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 제주도 푸른 밤-66-
하지만 막상 도훈을 만나고도 보미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영화에서 본 대사만 자꾸 입안에 맴돌 뿐이었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그 한마디가 이렇게 꺼내기 어려울 줄이야.
보미가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도훈이 먼저 물었다.
"근데 무슨 일인데? 원래 지금 근무시간 아니야?"
"몰라. 출장 갔다가 복귀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지구대에서 연락와서는 현지퇴근 하라잖아."
"출근한지 얼마나 됐다고? 어쨌든 개이득이네."
"뭔 개이득?"
"월급 루팡 한 거잖아. 아이고, 세금 살살 녹는다."
도훈이 빈정거리자 보미가 곧바로 발끈했다.
"아니, 내가 무슨 일부러 연차를 낸 것도 아니고!"
"농담이야. 왜 날 갑자기 놀부로 만들어?"
"어?"
"왜 흥분하냐고. 흥부세요?"
"하-."
[주인님, 이건 정말 아닙니다.]
'아니야?'
[아재티 그만 내십시오. 듣는 제가 낯 뜨겁네요.]
도훈의 실없는 농담으로 어느정도 긴장이 풀린 보미가 천천히 서두를 꺼냈다.
"근데 너 어제 왜 늦게 잤어?"
"나? 왜?"
"아침에 늦게 일어 났잖아. 내 전화 받고 깬 거 아니야?"
"뭐, 휴가 왔는데 그럴 수도 있지."
"휴가라니?"
"PK단 추적 피하려고 대피한 건 맞는데, 명목상으론 휴가지. 나 대학생이잖아."
"대학생이 맘대로 출석 빠져도 돼?"
"핑계야 만들기 나름이지. 그리고 1~2주 출결 빠져봐야 졸업못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 날림이구나? 생긴 것처럼."
"내가 뭘?"
"너 솔직히 날라리지?"
차마 양아치라는 말은 할 수 없었던 보미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을 썼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묻고 싶은 건, 출결에 불성실한 도훈의 학업태도가 아니라 여자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부분이었다.
질문의 의도를 눈치챈 도훈이 장난스럽게 응수했다.
"아깝다. 염색하고 태닝까지 했으면 더 완벽했을 텐데."
"갑자기 웬 염색?"
"금발 태닝 양아치 하게 말이야. 금태양."
"와, 진짜!"
도훈의 대답을 들은 보미는 기가 막혔다.
'역시 양아치 새끼였어.'
하지만 도훈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근데 어떤 양아치가 단대 수석을 하지?"
"뭐라고?"
"믿기 어렵겠지만 난 보기보다 성실해. 지난 학기 단대 수석도 했거든."
"니가?"
"왜? 못 믿겠어?"
"보나마나 아이템 같은 걸로 치팅했겠지."
"응, 자기소개."
"뭐?"
"네가 그렇게 했다고 다른 선수도 똑같은 건 아니거든."
"장난해? 내가 언제? 난 내 노력으로 경찰대에 진학했고, 거기서도 순전히 내 노력만으로 졸업한 거야."
보미의 모든 말은 사실이었다. 임관 성적이 좋았다면 비선호 지역인 제주도 발령도 나지 않았을 테니까.
"나도 마찬가지야. 나를 왜 그렇게 삐딱하게 보는지 모르겠네?"
"그거야···."
-넌 남의 집에 오자마자 딸딸이 쳤잖아! 남의 옷에다 정액이나 싸지르고!
보미는 차마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자신도 어제 똑같은 짓을 몰래 했던 것이다. 누가 누구를 비난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보미는 특히 내로남불을 극혐했기 때문에 차마 제 얼굴에 침 뱉는 짓을 할 수 없었다.
'하아. 진짜 짜증나. 왜 저렇게 얄밉지?'
보미는 도훈이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것에 화가 났지만, 도저히 말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안 되겠어. 증거를 들이 밀어 꼼짝 못하게 만들지 않으면 계속 저렇게 변명만 할 거야.'
"뭐? 왜 말을 하다 말아?"
"···됐어. 너랑 말해봐야 내 입만 아프지."
"참, 근데 아침 일찍부터 경찰서는 왜 간거야?"
"뭐?"
"거기로 출장 갔다면서. 일 있어서 간 거 아니야? 혹시 어제 유괴범 일 관련인가?"
"증거품이 발견됐어."
"증거품?"
"네가 끊은 쇠사슬이랑 부서진 울타리 때문에. 누가봐도 수상하잖아."
"아···. 그래서 뭐라고 했어?"
"그냥 모른다고 했어. 어차피 못 찾을 거야."
"범인이 혹시 불면? 나에 대해서 진술하면 좀 복잡해지겠는데."
"지금까진 충격을 크게 먹었는지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어. 어차피 놈의 범죄는 증거가 너무 많아서 빠져나가기 어려울 거야."
"그건 그거고, 괜히 나에 대해 발설해서 PK단에 실마리를 주면 곤란한데. 흠."
보미도 사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증인도 없는 흉악범의 진술이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지는 모르겠지만 사건 기록에는 남을 수 밖에 없었다. 만약 경찰관계자 중 PK단의 끄나풀이 있다면, 자칫 꼬리를 밟힐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게 왜 생각도 안하고 일을 벌여?"
"그럼 죄도 없는 여자가 납치돼서 죽게 생겼는데, 그냥 모른 척지나갈까?"
"그 말이 아니라, 증거를 철저하게 인멸했었어야지."
"인멸이라니?"
"나라면 그냥 죽였어."
"뭐, 뭐라고?"
도훈은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플레이어는 살인을 저지르면 안되는 거 아니었던가?
상식이 무너지는 기분에 로시에게 물었다.
'로시. 저게 무슨 말이야? 플레이어가 민간인을 죽인다고? 고수 등급에 오르면 살인 면허라도 발급되는 건가?'
[그럴리가요.]
대답은 윤보미가 직접 했다.
"물론 이유 없이 그러면 안되지. 하지만 정당방위는 상관없으니까."
"아···."
보미의 말은 정당방위로 유도해, 상대를 입막음 한다는 소리였다. 도훈이 지난 번 박회장을 암살하려고 했던 일본인 칼잡이를 죽였을 때와 유사한 수법이었다.
"아무튼 이건은 내가 최대한 통제해 볼테니까, 너무 걱정마."
"어떻게 하려고?"
"입도 벙긋 못하게 만들거야. 암시 스킬로."
"암시?"
"그런게 있어. 나에겐 꼭 필요한 스킬이었는데 운 좋게 받았거든."
"호오. 듣던 중 다행이네."
도훈은 보미에게 자신과 비슷한 세뇌 스킬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고수에 올랐으니 만큼 스킬 구성은 자신보다 훨씬 많은게 당연했다.
"혹시 나한테도 쓰는 건 아니지?"
"내가 왜?"
"모르지. 날 맘대로 조종하려고?"
"웃기고 있네. 내가 왜 죄도 없는···. 아무튼 난 아무한테나 스킬 안 써."
"그렇다면 다행이고."
서로 티격태격하는 사이 어느새 두 사람은 식당에 도착했다. 보미는 밥을 먹고나서 꼭 말을 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어영부영 넘어가선 안 돼. 이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야.'
유명한 브런치 카페라 그런지 애매한 시간임에도 관광객으로 손님이 바글바글했다.
보미와 도훈이 가게에 들어가자 식당에 앉아있던 여자 손님들이 힐끔거리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도훈의 외모가 너무 훤칠하고 상대적으로 보미가 너무 딸리다보니 수근거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보미도 눈치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수근거림에 짜증이 올라왔다.
'도훈이 때문에 괜히 나만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겠네.'
자리를 잡은 도훈이 메뉴판을 고르는데 보미가 따지듯 물었다.
"넌 왜 맨 얼굴로 다녀?"
"왜?"
"쫓기고 있다는 사람이 그렇게 무방비로 다녀도 돼?"
"다행히 아직 얼굴을 들키지 않아서 말이야."
"참나. 누군 맨날 가면쓰고 일하는데."
"답답하면 벗어버리지 그래?"
"뭐, 뭘 벗어!"
"역용마스크 불편하지 않아? 시간 지나면 계속 뭉개지고. 난 답답해서 못 쓰겠던데."
"됐다. 밥이나 먹자."
주문을 하고 음식을 기다리는데 도훈이 바닷가 쪽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켰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대흉근과 넓은 어깨가 강조되는 자세에 보미가 자기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씨, 왜케 잘생겼어. 사람 신경쓰이게.'
"제주도도 나름 살만 하겠다. 경치도 좋고."
"······."
"응? 왜 말이 없어?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야, 아무것도."
보미는 도훈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볼 수 없었다.
만나면 어젯밤 일에 대해서 따지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었다.
'왜 이러지 진짜. 저 자식은 양아치에 변태일 뿐인데.'
보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도훈이 불쑥 말했다.
"너도 원래 얼굴은 참 예쁘던데."
"내, 내가?"
"뭘 모른 척이야? 사실 너처럼 예쁜 경찰은 살면서 처음 봤거든."
"무슨 소릴···."
뜬금없는 칭찬에 보미는 더더욱 몸둘 바를 몰랐다.
특히 자신이 도훈을 속으로 비난하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칭찬하자 괜히 미안한 마음까지 드는 것이었다.
"답답하긴 하겠다. 예쁜 얼굴 숨기고 살려면."
"별 소릴 다 듣겠네."
민망해진 보미가 자꾸 말을 돌리려고 했지만, 도훈은 먹잇감을 포착한 포식자처럼 계속 보미를 물고 늘어졌다.
"혹시 사귀는 사람은 있어?"
"내가?"
"응. 실례되는 질문인가?"
"그게 왜?"
"내가 어젯밤 생각을 해봤거든. 갑자기 묵고 있던 게스트 하우스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조급해져서 너네 집에 잠깐 머물기로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사귀는 사람이 있으면 실례가 될 것 같아서."
"아."
"물론 별일이야 없겠지만, 말이야."
"어, 없어."
보미는 자기도 모르게 당황하며 대답하고 말았다.
실은 거짓말이라도 해서 도훈을 쫓아낼 명분 삼을 수 있었지만, 어째서 인지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 그럼 당분간 너네 집에서 계속 지내도 돼?"
"···그, 그러거나 말거나."
'아,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보미는 스스로 대답해 놓고도 어이가 없었다.
김형사의 조언대로라면 오늘밤이라도 그를 쫓아내야 했으나, 반대로 더 머무를 수 있는 명분만 줘버린 셈이었다. 생각해도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방금 일부러 칭찬하신 거죠?]
'응. 당황할 것 같았거든.'
[어떻게 아셨습니까?]
'보미는 본 얼굴로 밖을 돌아다닌 적이 많이 없잖아. 주변 사람들도 늘 가면 쓴 얼굴만 기억할 테고. 일부러 못 생기게 감췄는데 저 얼굴에 대고 예쁘다고 하면 오히려 놀리는 셈이거든. 그러니 거의 못 들어봤을 것 같았어. 못 들어본 칭찬을 갑자기 들으면 사람은 당황할 수 밖에.'
[역시 주인님은 심리전의 달인이십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보미와 도훈은 묵묵히 식사를 이어갔다.
보미는 방금 전 자신이 한 실언을 후회하면서도 속으로 계속 생각했다.
'그래. 어젠 받아준다고 했다가 갑자기 쫓아내는 것도 명분이 부족해. 차라리 쫓아낼 증거를 찾는 쪽이 빠를 거야.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찾아서 꼭 내보내야지.'
보미가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도훈이 갑자기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 조개 맛있다."
"으, 응?"
"봉골레 파스타지 이거?"
도훈이 갑자기 젓가락으로 조개 껍질을 확 벌리며 말했다. 유난히 큰 홍합이 쩍 벌어지더니 내부의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 모습이 마치 여성의 음부와 너무 비슷했기 때문에 보미는 움찔 놀라고 말았다.
"으, 응."
"내가 조개 진짜 좋아하거든."
도훈이 젓가락으로 조개 속살을 꺼내들더니 와구와구 씹어 먹었다. 그 모습을 본 보미는 도훈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정신없이 눈을 굴렸다.
'뭐, 뭐지? 설마 날 희롱하는 건가? 아니면 진짜 맛있어서 저런 걸까?'
보미는 남자들이 흔히 은어로 여성의 성기를 조개에 빗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훈이 그것을 알고 자신에게 보란듯 조개를 벌린 뒤 꺼내 먹은 것인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아이씨, 대체 뭔데.'
조개를 맛있게 먹은 도훈이 이번엔 파스타 안에 든 베트남 고추를 집어 들며 말했다.
"이거 엄청 매운 거 알지?"
"뭐, 뭐?"
"크기는 작은 데 엄청 맵잖아. 역시 작은 고추가 맵다니까?"
그러면서 다시 한입.
조개니 고추니 하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도훈을 보며 보미의 속이 부글부글 끊었다.
'뭐지 진짜? 날 희롱하는 건가?'
"너도 먹어 볼래?"
"뭘?"
"내 고추."
"뭐, 뭐라고?'
보미가 흥분해 소리치자 젓가락을 내 밀던 도훈이 머쓱해 하면며 답했다.
"아니 난 그냥 파스타에 든 고추 한 번 먹어보라고 한 건데···, 갑자기 소리를."
"미, 미안.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보미가 민망해하며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화장실로 도망갔다. 그녀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도훈이 씩 웃었다.
[악취미군요, 주인님도 참.]
'왜? 혼자서 망상하는 거 엄청 웃기지 않아? 연상되는 단어만 몇개 던졌을 뿐인데 혼자 급발진 하는 거.'
[순진한 아가씨를 그렇게 놀려서 되겠습니까?]
'순진하긴. 지금도 머릿속에서 얼마나 야한 생각을 하길래 조개랑 고추 밖에 말 안했는데 저런 반응을 보이겠냐고.'
[같은 플레이어에 대해 예의를 차리시죠.]
'플레이어는 사람 아니냐? 쟤는 여자 아니야? 솔직히 플레이어라고 금욕하며 사는 게 더 잔인한 거야. 나야 클래스가 섹서라 그렇다 치고, 저렇게 예쁘고 매력있는 여자가 족쇄에 묶인 것처럼 독수공방 하는게 말이 되냐고.'
[그래서요?]
'이제부턴 꼭 공략 때문만은 아니야. 보미를 위해 진심으로 따줘야겠어. 섹스의 즐거움을 알려줘야지.' 도훈이 결심을 굳히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반면 도망치듯 화장실로 달려간 보미는 거울을 쳐다보며 스스로 뺨을 맞잡고 있었다.
'하아, 하아. 진짜 내가 왜 그러지? 내가 문제인 거야 도훈이가 문제인 거야?'
보미는 도훈이 자길 가지고 노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 망상에 사로잡혀 음탕한 상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그냥 아까 집에서 나가라고 할 걸 그랬어. 이제 어떡하지?'
갑작스러운 반차. 그리고 이어지는 주말.
무려 3일이라는 시간동안 도훈과 계속 붙어있어야 하는 보미는, 그 사이에 분명 무슨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