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6. 제주도 푸른 밤-56-
거절당할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도훈은 한 방 먹은 표정이었다.
"거절한다고?"
"이유도 알려줘야 해?"
"아, 아니 이건 상식적으로 맞지 않잖아."
"뭐가 상식적인데?"
"너도 나도 PK단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체에 쫓기는 입장이야.
쫓긴다는 말도 순화한거고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고 날만 기다리는 입장이지. 그럴바에야 우리가 먼저 힘을 합쳐 놈들을 친다면 ···."
"풋-."
도훈의 열변에도 불구하고 보미는 피식 웃어보일 뿐이었다.
그 웃음이 너무나 기분 나빴기에 도훈이 발끈했다.
"내 말이 지금 우스워?"
"아니, 미안.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와서."
"어떤 부분에서?"
"힘을 합쳐 놈들을 친다고? 정말? 그게 가능할까?"
"뭐?"
"나는 놈들하고 직접 붙어봤어. 고작 둘이서 놈들을 상대한다고? 정말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보미 넌 제주지부 스무명을···."
"그것 때문에 죽다 살았어 나는. 심지어 동시에 상대했던 것도 아니고 몇번이고 암습을 당하는 과정에서 운좋게 목숨을 부지했을 뿐이야. 놈들이 얼마나 큰 규모인지 알기는 해?"
"정확히는 모르지만."
"거짓말하지마. 보고서를 읽어 봤다며? 인구 60만 겨우 넘는 제주도에만 20명이 넘는 PK단원이 있었어. 그럼 전국적으론 몇이나 될까? 우리나라 인구가 5000만이니까 대충 계산 나오지?
우리 둘이서? 계란으로 바위치기 아니야?"
"그렇다고 목 빼놓고 죽을 날만 기다리라고?"
"그게 싫으면 너도 나처럼 숨어 지내면 돼."
"아니···."
윤보미가 차갑게 말했다.
"잘들어. 놈들에게 발각되었다니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현실적인 조언은, 어디 인적 드문 한 적한 시골에 처박혀 숨죽여 지내라는 것 뿐이야. 괜히 네 일 때문에 엄한 나까지 불똥튀게 하지 말고."
"불똥이라고?"
"너 때문에 나 까지 위험해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내가 어떻게 3년을 숨어 지낼 수 있었는데?"
"하-."
도훈은 기가 막혔다.
그녀를 만나면 당연히 같은 플레이어로 도와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밖의 반전이었다.
[주인님···.]
'아니 이건 해도 너무한데.'
[설득이 어려울 거라는 건 예상을 했잖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같은 플레이어끼리···. 이건 남보다도 못한 거 아니야?'
[솔직히 남입니다.]
'뭐?'
[왜 플레이어가 독립된 생활을 하시는 지 아시겠죠? 플레이어는 어떤 면에서 보면 각자의 사명에 미쳐 있는 사람들입니다. 뭔가 힘을 모아 업적을 이루는 팀플레이보다는 개인 플레이에 치중하는 외골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와, 그래도 이건···.'
[주인님도 막상 위기가 닥쳐오기 전까진, 다른 플레이어 대해선 관심도 없으셨잖습니까.]
'아니 그거야···.' 로시의 뜨끔한 충고에 도훈도 스스로를 되돌아 보았다.
사실 로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보미가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이유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도훈 자신이었고, 생면부지의 윤보미는 오늘 처음 만났을 뿐이다. 이제껏 존재하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사람이 뜬금없이 찾아와서,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나와 함께 하자면 누군들 동의할 수 있을까?
겨우 머리를 식힌 도훈은 역지사지를 통해 보미의 입장을 최대한 이해했다.
PK단에 쫓겨 죽을 뻔한 그녀인데, 어찌 복수심이 없을까? 하지만 그녀는 맞서기 보다 숨어지내는 쪽을 택했고, 실제로 3년간 무탈하게 살고 있었다.
그리고 도훈은 그 평화를 깨뜨리고, 자칫 추적단을 불러들일지 모르는 불길한 존재였다.
'하, 이거 난처하게 됐네.'
[주인님이 분명 자신있다고 하셨잖습니까? 여자를 설득하는 일은 누구보다 자신있다고요.]
'아니 그건···.'
도훈도 분명 비슷한 취지의 말을 했었다. 그러나 정보창도 막힌 여자는 난생 처음이었기 때문에 손발이 꽁꽁 묶인 기분이었다. 그녀는 일반인이 아니었고, 자신에게 딱히 호감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귀찮은 짐짝 취급하며 그를 밀어내려하고 있었다.
'젠장. 이걸 어떻게 한다.'
도훈은 무작정 협조를 구하길 포기하고 그녀의 복수심을 자극하기로 전략을 바꿨다.
"그래. 불쑥 찾아와서 함께 힘을 모으겠다고 하면 나라도 떨떠름할 것 같아."
"잘 아네."
"근데 이것도 한 번 생각해봐. 어쨌든 PK단은 우리같은 사람들에겐 목에 걸린 가시같은 존재야. 놈들은 우릴 사람 취급은 커녕 현상금 달린 범죄자 취급 한다고. 너도 놈들에게 죽을 뻔 했다며?
그게 억울하지 않아? 우리가 죽을 죄를 진것도 아닌데?"
"······."
바뀐 전략이 먹혔는지 보미도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도훈이 계속 밀어 붙였다.
"내가 위기에 처했으니 무조건 날 도와달라는 소리는 아니야.
내가 뭐라고 오늘 처음 만난 너에게 그런 무리한 부탁을 하겠어?"
"그럼?"
"한번 생각해 보자는 거야. 내가 자세히 설명은 못했지만, 난 놈들에게 아직 정체를 들키지 않았어. 놈들은 내 이름도, 내가 사는 곳도 몰라. 정확히는 내가 무슨 능력을 갖고 있는 지도 모르지."
"그럼 왜 아까는 쫓긴다고 했어?"
"그렇게 말하는 게 더 불쌍해 보일것 같았는데, 잘못 생각한 것 같아. 하지만 언젠간 나도 너처럼 놈들에게 들켜서 습격을 받을 수 있잖아. 그런 위험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니까."
"그래서?"
"우리도 놈들만큼은 아니지만, 서로 돕는 연합 전선을 구축해 보자는 거야. 세상에 플···"
플레이어를 말하려다 말문이 막힌 도훈이 속으로 짜증을 터뜨렸다.
'이 빌어먹을 제재는 왜 있는 거야? 플레이어를 플레이어라고 부르지도 못해? 아니 쟤도 알고 나도 아는데 무슨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게 규칙인지라.]
'어휴 답답해. 그럼 단어를 대체해도 상관없는 건가?'
[네?]
'플레이어한테 플레이어라고 부르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야?
플레이어 말고 다른 단어로 대체해서 부르면 그만이잖아.'
[약간은 편법이지만 문제가 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선수가 우리 둘밖에 없는 건 아닐 거 아니야?"
"선수?"
"그래. 빌어먹을 P워드는 앞으로 선수로 통일하기로 해."
도훈이 생각해낸 대체어는 선수였다. 실제로 그런 뜻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한때 호빠 선수로 출격한 적이 있던터라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던 것이다.
같은 제약을 받고 있던 건 보미도 마찬가지였는지 곧바로 동의 했다.
"그래, 선수. 좋네. 네 말대로 선수가 우리 둘 만은 아니겠지. 그럼 넌 선수들을 일일이 찾아내서 설득해 보겠다는 거야?"
"전부는 아니어도 어느정도 규모만 이룰 수 있다면 놈들이 그렇게 쥐잡듯 사냥하고 다니진 못하겠지. 건드리면 지들도 좆되는 걸 알테니까."
"흐음."
도훈의 두번 째 제안에는 보미도 솔깃하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다시 물었다.
"하지만 선수들은 다들 꽁꽁 숨어 있잖아. 랭커 쯤 되어야 다른 선수와 소통이 가능하고. 대체 어떤 수로 찾아낼 건데?"
"다음으로 찾을 선수는 정해놨어."
"누구?"
"천상 크래프트의 개발자."
"그 가상 현실 게임 말이야?"
"맞아."
"어떻게?"
"단서를 남겨놨더라고. 이스터 에그라고 해야 하나? 게임 속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놨어. 마치 알아보고 찾아오라는 것처럼."
"흐음···."
"그런 식으로 한 명씩, 한 명씩 같은 뜻을 가진 동료들을 모으다 보면 언젠간 PK단이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를 갖추지 않겠어?"
"그게 가능하다면야···."
도훈은 자신의 설득이 먹힌다고 생각하고 좀 더 밀어 붙였다.
"나는 선수들이 PK단에 비해 모자라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수때야 어쩔 수 없지만, 중수만 되어도 절대 꿀리지 않지."
"그건 맞아."
"근데 우리가 왜 놈들한테 역으로 사냥당하는 줄 알아?"
"혼자라서?"
"그래. 비유하자면 선수는 호랑이고, 놈들은 사자야."
"둘 다 맹수 아닌가?"
"보통은 호랑이가 더 덩치는 크고 강하지. 1:1로는 거의 이긴다고 보면 돼. 하지만 왜 사자가 싸움에서 이기는 줄 알아?"
"미안, 난 동물의 세계엔 관심이 없어서. 왜?"
"사자는 비겁하게 뭉쳐서 공격하거든. 암놈, 새끼 할 것없이 동시에 달려든단 말이지."
"아."
"지금 우리 상황이 딱 그래. 더 강한 존재지만, 뭉치질 못하니 맨날 당하고 사는."
"···그럴듯하게 들리네."
"어때?"
'내 동료가 돼라 그러면 안 통하겠지?'
[그닥 진지하지 못 해 보입니다.]
도훈이 마지막 대사를 날리기 직전, 이번엔 보미가 먼저 말했다.
"실은···. 나도 놈들이 무서워서 숨어 있기만 한 것은 아니야."
"어?"
"내가 정말로 여기 짱 박혀 숨만 쉬고 있는 것 같아? 사실 계속 업적과 미션을 수행하고 있었어."
"그렇겠네. 경찰이 사명이니까."
"맞아. 운좋게 업적과 미션을 잘 해결하면서 지금은 랭커를 목전에 뒀어."
"랭커?"
"왜 그렇게 놀라? 너도 아직 랭커는 아니구나?"
"노코멘트 하겠어."
"아무튼 랭커가 되면 다음 경지로 나아가게 돼. 그럼 지난 번처럼 도망치면서 싸우지 않을 거야. 건드리면 싹 다. 알지?"
윤보미가 갑자기 손날로 자기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도훈은 살짝 소름이 돋았다. 사이코메트리 영상으로 봤던 전투 장면이 떠오른 것이었다.
'쟤는 무슨 사람 목 치는 걸 점심메뉴 고르듯 말하냐?'
[아무래도 클래스가 전투마법사다 보니···.]
'흐음. 아무튼 랭커에 근접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구나. 근데 생각해보니까 엄청 빠른 거 아니야?'
[빠른 편이긴 합니다만 지내온 세월이 주인님의 10배는 될 겁니다.]
'10배라고? 그렇게나 많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학창 시절 자살시도 중에 우연히 플레이어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을 진학하고 졸업해서 경찰일을 했으니 최소 10년은 플레이어로 지내지 않았겠습니까? 주인님은요?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다고요.]
'아···. 듣고보니 그렇네.'
[물론 그렇다고 해도 10년만에 랭커 초입에 이른 것은 엄청 빠른 성취입니다. 보통은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리거나···.]
'걸리거나?'
[그 전에 PK단에 잡혀서 죽임을 당하니까요.]
'아.'
도훈은 보미가 과거 죽을 뻔 했다는 점을 떠올렸다.
'모난 돌이 정맞는 거구나.'
[네?]
'너무 능력을 빠르게 개화하면 그만큼 티가 날테니. 소년등과(少年登科) 부득호사(不得好死) 라더니, 그 말이 딱 어울리는 군.'
[그게 무슨 뜻입니까?]
'빨리 레벨업 하는 게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거야.'
[그럼 주인님쪽이 더 위험한거 아닙니까?]
'뭐?'
[윤보미양도 빠른 편이지만, 주인님은 더 기록적인 성장세거든요. 모르셨습니까? 일전에 한 번 말씀드렸는데.]
'그, 그렇네?'
[소년등과가 뭐라고요?]
'음음. 뭐 꼭 천재가 꼭 불행한 것은 아니니까.'
도훈은 스스로 말해놓고도 뻘쭘해졌다.
확실히 남의 허물은 잘보이는데 반해, 제 눈의 들보는 놓치기 쉬운 법이었다.
'그렇구나. 내가 위험해진 것도 사실 너무 빠르게 레벨업을 추구하다 벌어진 것이기도 하겠네.'
[더 빨리 레벨업해서 보다 강해지겠다는 계획이셨죠.]
'그게 양날의 검이네. 아슬아슬 줄 타는.'
"근데 너도 꽤 강해 보이던데 구체적으로 무슨 능력이야?"
"···응?"
"나는 내 스킬을 보여줬잖아. 난 처음에 네가 화염계열 마법사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그건 또 아니라니까."
"궁금해?"
"네 말대로 선수들끼리 연합을 꾸릴 계획이면 서로의 능력을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내공 어쩌고 하는 거 보면 격투가 타입인가?"
보미가 호기심을 보였다.
"으음, 몸을 쓰는 쪽이긴 하지."
"그러니까 어떤? 김형사를 때려 눕혔다는 거 보니 싸움은 꽤 하는 거 같던데."
"김형사?"
"아까 잠복중이던 형사."
"아, 김관구 형사?"
"어? 어떻게 알았어?"
"정보창 봤지."
"아···. 아무튼 김관구 형사도 나름 강력계에선 베테랑급인데 기절한 모습은 오늘 처음봤어."
"뭐, 그것도 있고."
"뭔데? 치사하게 안 보여 줄거야? 이런식이면 곤란해. 나는 정말 있는 그대로 다 알려줬는데."
"음···. 그게 좀."
"지금 동료를 구하는 중이라며? 그럼 나도 네가 어떤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선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 만약 우리가 PK단 이랑 싸우게 되면 서로 믿고 등을 맞댈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서야 하니까."
보미는 생각보다 집요한 편이었다.
자신의 패를 모두 오픈했다고 생각하자 불쑥 도훈에게도 똑같이 요구해왔다. 어찌보면 당연한 질문이긴 했지만, 도훈은 정말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줘야 하는지 망설여질 수 밖에 없었다.
"정말로 궁금하다고?"
"어."
"후회 안하겠어?"
"후회는 무슨 후회? 설마 능력을 쓰면 누가 죽고 그러는 거야?"
"응."
"저, 정말?"
"아니 좋아 죽지."
"뭐야 진짜?"
"암튼 여기선 보여 줄 수 없어."
"그럼 어디서?"
"조용한 곳이 없을까?"
"조용한 곳?"
"경보기 알람이 없는 걸 보면 PK단이 접근하거나 그런 건 아닌데, 아무튼 너무 밖에 노출되어 있는게 아닌가 싶어서."
"앗."
보미가 갑자기 벗어 놓았던 마스크를 다시 썼다. 따지고보면 제 주도 내에선 이방인인 도훈보다 얼굴이 알려져있는 자신이 더 위험했다.
"그, 그렇네. 내가 너무 방심했어."
"커피도 다 마신 것 같은데 옮기자."
"어디로?"
"내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곳으로."
"응?"
"너희 집 여기서 가까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