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8. 제주도 푸른 밤-58-
도훈이 갑자기 문을 훽 여는 바람에 손잡이를 잡고 있던 보미가 균형을 잃고 안으로 딸려 들어왔다.
"어어?!"
도훈과 달리 보미의 육체적인 능력은 일반인에 비해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과거 사이코메트리 영상에서 진압봉으로 범죄자와 싸우는 모습을 보고 도훈이 의문을 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엉겁결에 욕실 안쪽으로 넘어지려는 보미를 도훈이 재빨리 받아냈다.
"어이쿠!"
도훈이 마침 붙잡아 주었기 망정이지 자칫 흉한 꼴을 보일 뻔한 보미가 놀라서 소리쳤다.
"가, 갑자기 문을 잡아 당기면 어떡···."
소리를 빽 지르던 보미는 순간 도훈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뭐, 뭐야 이 변태!!"
보미가 빽 소리치자 도훈이 재빨리 두 손으로 밑을 가렸다. 하지만 단순히 벗은 몸 만으로도 지나치게 육감적이었기 때문에 보미가 얼굴을 붉히더니 재빨리 욕실문을 꽝- 닫았다.
"미, 미안. 밖에 있는 줄 몰랐어."
"아이씨 진짜, 조심 좀 하라고!"
보미가 씩씩거리며 소파에 가서 앉았다. 난데없이 성인 남성의 알몸을 코앞에서 보게 된 보미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뭐, 뭔데 진짜. 문을 갑자기 열어버리면.'
보미의 눈 앞에 도훈의 알몸이 잔상처럼 아른거렸다.
가끔 인터넷에서 사진으로만 보아오던 새끈한 모델의 몸매였다.
'무슨 근육이···. 어휴.'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보게 된 도훈의 심벌.
재빨리 가리긴 했지만, 손이 눈보다 빠를 순 없었다. 엄청나게 거대한 물건이 달랑거리는 모습이 머릿속에 박제된 것처럼 떠나지 않았다.
'저 변태 새끼 혹시 일부러 그런 거 아닌가?'
보미는 불쑥 도훈이 어떤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닌지 의심을 품었다. 직업이 경찰이다보니 늘 사람을 경계하는 것이 습관이 배여 있었다.
'흐음···. 설마 아니겠지? 몰카범도 신고하고, 유괴범까지 직접 잡은 걸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닌것 같은데.'
보미는 늘 범죄자와 마주치다 보니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특징이 있었다. 죄를 짓는 범죄자는 나쁜 사람이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기본적으로 선량하다는 생각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변태일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 아닐거야. 하필 수건을 걸려고 손잡이를 잡았는데, 모르고 당겨버린 것이겠지. 힘이 원체 좋아야 말이지.'
잠시 후 수건으로 몸을 닦은 도훈이 반팔에 반바지만 입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는 민망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더니 소파에 앉아있는 보미에게 사과했다.
"미안. 절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다음부터 좀 조심해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무슨 힘이 그렇게 세? 혹시 그것도 능력의 일부야?"
"어. 네가 바람 마법을 쓰는 것처럼 나도 무공을 익혔거든."
"무공이라고? 그게 정말로 실존하는 거였어? 무협 영화에서나 나오는 건줄 알았는데."
"그렇게 따지면 네가 쓰는 마법도 마찬가지지."
"하긴 그렇네."
"잠깐만 보여줄까?"
"뭘?"
"무공."
"여기서? 그게 가능해?"
"아주 간단한 묘기같은 거야."
도훈이 갑자기 엎드려 뻗친 자세로 바닥을 짚었다.
"지금 뭐하는 데?"
"잘 봐. 무공을 익히면 이런것도 가능하거든."
도훈이 한 손을 떼더니 한 팔로 팔굽혀 펴기를 시작했다.
진지한 그의 모습에 방금전 일로 심란해 있던 보미가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풉-. 뭐야 그게? 한손 팔굽혀 펴기 정도는 우리 서에 있는 직원들도 다 한다고."
"그래? 그럼 이건 어떨까?"
도훈이 갑자기 손가락을 하나씩 떼더니 세 손가락만으로 팔굽혀 펴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보미는 대단치 않다는 투로 말했다.
"그것도 몇명은 가능하지 않을까?"
"그럼 이건?"
도훈은 이제 엄지손가락 만으로 팔굽혀 펴기를 이어갔다.
이쯤 되자 보미도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 손가락으로 그게 된다고? 안 아파?"
"전혀."
"그게 무공을 익혀서 가능하다는 거지? 생각보다 대단한데?"
보미는 기껏 시범을 보인 도훈이 민망할까봐 공치사를 했다. 나름 신기한 재주긴 하지만, 한 손가락으로 팔굽혀 펴기를 하는 것이 무공이라면 그리 대단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아직 대단한 건 보여주지도 않았는데?"
"어?"
엄지 손가락 하나로 무게를 지탱하던 도훈의 두 발이 갑자기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무중력 공간에 있는 것처럼 두둥실 두 발이 떠오르더니 그대로 물구나무 자세로 이어졌다.
"어, 어?"
보미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도훈이 손가락 하나만으로 완벽한 물구나무를 선 보인 것이었다.
"우아, 어떻게 했어?"
아까완 달리 보미가 진심으로 놀라 물었다.
도훈은 그 상태에서도 수직 물구나무를 선보였다.
"이런게 무공이야."
"대단해!"
도훈이 나인틴 나인 동작처럼 몸을 팽그르르 돌렸다.
하필 그의 몸이 보미에게 정면으로 섰을 때 갑자기 상의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또다시 그의 선명한 복근이 드러나자, 보미는 화장실에서 봤던 그의 알몸이 떠올라 얼굴이 빨개졌다.
"이, 이제 그만 보여줘도 돼."
"아직 더 남았는데?"
"아니야."
보미는 차마 도훈의 복근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외면했다. 의도한 것은 아닌것 같은데 어째서 자꾸 알몸을 보게되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거참, 부끄럽지도 않나. 다 큰 성인이.'
도훈이 아쉬운 표정으로 몸을 공중에서 회전 시키더니 보미 앞에 똑바로 섰다.
"집 안이라서 뭔가 보여주기가 힘드네."
"흠흠. 무리하지 않아도 돼. 무공이 대단하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았으니까."
그때 도훈의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났다.
민망함에 화제를 돌리려 했던 보미가 도훈에게 물었다.
"맞다. 우리 저녁 안 먹었지? 밥 먹을까?"
"밥? 요리도 할 줄 알아?"
"아니. 시켜먹자는 소리였는데."
"시켜먹어?"
"응. 요새 배달 잘 되잖아. 난 맨날 시켜먹는데?"
도훈은 그제야 보미의 집에 가재도구가 많이 없는 이유를 깨달았다.
'밥을 직접 안하고 시켜먹는 모양이구나. 어쩐지 주방에 제대로 된 그릇도 몇개 안보이더니.'
[아무래도 일이 바쁘니 어쩔 수 없겠죠. 야근도 잦을 테고요.]
"그럼 내가 낼게."
돈에 구애받지 않는 도훈이 먼저 산다고 했지만, 보미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너 아직 대학생 아냐? 어느 직장인이 학생한테 얻어 먹니? 됐으니까 메뉴나 골라."
배달 어플을 켠 보미가 스마트폰을 도훈에게 내밀었다.
[주인님이 어마어마한 부자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군요.]
'그러니까 말이야. 박봉의 공무원 지갑을 털고 싶진 않은데.'
[경찰대 출신 간부가 박봉일리가요?]
'공무원은 아무리 고위직이라도 호봉이 차야 연봉이 올라가거든. 끽해야 3년차 공무원이면 딱히 대단한 연봉도 아닐걸?'
[하긴, 주인님 앞에서라면 연봉 1억도 우습죠.]
"그냥 보미 네가 골라줘. 난 아무거나 잘 먹으니까. 평소 주로 시켜먹던 메뉴가 있을 거 아니야."
"그래? 그럼 진짜 내 맘대로 고른다?"
보미가 메뉴를 고르는 사이 도훈이 물었다.
"근데 김관구 형사랑은 무슨 사이야?"
"어?"
"아니 아까 경찰서 갔을 때, 기자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었거든.
근데 김관구 형사가 나한테 그러더라고. 이번 부녀자 유괴사건 기사 쓰게되면 윤보미 경위 이름을 꼭 넣어달라면서."
"김형사가 정말 그랬어?"
"응. 엄청 챙겨주는 느낌이길래, 혹시 애인 사이?"
애인이라는 말에 보미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무, 무슨 소리야. 그냥 일적으로 아는 사이지. 그리고 나랑 나이차가 얼만데?"
유난히 당황하는 보미의 표정에서 도훈이 행간을 읽었다.
'관심있었구나 보미도.'
[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정보창도 마음의 소리 스킬도 다 막 힌 상태일 텐데요?]
'딱 보면 몰라? 지나치게 당황하잖아. 살짝 찔러 봤을 뿐인데.'
[정말 그렇다면 의외로군요. 김관구 형사는 보미양 말대로 나이도 많고, 외모도 그다지 미남형과는 거리가 멀던데 말입니다.
생각보다 눈이 낮은 것일지도.]
'그게 아니라 보미가 숫처녀라서 그래.'
[네?]
'보미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정상적인 연애를 한 번도 못 해봤거든. 일종의 연애 고자인 셈이지.'
[아하.]
'근데 함께 근무하던 형사가 관심을 보이고 잘해주니까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끌리는 거지. 어쨌든 상대도 남자는 남자니까.'
[그럼 주인님한테는 불리한 거 아닙니까? 괜히 김관구 형사 이름을 들먹이면 보미양을 공략하기 더 어려울텐데요.]
'오히려 그 반대야.'
[네? 반대라고요?]
'너 그런 이야기 못 들어봤어?'
[무슨 이야기요?]
'순진하게 짝사랑 하던 여자가, 막상 처녀를 줄때는 어디서 굴러온지도 모르는 쌩양아치한테 대주는 스토리.'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서로 호감만 있는 상태로 진도를 못 빼면 결국 남 좋은 일만 시킨다는 거야. 김관구 형사도 보미도 서로 직위 때문인지 늘 거리를 두는 편이거든. 이성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관계가 지속되면 결국에 썩어 버린다고 해야 하나?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밀어내는 것도 아닌 애매한 사이가 되는 거지. 일종의 친한 오빠 동생같은.'
[그런데요?]
'반면에 갑자기 굴러온 개뼈다귀 같은 양아치는 뉴 페이스거든.
남자만 새로운 여자에게 끌리는 게 아니야. 여자도 같은 동물이고, 새로운 이성에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어.'
[호오.]
'그런데 여기서 김관구 형사와의 관계를 딱 잘라 말해버린다?
그 순간 모든게 확실해지는 거지. 그에게 호감이 있기는 하지만, 남자친구로 삼을 만큼은 아니라는 걸.'
[주인님이 기습적으로 찌른 건 그 대답을 유도하기 위해서군요.]
'맞아. 나중에 갈팡질팡할 때 본인이 내뱉은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거야. 사람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구속되는 법이니까.'
[과연 놀랍습니다. 저는 이제껏 주인님이 정보창과 각종 스킬로 여자를 꼬시는 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굉장한 연애 스킬을 가지셨군요.]
'스킬은 무슨. 그냥 잔기술이지.'
[네?]
'어차피 연애라는 건, 첫 인상으로 다 결정된다는 거야. 외모가 일단 먹고 들어가야 잔기술도 통하는 법이라고.'
[그럼 윤보미양이 주인님의 첫인상을 좋게 보셨다고 생각합니까?]
'첫인상은 몰라도, 아까 알몸은 제대로 봤지. 아마 밤새 생각날걸?'
[모든 여자들이 주인님처럼 섹스에 환장하는 건 아닙니다.]
'그건 당연하지. 하지만 윤보미처럼 일부러 억제하고 살았던 여자라면 흔들릴 수밖에 없거든.'
"그냥 물어 본 거야. 네 이름 언급하길래."
"쓸데없는 소릴···. 암튼 내 맘대로 시킨다?"
보미는 방금 전 대화로 마음이 심란했던지 갑자기 리모컨을 찾아 티비를 켰다. 어색한 적막보다는 뭐라도 옆에서 빈 사운드를 채워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도훈도 자연스럽게 티비를 쳐다보자, 보미가 그를 힐끔거리며 생각했다.
'참 이상한 애라니까? 김형사랑은 또 어떻게 알아가지고?'
보미가 김형사를 떠올리자 갑자기 그가 핸드폰 사진첩에 담긴 윤소미를 소개팅 시켜달라고 한 것이 떠올랐다.
'맞네. 나한테 잘보이려고 그랬구나. 윤소미 때문에.'
사실 소미는 자신의 본래 얼굴이었다. 그는 김형사가 변장한 자신보다 또다른 자신인 윤소미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못 마땅했다.
'김형사도 은근히 얼굴 많이 따진단 말이지? 쳇. 남자들은 다 똑같아.'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기분이 울적해진 보미가 다시 도훈을 힐끔거렸다. 옆 모습만 보는데도 굉장한 미남이었다. 조각처럼 우뚝선 코에, 서글서글한 눈매.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까지.
'···잘생기긴 엄청 잘생겼네. 처음봤을 때 깜짝 놀랐잖아?'
보미는 자기도 모르게 도훈을 의식하고 있었다.
아직도 도훈이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자신의 아파트에서 함께 티비를 보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나저나 난 무슨 생각으로 집에 들인 거지? 그냥 거절했어도 그만이었는데.'
도훈이 때를 쓰긴 했지만, 냉정하게 거절했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보미는 자신의 집에 당분간 도훈을 머물게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그 결정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설마 내가 저녀석 외모에 혹해서 그런 건 아니겠지?'
보미는 스스로의 감정을 부정했지만, 본능적으로 그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늘 혼자라고만 생각했는 데, 막상 자신과 같은 플레이어를 만나자 알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던 것이다.
'아니야. 쓸데없는 생각 집어 치우자. 업적에 집중해야지. 랭커가 머지 않았으니까.'
도훈의 도움으로 부녀자 납치범을 체포하는데 성공한 보미는 이제 랭커까지 업적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모든 걸 포기하고 쉼없이 달려왔는데, 불쑥 등장한 도훈 때문에 시간 낭비 하고 싶지 않았다.
한참 티비를 시청하는데 배달 음식이 도착했다.
거실에 낮은 상을 펴고 음식을 펼치는데 보미는 왠지 그 모습이 신혼부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 내가 미쳤나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쭈꾸미도 배달이 되네?"
"응. 원래 1인분은 안되는데 간만에 두명이라 시켜봤어. 여기 평이 좋아."
"흐음, 매운거 먹으면 술 당기는데. 혹시 반주할 거 있어?"
"술을 마시자고?"
"아, 내일 근무에 지장있나?"
"아니 그건 아닌데···."
보미는 이따금 혼맥을 즐겼기 때문에 냉장고에 몇 캔씩 쌓아 놓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직접 냉장고에서 캔맥주 두개를 들고 왔다.
"뭐, 한 캔 정도는 괜찮겠지?"
맥주를 본 도훈이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