더 그렇겠지. 캠핑장에 남자랑 단둘이 오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무척 색다르고 신나는 경험이 될 테니까.'
[장소가 바뀐 것도 영향을 미칠까요?]
'그것도 있지. 보미가 현재 사는 집은 정부에서 제공한 숙소일 뿐, 안락하고 편안한 장소는 아니거든. 그저 잠을 자기 위해 몸을 눕히는 공간이랄까? PK단 감시를 피하는 대피처가 될지언정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은 아닐 거야. 그런 곳에서 첫 섹스를 한다? 그건 본인에게도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겠지.'
[그에 비하면 캠핑장이 훨씬 낭만적이긴 하군요.]
"담배 한 대 펴도 돼?"
"으, 응?"
"아니 불 보니까 갑자기 생각나서."
"나 굳이 신경 쓰지 말고 펴. 어차피 경찰서에 골초들 많아서 담배냄새는 익숙하니까."
"골초들이라니?"
"형사들 말이야. 골초 아닌 사람을 거의 못 봤어. 처음엔 곁에만 가도 냄새 때문에 싫었는데, 몇 년 부대끼다 보니 이젠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아."
"그렇구나."
도훈이 손가락 끝에 불꽃을 만들더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보미가 신기한 표정으로 쳐다보다 물었다.
"내공으로 담뱃불도 붙여?"
"응. 원래 담배에 불 붙이다가 발견한 거야. 내 손으로 엄청난 열을 뿜을 수 있다는 걸."
"아하."
도훈은 다른 사람 앞에서 능력을 마음껏 쓰는 경험이 너무나 신기했다. 늘 능력을 쓸 땐 주변을 살피거나 아니면 혼자 몰래 스킬을 사용하곤 했는데, 지금은 같은 플레이어다 보니 거리낌이 없었다. 그것은 보미에게도 마찬가지로 산뜻한 경험이었다.
"너도 하나만 보여줘."
"뭘?"
"스킬. 어떤게 있는지 궁금해."
"안 돼. 내가 가진 스킬들은 대부분 공격 마법이라···."
캠핑장엔 사람들이 가득차 있었다. 텐트끼리 거리가 떨어져 있다곤 해도, 마법을 날렸다간 당장 사람들에게 들키고 말 것이다.
"아쉽네. 궁금했는데."
"맞다. 하나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아."
"뭔데?"
"잠시만."
보미가 박스에서 가장 두꺼운 장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걸로 뭐하려고?"
"아주 단순한 스킬이야."
장작을 수직으로 세운 보미가 주변을 힐끔거리다가 수도 모양으로 손을 펼쳤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녀의 손에서 푸른 기운이 앞으로 뻗어 나오는 것이었다.
보미가 손에 뽑아낸 칼날을 장작을 향해 내리긋자 장작이 수직으로 잘려나갔다. 단면을 보니 기계로 재단한 것처럼 깔끔했다.
보미가 다시 주먹을 쥐자 푸른 기운이 자취를 감췄다.
"와, 방금 그게 뭐야?"
"일종의 근접용 공격 스킬이랄까?"
"대박이네. 무슨 질럿 보는 줄 알았어."
"질럿이라니?"
"질럿 몰라? 리싸~수!"
"리사수면 AMD CEO 말하는 거야?"
도훈은 서로 딴 얘기를 하는 것 같아 설명을 그만 두었다.
"그건 됐고. 너 진짜 무서운 기술을 가지고 있구나. 여차하면 싹다 뎅겅 잘라버리겠네, 그 기술로?"
"굳이 쓸 일이 없게 해야지."
[주인님. 저건 조금 위험한 거 아닙니까?]
'그러게. 조금이라도 기분 나쁘게 했다간 어디하나 잘려 나가는 건 순식간이겠는데?'
[공략이 중요하다곤 하나 목숨을 걸 정도의 일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그냥 포기하심이···.]
'에이, 그렇다고 쫄아서 도망치기엔 너무 멀리 왔지. 걱정마.
보미가 알아서 앵기게 만드는 게 내 목표니까.'
그때 다른 텐트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겨왔다. 어느덧 식사시간이 다가온 것이었다.
"우리도 슬슬 식사 준비 할까?"
"응."
두 사람은 임무를 나눴다. 보미가 쌈채소를 들고 음식물을 씻어오는 사이, 도훈이 석쇠 그릴을 설치해 삼겹살을 올렸다.
잠시후 테이블 위에 상추, 고추, 마늘등의 쌈거리가 펼쳐졌고, 도훈이 잘 구워진 삼겹살을 집게로 잡고 자르기 시작했다.
'이건 마치.'
보미는 고기를 싹뚝 자르고 있는 도훈을 보며 생각했다.
'데이트하는 것 같은데···.'
잘생긴 남자와 단둘이 캠핑 장에 와서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 먹는 것이 데이트처럼 느껴지는 보미였다. 살면서 한 번도 이런 순간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보미의 가슴이 두근 거렸다.
'도훈이도 나랑 같은 생각일까?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을까?'
"잘 익었네. 맛있겠다."
"응. 고기도 잘굽는데?"
"당연하지. 내가 원래···. 아니야."
"왜? 말을 하다말아?"
"지금 생각하면 되게 슬픈 기억이거든."
"말하기 곤란하면 안해도 되고."
도훈이 삼겹살을 하나씩 집게로 뒤집으며 말했다.
"내가 선수가 되기 전 공시생이었다고 했잖아."
"응. 어제 말했어."
"공시생 생활을 할 때 진짜 가난하게 살았거든. 옥탑방 알지?"
"옥상위에 있는 거?"
"응. 돈이 없어서 월세가 싼 옥탑방에 살았는데, 비가 오면 비가 막 샐 정도로 형편없는 집이었어."
"왜 그런 집에 살았어?"
"그땐 돈이 없었으니까."
"너네 집 돈 많다며? 아버지가 베스트셀러 작가시라고."
"그게 사정이 좀 있어."
"무슨 사정?"
"자세히는 말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땐 여러 가지로 힘든 시기였거든. 맨날 컵밥이나 지하철역 앞에서 파는 천원짜리 김밥으로 끼니를 때웠거든."
"저런."
"가난한 고시생이 돈이 어딨겠어. 근데도 가끔은 고기가 당기더라고. 그때는 마트에서 파는 수입산 냉동 삽겹살을 500그램씩 사서 옥상에서 혼자 구워 먹곤 했거든."
"아···."
"정말 눈물 나는 시절이었지. 그래놓고도 계속 시험에 낙방한 게 더 레전드지만."
[정말 주인님은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자꾸 지어 내시는 건지.]
'보미에게 동정심 유발 작전을 펼치는 거야.'
[동정심이요?]
'이제부터 시작이거든.'
"시험은 떨어지지, 가진 돈은 하나도 없지 사람이 점점 자신감이 없어지더라. 그러니 당연히 여자도 못 만났지."
"응?"
"공시생에게 연애는 사치거든. 경찰대 나온 너에게야 보장된 미래가 있겠지만, 나같이 공부도 못하고 오로지 공무원 시험 하나만 매달리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어?"
"그랬구나."
[이걸 위한 빌드업이셨습니까?]
'응. 보미가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았거든. 나를 여성 편력 화려한 양아치 바람둥이 정도로 알고 있잖아.'
[언제는 머리만 노랗게 염색하면 금태양이시라면서요?]
'어쨌든 과거를 찌질하고 연애도 못해 본 남자처럼 만들어놔야 보미가 안심할 것 같아서.'
도훈이 꾸며낸 과거를 들은 보미가 입을 열었다.
"뭐, 나도 사정은 비슷해."
"응?"
"경찰대 다닌다고 연애하고 그럴 여유는 없었다고."
"정말? 그래도 거긴 나중에 다 경찰 간부 될 사람들인데···.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나?"
"교내에선 연애 금지야. 그건 육사랑 비슷해."
"아···. 그래도 외부에서 사귀는 건 상관없지 않아?"
"몰라.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는. 사실 난 그런데 전혀 관심도 없었거든. 어떻게 해서든 경찰이 될 생각밖에 없었어."
"왜?"
"그게 내 업적이었거든."
"아···."
"그리고 경찰이 되고 나서도 미션이랑 업적을 해결하기 바빴지. 남자한테 딱히 관심이 없기도 하고."
"남자한테 관심이 없는 여자가 어딨어?"
"여기 있잖아."
보미가 곧바로 대답했다. 도훈이 피식 웃더니 보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선글라스 벗어봐."
"왜?"
"내 눈 똑바로 보고 그런말 할 수 있는지 보게."
"싫어. 벗었다가 들키면 어떻게 해?"
"여기 누가 있다고 그래? 그리고 내가 말했지? 나에게 경보기가 있다고. PK단이 가까이 접근하면 바로 알 수 있어. 참고로 여긴 전혀 그런 기미도 없고."
보미가 우물쭈물 하더니 선글라스를 벗었다. 점점 해가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야밤에 쓰고 있는 것도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도훈이 보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정말 남자한테 조금도 관심 없어?"
"······."
보미는 순간 대답을 망설이고 말았다. 도훈과 눈을 마주친 순간 그의 잘생긴 얼굴에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었다.
"어, 없어. 정말."
"어째 대답이 한 박자 느린 거 같은데?"
"무슨 소리야? 고기나 먹자. 다 익은 것 같은데."
당황한 보미가 갑자기 고기를 들고 싸 먹기 시작했다. 도훈이 피식 웃더니 함께 고기를 먹었다. 두 사람은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며 저녁을 함께했다. 그사이 해가 완전히 떨어지며 이젠 모닥불주위로만 불빛이 비쳤다.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자 도훈이 이번엔 고기가 비워진 그릴 위에 조개와 새우를 올렸다. 만족스러운 식사였는지 보미도 한층 더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야, 이건 진짜로 술안준데?"
"술 마시려고?"
"어차피 운전은 네가 할 거 아니야?"
"그, 그건 그렇지만···."
보미도 새롭게 올라온 해산물을 보자 술이 당기는 모양이었다.
잘 못 마시는 술이지만, 집에서 한 캔씩 마시고 자는 버릇이 들어서 술이 고파지는 것이었다.
도훈이 아이스박스에 담아놓은 맥주캔을 따더니 꿀꺽꿀꺽 마셨다.
"키야, 이거지!"
"······."
너무나 얄밉게 혼자 맥주를 마시는 도훈을 보자 보미가 골이 나서 말했다.
"맛있냐?"
"응?"
"혼자 마시니까 그렇게 좋아?"
"왜? 너도 마실래?"
"됐어. 운전해야 돼."
"한 캔 정도는 괜찮지 않아?"
"음주측정 기준이 강화돼서 한 캔이면 무조건 나오거든?"
"그럼 한 모금은?"
"한 모금은···."
보미가 대답을 주저했다.
그러자 도훈이 자신이 반쯤 먹은 맥주캔을 보미에게 건넸다.
"그럼 딱 한 모금만 마셔봐. 아이스 박스에 넣어놔서 그런지 지금도 차가워."
"머, 먹던 걸 주면 어떻게 해?"
"그럼 새로 딸까?"
도훈이 다른 캔을 집어 들자 보미가 말렸다.
"돼, 됐어. 어차피 다 마시지도 못할 건데. 그냥 줘."
보미가 도훈이 마시다 준 맥주캔을 보며 생각했다.
'근데 이거 간접 키스 아닌가?'
도훈을 힐끔 쳐다봤으나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새우를 뒤집고 있었다.
'내가 너무 의식하는 거겠지? 새로 캔 따는 건 너무 아까우니까 그냥 한 모금만 마시는 건데.'
보미가 눈을 꼭 감더니 맥주를 들이켰다.
"크아-!"
"어때? 맛있지? 안주도 자~."
도훈이 손수 껍질을 깐 새우살을 보미의 입에 가져갔다. 보미는 살짝 눈치를 보더니 그대로 입으로 받아먹었다.
도훈은 울긋불긋 익어가는 새우들을 보며 생각했다.
'무르익어 가는구나, 슬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