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3. 제주도 푸른 밤-63-
* * *
주차장에 도착한 보미는 차에 올라 곧바로 역용마스크를 착용했다. 그녀는 늘 출근 길을 이용해 변장을 했는데, 바뀐 얼굴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는데 걸리는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중문 경찰서 방향으로 향해가던 그녀는 문득, 근무복이 지구대사물함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맞다. 근무복이 거기 있는데.'
그러나 이미 경찰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U턴으로 차를 돌려 들르자니 너무 귀찮았다.
'에이, 형사들은 맨날 사복 차림으로 잘만 다니는데, 복장 가지고 지적하진 않겠지?'
사복 출근을 마음먹고 운전을 하던 보미는 문득 겨드랑이 쪽에서 알 수 없는 축축함을 느꼈다.
처음에는 젖은 머리를 제대로 안 말려 옷이 젖었겠거니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적인 물기 같지 않았다. 뭔가 진득한 질감의 용액으로 보였다.
'이게 뭐지?'
잠시 신호대기에 걸린 보미가 겨드랑이 부근을 쓱 훔쳤다.
조신하지 못한 행동이지만, 차 안에 혼자 있으니 눈치 볼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손바닥에 끈적하고 투명한 액체가 묻어 나왔다.
"···어? 설마 가래침인가?"
살면서 한 번도 정액을 본 적 없는 보미는 처음 그것을 가래침으로 오해했다.
"근데 겨드랑이에 왜 가래침이 묻었지?"
하지만 아무리 봐도 가래침과는 달랐다. 누리끼리한 색상이 아닌 우윳빛의 허연 색상이었다. 끈적이는 느낌은 비슷했지만, 좀 더 찰진 느낌이었다. 굳이 비유한다면 전분이 많이 들어간 탕수육소스 같은?
"이게 대체 뭐지?"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보미는 급기야 손바닥을 코에 가져가 킁킁거렸다. 냄새를 맡아보면 그것이 침인지, 소스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엑!"
보미의 손바닥에선 평생 맡아 본 적 없는 냄새가 올라왔다. 약간은 비릿하면서 알싸한 냄새는 후각을 일순 마비시킬 만큼 강렬했다.
"뭐, 뭔데?"
보통 때라면 지저분한 게 묻었다고 질색을 했을 테지만, 보미는 자기도 모르게 한 번 더 코를 킁킁대며 다시 냄새를 맡았다. 본능적으로 끌리는 냄새를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으윽!"
다시 코를 찌르는 알싸한 냄새. 후각을 타고 들어온 냄새가 뇌를 뒤흔드는 것 같았다.
"아씨, 어디서 칠칠치 못하게 이딴 걸 묻혀 온 거야?"
보미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급히 차량 콘솔 박스를 열어 물티슈를 꺼냈다. 물티슈로 깨끗이 닦아 냈음에도 찝찝함이 가시질 않았다.
'이상하네? 분명 저번에 빨았던 옷 같은데?'
보미는 요리는 하지 않았지만, 빨래는 열심히 하는 편이었다.
특히 여자치곤 옷이 몇 벌 없다보니 3일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빨래를 돌려야 로테이션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닌가? 내가 착각했나?'
세탁기를 돌렸다면 이물질이 묻어 나올 리 없었다. 더욱이 한번 입었던 티를 옷걸이에 걸어놓고 다시 입는 타입도 아니었기 때문에 도무지 지금 묻어나온 물질의 출처를 알 길이 없었다.
빵빵-!
보미가 물티슈로 손을 닦는 사이 신호가 바뀌었는지 뒤차가 경적을 울렸다.
"가, 가요!"
들리지도 않을 대답을 혼자 내뱉으며 보미가 차를 출발시켰다.
운전 중에도 계속 그녀는 이물질의 출처를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 아파트에서 나오다가 새똥을 맞은 것도 아닐 테고, 음식물 냄새는 절대 아닌데.'
보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 때 벽에 기대면서 묻었나 의심도 해봤지만, 만약 그렇다면 겨드랑이 안 쪽이 아니라 어깨나 등에 묻었어야 했다.
'가만, 그럼 옷 방에서 묻은 거야?'
출처를 따지던 보미는 마침내 이물질이 옷 방에서 오염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마침 자신의 옷 방에 어제부터 동거를 시작한 룸메이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도훈이?'
도훈을 떠올리자 불쑥 아침에 본 발기된 잦이가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조건반사처럼 도훈=잦이로 자동 연상되었다.
"아악! 미쳤나 봐 진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데?"
혼자서 차를 타고 가는 길이었기에 보미는 끊임 없이 혼잣말을 했다.
"이게 다 도훈이 그 자식 때문이잖아! 괜히 발가벗고 자가지고 사람 심란하게!"
정작 가까이서 관찰하고 만진 것은 본인이었지만, 오히려 도훈에게 책임 전가를 하는 중이었다.
"잠깐, 근데 아까 묻어 있던 게 정말 도훈이 짓이라면···."
보미의 머릿속으로 기억의 파편들이 조합되기 시작했다.
밤늦게 희미하게 들려온 야동 소리.
그리고 리드미컬하게 이어지던 탁탁탁 하는 진동음.
과거 영상에서 보던 부카케맨들의 피날레.
"서, 설마!"
뭔가를 떠올린 보미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아닐거야. 에이, 설마. 진짜로 미친놈도 아니고."
보미는 현실을 부정하려 했지만, 모든 증거는 단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자위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그걸 내 옷에다가 왜!"
보미는 결국 못 참고 또다시 손바닥을 가져와 킁킁거렸다. 물티슈로 한 번 닦아 냈음에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밤꽃 냄새가 알싸하게 퍼져나왔다.
"아이씨, 진짜 이게 뭐냐고!"
그러고 보니 언젠가 한 번 들은 것 같았다. 남자의 정액에선 밤꽃 냄새가 나더라는 이야기를.
화가 난 보미는 곧바로 핸드폰을 들었다. 도훈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 따지려던 보미가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 멈칫했다.
'근데 이걸 뭐라고 따지지?'
부끄러운 일이었다.
처녀의 입에서 먼저 꺼내기가 쑥스럽고 창피했다. 왜 내 옷에다 정액을 싸질렀느냐고 따지는 건 용기가 필요했다.
'아니야. 지나치게 흥분했어. 할 말을 미리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야지.'
도훈이 도대체 무슨 의도를 가지고 그랬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단순히 짓궂은 장난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변태 같은 거 아니야? 왜 남의 옷에다 그걸···.'
장난이라고 하기엔 도를 넘는 행동이었다.
남사친, 아니 설사 남자친구라 할지라도 그런 짓은 감히 못할 짓이었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모종의 시그널 같은 건가?'
보미는 평생 연애를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오죽하면 함께 공조 수사를 하던 노총각 김형사가 피곤해 보인다며 뽑아준 자판기 커피에 감동해 호감을 느꼈을 정도였다.
따라서 남자들이 정액을 싸서 흔적을 남겨두는 행위가 무슨 의도를 품고 있는지 알길이 없었다.
'김형사님한테 여쭤볼까?'
어차피 경찰서에 도착하면 김형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미는 다른 남자도 아닌 김형사에게 그런 것을 묻는 건 왠지 실례가 될 것 같았다.
'···아니야. 괜히 오해할지 모르니까. 도훈이가 우리 집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나면 내 입장만 곤란해질테고.'
하지만 보미는 김형사에게 도훈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이유가,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도훈을 만난 이후로 점점 김형사에 대한 감정이 식고 있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 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보미는 이내 김형사 생각을 지워버렸다.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경찰서에 도착한 보미는 여자 화장실부터 찾았다. 겨드랑이에 아직 묻어 있는 도훈의 정액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도훈이 이 나쁜 자식. 퇴근하기만 해. 가만 안둘 줄 알아."
세면대 앞에선 보미가 씩씩거리며 겨드랑이 쪽을 닦아냈다.
* * *
한편 보미가 출근한 이후 샤워를 마친 도훈은 보미의 집 구석구석을 탐색했다. 혹시나 남아있을지 모를 플레이어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는데, 예상대로 아무것도 나오질 않았다.
어제 들어올 때부터 느꼈던 사실이지만, 보미의 집 상태는 언제 든 도망갈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였다. 가전이라고는 꼴랑 세탁기와 건조기, 그리고 냉장고와 티비 뿐이고, 개인 짐도 이불과 옷가지가 전부였다.
'언제든 튈 생각이었구나 보미는.'
[네?]
'PK단에 발각되는 즉시 미련 없이 떠날 생각이었던 것 같아.
그러니 3년이나 산 관사 아파트에 물건이 아무것도 없는 거겠지.
아이템은 당연히 없고.'
[일전에 습격을 받았던 영향인가 보군요.]
'그렇지. 하마터면 골로 갈 뻔했으니까. 여전히 놈들의 잔당이 제주도에서 돌아다닐테고.'
[주인님도 조심하십시오. 어제 일도 그렇고, 너무 힘을 숨기지 않고 막 쓰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제는 유괴범 새끼 잡느라고 어쩔 수 없었잖아.'
[그래도 늘 경계하셔야 합니다. PK단은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존재 하니까요.]
'알았어. 새겨들을게.'
[그나저나 보미양 공략은 차질 없으시겠습니까? 오늘 아침에 보니 엄청 과감하게 행동하던데요.]
'계속 자극을 줘봐야지. 잘만하면 오늘밤 공략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공략이 끝나면 내 편으로 끌어들이기 더 쉬워 지겠지.'
[그렇다면 보미양의 공략이 곧 동료 영입 활동이 될 수도 있는 거군요.]
'그렇다고 봐야지? 살을 비빈 남녀는 급속도로 친해질 수 밖에 없으니.'
도훈이 씨익 웃었다.
* * *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품인데 좀 이상한 부분이 있어서 말이야."
수사반장과 면담을 하게 된 보미 앞에 커다란 쇠사슬이 놓여 있었다. 모두 두 개였는데, 한 쪽 끝이 녹아내린 것처럼 변형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게 뭐죠?"
"자네도 전혀 모르겠나? 보고서에는 자네가 최초로 현장에 도착했다고 하던데."
"맞습니다. 다만 제가 도착했을 땐 범인이 이미 부상을 당한 상태였고, 실종자 구출이 먼저였기 때문에 창고로 곧바로 진입했었습니다."
"흐음. 그래?"
수사반장은 턱수염이 까슬하게 난 턱을 손가락으로 긁어댔다.
궁금증이 생겼을 때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었다.
"실은 이 사건은 좀 이상한 부분이 있네."
"어떤 말씀이신지."
"저기 보이는 끊어진 쇠사슬 말고도, 목장 울타리가 포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서져 있다든가, 범인이 정신적 충격을 받아 진술을 거부한다든가 하는 것도."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선 보고서 작성할 때 진술했다시피 아는 바가 없습니다."
"아니야. 분명히 뭔가 있어. 범인은 경찰의 손으로 잡은 게 아닐세. 매스컴에서 하도 들러붙어서 대외적으로야 우리 공으로 돌렸지만, 우리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해서 범인을 잡은 사람이 분명 있단 말이지."
"저도 일정 부분 동의합니다."
"그런데 최초로 현장에 도착한 자네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거고."
"네, 그렇습니다."
보미는 최대한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며 감정을 숨겼다. 수사반장 입장에선 현장에 남아있는 도훈의 흔적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이를 밝혔다간 자칫 PK단에 빌미를 줄 수 있으므로 철저하게 모른척 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다른 경찰이 아닌 보미가 사건 현장에 먼저 출동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도훈을 먼저 발견했다면 이 사건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번졌을 테니까.
"흐음. 자네도 모른다면 어쩔 수 없지. 그냥 증거품이 좀 이상해서 말이야."
수사 반장은 책상 위에 놓인 쇠사슬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체인은 여자를 가둔 창고를 시건하는 용도였다는 군. 범인이 여자가 다른 곳으로 도망갈 수 없도록 최대한 두꺼운 것으로 칭칭 감아 놨던 거지. 도대체 누가 이걸 이렇게 끊었을까?"
"······."
"참 이상하지 않나? 절단기로 자른 것도 아니고, 뜨거운 것으로 녹여버린 것 같단 말이지."
"저에게 더 하실 말씀 없으면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이런, 내가 너무 심취했나 보구먼. 미안하게 됐네. 지구대 일도 바쁠텐데 불러내서."
"아닙니다."
"출장 나온 김에 본청에 얼굴도장이나 찍고 가게나."
"얼굴 도장이요?"
수사 반장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보미에게 말했다.
"경찰대 출신이 언제까지 시골 지구대에만 처박혀 있으려고?
얼른 본청 들어와서 자리 잡아야지. 자네 발령 동기들은 죄다 오고 싶어 난린데, 자네만 관심이 없는 거 같아."
"아닙니다, 반장님."
"내 자네를 아껴서 하는 말이야. 실력도 있겠다, 실적도 좋겠다 그만하면 일선 현장 근무 경험은 충분히 쌓은 것 같네."
"새겨 듣겠습니다."
"거 원참, 고지식해서는. 혹시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는 건가?"
"···네?"
침착함을 유지하던 보미가 처음으로 눈빛이 흔들렸다.
숨겨둔 애인이라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도훈을 떠올렸던 것이다.
"뭘 그렇게 놀라나? 진짜로 있는 거야? 누군데?"
"아, 아닙니다. 무슨···."
"내가 상급자가 아닌 선배로서 알려주는데, 사내 연애할 거면 절대 들키지 말게나. 결혼까지 갈 거 아니면 말이야. 괜히 소문만 따라다니고···. 안 좋아. 특히 여자들한텐."
"네."
"그래. 내가 너무 시간 많이 뺏었구먼. 자네 서장한테는 안부 전해주고."
"네, 알겠습니다."
보미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밖으로 나갔다. 수사 반장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참, 윤 경위는 다 좋은데 얼굴이 아쉽단 말이지. 얼굴이 조금만 예뻤어도 선 자리가 줄을 섰을텐데 말이야. 안 됐어."
밖으로 나온 윤 경위는 벽에 기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 다 끝났나? 도훈이 이 자식은 여기서도 말썽이네. 진짜."
"어? 윤 경위님 아니세요?"
그때 항공 점퍼를 입은 사내 하나가 보미를 향해 인사했다. 그는 얼마 전 도훈에게 숄더차징을 당해 기절했던, 김관구 형사였다.
"안녕하세요, 김형사님."
"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로? 근데 웬 사복 차림?"
반갑게 자신을 맞이하는 김형사가 갑자기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보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