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9. 제주도 푸른 밤-69-
* * *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둘러보는 데 1초.
"시작부터 장난질이구먼."
하고 대사 치는 데 1초.
무려 2초를 까먹고 시작하는 도훈이었지만, 조금도 조급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표정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어디, 오랜만에 전력으로 한 번 달려볼까?'
내공을 폭발시킨 도훈이 탄환처럼 뛰쳐나갔다. 애초 발이 푹푹빠지는 모래사장이라는 건 그에게 큰 장애물이 아니었다. 발이 빠지기도 전에 이미 다른 곳을 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과장해 말하면 물 위를 걷는다는 수상비가 연상되는 빠른 발놀림이었다.
파바바바밧!
도훈이 지나간 자리로 후폭풍이 일어나는데, 모래가 뒤섞여 마치 모래 돌풍이 치는 것 같았다. 100미터 앞 도착점에 미리 가 있던 보미가 그 광경을 보고 경악했다.
"마, 말도 안 돼!"
도훈의 주력은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마치 치타의 전력 질주를 보는 듯한 엄청난 박력이 느껴졌다.
이윽고 스마트폰 초시계를 멈추기도 전에 도훈이 결승점을 통과해 버렸다.
"푸헥, 쿨럭-쿨럭-!"
모래 먼지를 뒤집어쓴 보미가 기침하는 사이, 결승점을 훌쩍 지나친 도훈이 소리쳤다.
"몇 초야?"
"어?"
"몇 초냐고. 시간 안 쟀어?"
다행히 보미는 살짝 늦긴 했지만, 반사적으로 초시계를 멈춘 상태였다. 시간을 확인한 보미는 깜짝 놀랐다.
'7.92초라고?'
시간을 확인한 보미의 눈빛이 흔들리자 도훈이 당당히 어깨를 폈다.
"8초 안이지? 내가 가능하다고 했잖아."
"이럴 수가."
보미는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타이머를 살짝 늦게 눌렀는데도 7초 대로 들어오는 기록이라니. 만약 바닥이 단단한 트랙에서, 제대로 된 측정방식으로 달렸으면 과연 어떤 기록이 나왔을지 궁금할 정도였다.
"너, 너 진짜로 빠르구나? 방금 그건 무슨 스킬이야? 가속? 아니면 축지법? 뭔데?"
도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킬 아니야."
"그럼?"
"내공을 활용한 거긴 한데, 스킬이랑은 좀 다르지."
"말도 안 돼 진짜. 세계에서 제일 빠른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거야 지금?"
"그건 됐고. 소원 들어주기로 한 건 잊지 않았지?"
내기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보미가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본래 그녀가 내기를 받아들였던 이유는, 여차하면 그를 집에서 쫓아내기 위한 일종의 보험 성격이었다. 실제로 소원을 써먹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무방비로 손 놓고 있지 않았다는 고도의 자기 기만 같은?
하지만 반대로 내기에서 지면서 오히려 도훈에게 면책권만 부여한 셈이 되어 버렸다. 이젠 도훈이 버틴다고 해도 쫓아낼 명분이 없었다.
"무슨 소원인데."
"뭐든 들어준다는 말도 기억하지?"
"아니 그거야···."
보미는 갑자기 다가오는 도훈의 모습에 움찔 놀라 뒤로 물러났다.
자신이 생각하는 수준의 소원이 아니라,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을 요구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퍼뜩 들었다.
[주인님, 공략 끝낼 기회가 왔습니다.]
'갑자기 뭔 소리야?'
[소원 들어주기 내기를 한 거 아니었습니까? 한 번 자자고 하면 끝날 것 같은데요?]
'에이,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건 선 넘는 거지.'
[선을 넘다뇨?]
'넌 저런 내기에 졌다고 전 재산 내놓으라고 하면 주겠냐?'
[그건 좀···.]
'그거랑 비슷한 거야. 말만 뭐든 들어 준다지 실제론 한계가 정해져 있다고. 그게 우리 사회의 일반 상식을 벗어나면 순식간에 개념 없는 사람 취급받는 거고.'
[그럼 뭐 때문에 내기를 거셨습니까? 공략에는 하등 쓸데없는 짓인 것 같은데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거 아니야? 빌드업 한 번 짜봐야지.'
[빌드업이요?]
"그럼 오늘 나랑 캠핑 가."
"···캐, 캠핑이라고?"
"캠핑 한 번 꼭 가보고 싶었거든. 예전부터. 제주도 온 김에 한번 가보려고."
"아니 그걸 왜 나한테···."
"소원 들어주기로 했잖아. 잊었어?"
"그, 그건 그런데···."
예상외의 대답에 보미가 몹시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캠핑이라고요? 이게 무슨 빌드업인지 저는 전혀 감이 안 오는데요?]
'한 번 생각해 봤는데, 보미의 집은 오히려 공략이 더 어려울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어젯밤만 해도 분위기 좋았잖습니까?
서로 방에서···.]
'그게 문제야.'
[네?]
'서로 방이 나누어진 게 문제라고. 보미의 안방은 일종의 <소도 >같은 곳이랄까?'
[소도가 뭔가요?]
'옛날 삼한 시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특수 지역을 말해. 거긴 신성한 곳이라고 해서 범죄자가 숨어 들어가도 절대 못 잡아갔거든.'
[그런데 왜 보미 양의 방이 소도죠?]
'보미는 지금 내 행동 때문에 엄청나게 자극받고 있어. 하지만 그와 반대로 나에게 매혹당하는 자신을 무척 경계하는 중이야. 아까 집으로 가자고 하니까 오히려 말 바꾸는 거 봤지?'
[네. 주인님이 집으로 가자고 하니까 그냥 드라이브를 택하거더군요.]
'왜 그랬겠어? 갇힌 공간에 단둘이 있다간, 뭔가 일이 벌어질까봐 겁낸다는 증거지. 보미는 아직 경험이 없고, 섹스를 두려워하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집에 가기만 하면 게임 끝이라는 소리 아닙니까?]
'아니지. 그거야말로 순진한 생각이지. 정말 그 상황이 되면 보미는 아예 자기 방에 처박히는 회피전략을 선택할 거야. 그래서 소도라는 거야. 거길 내가 함부로 진입했다간 지금까지 공들여 쌓은 신뢰가 단숨에 무너져 버릴 테니까.'
[그럼 캠핑하면 뭐가 다릅니까?]
'다르지. 왜 그런 말도 있잖아. 숫처녀인 여자들이 남자친구와 단둘이 여행 가서 아다 깬다는 말.'
[그건 왜 그렇죠?]
'그만큼 TPO가 중요하다는 거야. 시간, 장소, 경우. 보미의 자취방은 장소에서부터 탈락이야. 그곳엔 최후의 보루가 남겨져 있으니까. 그곳을 침범하는데는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릴 거야.'
[캠핑하면서 자연스럽게 소도를 제거하실 생각이시군요.]
'맞아.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캠핑하면 둘이 자연스럽게 한 공간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거야.'
[텐트요?]
'정답. 지금 보미에게 가장 필요한 건 불가항력적으로 단둘이한 공간에서 잠을 자야 하는 명분이 필요한 거라고. 그렇다고 내가 모텔을 가자고 하면 따르겠어? 뺨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하지만 캠핑은 달라.'
[진짜 목적을 숨길 수가 있으니까요?]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네. 캠핑이야말로 보미의 거부감을 낮추는 동시에 집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최적의 타협점이란 소리지.
거부하기도 마땅치 않고.'
"가자. 주말에 쉬니까 시간은 많을 거 아니야?"
"그래도 난데없이 캠핑은 좀···. 캠핑용품 가진 것도 하나도 없고."
도훈은 그녀가 적극적으로 거절하지 않고 용품 핑계를 대는 것을 보고 반쯤 넘어왔다고 생각했다.
"없으면 사면 되지."
"산다고? 그걸 다?"
"뭐 얼마나 거창한 게 필요하겠어? 차도 있겠다, 대충 텐트 치고 요리할 수 있는 도구 몇 개만 사면 뚝딱이지."
"······."
"아까 분명 소원 들어준다고 했다? 난 그 말만 믿고 전력으로 뛰었다고."
도훈이 계속 내기를 강조했다. 약속을 지키라는 소리였다.
보미의 입장에서도 당장 거절할 핑계가 마땅치 않았다.
보미가 고민 끝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캠핑 가는 건 그렇다 쳐. 근데 자고 오는 건 싫어. 너랑 내가 그럴 이유도 없고 말이야."
"누가 자고 온대? 그냥 기분만 내다 늦게라도 집으로 가면 되지. 제주도 엄청 좁잖아. 어디에 있든 차 타고 1시간이면 집에 돌아갈 수 있는데 굳이 왜 불편한 데서 자? 너 혹시 거기까지 생각한 거야?"
도훈이 뻔뻔하게 역공을 펼쳤다.
"아, 아니. 무슨 소리야. 당연히 집에 갈 생각 했지."
[이러면 나가리 아닙니까? 캠핑가서 잠도 안 자고 오면요.]
'당연히 처음부터 그 말은 안 꺼내는 게 좋지. 하지만 결국엔 자고 오게 될 거야.'
[주인님은 정말 입만 열면 거짓말이군요.]
'선의의 거짓말이란 말도 있잖아.'
[대체 어디에 선의가 있다는 건지.]
"말 나온 김에 바로 캠핑 장비 보러 가자."
"지, 지금?"
"지금부터 장보고 움직여도 저녁 식사 시간 맞추려면 빠듯해.
저녁은 뭐 먹을까? 고기? 회? 아니면 둘 다?"
"모, 몰라. 나도 한 번도 안 가봐서."
"암튼 일단 출발해."
어쩐지 도훈의 꾀임에 말려드는 기분이었으나, 보미는 약속을 지킨다는 이유로 그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고 오는 것만 아니면 캠핑 정도는 뭐···. 괜찮겠지? 그냥 밖에서 바비큐 하는 거랑 비슷하니까.'
두 사람은 차를 타고 캠핑용품점부터 들렀다. 요샌 하나의 매장안에서 어지간한 물품은 한 번에 모두 살 수 있어서 쇼핑도 뚝딱이었다.
4인용 텐트와 그늘을 만들어 줄 타프, 그리고 간이 식탁과 접이식 의자 등등을 구매하자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나왔다. 가게 주인에게 가격을 들은 보미가 놀라서 말했다.
"너무 비싼 거 아니야?"
"몰랐어? 캠핑 용품은 원래 비싸잖아."
"잠깐. 이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은데. 가격이 무슨···."
금액에 놀란 보미가 도훈을 만류했지만, 도훈은 어디선가 현금뭉텅이를 꺼내더니 빠르게 계산을 끝내버렸다. 트렁크에 캠핑용품을 실으면서도 보미가 계속 투덜거렸다.
"넌 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100만원 넘는 돈을 그렇게 흥청망청 쓰니?"
"나 돈 많은데?"
"누군 과외 안 해본 줄 알아? 설사 고액과외라고 해도 이건 조금···."
"누가 과외해서 돈 많데?"
"그럼?"
"우리 집 원래 부자야."
"부자···."
"그냥 부자 아니고 쌉부자."
"무, 무슨."
"정말이야. 위화감 느낄까 봐 말 안 하는데, 아버지가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라서 용돈도 충분히 받고 있어."
"······."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이게 무슨 일회용품도 아니고 사놓고 두고두고 쓰면 되지."
"그, 그래 뭐. 알아서 해. 대신 장 보는 건 내가 낼게."
"굳이?"
"같이 가는 건데 왜 너만 돈을 써? 그리고 나 남자한테 얻어먹는 거 불편해."
"알아서 해 그럼."
도훈은 보미의 자존심을 생각해 장 보는 비용을 맡겼다. 명색이 경찰 간부인데 대학생에게 얻어먹는 것이 부끄럽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트로 장소를 옮긴 두 사람은 저녁으로 먹을 식재료를 골랐다.
"저녁으로 삼겹살 괜찮아?"
"고기는 뭐 다 좋아."
"조개도 좀 살까? 새우랑."
"다 먹을 수 있겠어?"
"충분하지. 내 덩치를 보라고."
도훈은 내친김에 이것저것 모두 카트에 쓸어 담았다. 고기를 싸먹을 수 있는 쌈 채소와, 쌈장, 마늘에 고추, 파절이를 담고 해산물로는 조개와 새우 등등을 담았다.
"술은 어떻게 할까?"
"술?"
식재료를 보자 막상 보미도 입맛이 동했는지 술이 당겼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 왠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굳이 술까지? 저녁에 집에 돌아오려면 음주 운전하면 안 되잖아."
"아, 그렇네. 그럼 내 것만 살게."
"뭐라고?"
"운전은 어차피 네가 할 거니까 나 혼자 마실 것만 사면 되잖아."
"아···."
보미는 뭔가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도훈이 앞에서 절대 술을 마시면 안 돼. 분명 실수할 거야.'
캠핑용품과 저녁 장까지 모두 마친 두 사람은 캠핑할 장소를 골랐다. 제주도 내에 캠프장이 많았기 때문에,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여기로 가면 되겠다."
"좋아."
캠프장은 보미의 집에서 불과 30분 떨어진 위치였다. 바닷가가 보이는 곳으로,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땐 빈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차를 주차한 곳 바로 옆에 나무로 된 데크가 설치되어 텐트를 펴기 쉬웠다.
도훈이 익숙한 솜씨로 척척 텐트를 펼치더니 순식간에 뼈대를 조립했다.
"캠핑 안 가봤다지 않았어?"
"안 가보긴 했는데 군대에서 배워왔지."
"대한민국 군대에선 별걸 다 알려주는구나."
순식간에 텐트를 치고 타프까지 설치하자 그럴듯한 모양새가 갖춰졌다. 두 사람은 접이식 식탁과 의자를 펼쳐놓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막상 와보니까 좋지?"
"으, 응. 뭐 생각보단 나쁘지 않네."
도훈은 보미의 표정이 꽤 밝아진 것을 보고 만족스러워했다.
'얼굴을 변장한 채 맨날 일만하고 살았으니, 이런 기분은 처음일 거야.'
[주인님이 여자 한 명 공략하는 데 이렇게까지 애쓰시는 모습은 오랜만입니다.]
'어쩔 수 없지. 스킬도 아이템도 전부 사용 불가에, 정보창마저 안되니까 정석으로 가는 수밖에.'
[정석은 꽤 고단하군요.]
'원래 여자 한 명 눕히는 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거야. 이제껏 내가 날로 먹은 거지.'
"불 피울까?"
"응? 지금?"
"숯에 불이 올라오려면 미리미리 피워야 하거든."
도훈이 접이식 화로 대를 펼치더니 안에 마른 숯과 장작을 넣기 시작했다. 보미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의문을 가졌다.
"가운데 번개탄 빠뜨린 거 아니야? 그냥 붙이면 잘 안 탈 텐데?"
보미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도훈은 화롯대 위에 묵묵히 장작을 쌓아 올릴 뿐이었다.
"번개탄은 필요 없어. 사지도 않았거든."
"그럼 뭘로 불 붙이게?"
"너한테만 보여줄게."
도훈이 장작 하나를 맨손으로 붙잡았다.
"응?"
손에 내공을 끌어모아 열기로 바꾸자 마른 장작에서 갑자기 연기가 피어올랐다.
"어, 어?"
"난 늘 뜨거운 남자거든."
그 말과 동시에 장작에 화르륵 불이 피어올랐다. 마법과 같은 장면에 보미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