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627화 (1,607/2,000)

1627. 제주도 푸른 밤-57-

갑자기 집을 묻는 도훈을 보고 보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집은 갑자기 왜?"

"얼굴 드러내고 편하게 있을 수 있는데가 집 말고 또 있어?"

"아무리 그래도 처음 본 사이에 집까진 좀···."

도훈이 갑자기 앓는 시늉을 했다.

"실은 그게 아니라 묵을 곳이 없어서 그래."

"묵을 곳이 없다니?"

"어제 게스트하우스 몰카범 사건 소식 들었지?"

"어? 우리 관할서 사건인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신고한 사람이 나거든."

"너라고?"

"그래. 못 믿겠으면 너네 서에 전화해서 확인해봐. 신고자로 어젯밤 조사받고 나왔으니까."

"아니···."

"진짜 전화해 보라니까?"

보미는 도훈의 말이 믿기 힘든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동료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나야. 다른게 아니라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러는데 어제 몰카 건으로 연락한 사람 이름 좀 알 수 있어? ···어, 이 도훈이라고? 오케이 알았어. 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 경찰서 왔는데 확인할 게 좀 있어서. 응, 그래 고마워."

통화를 끝낸 보미가 도훈을 다시 쳐다보았다.

"정말로 네가 신고한 거야?"

"그렇다니까? 내 이름 들었지?"

"대체 어떻게 된 일인데?"

"거기 주인이 여자 손님들 몰카 찍는 걸 우연히 발견했거든. 그래서 신고했더니 주인은 붙잡혀가고 숙소는 오늘 중으로 긴급 폐쇄 조치가 내려졌지 뭐야?"

"그거야 당연하지. 그런 게스트하우스에 손님이 왜 계속 머물겠어."

"그래서 지금 갈 곳이 없어."

"자, 잠깐. 그래서 우리 집으로 오겠다는 거야?"

"안되나?"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여자 혼자 사는 집을 왜?"

"혹시 원룸이야?"

"아니 관사로 제공받은 아파트긴 한데···."

"아파트면 방도 남을 거 아니야? 잠깐만 지낼 수 없을까?"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도훈의 태도에 보미도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아무리 그래도 여자 혼자 사는 집에 ···."

"왜? 내가 무서워? 난 네가 더 무서운데."

"뭐라고?"

"생각해봐. 생선 대가리 썰듯 아무렇지도 않게 목을 딸 수 있는 여자를, 어떤 남자가 겁 안내겠냐고."

"그건 그거고. 아무튼 안 돼."

보미가 거절을 하는데도 도훈은 끈질기게 매달렸다.

"실은 신분이 노출될까봐 그래."

"노출되다니?"

"네 말대로면 제주도에도 PK단 놈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거 아니야. 그래서 너도 계속 얼굴 변장하고 숨어 지냈던 거고."

"그거야 그렇지만···."

"내가 만에 하나라도 돌아다니다 붙잡히면···, 너한테도 위험하지 않겠어?"

이쯤되면 반쯤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도훈은 PK단을 핑계로, 보미에게 숨겨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니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알았어. 미안해. 갑자기 숙소에서 쫓겨나서 오갈데 없어서 한번 물어나 본 거야. 숙소는 내가 다시 알아볼게."

도훈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꼬릴 내리자 보미도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다. 그녀 역시 3년전 아무 생각없이 제주도를 돌아다니다 PK단에 걸려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만큼, 도망다니는 도훈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이다.

"아니 그러니까 왜 멀쩡히 잡은 게스트하우스를···."

"그럼. 범죄 행위가 눈 앞에 떡하니 벌어지고 있는 걸 알게 되었는데, 명색이 선수가 돼가지고 보고만 있을 순 없잖아. 너라면 참았겠어?"

"그, 그건 아니지만."

"난 너처럼 경찰은 아니지만, 나쁜놈들은 절대 그냥두지 않아.

이번에 유괴범을 쫓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아니지 않습니까? 주인님이 언제부터 정의의 사도처럼 구셨다고.]

'이래야 윤보미가 흔들릴 것 같아서.'

[그래서 정의감 넘치는 열혈 청년으로 위장하시는 겁니까?]

'최소한 나를 색마에 변태로 인식하는 것보단 낫하겠지.'

"음. 이번 사건에 협조해 준것은 정말 고맙게 생각해. 도와주려고 한것도 모르고 공격한 것도 미안하고."

"됐어. 공치사나 듣자고 한 일도 아니야. 나쁜놈을 보면 처단하는게 선수의 사명이니까."

"······."

"뭐 어쨌든, 연락처는 알았으니 생각바뀌면 전화 줘. 당분간 제 주도에 있을 예정이니까."

도훈이 갑자기 일어나자 보미도 당황했다.

"어, 어? 어딜 가려고?"

"어디든 숨어 있을 곳을 찾아야지. 그리고 걱정마. 혹시나 PK 단에 붙들리더라도 네 얘기는 절대 안할테니까."

"······."

"그럼 이만."

"자, 잠깐만."

도훈이 떠나려고 하자 보미가 그를 붙잡았다.

"왜?"

"제주도엔 얼마나 있을 건데?"

"모르겠어. 서울 상황이 진정될때까지? 아마 길면 일주일 정도 일거야."

"···일주일이면, 흠."

보미는 무척 난감했다. 지방 발령난 경찰 간부랍시고 18평짜리 관사 아파트를 받긴 했지만, 이제껏 누구도 들인적 없던 금남의 구역이었다. 그곳에 오늘 처음 본 도훈을 들이자니 당연히 망설여질 수 밖에 없었다.

"너 진짜로 조용히 있다가만 갈 거지?"

"당연하지. 나를 지금 뭘로 보는 거야? 나도 너와 같은 선수라고."

"으음. 그건 그런데···."

하지만 도훈은 자신과 같은 비밀을 가진 플레이어였고, 심지어 두 건의 사건으로 볼때 정의감 넘치는 청년이었다.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를 매정히 내치기엔, 보미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확실히 틀린 말도 아니야. 만약 도훈이 PK단에 노출되었다간 되려 나까지 위험해 질 수 있으니.'

"알았어. 그럼 우리 집으로 와."

"정말? 괜찮겠어?"

도훈이 반색하자 보미가 딱 잘라서 말했다.

"아파트라곤 하지만 관사로 받은 거라 18평 밖에 안 돼. 당분간은 내 옷방에서 지내."

"그거라도 감지 덕지지. 근데 안 불편 하겠어?"

"당연히 불편하지. 근데 어쩌겠어? 돌아갈 숙소도 없다면서?"

"고마워. 사실 그럴 목적으로 말을 꺼낸 건 아닌데···."

"맞다. 무슨 능력인지 보여주기로 했잖아?"

"그건 같이 지내면서 차차 알게 될 거야."

도훈이 씨익 웃었다.

* * *

경찰 간부용 아파트는 별도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일반 아파 트에 몇자리 임대를 한 케이스였다. 따라서 이웃주민들도 보미가 제복을 입고 출근하지 않는 이상 경찰인줄도 몰랐고, 보미 역시 괜히 주거지에서 경찰 신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근무복은 늘 지구대에서 갈아입는 편이었다.

"여기야."

"어, 그럼 실례할게."

보미가 혼자 사는 아파트를 방문하게 된 도훈은 신나는 마음으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여자 혼자 사는 아파트치곤 내부는 무척 심플한 편이었다. 마치 오늘 당장 이사를 나가도, 꾸릴 짐이 얼마 없을 것 같았다.

"집이 좀 휑하네?"

"쓸데없이 물건을 사모으는 편이 아니라서. 기본적으로 제공된 가전 외에는 따로 산 게 없어. 저쪽이 옷방이니까 당분간 도훈이 네가 쓰도록 해."

"어, 고마워."

"그리고, 내가 반말하는 건 상관없지? 네 실제 나이랑 상관없이 어쨌든 지금은 나보다 어리니까."

"응. 괜찮아. 내 대학 동기들도 나보다 한참 어린데 반말 찍찍하거든."

"풉."

"그럼 쉬어. 오늘은 피곤할테니."

"잠깐, 근데 화장실이 한 개뿐이야?"

18평 규모의 아파트다 보니 당연히 하나 밖에 없었다.

"응."

"어 그러면 씻으려면···."

"출근할 때만 조심해 줘. 난 7시에 출근 준비하니까."

"그래. 그럼 내가 먼저 씻어도 될까? 오늘 땀을 너무 흘려서."

보미는 난감한 표정이었지만, 갑자기 씻는 다는 도훈을 말릴 명분도 없었다.

"그, 그래."

"고마워."

보미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자 도훈이 짐가방을 열고 속옷을 꺼냈다.

[무슨 생각으로 보미양의 집까지 쳐들어 오신 겁니까?]

'뻔한 거 아니야? 플레이어 따먹는 업적 이뤄야지.'

[상대를 잘못 고르신 거 아닙니까? 보미양이 전투 마법사라는 걸 잊으신 건 아니죠?]

'목이 달아날까봐 겁을 냈다면 사마귀가 지금까지 번식했겠어?'

[네?]

'수컷은, 목이 잘려 나가도 허리를 흔드는 법이라고.'

[업적에 목숨까지 거실 필요는 없다는 소리였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

[그리고 정보창을 쓰지 못하는 이상 공략도 어려울 거고요.]

'그렇긴 한데 대충은 감이 와.'

[네? 무슨 감이요?]

'보미 쟤, 처녀같아.'

[네? 20대 후반의 초절정 미녀가 처녀일리가요? 평소 주인님 이론과 배치되는 거 아닙니까?]

도훈은 예쁜 여자가 처녀인건 10대 시절 뿐이라고 주장하는 편이었다. 주변 남자들이 무르 익을 때까지 기다려 줄리가 없다고.

아무리 늦어도 20대 초반. 대학교에 가면 대부분 처녀 딱지는 뗄수 밖에 없다고.

'보통이면 말이 안되지만, 살아온 이력을 봐선 충분히 그럴 개연성이 있거든.'

[어떤 면에서요?]

'일단 보미가 예쁜 건 맞아. 나도 처음 실물 보고 감탄했거든.

무슨 연예인 저리가라야. 한송이가 그렇게 추켜세우던게 과장이 아니더라고.'

[근데요?]

'문제는 신분이 탄로날 걸 우려한 보미가 대학생 시절, 그러니까 스무살 넘고부터는 계속 못난 얼굴로만 다녔다는 거야.'

[한송이양을 만날 때는 본 모습 아니었던가요?]

'우연히 본 모습으로 다니다가 한송이랑 마주친 거겠지. 나중에 과외를 해줄 때는 갑자기 얼굴을 바꾸면 안되니까 계속 본모습으로 있었던 거고. 이따금 본 얼굴로 돌아다니기도 했겠지만, 대부 분은 변장한 얼굴로 살아왔다는 소리야, 내 말은.'

[호오 일리가 있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보미양이 남자에게 인기가 없을 타입은 아니지 않습니까? 얼굴은 일부러 못생기게 만들었지만 타고난 몸매는 그대로 였을텐데요.]

'그렇긴 하지. 아까 경찰서에서 명함 준 김관구 형사도 보미를 눈독들이는 눈치였거든. 특히 여자는 얼굴이 조금 못나도, 막 심하게 뚱뚱하지만 않으면 주변에서 껄떡대는 놈들이 있기 마련이라.'

[근데요?]

'근데 플레이어 승급에 미쳐서 미션과 업적만 해치워 온 보미가 과연 남자에게 관심을 갖고 연애를 해봤겠냐고. 쉽게 말하면 워커홀릭이나 마찬가진데.'

[아···.]

'그래서 내 결론은 아마도 처녀일거다, 라는 소리야.'

[흐음. 주인님 말처럼 보미양이 설사 처녀라고 치더라도 그것이 공략과 무슨 관계가 있죠? 오히려 처녀면 더 공략이 어려운 것 아닙니까?]

샤워를 위해 화장실로 들어간 도훈이 옷을 탈의하며 말했다.

'일반적으론 처녀가 더 따먹기 어렵지.'

[근데요?]

'근데, 그건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의 쌩 아다들에게나 통하는 얘기고, 20대 후반의 처녀에게 통용되는 건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반대라고요?]

도훈이 샤워기의 물을 틀며 땀에 젖은 몸을 씻었다.

'생각해봐. 여자는 나이가 들수록 무르익는단 말이지. 원래 경험에는 적정시기라는 게 있는 거야. 왜 사람들이 비슷한 시기에 연애하고,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고 애낳고 하겠어? 그게 인간의 본성에 따른 보편적인 흐름이거든.'

[흐름이라면···.]

'보미가 비극적인 사건을 겪지 않고 플레이어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남들과 비슷한 삶을 살았을 거야. 무수한 남자들에게 대시도 받아보고, 20대 때는 불타는 사랑도 해보고, 직장에 와서도 인기 만점의 직원이었겠지.'

[아마도 그랬겠죠?]

'하지만 보미는 플레이어가 되고, 미션과 업적을 수행하면서 원래 겪었어야 했을 보편적인 경험을 모두 놓치고 만 것이라고.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처럼 말이야.'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갑니다.]

'즉 보미는 지금 과즙미가 뚝뚝 떨어지는, 상하기 직전의 과일과 같은 상태인 거야. 풋사과일 때 누군가 따주지 않았으니 이제는 스스로 향기를 내뿜으면서 제발 따달라고 몸부림치는 나이가 돼버린 거지.'

[너무 오버하시는 거 아닙니까? 전혀 그런 기미는 안 보이던데요.]

'물론 아무것도 모르니 아직은 욕구도 들지 않겠지만, 내가 계속 자극을 주면 어떨까?'

[보미양의 억눌린 본능을 자극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도움을 청하러 온 플레이어를 보고 업적 달성할 생각으로 자극하는 건 도의적으로 온당치 못한 것 같습니다. 심지어 보미양은 주인님께 방 한 칸을 내주기까지 했는데요.]

도훈이 물줄기를 맞으며 사타구니를 힘껏 씻었다.

비누를 마구 묻혀 빡빡 닦아내는 모습이, 당장이라도 오늘밤 써먹을 것 같은 기세였다.

'아니지. 플레이어의 사명에 충실한 거야. 보미가 범인을 잡는데 혈안이 된 것은 경찰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본인의 업적이기 때문인 것처럼. 나역시 섹서로서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거라고 보면 돼.'

[역시 주인님은 궤변의 달인이십니다.]

'보기드문 훌륭한 플레이어라고 해줄래?'

[주인님 목이 제 위치에 붙어 있길 바랄 뿐입니다.]

'두고 보라고. 시간은 충분하니까.'

샤워를 마친 도훈이 몸을 닦기 위해 수건을 찾았다.

그러나 화장실 수납함에 수건이 보이질 않았다.

"어랍쇼?"

도훈이 속으로 생각했다.

'기횐가?'

[네? 벌써요?]

'수건이 없잖아. 몸을 닦아야 하는데.'

[주인님 내공으로 말리실 수 있지 않습니까?]

'나는 알지만 보미는 내가 할 수 있다는 걸 모르잖아.'

도훈이 젖은 몸으로 조심스럽게 밖에 소리쳤다.

"저, 윤보미씨?"

"왜?"

거실에 나와 있었는지 보미가 바로 대답했다.

"저기 화장실에 수건이 한장도 없는데."

"어, 없다고? 아! 맞다 어제 건조기 돌려놓고 그대로 둬버렸네. 자, 잠깐만."

보미가 후다닥 달려가더니 다용도실 건조기를 열어 수건을 꺼내왔다. 수건을 건네기 위해 보미가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밖에 손잡이에 걸어놓고···."

보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도훈이 안에서 문을 확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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