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8. 제주도 푸른 밤-68-
* * *
"근데, 왼쪽에 무슨 숫자가 뜨던데 그건 뭐야?"
응? 숫자라니?
그럴 리가?
나는 로시에게 급히 물었다.
'3 size 스카우터는 여자한테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어?'
[맞습니다.]
내 기억에 의하면 이것은 남성 전용 아이템이나 마찬가지다.
애초 아이템 설명에도 남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었고, 실제로 사용하면서 남자를 쳐다봤을 때 어떤 수치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보미에게 씌워줬던 것이다.
"무슨 숫잔데?"
"뭐지? 바코드 같은 건가?"
"바코드라고?"
스카우터의 표기 숫자는 기껏해야 3단위.
그걸 바코드라고 이해하긴 쉽지 않을 텐데?
[아, 그렇군요! 착용자가 플레이어라면 다른 게 보일 수도 있겠군요!]
'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러니까 해당 아이템은 남성 플레이어가 사용할 땐 여성의 몸매를 측정하는 도구지만, 여성 플레이어에겐 남성의 다른 정보가 출력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정보?'
"185, 18, 789329···. 뒤의 숫자는 너무 길어서 뭔지 모르겠어. 어? 계속 바뀌는데?"
"바뀐다고?"
"마지막 숫자가 계속 바뀌는데? 이거 혹시 디스플레이였어?"
"아아!"
수치를 듣는 순간 깨달았다.
맨 앞의 185는 나의 키.
중간에 18은 잦이 길이.
그리고 아마 마지막은···.
"아, 맞다. 그거 GPS 표시기능있어."
"GPS?"
"왜, 디지털카메라도 사진 찍는 위치에 따라 GPS가 기록되는 게 있잖아. 그것도 그런 기능이 있거든. 선글라스긴 한데 일종의 전자기기랄까? 왜 들어봤지? 구골글라스 같은."
"오, 신기하다."
순진한 보미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는지 이내 선글라스를 벗어 나에게 건넸다.
[마지막 수치는 아마도 주인님 재산 현황 같군요.]
'그런 것 같아. 코인 투자를 해놓는 바람에 실시간으로 재산이 변동되었나 본데.' 참으로 어이없는 기계였다.
남자가 볼 땐 여성의 가슴, 허리, 힙을 측정하는 도구가 반대로 여성이 볼 땐 남자의 키와 잦이, 그리고 재산을 보여주었다. 정말이지 속물적인 기계가 아닐 수 없다.
'개발자 놈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따위 아이템을 만든 거야?'
[글쎄요. 아무래도 사용자의 니즈를 분석하지 않았을까요? 여성들이 남성을 볼 때 궁금한 점을 잘 파악했다고 생각됩니다.]
'키랑 잦이 길이 재산이 궁금하다고?'
[주인님의 동의하든 안 하든 통계는 그렇다는 거죠.]
'아무리 그래도 실시간 재산 현황까지 보여주는 건 진짜 노골적 이네.'
[저는 그것보다 주인님 재산이 많이 줄어든 것 같아 걱정이군요. 앞자리가 생각했던 숫자와는 다른 것 같아서요.]
'상관없어. 존버는 승리한다.'
코인에 신경 안 쓴 지 오래다. 어차피 반등할 거란 믿음으로 올인했기 때문에 묵묵히 기다릴 뿐.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돈은 지금의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저기 화장실 있네. 여기서 잠깐 기다려."
"응?"
"얼굴 좀 고치고 올게."
"아, 어."
공용화장실을 발견한 보미가 쪼르르 뛰어갔다.
무료해진 나는 스카우터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근데 역용 마스크를 여기서 어떻게 벗는다는 거지? 저거 원래대로 돌아오는 데 한참 걸리지 않나?'
[보미 양의 분장 아이템은 역용 마스크와는 살짝 다른 종류로 보입니다.]
'다르다고?'
[네. 주인님이 쓰는 역용마스크는 실제로 안면 윤곽을 변형시키고 피부를 조절한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성형 아이템에 가깝지만, 보미양이 쓰는 물건은 인피면구랄까?]
'인피면구면 인조가죽으로 만든 가면 말이지?'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천상계 아이템을 시중에 파는 가면과 비교할 순 없죠. 차라리 특수분장의 일종이라고 생각하시는는게 더 가깝습니다.]
'아아, 다른 거구나. 어쩐지 그래서 얼굴이 항상 똑같은 모습이었군? 근데 왜 저런 아이템을 썼지?'
[경찰대 재학시절 때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얼굴로 위장해야 했기 때문에 아마 간편한 방식을 사용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 때나 쓰고 벗을 수 있다면 저게 더 좋은 거 아니야? 내건 조금만 잘못하면 얼굴 근육이 비틀려 버리잖아. 물론 그 덕분에 빻은 얼굴 업적을 달성하긴 했지만.'
[아닙니다. 주인님이 쓰는 역용 마스크 타입이 훨씬 더 고급 기술입니다. 피부 근육을 당기고 늘여 얼굴을 변형하기 때문에 실제 자기 얼굴이거든요. 보미양이 쓰는 제품은 탈부착은 간편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양이 변형되기도 하고, 아무리 피부의 근육 신경을 모방했다곤 하나 표정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흐음. 어쩌면 저 가면도 보미가 인기가 없었던 이유로 한 몫 했을지 모르겠군.'
[분명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인조가죽은 실제로 구분하긴 어려우나 표정의 다채로운 변화가 부족해 자칫 무표정한 인상을 주거든요.]
'맞아. 나도 좀 이상하긴 했어. 가끔 보면 거죽만 덮어 놓은 로봇 같더라니까? 인간미가 안 느껴진달까?'
로시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가면을 벗은 보미가 공용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
"어, 어때? 너무 눈에 띄나?"
오, 마이 지저스 크라이스트 갓 뎀!
본래 얼굴로 되돌아간 보미는 엄청난 미인이었다.
어제 집에 함께 있을 때도 보긴 했지만, 밖에서 외출복을 입은 상태로 다시 보니 선녀가 따로 없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굴부터 몸매까지.
문자 그대로 여신 강림.
"뭐야. 뭐라고 말 좀 해봐. 이상해? 인피 면구가 아직 남아있나?"
"으. 음. ···괜찮네."
사실은 예쁘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괜히 그녀의 콧대만 높여줄까 봐 일부러 생략했다. 하지만 정말로 여자 얼굴을 보고 놀라긴 오랜만이었다.
"그래? 다행이네. 암튼 선글라스는 써야겠지?"
보미는 차에 가더니 선글라스를 챙겨 나왔다. 그녀의 얼굴에 어울리는 꼭 맞는 선글라스였다. 아니, 그냥 시장에서 파는 5,000원짜리를 썼어도 예뻤을 것이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니까.
"거봐. 진작 이렇게 하고 다니지. 훨 낫지?"
"편하긴 한데, 지금도 불안해. 누가 알아볼까 봐 겁나고."
"누가 널 알아본다고 그래? 둘이 같이 다니면 그냥 관광객인 줄 알겠지."
"그러려나?"
"커플처럼 다니면 더 의심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커플이라니?"
"생각해봐. 선수들은 원래 다른 선수들이랑 같이 안 다니잖아.
단독으로 활동하니까."
"응."
"그럼 커플 행세를 하면 PK단이 절대 의심 못 하지 않겠어? 어느 선수가 둘이서 커플 행세를 하겠냐고. 그것도 맨얼굴 드러내놓고."
"오호. 일리가 있는데?"
"진짜로 커플 흉내 좀 내 봐?"
"···응?"
나는 불쑥 보미의 손을 잡았다.
갑자기 훅 들어가는 스킨십에 보미가 놀라 까무러쳤다.
"뭐, 뭐하는 거야?"
"손 잡았잖아. 커플끼리 손잡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겠어?"
"누, 누가 너랑 커플한다고 했는데?"
"진짜로 하자는 것도 아니잖아. 놈들 따돌리려고 위장하는 건데. 설마 손 좀 잡았다고 설레는 건 아니지?"
"무슨 소리야? 나 아무렇지도 않거든?"
거짓말이다. 손을 잡는 순간 보미의 심박수가 두 배는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내 청각이 빼어난 편이긴 하지만, 심장 박동이 귀에 들릴만큼 과격하게 뛰는 걸 보니 엄청 놀란 게 분명했다. 얼굴은 상기 되고, 맞잡은 손에서도 땀이 나고 있었다.
이 여자, 너무 순진하군.
"아무렇지 않으면 밖에 돌아다닐 땐 이렇게 다니자. 그편이 너랑 나 둘 모두에게 안전하니까."
그녀에게 왠지 핑곗거리가 필요할 것 같았다.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그래야 스스로를 계속 기만할 수 있을 테니.
"그, 그러든가."
우린 한동안 바닷가 주변을 걸었다.
마침 바닷바람도 시원하게 불어와, 상쾌한 청량감을 주었다. 가을의 햇살은 여름처럼 너무 뜨겁지도 않고 적당한 온기를 제공했다. 단둘이 해변을 걷기만 해도 사랑에 빠질 것 같은 날씨였다.
"···너무 오랜만이야."
"응?"
"집이 아니라 제주도 밖을 이렇게 편하게 돌아다니는 거."
"그랬구나."
"늘 가면을 쓰고 있어서 답답했거든."
"그거 설마 평생 쓰고 다닐 건 아니지?"
나의 물음에 보미가 고개를 돌려 먼 바다 쪽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조용히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랭커가 되면, 그땐 더 숨지 않으려고."
"랭커?"
"응. 너도 대충은 알겠지만, 우리들은 랭커부터가 진짜 시작이잖아. 그땐 많은 게 가능해지거든."
"흐음."
"당당히 내 얼굴로 다닐 거야. 그땐."
"멋있네."
"응?"
"나와 같은 뜻을 가졌으니, 우린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파트너···. 흐음. 설마 이상한 의미는 아니지?"
"무슨 의미?"
내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되묻자 보미가 오히려 얼굴이 빨개지며 시선을 피했다.
"아, 아니야. 아무것도."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몰라."
보미가 손을 놓더니 멀찌감치 달아났다.
해변을 뛰는 그녀를 보니 CF의 한 장면 같았다.
"뭐야, 나 잡아 봐라야?"
나도 덩달아 신이 나서 같이 뛰었다. 문제는 내가 너무 빠르다는 사실이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나는 속도를 주체할 수 없었다.
"어, 어!"
순간 몸이 부딪혔다. 자칫하면 보미를 몸빵으로 날려버릴 수 있는 위기였다. 나는 재빨리 그녀의 등허리를 휘감은 뒤 내게 쿠션이 되도록 낙법을 펼쳤다.
쿵-!
모래사장이라 다행히 충격은 없었지만, 보미가 내 위를 덮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너무 클리셰인 건 아닙니까?]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
"으읏. 뭐, 뭐하는 거야!"
나를 깔고 넘어진 보미가 빼액 소릴 질렀다.
밑에서 보니 더 예쁘다.
아니 밑에 깔려도 예쁠 것 같다.
뒤로 돌려도 예쁘겠지?
"미안. 나도 모르게."
"아, 진짜."
보미가 일어서려다 움찔 놀랐다. 하필 그녀의 허벅지가 나의 가운뎃다리를 누른 탓이다. 아까처럼 일부러 발기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나는 발기를 하지 않아도 묵직하다.
사내는 원래 묵직해야 하는 법이니까.
"······."
보미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아무말 없이 일어섰다.
분명 말랑 잦이의 촉감을 느꼈을 텐데도,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것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옷을 털었다.
"미안, 발이 미끄러져서."
"웃기시네. 일부러 그런거잖아."
"아니라니까. 속도 제어를 못 했어. 가끔 내가 너무 빠르다는 사실을 까먹거든."
보미가 눈을 흘기며 나를 쳐다보았다. 얄밉긴 한데 차마 화를 낼 순 없는 눈치였다. 저런 모습을 보니 더 귀엽게 느껴졌다.
'무슨 여중생이랑 티키타카 하는 것 같네.'
[주인님도 같은 수준이란 소린가요?]
'나야 늘 동심에 가득차 있지.'
[동심이 아니라 음욕이겠죠.]
'원래 사내들은 중학생 때부터 발정시작이라.'
"뭐, 얼마나 빠른데?"
"나?"
보미도 민망한지 화제를 돌리기 위해 물어 본 것 같았다.
"100미터 8초에 가능할걸?"
"장난해?"
"아니 진짜로."
"내가 경찰대 4년 다닌건 알고 있지? 우리 학교 다니면 맨날 아침 구보하고 체력 단련하는 것도. 너 정식 트랙 위에서 뛰어 보지도 않았을 거 아니야."
보미는 도저히 못 믿겠다는 투였다.
"아니야. 나도 체육교육과 다닌다고. 당연히 육상 트랙에서 쟀었고."
"정말로 측정해서 8초가 나왔다고? 세계 신기록인데?"
내가 갱신한 세계 신기록을 몇가지 더 말해주고 싶었으나, 더 말해봐야 못 믿을 것 같아 관두었다.
"물론 정식으로 측정한 건 아닌데, 아마 전력으로 달렸으면 그쯤 나오지 않았을까?"
"웃기시네. 도훈이 네가 정말 100미터를 8초에 뛰면 내가 ···."
"뭐 해줄 건데?"
"······."
보미가 말문이 막혔는지 잠시 주춤했다.
"소원 들어줄 거야?"
"내가 왜?"
"방금 뭐 해준다는 것처럼 들렸는데?"
"그렇다고 무턱대고 아무 소원이나 들어주는 사람이 어딨어?
그리고 실패하면?"
"내가?"
"그래. 내기는 공평해야지. 실패하면 넌 어쩔 건데?"
"나는 소원 들어줄게."
"아무거나?"
"그래."
보미가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나를 집에서 쫓아낼 생각인 걸까?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하니, 답답할 뿐이었다.
"좋아. 이렇게 해. 도훈이 니가 정말 100미터를 8초로 들어오면 네가 원하는 거 들어줄게. 단, 실패하면 너도 내 말대로 따르는 것으로."
"콜. 근데 100미터 트랙이 어딨어?"
"기다려봐."
보미가 갑자기 보폭을 일정하게 벌이며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슨 의도인지 몰랐으나 잠시 후 그녀가 100미터 라인을 측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뭐야, 설마 모래사장을 뛰란 소리야?"
"왜? 트랙이라는 말은 없었는데?"
보미가 혀를 낼름 내밀더니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결국 한참 떨어진 거리에서 보미가 손을 크게 흔들었다. 육안으로 봐도 100M보다 훨씬 멀어 보이는 위치였다.
"여기야, 도훈아! 내가 출발하면 뛰어!"
"와, 나참 이건 사긴데."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모래사장 위에선 아무리 주인님이라도 속도를 못 낼 텐데요?]
나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뛸 채비를 마쳤다. 발바닥에 닿는 고운 모래가 햇볕을 받아 뜨거웠다.
'8초쯤 뛴다는 것도 내공을 얻기 전 측정했던 거거든. 사실 지금은 내가 얼마나 빨라졌는지도 모르겠어.'
대충 몸을 풀고 있는데 보미가 기습적으로 "출발"을 외쳤다.
귀가 밝지 않았으면 제대로 듣지도 못했을 작은 소리였다.
"시작부터 장난질이구먼."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내공을 폭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