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4. 제주도 푸른 밤-64-
"부녀자 납치사건 관련으로 수사부 협조 요청이 있어서요. 그리고 이쪽으로 바로 출근하느라 옷을 못 갈아입었어요. 근무복이 지구대에 있거든요."
"그러셨구나. 몰랐는데 사복도 잘 어울리시네요, 경위님."
김관구가 유난히 튀어나온 가슴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경찰복을 입을 때는 일부러 두 치수 크게 입어 최대한 몸매를 감췄지만, 현재 입은 상의는 몸에 딱 맞는 사이즈다 보니 유독 몸매가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보미는 김형사가 자신의 가슴을 훔쳐보는 것도 모르고 의례적인 덕담이겠거니 생각했다.
"시간 있으시면 커피라도 한 잔 하실래요?"
"커피요?"
"네, 제가 뽑아 드릴게요."
보미는 본청에 얼굴 도장이나 찍고 가라는 수사 반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도 자신을 챙겨주는 몇 안되는 상급자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던 보미는, 김형사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적당히 구색을 갖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상관없겠지? 어쨌든 김형사도 본청 소속이니까.'
"좋아요. 대신 비싼 거 마실 거예요?"
"하하, 얼마든지요."
두 사람은 자판기 커피 두 잔을 내려 경찰서 바깥 벤치에 앉았다.
"비싼 거 드신다더니 고작 자판기 커피가 뭡니까? 고작 500원짜리를."
"뭐 어때요? 전 여기 커피가 제일 맛있던데."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이어갔다.
"아까 수사과에서 나오는 것 같던데 무슨 일 있어요?"
"별건 아니고 현장에서 몇 가지 증거품이 발견되었는데 출처에 대해 물으시더라고요. 근데 저도 잘 모르는 내용이라."
보미는 괜히 엮이고 싶지 않은 생각에 적당히 얼버무렸다.
"아 맞다. 김형사 님이 기자한테 제 이름 넣어 달라고 청탁하셨다면서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 확인 전화가 왔더라고요. 기자한테"
"그랬구나. 근데 청탁은 아니죠. 엄연한 사실이잖아요. 본청에서 사건 브리핑하면서 윤 경위님 이름 쏙 빼고 발표할 때 얼마나 괘씸하던지."
"아니에요. 브리핑 내용이 맞아요. 실제로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최초 현장에 출동해서 범인 체포하고 인질을 구출한 건 윤 경위님이잖아요."
보미는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로 공치사를 받는 게 부담스러웠다. 애초 자신의 공을 과시하고 치적으로 삼는 타입도 아니었다.
경찰 조직내에서 승진은 딱히 관심이 없었으니까.
"아니에요. 진짜로 제가 한 건 없어요."
"없다뇨?"
"제가 현장에 도착했을 땐 누군가 먼저 와서 범인을 제압한 뒤였거든요. 굳이 제가 한 일이 있다면 피해자를 발견했다는 정도 죠."
"정말요? 그럼 누가···."
김형사는 머리를 긁적거리다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다 끝난 일인데 무슨 상관이에요. 수사과로 이관됐으니 그쪽에서 알아서 마무리하겠죠."
"그러니까요."
커피를 마시는 중에도 김형사는 자꾸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본능적인 부분이라 통제가 어려웠다.
'어휴, 오늘은 무슨 작정하고 나온 것 같네. 왜 저렇게 가슴이 커보인담?'
"근데 윤 경위님은 본청 넘어 오실 생각 없어요?"
"저요?"
"네. 조만간 인사발령 있을 거라던데, 지원이라도 한 번 해보시지."
"공무원이 발령 나면 시키는 대로 가는 거죠. 어디서 근무하든 저한테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래도 현장 근무 힘들지 않으세요? 여기로 오시면 내근직도 많으니까···."
대개 경찰대 출신은 현장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
민원인과 늘 부딪히고, 음주 단속이나 가정 폭력 사건, 혹은 주취자 관련 사고 등 온갖 잡다한 일들을 끊임없이 상대하다 보니 오히려 기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경찰대는 조직 내 고급 간부 육성이 목표였기 때문에, 소위 '펜 대' 굴리는 부처로 가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다들 어떻게든 승진에 유리하고 편한 곳으로 가려고 인맥까지 동원해 로비도 서슴지 않는 판국에, 굳이 일선 현장을 고집하는 윤 경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형사과로 보내주면 생각 좀 해 보고요."
"에이, 농담이시죠? 사내새끼들 땀 냄새 펄펄 나는 곳을 여경이 굳이 뭐하러···, 아 죄송합니다. 윤 경위님을 절대 무시해서한 말은 아닙니다."
실언한 김형사가 곧바로 사과했다. 방금 전 발언은 명백하게 윤경위를 비롯한 경찰서 내 여경들을 무시하는 뉘앙스였다.
아무래도 흉악범들을 주로 상대하는 형사과에선 여경의 존재를 껄끄럽게 생각했다.
파트너가 아니라 짐덩이를 얹은 느낌이라고.
무술 유단자니, 사격 우수자니 특채로 뽑힌 여형사들조차, 막상 피 튀기는 사건 현장에 몇 번 투입되다 보면 "오또케"를 연발하며 줄행랑을 치기 일쑤였다. 현장은 생각보다 위험했고, 사망사고가 연례 행사처럼 일어났다. 제아무리 겁 없던 형사도 배에 칼침 몇 방 맞다 보면 줄행랑 치는 게 다반사였다.
김형사는 여경이 전혀 필요 없다고 여기는 극단적인 남녀차별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굳이 형사과에서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여성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부서에서도 얼마든지 경찰 행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네, 뭐 알아요. 무슨 뜻인지."
윤 경위가 굳이 본청으로 옮기고 싶지 않은 이유도 김형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경찰들이 가진 편견에서 비롯했다. 이곳으로 옮긴다는 말은 현장과는 멀어진다는 뜻이었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미션과 업적을 완수하는 데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기분 상하신 거 아니죠?"
더구나 윤보미는 도훈처럼 신체적 능력이 월등히 뛰어난 편도 아니었다. 윤 경위와 친한 김형사는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보미가 형사과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전 괜찮아요. 김형사님이 저 생각해서 하시는 말씀인데요, 뭘."
"그래도 죄송합니다. 방금은 제가 주제넘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단지 경위님이 몸이라도 상하실까 봐···."
진심으로 사과하는 김형사의 말에 보미는 의아한 느낌을 받았다. 단순한 동료애나 개인적인 친분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스윗한 면이 있었다.
'뭐지? 김형사 님이 설마 날 여자로 보는 건가?'
연애 경험이 없던 보미는, 여전히 김형사가 자신에 대해 연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보미가 화제를 돌렸다.
"걱정 마요. 저 이런 걸로 안 삐지니까. 사촌 동생 소개팅은 꼭 시켜드릴게요."
"정말입니까?"
"그럼요. 약속했는데요. 저번에 저 도와주시다가 다치시기까지 했잖아요."
그 말에 김형사가 발끈했다.
"아니 그건 진짜 기습을 당해서···."
무기도 없는 상대에게 한방에 나가떨어졌다는 사실에 무척 자존심이 상했던 김형사였다. 더구나 호감을 가지고 있는 윤보미 앞에서 기절해 버렸던 터라 더욱 더 분개했다.
"하여간 다음에 다시 만나면 제가 진짜 제대로 응징해 줄 겁니다."
"뭘 또 응징까지. 사건도 잘 해결됐고 오해 때문에 생긴 일 같은데요."
"아닙니다. 남자로서 자존심이 있지. 저는 당하고는 못 사는 성미라서요."
하지만 이미 도훈의 능력을 두눈으로 확인한 보미로서는 그것이 무리한 일이란 걸 잘 알았다.
'어차피 상대도 안 될 텐데. 도훈이한테는···.'
도훈을 생각하자 보미는 불쑥 그의 커다란 잦이가 연상되었다.
아침에도 샤워할 때 그러더니 아랫도리가 욱신 거리는 것 같았다.
'아이참, 괜히 이상한 걸 봐 가지고.'
보미가 얼굴이 빨개지자 김형사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네?"
"아니 방금 귀가 엄청 빨개지셨거든요. 열 있으신거 아니죠?"
"아, 아니에요. 그냥···."
보미는 불쑥 도훈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같은 남자라면 김형사가 알 수 있지 않을까?
"저 김형사님."
"네, 말씀하세요."
"혹시 남자들은···. 아니 그러니까 이건 제 동기가 궁금해하길래 여쭙는 건데요."
"사건입니까?"
"네. 이걸 추행으로 봐야할지."
"추행 사건요?"
"그러니까 친하게 지내던 남자가 제 동기의 옷에다···."
"옷에다?"
"그 사정을···."
"네?"
보미는 스스로 말을 꺼내고도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다. 김형 사가 버릇처럼 취조하는 자세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경위님 동기분에게 어떤 남성분이 옷에다 사정을 했다는 말씀인가요?"
"네, 뭐 대충 그런 내용 같아요."
"혹시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
"어 그러니까, 동기가 벗어 놓은 상의에다가 남자가 사정을 해놨나 보더라고요. 몰래."
"으음···. 명백한 추행 같은데요? 혹시 두 사람이 자는 사인가요?"
"아, 아뇨!"
보미가 엉겁결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다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히 덧붙였다.
"그러니까, 둘이 사귀는 사이는 아니래요."
"사귀진 않아도 남녀 사이에 잘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래요?"
윤 경위가 놀라서 묻자 김형사도 민망했는지 변명했다.
"물론 제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개방적이니까요."
"네. 암튼 섹슈얼한 관계는 아니라고 했어요."
"한마디로 그냥 동료로서 친한 남녀사이인데, 몰래 친구분 옷에다 남자가 사정을 해놓고 갔다는 거군요."
"네."
"혹시 정액 검사를 해본 건가요?"
"예?"
"어떻게 용의자를 특정했는지가 궁금해서요. 몰래 싸고 갔다면 누군지 모르는 게 맞지 않나 싶은데."
"아···. 그러니까 그게···. 집에서···."
"네?"
"집에 불렀나 보더라고요."
"윤 경위님 친구분이 남자를 집에 불렀다고요?"
"···네."
"뭔가 이상한데요?"
"뭐가요?"
"왜 강간으로 고소 고발된 사건에서도 여자 측에서 남자를 집으로 불러들인 정황이 있으면 굉장히 불리해지거든요. 이걸 위력에 의한 강간이라고 봐야할지, 끝나고 마음이 바뀐 것인지."
"그, 그렇긴 한데···. 아무튼 그냥 그 남자의 심리가 궁금해서요. 어, 그러니까 제가 궁금하다는 게 아니고 제 친구가요. 저한테 물어보는데 저도 남자가 아니니까."
김형사는 평소와 달리 말이 길어지는 보미의 태도가 수상했지만, 민망한 주제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음, 사건 개요는 대강 숙지했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경위님 친구분이랑 그 남자랑 서로 가까운 사이인데."
"네."
"집에 불러 갔는데, 남자가 몰래 옷에다 정액을 싸놓았다는 뜻이죠?"
"네."
"둘이 섹스는 안 했고요."
"···어, 네."
"그건 확실한가요?"
"네?"
"두 사람 사이에 육체적인 관계가 없다는 거요."
"그게 중요한가요?"
"중요하죠. 둘이 이미 그런 관계라면 해석이 전혀 달라지거든요."
"음···. 제가 알기론 그런 관계는 아닌 것 같아요."
"뭐 일단 둘이 집으로 부를 만큼 친하긴 하지만, 아직까진 섹스를 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네. 그 남자는 대체 무슨 심리인가요?"
김형사가 종이컵에 든 커피를 단숨에 들이키더니 말했다.
"추행이라고 보기엔 좀 애매하고, 그냥 떡 각 보는 거네요."
"네, 네?"
"아이고, 단어 선택이 좀 그랬네요. 쉽게 말해 남자가 자자고 유혹하는 단계 같아요."
"네? 유혹이요?"
"그렇죠. 집까지 초대해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 그건 남자 입장에선 정말 미칠 노릇이거든요. 라면 먹고 가라고 해놓고 진짜로 라면만 먹인 경우랄까?"
"그, 그래요?"
"그쵸. 남자 쪽에선 당연히 그 이상을 기대했을 겁니다. 오히려 모텔보다 더 강한 사인이 될 수도 있거든요.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남자를 부른다는 건."
"아···."
"근데 여자가 막상 주질 않으니까, 굉장히 당혹스러운 거죠.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해소가 안 돼버리니까."
"네."
"그렇게···. 음, 자위를 했을··· 잉? 근데 어떻게 그게 된 거 죠?"
"네?"
"아니 친구분 집에서 어떻게 자위를 할 수가 있었냐는 거죠. 집을 비우지 않고서야."
"아, 그게···. 자고 가라고 했나보더라고요."
"네?"
이번엔 김형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여자 집에서 심지어 자기까지 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어 그게···. 그러니까 회식에서 술을 마셨는데, 술이 취해서 그냥 집에서 자고 가라고. 바, 방은 따로 썼고요."
"이제 알겠네!"
"뭔데요?"
"여자가 끝까지 안주니까 남자가 무력 시위 한 거네요."
"무력 시위요?"
"나 이렇게 건장하다. 너 생각하면서 딸딸이 쳤다. 광고하는 거라고요."
"그, 그게 무슨 뜻이에요?"
"뭐겠어요. 이번엔 그냥 참고 넘어가지만 다음엔 꼭 달라는 거 죠."
"다, 다음에요?"
"어차피 친구분도 전혀 마음이 없는데, 술 취한 남자를 집으로 불렀겠어요?"
"아니, 취해서 운전을 못 하니까."
"대리기사는 뻘로 있답니까? 그 동넨 모텔도 없어요? 그건 다 핑계죠."
"피, 핑계구나."
"제 생각에 여자분도 조금은 생각이 있었는데, 막상 상황이 닥치니까 겁이 났던 모양이네요. 그래도 남자가 신사구먼. 솔직히 덮쳤어도 할말 없긴 한데, 자위 정도로 끝냈으니까요."
"그런 거예요?"
"만약 다음에 한 번 더 그런 상황이 생기면 두 번째는 절대 못참을 겁니다. 남자 입장에서 자길 가지고 논 것 같거든요. 그래서 한 번 보여준 거예요."
"보여주다뇨?"
"다음에 또 집으로 부르게 되면 직접 해버릴거라고요."
"지, 직접. 으음."
"친구분한테 그렇게 말해주세요. 그 남자랑 잘 거 아니면 다신 집에서 재우지 말라고요. 아니면 진짜 사고 납니다."
"그냥 잠만 잘 수도 있지 않아요? 왜 꼭···."
"에이, 경위님이 순진해서 잘 모르시는 거 같은데 남녀 사이에 그냥 잠만 자는 게 어딨어요? 남자가 고자거나, 여자가 진짜로 아니면 모를까. 아니지, 관심 없었으면 애초에 집으로 부르지도 않았겠네. 여튼, 이건 추행이라고 보긴 애매해요."
"그런가요?"
"당연하죠."
보미가 심각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고, 김형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여자가 남자에게 이런 성적인 주제로 얘기를 한다는 건 관심의 반증이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윤 경위가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할 줄이야. 어쩌면 앞으로 잘 될지도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