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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635화 (1,615/2,000)

1635. 제주도 푸른 밤-65-

김형사가 김칫국을 마시는 사이, 보미는 더더욱 마음 속이 복잡해졌다.

"으음, 김형사님 커피 잘 마셨어요. 상담도 고마웠고요."

"벌써 가시게요?"

"네, 본청에서 일 다 봤으니 바로 지구대로 복귀해야죠."

"에이, 출장 나온 김에 오늘은 그냥 농땡이 피우시죠? 너무 FM이신 거 아닙니까? 아니면 오후에 제가 반차라도 내서···."

"그럼 가볼게요."

김형사가 어떻게든 건수를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보미는 단호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었다. 정중히 목례를 하고 물러나는 윤 경위를 향해 김형사 역시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거 참, 융통성하고는···."

김형사는 돌아선 윤경위의 뒤태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사복 입은 뒤태만큼은 정말이지 끝내주는 여자였다.

'어우야. 몸매 하난 끝장난다 진짜. 그래, 차라리 일찍 보내주는 게 낫겠어. 경찰서에 오래 머물다가 다른 놈들이 괜히 눈독 들이면 곤란하니까.'

얼굴은 조금 아쉽지만, 나머지 모든 면에서 그녀는 감히 도내최고의 신붓감이라 할 수 있었다.

'뭐, 평생 마누라 얼굴만 뜯어 먹고 살 거야? 자고로 여자는 윤경위처럼 엉덩이 빵빵한 게 최고라니까? 애도 쑥쑥 잘 낳을 테고.'

중문 경찰서 아이돌로 소문난 경무과 미스김이나 아니면 최근돌싱이 되며 주가가 오른 정보과 최 경사 등 미모로 유명한 여경들이 많았지만, 김형사는 윤 경위야 말로 숨겨진 원석이자 저평가 우량주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다른 놈들이 채가기 전에 더 적극적으로 대시 해야겠어. 흐흐오늘 나한테 얄궂은 상담도 해오는 걸 보면, 윤 경위도 은근 나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단 말이지?'

김형사가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 있을 때 주차장에 도착한 윤보미는 자꾸 그가 해준 말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나 이렇게 건장하다. 너 생각하면서 딸딸이 쳤다. 광고하는 거라고요.

-다음에 한 번 더 그런 상황이 생기면 두 번째를 절대 못 참을 겁니다.

-그 남자랑 잘 거 아니면 다신 집에서 재우지 말라고요. 아니면 진짜 사고 납니다.

"···사고? 얼씨구. 내가? 도훈이랑?"

기가 찼는지 윤보미가 구시렁거렸다. 차에 오른 그녀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지 시동도 켜지 않고 계속 중얼거렸다.

"지금 장난해? 감히 나를 뭘로 보는 건데?"

운전대를 움켜쥔 그녀의 손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마나가 응축되는 것이었는데, 보미는 이를 통해 위험천만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여간 껄떡 대기만 해? 확 그냥 잘라버릴까 보다."

보미가 혼자서 씩씩거리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보미의 상관인 지구대장이었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어, 나야. 경찰서는 들렀어?

"네. 방금 용무 마치고 지구대로 복귀하는 길입니다."

-복귀? 복귀는 무슨 복귀? 그냥 현지 퇴근해.

"퇴근이라뇨?"

-내가 종일 출장으로 올렸으니까 일 다 봤으면 오늘은 그냥 쉬라는 소리야.

"아니 대장님 굳이···."

-그냥 상관이 쉬라면 옳다구나 하고 쉬어. 반차 냈다고 생각하고. 마침 내일부터 주말이니까 3일간 푹 쉬면 되겠네.

"괜찮습니다. 돌아가서 처리할 일들도 있고···."

-우리 지구대 인원들이 자네 한 명 없다고 안 돌아갈 만큼 무능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 줄 아나?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면 섭섭한데.

"아닙니다. 절대 그런 생각 안 했습니다."

-다른게 아니고, 윤 경위 최근에 이런저런 사건 담당하느라 고생 많이 했잖아. 젊은 사람이 맨날 일만해서 언제 연애하고 언제 시집 가려고 그래?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기왕 출장 나간 김에 하루 푹 쉬라는 소리야. 왜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 듣나? 머리도 좋은 사람이.

"경감님···."

-알았지? 내가 허락해준 거다? 이상. 통화끝.

"아니 그래도."

뚝-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보미는 갑작스러운 반차 명령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아니, 내가 쉰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그녀는 늘 업무를 최우선으로 살아온 경찰이었다. 요새 젊은 사람답지 않게 고지식하다는 소릴 들을 정도로 성실하고 묵묵히 맡은 일을 수행해왔다. 그런 그녀에게 갑작스러운 연가 명령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 무슨 반차를 오전 10시부터 쓰냐고···."

이 정도면 거의 출근과 동시에 퇴근이나 마찬가지.

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생겼음에도 윤보미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매일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면 집에서 맥주 한 캔 마시고 잠이자는 집순이였기 때문이었다.

'어쩌지? 저렇게까지 말했는데 지구대로 돌아가면 괜히 면박줄 것 같은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보미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도훈이 자신의 집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맞다. 도훈이 아직 집에 있을 텐데.'

도훈을 생각하자 또 다시 가슴 한켠이 욱신거렸다.

찌르르한 감정이 가슴에서 밑으로 내려가면서 몸이 후끈 거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우연히 본 발기된 잦이가 떠오르자, 보미가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으!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고. 진짜 돌아버리겠네."

보미도 자신이 남자랑 관련된 문제를 김형사에게 상담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도훈 때문에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도훈의 등장은 평화롭던 자신의 일상을 완전히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심란한 기분이 들게 했던 것이다.

도훈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이해하기 위해 비록 노총각이지만 연배 많은 김형사에게 창피를 무릅쓰고 물은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김형사의 진단이 도움이 되었느냐 하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오히려 도훈의 의도가 명확해지자 보미는 더욱 더 난감해졌다.

'그러니까 김형사님 말은, 여지를 주지 말라는 거잖아? 집에서도 재우지 말고.'

사실 도훈을 굳이 집에 들일 필요까진 없었다.

관광객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제주도에선, 외지인인 도훈이 구석진 팬션에 혼자 처박혀 있는다 해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능력만 잘 숨기고 있으면 PK단도 모를 것이고.

보미도 그 사실을 알았다.

다만 일부러 무시했을 뿐.

'안 되겠어. 이렇게 고민해 봐야 나만 골치 아플 뿐이야. 그냥 대놓고 물어보자. 나한테 왜 그러는 건지.'

갑작스러운 반차로 여유가 생긴 보미가 도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도훈이니? 깨어났어?"

-어.

"밥은."

-아직.

"음, 아직 안 먹었으면 같이 먹게 나와."

-지금? 지금 밥을 먹자고?

"어. 여기 브런치 카페 좋은 곳 많아."

-너 지금 근무시간 아니야? 점심 시간은 아직 멀었지 않나?

"그냥 나오라고. 데리러 가는데 20분 정도 걸릴 것 같아. 그 안에 준비되지?"

-알았어. 근데 진짜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은. 요 며칠 고생했다고 오늘 그냥 쉬래."

-아하. 오케이. 1층으로 내려가 있을게.

"그래."

드라이하게 통화를 마친 보미는 통화가 끊긴 걸 확인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제까진 분명 아무렇지 않았는데, 도훈의 목소리만 들어도 괜히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이었다.

'미치겠네, 진짜.'

보미는 혼란스러운 기분을 떨쳐버리기 위해 다짐하듯 말했다.

"그래. 그냥 확실히 결판을 짓자. 이렇게 쓸데없는 걸로 고민하는 시간이 아까워."

보미가 집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 * *

"으음. 뭐지? 아침부터 출근했던 걸 보면 비번은 아닌 것 같은데. 경찰 공무원은 원래 근퇴가 자유로운 건가?"

[혹시 보미 양이 눈치챈 건 아니겠죠?]

'눈치? 무슨 눈치?'

[어젯밤 주인님이 한 짓 말입니다.]

'내가 뭘 했다고?'

[기억 안 나십니까? 혼자 자위하시다 막판에 보미양 옷에다 싸지르셨잖습니까?]

'아, 그거?'

[아 그거라뇨? 잘못하면 그 일로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쫓겨나는게 문제가 아니라, 공략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상관없어.'

[상관없다고요? 공략이 걸려있는데도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정액을 들켰어도 상관없다고.'

[네?]

'보미는 내가 혼자 딸친 걸 알고 있었어. 지도 쳤으니까.'

[그건 그렇죠.]

'뭐냐고 물으면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돼. 혼자 딸쳤는데 정액이 거기까지 튄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지금 그게 할 소립니까? 보미 양은 처녀입니다. 그런 쪽으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란 뜻이죠. 그런 보미양의 옷에 정액을 싸질러 놓고선, 미안하다고 한마디로 해결이 될까요?]

'로시 네 말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려.'

[어떤 부분이요?]

'보미가 처녀라는 건 맞지. 근데 순진? 과년한 처녀는 수확기를 놓친 과일이랑 비슷해.'

[무슨 비유인지 모르겠습니다.]

'본래 과일은 썩기 직전에 가장 강렬한 향기를 뿜는단 말이지.'

[보미양이 썩었다고요?]

'아니. 무르익을 대로 익어서 누가 따주기만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야. 순진 같은 소리하고 있네. 어젯밤 어찌나 오나니를 빡세게 했는지, 나중엔 방바닥에서 쓰러져서 경련 일으키더라.'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귀로만 들어도 동작이 그려져.'

[벌써 그런 경지까지 오르셨단 말입니까?]

'나날이 발전하는 것 같아. 일신우일신하고 있지.'

[정말이지 점점 괴물이 되어가시는 군요.]

'암튼, 보미도 할 말 없을 거야. 그걸로 따지면 나도 똑같이 되받아칠 생각이거든.'

[어떻게요?]

'너도 그때 나랑 같이 딸치지 않았냐고.'

[헐! 그건 너무 노골적인 것 같은데요?]

'너 때문에 잠 못 자서 그랬다고. 소리가 밖으로 들리는 지도 몰랐냐면서.'

[흐음.]

'내가 장담하는 데, 보미는 지금 궁금해 미칠 지경일 거야. 아침에 방에 들어와서 몰래 내 잦이 만지는 거 봤지?'

[네.]

'보미는 성적호기심이 폭발한 스무살 여대생과 같은 느낌이라고. 진작 해치워야 했을 과업을, 나이 먹고 압축적으로 겪고 있는 셈이지.'

[그렇다면 주인님은 보미양의 호기심을 폭발시켜 공략을 진행할 생각이시군요.]

'그렇지. 궁금하지 않겠어? 직접 만져도 봤으니,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도 싶겠지.'

[흐음. 하지만 너무 낙관하시면 안 됩니다. 주인님 말마따나 보미양은 김관구 형사에게 관심이 있으니까요. 꼭 그 호기심의 해결을 주인님과 풀라는 법은 없을텐데요?]

'김형사? 에이, 그건 아니지.'

[왜요? 주인님이 김형사보다 잘 생겨서요?]

'이건 생김새의 문제가 아니야.'

[아님 김형사가 노총각이라서?]

'그런 게 아니고, 애초에 보미가 김형사에게 느낀 감정은 그냥 친한 동료로서 느끼는 일종의 뭐랄까···. 전우애?'

[네?]

'왜 회사 생활하다 보면 이성적으로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 생기는 법이거든.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이 모두 다 커플이 되거나 또는 결혼을 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지.

그냥 가까이 있으니까 친해지는 거고, 친하다 보니 이성적인 호감을 가지는 거지. 남녀사이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 아주 싫지만 않으면 조금씩 끌리는 게 정상이지. 근데 둘 중 한 명이라도 다른 이성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 순간 관계는 끝나는 거야. 연애 공백기를 메워주는 일종의 스페어 타이어 같은 존재랄까?'

[흐음. 설사 보미양은 그런 가벼운 마음이라고 쳐도, 김형사는 진심 일수도 있잖습니까?]

'그럴수도 있겠지. 아니, 그럴거라고 봐 나도. 내가 기자로 위장해서 접근했을 때 특별히 보미를 챙기는 모습을 보고 느꼈어.

이 남자는 보미를 좋아하는 구나.'

[그런데요?]

'미안하지만, 여자를 눕히는 것은 먼저 알게 된 순서랑은 아무 상관 없는 거거든. 그러니까 누구는 1년 째 짝사랑하며 바라만 보던 그림의 떡을, 어떤 놈은 하룻밤에 꼬셔서 진짜로 떡을 쳐버리는 거지.'

[너무 잔인합니다. 주인님은 그저 공략을 위한 과정일 뿐인데.]

'그런 것까지 모두 배려했다간, 나는 랭커는커녕 고수도 못 될걸. 다 각자만의 사정이 있는 법이야. 막말로 둘이 사귀는 사인데 억지로 끼어는 드는 것도 아니고, 고백도 안 한 관계라면 중간에 가로채 가도 할 말 없는 거지. 사랑은 타이밍이거든.'

[키야, 역시 주인님은 스스로를 합리화하는데는 일가견이 있으십니다.]

'당연하지. 바람둥이가 괜히 바람둥인 줄 알아? 내로남불의 사고방식이 아니고선,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족속들이라고.'

도훈은 최대한 멋을 부린 후 보미의 도착 시간에 맞춰 아파트 1층으로 내려갔다.

* * *

차는 딱 맞게 도착했다. 보미의 승용차는 제주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전기차 모델이었다.

"내려와 있었어?"

"방금."

보미는 어제보다 잘생겨진 도훈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확실히 미남은 미남이었다. 한번 보고 두 번 봐도 자꾸 시선이 끌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타. 브런치 먹으러 가게."

도훈이 보조석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보미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뒤에."

"뒤에 타라고?"

"응. 난 옆에 누가 앉으면 운전하는데 신경 쓰이거든."

물론 거짓말이었다. 도훈의 바로 옆에 앉아 있으면 감정을 들킬까 봐 일부러 뒤에 앉히려는 것이었다. 얄팍한 속셈을 알아챈 도훈은 피식 웃더니 군소리 없이 뒷좌석에 앉았다.

운전석 대각선에 자리한 도훈이 장난스럽게 농을 건넸다.

"운전해, 윤 기사."

"뭐라고?"

"원래 뒷자리가 상석이라잖아. 내가 뒤에 앉았으니 내가 더 높은 사람 아니야?"

"나랑 장난해?"

"그럼 앞에 탈게."

"됐어. 그냥 가."

보미가 급히 차량을 출발시켰다. 도훈을 만나면 최대한 침착하려고 했지만, 시작부터 휘둘리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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