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 제주도 푸른 밤-67-
* * *
식사를 마치고 나온 도훈은 불쑥 보미에게 제안했다.
"아점 먹고 나니까 엄청 여유롭네. 나 관광이나 시켜줘라."
"관광이라니?"
"제주도에 3년씩이나 살았는데 좋은 곳 많이 알지 않아?"
자신의 심란한 마음도 모르는 채 속 편한 소릴 해대는 도훈이었다. 얄밉기 짝이 없는 마음에 보미가 톡 쏘아붙였다.
"넌 내가 무슨 가이드로 보이니?"
"싫으면 말지 왜 짜증이야? 그럼 집이나 가든지."
집으로 돌아가자는 도훈의 말에 보미는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금요일 낮부터 월요일 출근 전까지. 무려 3일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하룻밤만 같이 보내도 만리장성을 쌓을지 모르는 판국에 3일은 길어도 너무 길었다.
'아, 아니야. 차라리 그냥 밖을 같이 돌아다니는 게 더 나을 지도.'
생각을 고친 보미가 급히 말을 바꾸었다.
"그, 그래. 뭐 관광 정도는···."
"뭐야? 왜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데?"
"내 맘이지."
"참나. 변덕이 죽 끓듯 하는구먼. 그럼 어디로 갈 거야?"
"갑자기 물으니까 딱히 생각나는 곳이 없는데."
"그럼 차에 타서 생각해 보든가."
도훈이 보조석에 오르려고 하자 보미가 말렸다.
"어어, 뒤에 타라니까?"
"왜? 또 윤 기사 해주게?"
"내가 왜 네 기산데?"
"그러니까 앞에 탄다잖아. 그리고 밥 먹고 뒤에 타면 멀미할 것 같다고."
도훈은 그 말을 마치자마자 차 문을 열고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제멋대로인 도훈을 향해 보미가 계속 뒤에 타라고 요구했지만, 먼저 자리를 잡은 도훈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요지부동이었다.
"안 가?"
"아이씨. 몰라 진짜. 맘대로 해."
결국 도훈과의 실랑이에 피곤해진 보미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운전석에 올랐다. 차량을 출발시킨 보미는 옆 좌석에 앉은 도훈이 계속 신경 쓰였다.
'이상해. 남자랑 처음 같이 차에 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신경 쓰이지?'
보미의 현 순찰 파트너인 곽 순경은 남자였다. 그와 거의 6개월넘게 순찰차를 타고 다녔지만, 단 한 번도 불편하다는 감정을 느껴본 적 없었다. 심지어 공조수사를 하며 친해졌던 본청의 김형사 또한 늘 앞 좌석에 함께 타면서도 불편함이 없이 지냈다. 오로지도훈만이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왜지?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혹시 내가 저 양아치한테···.'
보미는 결국 인정하기 싫었던 진실과 대면해야 했다. 하지만 이 내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지워버렸다.
'흥, 그럴 리가. 놈이 계속 자극하니까 나도 모르게 말려든 것뿐이야. 놈은 그냥 평소 하던대로 여자를 희롱하는 거라고.'
도훈을 바람둥이 양아치로 의심하는 보미는 쉽게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꿀릴 것도 없는데, 왜 의식하는 건데? 그냥 다른 남자들하고 똑같이 대하면 그만이지.'
보미가 용기를 내 도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일단 해안도로 타고 달릴 거야. 심심하면 바다 구경이나 하든지."
"그래 좋아."
도훈이 씩 웃으며 말했다.
'흥. 뭐 막상 보니까 별것도 없잖아? 내가 왜 그렇게 시선 마주치는 걸 부끄러워했지?'
도훈을 똑바로 바라봐도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보미는 무심결에 시선을 내렸다. 그런데 도훈의 허벅지 안쪽이 눈에 띌정도로 불룩 튀어나와 있는 것이었다.
'헉, 저, 저게 뭐지?'
오른 허벅지 안쪽의 굴곡진 모양새는 길쭉한 소시지를 연상시켰다.
'설마 저거?'
그 순간 겨우 유지하고 있던 평정심이 깨지며, 아침에 손으로 몰래 만졌던 도훈의 커다란 잦이가 떠올랐다.
"흡!"
보미가 갑자기 침음을 토하며 시선을 돌리자 도훈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아, 아니야. 그냥 속이 메슥거려서."
"식사를 너무 급하게 했나 보네. 화장실 다녀와선 말도 하지 않고 계속 먹기만 하더니···. 속 불편하면 내가 대신 운전해도 돼."
"돼, 됐어."
"나 운전 잘한다니까?"
"돼, 됐다고. 그냥 바다나 구경해."
도훈의 거듭된 제안에도 보미는 한사코 거절하며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우연히 보게 된 바지 속 소시지가 그녀의 마음을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설마 지금 내 옆에서 꼴린 거야? 저건 분명히 꼴린 거겠지? 그게 아니고서야 옷 밖으로 보일 정도로 크다고?'
실제로 도훈의 발기된 잦이를 봤던 터라, 보미의 마음은 더더욱 심란해졌다. 마치 눈앞에 도훈의 잦이가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변태 새끼. 일부러 나 보라고 꼴린 걸 거야. 근데 저게 맘대로 커질 수도 있는 건가?'
처음엔 도훈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발기를 한 것으로 오해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잦이가 무턱대고 커질 리는 없었다. 더구나 도훈이 자극받을 만한 사건도 전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그냥 내가 오해한 건가?'
보미가 용기를 내어 다시 도훈의 바지를 힐끔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눈에 띌 정도로 불룩 튀어나온 잦이는, 그 모양을 완연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보미가 침을 꿀꺽 삼켰다.
'말도 안 돼. 안 꼴린 상태가 저 정도면···. 저건 그냥 병 아닌가?'
물론 보미도 유난히 잦이가 큰 사람들에 대해 들어본 적 있었다. 특히 흑인들 같은 경우엔 반바지만 입고 있어도 실수로 물건이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라고.
그녀는 도훈도 그런 특이 체질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오해한 걸 거야. 도훈이가 좀 큰 편이니까···. 앉았을 때 옷 밖으로 티가 나는 거겠지.'
보미의 생각과는 반대로 사실 도훈은 일부러 물건을 발기시킨 것이었다. 그는 커져라 여의봉 스킬이 있었기 때문에, 흥분과 상관없이 크기를 조절할 수 있었다.
[보미양이 자꾸 주인님을 힐끔거리는군요.]
'아침에 실물로 봤던 잦이가 상당히 쇼킹했던 모양이야. 바지 속에 든 것만 보고도 막 상상이 되나 보지?'
[그런데 이렇게 한다고 보미양이 정말 자극을 받을 까요?]
'당연하지. 이건 마치 여자들이 가슴골 다 보이게 옷 입은 거랑 다를 게 없거든. 안 보려고 해도, 본능적으로 시선이 갈 수밖에.
맞다, 그나저나 공략에 상관없는 스킬은 써도 된다고 했지?'
[네. 커져라 여의봉 스킬도 보미양에게 직접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므로 상관없습니다.]
'그럼 아이템도 마찬가진가?'
[무슨 아이템 말씀이신지.]
'스카우터 말이야. 보미 몸매가 궁금해서.'
[쓰리 사이즈 스카우터요? 단지 보는 것만으로 공략 규칙에 위배는 아닙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창밖을 보는 척하던 도훈은 불쑥 말했다.
"제주도는 가을인데도 햇살이 엄청 뜨겁구나. 선글라스 좀 써야겠다."
"웬 선글라스?"
도훈이 허공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곧 그의 손에 레이밴 스타일의 선글라스가 딸려 나왔다.
"인벤토리 쓰는구나."
같은 플레이어인 보미는 곧바로 인벤토리를 알아보았다. 선글라스를 쓴 도훈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보미를 쳐다보고 말했다.
"너도?"
"당연하지. 선수들에겐 필수품이잖아."
그 순간 보미의 몸매 수치가 선글라스 한쪽에 표기되었다.
<37-24-38>
"오우 쉣!"
"뭐?"
"아, 아니야. 반대쪽 차선에서 이상한 걸 본 것 같아서."
도훈이 운전석 차창을 가리키자 보미가 고개를 반대로 돌리며 물었다.
"어디?"
"방금 지나간 것 같아."
"그래?"
도훈은 그 틈에 안전 벨트에 꽉 낀 보미의 가슴을 쳐다보았다.
벨트가 가슴골을 가로지르며 양쪽으로 툭 튀어나온 모습이, 마치 밥그릇 두 개가 엎어진 모습 같았다.
'쌉 가능.'
[네?]
'빻은 얼굴이라도 이 정도면 주절먹이라고.'
[아니 주인님.]
도훈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해안도로를 지나고 있던 차량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해변가를 비추고 있었다.
"죽이네, 전경."
"예쁘지? 여기가 제일 전망이 좋은 코스야."
"그러니까. 아주 그냥 얼굴을 파묻고 싶을 정도야."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아니 모래사장에 말이야. 모래 찜질하고 싶다고."
"참나."
보미의 몸매를 확인한 도훈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데?'
[좀 크긴 하네요. 위아래 전부.]
'이야, 경찰청 사람들 정말 보는 눈도 없다. 저런 폭탄 같은 몸매를 몰라 봤다니. 제정신인가?'
[보미양이 의도적으로 몸매를 감추지 않았을까요?]
'하긴. 저번에 근무복 입고 있을 때 보니까 잘 티가 안 나긴 하더라. 분명 몇몇 사람들 말고는 전혀 눈치 못 챘을 거야. 가슴이 큰 여자가 일부러 큰 옷을 입으면 오히려 애매하게 뚱뚱해 보이기도 하거든.'
[그렇다면 김형사는 보미양의 몸매를 눈치챈 몇 안 되는 사람이겠군요.]
'김형사 이 새끼, 알고보니 엉큼하기 짝이 없군. 얼굴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몸매만 본다는 소리잖아?'
[주인님도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 누가 누굴 나무라는 건지.]
'암튼. 장난 없네 진짜. 빨통 튀어나온 거 봤지? 어우, 그냥 하루 종일 가슴만 잡고 빨아도 행복할 듯.'
[역시 주인님은 변태십니다.]
"저기 잠깐 세워줄까?"
"응?"
"아니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서. 경치나 보고 가라고."
"그럴까?"
해안도로 옆 해변가에 다다른 보미가 갓길에 차를 주차했다. 두 사람은 곧 차에서 내려 바닷가 쪽으로 걸었다.
"예쁘지? 나도 좋아하는 곳이야. 제주도 처음 왔을 때 보고는 여기로 발령 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럴만하겠네. 어, 저기 푸드 트럭있다. 음료라도 한 잔 마실래? 이건 내가 살게."
"됐어. 학생한테 무슨."
"괜찮아. 겉보기만 학생이지, 실제론 30대니까."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돈도 안 벌면서."
"벌어."
"네가 무슨 수로?"
"과외하거든. 네가 경찰대 다닐 때 한송이 가르쳤던 것처럼."
"헐, 주제에 과외까지?"
"뭐래. 단대 수석이란 말 못 들었어? 보기보다 공부 잘한다니까?"
"그럼 뭐 사양않고 마신다?"
"그래."
두 사람은 푸드트럭 앞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푸드트럭을 보자 문득 김형사가 떠오른 도훈이 보미에게 물었다.
"맞다. 그때 그 형사가 여기 위장해서 잠복수사 했었지?"
"김형사님?"
"응. 갑자기 덤벼들어서 깜짝 놀랐잖아."
"네가 수상하게 행동했다며? 불쑥 실종자 인적 사항을 묻질 않나."
"그렇다고 다짜고짜 사람을 체포하려고 하면 쓰나."
"김형사님이 평소엔 안 그러는데, 수사할 땐 되게 성격이 급해 지거든."
"그분이랑은 근데 무슨 사이야?"
"어?"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도훈이 커피를 양손에 받아들고 물었다.
"되게 친해 보여서."
"내가? 아닌데?"
"신문 기사에 굳이 네 이름 넣어달라고 부탁한 걸 보면, 그 분이 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야?"
도훈이 커피를 건네며 물었다.
보미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니라 윤소미한테 관심이 있다고 봐야지."
"윤소미가 바로 너잖아."
"그게 아니라···. 예전에 우연히 내 핸드폰 사진첩에서 내 본 얼굴을 봤거든, 김형사님이. 누구냐고 꼬치꼬치 캐묻길래 얼버무리느라고 사촌 동생이라고 했단 말이야."
"근데?"
"갑자기 사촌 동생이 제주도 놀러 오면 소개팅 좀 시켜달라고 조르더라고."
"윤소미를?"
"응. 그러니까 김형사님이 나한테 평소 잘해주는 건, 내가 아니라 윤소미 때문이라고. 내가 같은 사람인 지 전혀 모를테니까."
"그랬구나. 섭섭했겠다."
"뭐가 섭섭해?"
"윤소미든 윤보미든 결국은 너잖아. 똑같은 사람인데 옆에 있어도 알아보지도 못하고 말이야."
"어쩔 수 없지. 나도 정체를 숨기고 살아야 하니까."
[윤보미양이 보기보다 눈치가 없군요.]
'그런 것 같아. 윤소미 소개팅 건이 친해지기 위한 핑계라는 것도 몰랐나 보군. 차라리 나한텐 잘 됐지.'
[왜요?]
'둘 다 아무 사이가 아니란 걸 확실히 알았으니까. 최소한 윤보미는 김형사에게 별로 깊은 감정은 아니었다는 걸.'
[만약 깊은 감정이면 주인님께서 공략을 중지하셨을까요?]
'물론 남의 여자가 더 탐나긴 한데···. 쓰읍.'
보미가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도훈이 말했다.
"그냥 드러내면 되잖아."
"뭘?"
"네 본 모습."
"미쳤어? 그러다 PK단에 걸리면 어쩌려고?"
"잠깐만 그대로 있어봐."
도훈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더니 보미의 얼굴에 씌워주었다. 빨대로 커피를 빨고 있던 보미는 당황해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갑자기 훅 들어오는 도훈 때문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무, 무슨."
"거 봐. 선글라스만 쓰고 있어도 누군지도 못 알아 보겠구먼."
"무슨 소리야 그게?"
"생각해 보라고. 제주도 사건은 무려 3년 전 벌어졌던 일이야.
네 얼굴을 직접 봤던 PK단은 모두 하늘나라로 떠났고. 그런 마당에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는 너를, 사진만 본 사람들이 무슨 수로 알아본다고 그래?"
"······."
"답답하면 가면 같은 건 벗어버려. 차까지 타고 돌아다니는데 누가 의심하겠어? 나랑 같이 다니면 관광객인가 보다 싶겠지."
"···정말 괜찮을까?"
실은 보미도 도훈과 함께 다니며 느꼈던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점점 못마땅하던 터였다. 실제 얼굴도 아니고, 분장한 얼굴 때문에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게 억울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도훈이 아까 식당에서 해준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너처럼 예쁜 경찰은 처음 봤다는 말. 보미는 도훈에게 예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괜찮지 그럼. 선글라스 쓰고 있으면 아무도 모를거야."
"흐음. 그래 그럼. 간만에 휴식이니까. 그래도 이건 너무 크니까 내걸 써야겠어."
보미가 선글라스를 벗더니 도훈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근데, 왼쪽에 무슨 숫자가 뜨던데 그건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