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9. 제주도 푸른 밤-59-
[술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시면서 굳이 왜 반주를 곁들이십니까?]
'나는 싫어해도, 술취한 여자는 또 좋거든.'
[뭔가 모순적인데요?]
'취한 여자는 흐트러지기 쉽지. 내가 볼때 보미는 맨정신으론 공략하기 어려운 타입이야. 이럴 땐 술의 힘이라도 빌려야지.'
[아이템을 못 쓰니 아예 자체 조달 하시는 셈이군요.]
'근데 나 한가지 궁금한게 있어.'
[네, 하문하십시오.]
'원래 플레이어 끼리는 스킬이나 아이템이 완전 먹통인 거야?'
[그럴리가요. 일부 스킬은 여전히 적용이 되고, 아이템도 얼마든지 쓸 수 있습니다.]
'엇? 정말? 그럼 왜 나는···.'
[다만 플레이어 업적 공략에 있어 스킬 및 아이템 사용불가가 조건이기 때문에 어차피 맨몸으로 공략하셔야 하는 건 똑같은 상황이란 거죠.]
'아···. 맞다. 공략 때문이었지? 그럼 공략만 아니면 얼마든지 사용해도 되는 거였네?'
[가능은 한데 특정 아이템에 대해 면역이거나 일부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부반응이라면?'
[신체에 위해가 가해지거나, 위기에 처하게 되면 발동하는 패시브 스킬 때문에요. 주인님의 반탄강기도 일종의 스킬 방어막 이기도 한 것처럼.]
'호오.' 쉽게 말해 어떤 아이템은 허용이 되고, 어떤 아이템은 보미가 가진 패시브 스킬에 막힐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아이템을 사용하는 순간 업적은 실패하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모두 봉인해야 했다.
"짠"
"치어스."
매콤한 쭈꾸미 볶음을 먹으며 시원하게 맥주를 곁들이자 금방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역시 여자를 꼬시려면 함께 저녁 식사를 해야 한다는 말이 딱 맞는것 같다.
식사를 하게 되면 공복이 해소되면서 포만감이 생긴다. 포만감은 기분을 좋게하고, 함께 식사한 사람에게 긍정적인 감정이 연합된다. 즉, 두 개의 다른 사건이 하나로 결합되면서 함께 있어 기분이 좋아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여기 맛있지 않아? 좀 맵긴 하지만."
"그렇네. 보미 너 은근히 미식가 기질이 있구나?"
"어떻게 알았어?"
"응?"
무심코 던진 말을 보미가 받았다.
"실은 제주도 내려 와서 다른 건 다 별로였는데 맛집 투어 다니는 건 엄청 행복했거든."
"정말?"
"응. 나 먹는 거 엄청 좋아해. 특히 맛있는 거."
"나도 맛집 투어 좋아하는데."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진짜야."
[주인님이 맛집을요? 배고프면 아무거나 집어 먹는 스타일아니셨습니까?]
'그 맛집 말고.'
[그럼요?]
'좆집 말이야.'
[아, 아니.]
'좋은 좆집은 훌륭한 맛집이기도 하니까.'
[역시 사상이 불순하니 별 소릴 다하시는 군요.]
"그럼 제주도 와서 어디어디 가봤어? 참 여기 온지 얼마나 됐다고 했나?"
"오늘로 이틀 째 밤이야."
"아, 어제 막 도착했구나? 다음에 그럼 내가 맛집 소개시켜 줄까?"
"좋지."
'제일 맛있는 건 바로 눈 앞에 있긴 하지만.' 보미는 자기가 다녀본 맛집 중에 손에 꼽는 몇몇 장소를 신이 나서 소개했다. 그러다 문득 표정을 굳히더니 말을 멈추었다.
"아, 맞다 거긴 가지마."
"응?"
"방금 말한 오겹살집."
"왜? 다시 생각해보니 별로야?"
"아니. 고기도 맛있고, 서비스도 최고였지."
"근데?"
"내가 3년전 아무 생각없이 돌아 다니다가 PK단이랑 만난 곳이 거기 근처거든."
"어? 정말?"
"응. 경찰대 졸업하면 임관 이후 발령 받기 전 잠깐 휴식기가 있어. 경찰대생들은 그때가 거의 유일하게 한가한 시즌이야. 초임발령 받고 나면 업무 익히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으니까. 거의 몇 년 동안 여행은 꿈도 못꾸지."
"그렇구나."
"그때 해외를 나갈까 하다가 여권 갱신이 늦어가지고 그냥 제 주도를 왔단 말이야. 앞으로 몇년간 생활해야 할 곳이니 지리도 익히고 맛집 탐방 좀 미리 할 겸."
"응."
"그리고 경찰대 다닐 때 4년 내내 위장을 하고 다녔더니, 내 본래 얼굴로 여행을 다니고 싶더라고. 그래서 엄청 편하게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녔어."
"근데 어쩌다 걸린 거야? 아무리 놈들이라도 선수를 보자마자 알아내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닐텐데."
"그게 나도 모르게 능력을 써버렸거든."
"능력을? 어쩌다?"
"상황이 좀 그랬어. 고기를 맛있게 먹고 나와서 입가심을 하려고 커피숍으로 향하는데, 어린애가 차도를 무단 횡단 하는 거야.
반대쪽에선 차가 막 달려오고 있고."
"아."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마법으로 바람 장막을 써버렸지 뭐야."
"바람 장막? 그게 뭔데?"
"윈드 실드라는 스킬인데 순간적으로 전방에 강력한 배리어를 치는 거야. 어지간한 물리력으론 관통 못 시키는."
"뭐, 대충 그렇다 쳐."
"그렇게 아이를 구했는데, 하필 그 장면을 PK단 놈들에게 딱 들켜버린 거지. 윈드 쉴드는 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 무형의 막이라서 다른 시민들은 차가 갑자기 급제동을 걸었다고 착각했을 거야."
"하지만 PK단은 보자마 마법이란 걸 눈치 챘구나."
"어. 검은 정장을 입은 두 명이 나에게 접근하더라고."
"그래서 도망친거야?"
"처음엔 죽일 생각까진 없었어. 근데 너도 알다시피 놈들은 우리와 적대적인 단체잖아. 강제로 차에 태우려는 놈들을 피해서 달아나는데, 놈들이 끝까지 쫓아오더라고."
"흐음."
"결국 인적 드문 곳까지 도망쳤는데, 한 놈이 갑자기 지원요청을 할 것처럼 전화기를 드는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뎅겅 썰어버렸네?"
나는 일부러 심각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장난스럽게 손날로 목을 쓱 그었다. 보미가 그 모습을 보더니 의아해하며 물었다.
"너 그걸 어떻게 알았어?"
"보고서 봤다고 했잖아. 대부분의 시체가 두 동강이 나 있다고 해서."
"아···. 그땐 너무 다급해서 어쩔 수 없었어. 놈들이 더 몰려왔다간 붙잡힐 상황이었거든. 그렇게 도망치고 또 도망치는데, 어떻게 알고 놈들이 계속 따라 붙더라고."
"은근히 정보력이 뛰어난 놈들이야. 스킬을 사용했을수도 있고."
"스킬이라니?"
"놈들도 스킬을 쓸 수 있잖아. 우리랑은 다르지만. 추적에 써먹을 수 있는 스킬을 가진 놈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렇구나. 난 몸에 추적기라도 달린 줄 알고 엄청 쫄았었잖아.
암튼 그렇게 어찌어찌 우도까지 도망쳤는데···. 암튼, 거기서 겨우 따돌렸어."
"부상은?"
"어?"
"아니 놈들의 보고서에는 부상을 당해 바닷가로 추락했다고 기록되어 있었거든."
"정말? 거기까지 조사가 되어 있었어? 대단하네."
"응. 그 뒤론 종적을 못 찾은 걸로 나와."
"그랬구나. 마지막에 한 놈이 투척스킬을 가지고 있었나봐. 단검을 나한테 던졌는데 여기 어깨 죽지에 그대로 박혔어."
보미가 자연스럽게 티를 밑으로 내리더니 흉터를 드러냈다.
"보이지? 그때 정말 죽는 줄 알았거든. 등 뒤로 칼날이 뚫고 나왔는데, 병원에서 치료도 못하는 상황이라···."
하지만 거기서부터 보미의 설명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쇄골 아래 흉터를 내보이기 위해 티를 밑으로 늘어 뜨리자, 그녀의 가슴골이 훤히 비쳤기 때문이었다.
'꿀꺽-. 어우야, 가슴 골 실한 거 보소?'
[보미양이 살짝 취한것 같은데요. 주인님이 가슴을 대놓고 보는데도 눈치를 못채는 군요.]
'은근히 허당기가 있다니까? 되게 빈틈없는 척 하면서도 알고 보면 푼수 같은?'
"엄청 아팠겠네. 병원에서 치료를 못 받았으면 어떻게 치료했어?"
나는 일부러 노출된 슴골을 못본 척 하면 계속 물었다.
"급한대로 아이템으로 응급처지를 했어. 금창약이라고 알아?"
"금창약이 뭔데?"
"마켓에서 파는 치료제가 있어. 어지간한 상처는 다 낫게 해주는 건데, 하필 단검에 독이 발라져 있었나 보더라고."
"독?"
"어. 포이즌 대거라나 뭐래나. 그것때문에 한동안 마나가 응집이 안되서 엄청 고생했어. 1년을 꼬박 요양하고 나서야 독기가 빠지더라고."
"힘들겠었네."
"도훈이 넌? 넌 PK단 만난 적 없어? 아, 맞다. 아직 노출이 안됐다 그랬나?"
미호를 만나긴 했지만 정식 PK단 단원은 아니니 딱히 틀린 소린 아니었다. 게다가 미호를 만났다고 하면 괜히 보미가 겁을 먹을 까봐 신중해야 했다.
"응. 운 좋게 아직은."
"그럼 놈들의 보고서는 어떻게 입수한 거야?"
두 볼이 살짝 발그래진 보미가 나에게 물었다.
"보고서?"
"나에 대한 보고서를 입수했다고 했잖아. PK단에서 작성한."
"아, 그게···."
말을 꾸며대다 보니 다소 모순이 있었다.
보미에 대한 정보는 PK단에서 입수한 보고서를 보고 알았다고 했는데, 정작 나는 PK단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것이다.
"혹시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
"아니야. 실은 내가 전혀 안 그렇게 생겼지만 보기보다 실력 좋은 해커거든."
"해커? 너 컴퓨터 잘해?"
"어. 어려서부터 그 쪽에 관심이 많았어."
"이야, 완전히 운동만 하는 사람처럼 생겼는데··· 의외네."
"암튼 인터넷으로 우연히 PK단에 대한 동향을 파악하고 있다가 아카이브를 모아놓은 오래된 서버에서 한 장의 보고서를 찾았어."
"그게 나에 대한 거였구나?"
"응. PK단 놈들도 규모가 상당하잖아. 아마도 파일을 전송하던 중 실수로 웹사이트에 흔적이 남아버렸던 모양이야."
"대단하다. 다른 건 더 없었어?"
"그것 말고는 대부분 암호화된 파일이었어."
"너 해커라면서? 열어 볼 순 없어?"
"음, 너 비트코인이라고 들어봤지?"
"가상 화폐 말이야?"
"응. 비트코인에 사용된 알고리즘으로 암호화가 이루어진 파일이더라고. 현재의 컴퓨팅 기술로는 절대 해제가 안된다는 소리지.
블럭이 체인처럼 연결되어 있거든."
"무슨 말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충은 알아 들었어. 우리 서에도 사이버 수사대가 있어서 관련된 내용을 가끔 듣거든."
"암튼 너에 대한 보고서만 잠금 해제가 되어 있더라고. 그래서 우연히 알게 된 거야."
"그랬구나. 그럼 놈들은 지금 날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보고서에선 뭐라고 적혀 있었어?"
보미는 그것이 무척이나 궁금한 듯 얼굴을 너무 가까이 들이댔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근접하자 오히려 내가 살짝 물러나며 대답했다.
"행방불명."
"행발불명?"
"말 그래야. 시체를 못 건졌으니, 죽었다고 단정하진 않는 것 같았어. 물론 그 뒤로 다른 흔적을 찾았다는 내용은 없었고."
"그나마 다행인건가."
보미는 점점 눈빛이 흐리멍텅해지더니 갑자기 스스로 뺨을 툭툭 치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앗, 미안, 내가 좀 금방 취하는 편이라."
"술이 약한 데 왜 맥주를 집에 사놓는 거야?"
"난 원래 한잔 마시면 금방 잠들거든. 집에서 마시다 그냥 잠드는 게 습관이야. 불면증이 좀 있어가지고."
"아이고. 그럼 괜히 마시자고 했네."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사람들이랑 마실때는 잘 안 취해. 나지금 안 취했어."
보미가 갑자기 내 손을 잡더니 자기 이마에 가져다 댔다.
의외의 행동에 놀라는데 보미가 눈에 일부러 힘을 주고 말했다.
"봤지? 한개도 안 뜨겁지? 진짜로 안 취했다니까?"
"어, 그래. 그런것 같네."
점점 취해가는 보미를 보자 슬슬 음심이 솟구쳤다.
이토록 쉽게 흐트러지는 여자라니.
아주 그냥 업어가도 모를 기세다.
"보미야. 짠 하자."
"응응!"
캔맥주를 서로 부딪히는 순간 일부러 손아귀에 힘을 주어 맥주를 위로 뿜게 만들었다. 그것은 사실 내공을 이용한 것이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진동을 일으켜 캔이 부딪히는 순간 위로 솟구치도록 만든 것이다.
"우앗!"
갑자기 맥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보미의 옷에 쏟아졌다. 보미는 피하지도 못하고 상의를 그대로 맥주에 적시고 말았다.
"으앗, 뭐야. 도훈이 니가 취했네!"
"미안. 안에 맥주가 많이 들어 있어나봐. 잠깐만 내가 수건 가져 올게."
"됐어 됐어. 여기 물티슈 있어."
보미는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더니 물티슈를 몇장 꺼내 겉만 슥슥 닦기 시작했다. 하지만 맥주가 옷안까지 스며들자 몸이 축축했는지, 짜증을 내며 갑자기 상의를 들어 올렸다.
'헉!'
"아띠, 다 젖었네 여기까지."
갑자기 혀짧은 소리를 내던 보미는 내 눈치도 보지 않고 허리를 훤히 드러냈다.
정말로 미친 골반과 허리라인이었다. 옷을 입고 있을 땐 몰랐는 데, 골반은 서양인처럼 크고 허리는 두 손으로 감싸쥐면 들어올 정도로 가늘었다. 보미는 내가 쳐다보는지도 모르고 계속 젖은 배를 문질렀다. 배꼽도 무척 섹시하게 생겼는데, 피부결도 좋아 혀로 핥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
'김형사가 왜 얼굴 빻은 보미에게 관심이 있었는지 알것 같아.'
[김형사요?]
'혹시라도 몸매를 봤다면, 저건 절대 못 참았을 거야. 희주 빻녀시절보다 더 잘 빠진것 같아.'
"아이참. 도훈이 너 때문에 다 젖어 버렸잖아."
"미안."
"그냥 옷을 갈아입는게 빠르겠다."
보미가 거실에서 일어나더니 자기 방으로 향했다.
[주인님이 술을 먹인 이유를 알것도 같습니다. 취하기 전이랑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은데요?]
'나도 놀랬어. 이렇게 술이 약할 줄이야. 취하니까 말도 많아지고 엄청 덤벙대네.'
[근데 좀 늦게 나오는 거 아닙니까?]
'응?' 보미는 들어간지 한참이 됐는데도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아, 맞네. 나한테 자기 옷방을 내줬잖아. 입을 옷이 내 방에 있는 거 아니야?'
나는 머물기로한 방에 가서 옷장을 열었다.
예상대로 그녀의 옷들이 옷장안에 차곡차곡 개져 있었다. 그중에서 반팔을 하나 챙긴 나는 보미의 방으로 가 노크했다.
"보미야. 옷 여기있는데."
그러나 이상하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보미야? 무슨 일 있어? 나 열고 들어간다?"
조심스레 안방문을 열었을 땐 보미가 침대에 대자로 뻗어 기절한 있었다. 옷을 갈아입으로 들어가더니 그대로 잠이 들어 버린 것이다.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