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5. 제주도 푸른 밤-55-
"내상 치료라니?"
"스킬을 쓰려면 내공을 끌어 쓰잖아. 그것처럼 내 등에 대고 ···."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내공? 마나가 아니고?"
"뭐?"
도훈은 서로의 대화가 엇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주인님. 클래스 마다 스킬을 끌어쓰는 방식은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내공이 윤보미에겐 마나인거야?'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이름만 같고 실상은 똑같은게 아니고?'
[발동원리도 다르긴 합니다. 궁극적으로 차크라로 통칭되긴 하지만 약간은 다른 개념입니다. 무공을 익힌 사람이 내공을 단전에 갈무리해 필요할 때 뽑아 쓰는 형식이라면, 마나를 익힌 사람은 대자연에 퍼져있는 마나를 스킬을 발휘할 때 일시적으로 빌려 쓰는 방식이거든요.]
'뭐? 그럼 아예 다른 거 잖아?'
[정확히는 똑같은 힘입니다.힘을 끌어 쓰는 방식이 다를 뿐이 죠. 실제로 마검사 같은 클래스에선 두 가지 힘을 융합하기도 하거든요.]
'대관절 뭔소린지 모르겠군.'
[결론적으로 윤보미양에게 내상 치료는 처음 듣는 개념일 거란 소립니다.]
'수작 좀 부려볼까 했는데 실패구나.'
"어쨌든 나때문에 다쳤다면 다시 한 번 사과할 게. 고의는 아니었어. 아깐 정말로 PK단 인줄 알았으니까. 근데 PK단에 쫓기고 있다니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놈들에게 추적당하고 있어. 그래서 제주도로 피신온 거고."
"하필 제주도로···."
윤보미가 입술을 깨물었다. 몇년간 힘들게 정체를 숨기고 살아온 그녀의 입장에선 도훈이 난데없이 PK단을 불러들인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제주도는 너 때문에 왔지."
"나? 나를 알아? 어떻게 알았지? 너 랭커야?"
"내가 랭커처럼 보여?"
"읽히지가 않아."
"뭐라고?"
"네 상태창이 읽히지 않는다고."
도훈은 그제야 보미가 자신에게 정보창 스킬을 쓴 것을 알게 되었다.
'뭐야? 윤보미에게도 정보창 스킬이 있는 거였어?]
[네, 맞습니다. 플레이어에겐 기본 스킬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근데 안 보여?'
[주인님도 못 읽습니다. 플레이어끼린 서로의 정보창을 확인할 수 없게 되어 있으니까요.]
'정말?'
도훈은 긴가민가하는 마음으로 상태창을 열어보려 했으나, 정말로 열리지 않았다.
'이게 왜 안 되지?'
[스킬 소유자끼리 일종의 면역이라고 할까요?]
'어쨌든 윤보미는 내가 어떤 클래스인지, 어떤 등급인지도 전혀 모른다는 거군.'
[네.]
'차라리 잘 됐어.'
도훈이 빨대로 커피를 한모금 들이키더니 말했다.
"당연하잖아. 우리끼린 서로 정보창을 열어 보는게 불가능하니까."
"난 방금 알았어."
"너도 나처럼 인공지능이 알려줬나 보군."
"응."
"너의 매개물은 뭐야? 난 스마트 워치."
도훈이 팔목을 내 밀자 윤보미가 라운드 셔츠 목부분을 살짝 끌어내리며 목선을 드러냈다.
"이 펜던트."
하지만 워낙에 가슴이 컸기 때문에 살짝만 내렸는데도 가슴골이 비칠 정도였다. 도훈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아래로 향하자 윤보미가 정색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무례하군. 나이도 한참 어린 주제에."
"내가? 넌 몇살인데?"
"난 올해 28이야. 넌 끽해야 대학생 정도 일테고. 맞지?"
"아니. 틀렸어. 내가 너보다 오빠야."
"거짓말 마. 내가 경찰이란 걸 잊지말라고. 신원조회 한 방이면 신상 터는 건 일도 아니니까."
"물론 위장 신분이라 주민등록상 나이는 어려 보일거야. 하지만 실제론 서른 넘었지."
"그게 무슨···."
"윤보미 너만 신분을 속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나도."
도훈은 순간 플레이어라고 밝히는 것을 망설였다.
'이거 P워드 그대로 말해도 되나?'
[어차피 서로 알고 있긴 하니, 적당히 비슷한 말로 대치해도 될 것 같습니다. 직접적인 언급은 아니니까요.]
"플레이하는 사람이니까. 알지? P로 시작하는."
보미가 팔짱을 끼더니 못 믿겠다는 투로 물었다.
"대체 어떤 식으로 내 위장신분을 간파했는지 이해가 안되는군."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야."
"난 널 믿지 않아. 아니 정확히는 누구도 믿지 않지. 자꾸 그런 식으로 사실을 감추면 우리가 계속 나누는 대화가 무의미할 것 같은데."
보미가 금방이라도 일어날 기미를 보였기 때문에 도훈이 진정 시켰다.
"워워. 보기보다 성격이 급한 타입이군. 다짜고짜 공격 마법을 쓸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알았으면 조심해."
"일단 네 정체를 알게 된 것은 한송이 때문이야."
"한송이?!"
윤보미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송이를 네가 어떻게 알아?"
"같은 대학에 재학중이야. 우연히 알게 되었지."
"흐음. 계속해."
"한송이에게 꽤 은혜를 베풀었더구만? 아이템에 대한 설명을 듣고 P의 개입을 인지했지."
"한송이는 내가 경찰대 다닐 때 과외했던 학생이었어. 하지만 그때도 변장하고 다녔던 것 같은데···."
"알아. 졸업한 뒤 개명을 했더군. 그건 제주도 도착해서 알게 되었지."
"내가 제주도에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지?"
"사실 운이 좋았어. PK단의 보고서를 입수했거든. 제주도 학살자에 대한."
"그건···."
충분히 사실을 밝힌 도훈은 이번엔 반대로 보미에게 물었다.
"나는 최대한 사실대로 말했어. 이젠 내가 너한테 물을 차례야.
어째서 너같은 실력자가 제주도에서 숨어 지내는 거지? 경찰 신분은 또 뭐고?"
보미는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도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정보창이 서로 통하지 않다보니, 대화의 진실성에 대해선 스스로 가늠해야 했다.
보미의 입장에서도 정보가 완벽히 차단된 상대와 대화를 나누기는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신중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윤보미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경찰이 되려고 했어. 그러다 선택받았지."
"하고 많은 직업중에 어째서 경찰이지? 솔직히 너같은 미인이 경찰을 꿈꾸는 사례는 흔치 않을 것 같은데."
도훈은 진심으로 궁금해 물었다. 아이돌, 아니 모델이나 연기자를 했어도 차고 넘치는 외모였다. 외모가 곧 경쟁력이 되는 시대에 굳이 힘들고 어려운 경찰대를 진학한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건···."
윤보미가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어차피 숨긴다고 없는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
윤보미는 본래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물론 예쁜 외모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그때도 얼짱으로 이름을 날리긴 했다. 문제는 그를 스토킹하는 고등학생이 등장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
"싫다고 했는데 집요하게 쫓아다니더라고. 도저히 말로는 설득이 안돼서 한번은 아버지가 직접 찾아가 혼을 낸 적도 있었어."
그게 화근이 되었다.
조현병을 앓고 있던 고등학생은 윤보미와 자신의 만남을 방해 하는 그녀의 부모님을 적대적인 존재로 인식했고, 어느날 집에 식칼을 들고 찾아와 그의 부모를 무참히 살해했다.
"···택배기사인 척 위장을 했더라고. 휴일에 집에서 쉬고 있던 부모님과 언니가 나때문에 영문도 모르고 죽었어. 아마, 나도 집으로 돌아갔다면 분명 그때 죽었을 테지."
범인은 윤보미가 귀가할 때까지 집에서 기다리다, 비명 소리를 수상하게 여긴 이웃집에서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현장에서 붙잡혔다고 한다.
"범인은 잡혔지만, 아직 고등학생이라는 점과 정신병이 있다는 이유가 참작되어 감형되었어. 나는 정신병자 때문에 온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되었는데 말이야."
윤보미는 이후 친척집에 얹혀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가족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중학생에 불과한 소녀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자살 시도를 몇번이나 했지. 손목도 긋고, 목을 매고, 옥상에서 떨어지려고도 해봤어. 그럴때마다 이상하게 살아나더라고. 마치 누군가가 내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흠."
"마지막 자살시도 때였나? 갑자기 신탁이 내리더라고. 나의 소원을 이뤄주겠노라고."
"소원?"
"그땐 감옥에 있는 범인을 내손으로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 뿐이었거든."
"아···."
"당연히 제안을 받아들였지. 복수를 하게 해준다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잖아. 대신 경찰이 되라는 거야."
"복수와 경찰이 대체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는데."
"너도 알다시피 우린 민간인을 해쳐선 안 되잖아."
"그건 경찰도 마찬가지 아냐?"
"물론 그렇지. 그 때문에 일가족을 몰살시키려 했던 그 새끼가 아직까지 살아있는 거니까. 경찰이 오히려 범죄자를 지켜주는 셈이지."
"근데 왜 하필 경찰을···."
"경찰은 위급 시에 스스로 정당방위를 할 수 있어. 특히나 강력 범죄자일수록 더더욱."
"서, 설마."
도훈은 순간 팔에 소름이 돋았다.
윤보미가 경찰이 된 것은, 스스로 범죄자를 정당방위란 이름으로 단죄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미션과 업적을 수행하면서 점점 능력을 갖추게 됐어. 네가 보고서에서 읽은 것처럼 PK단을 몰살 시킬만큼 강력한 공격 마법을 익혔지."
"경찰대 다닐 적 과외하던 한송이와는 무슨 관계였지?"
"한송이···. 걔를 보니까 어렸을 때 내가 생각나더라고."
"응?"
"그대로 두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어. 자존감도 너무 떨어져 있고, 혼자서는 헤쳐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느낌이랄까?"
"그래서 한송이를 구제해 준건가?"
"모두가 우리처럼 은총을 받진 못하니까."
"흐음. 이제 둘의 관계가 이해가 되는 군."
"경찰대 다닐 적에도 가명을 쓰고 얼굴을 감췄어. 네 말대로 본 얼굴로 경찰을 하기는 부담스럽더라고. 사람들이 나를 볼때 편견을 갖는 것도 싫었고."
"제주도 사건은 그럼 어떻게 된 거야?"
"경찰대 졸업하고 제주도로 발령이 나게 되었어. 운이 나빴지.
하고 많은 곳 중 제주도라니. 어쨌든 몇년 버티면 다시 뭍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렇게 발령 나기 전 잠깐 근무지를 둘러보러 왔을 때···."
"하필 제주지부 PK단에게 걸린 거군."
"맞아. 처음엔 한 두놈이었는데, 추적이 붙으면서 계속 쫓기는 신세가 됐어. 마지막엔 운좋게 놈들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었고."
"그러고선 제주도에 경찰로 눌러 앉았다?"
"다행히 놈들이 목격한 얼굴은 내 본 얼굴이었거든. 신분증도 가명으로 쓰던 윤소미라는 이름이었고. 나름 여행 목적으로 왔는데 그때까지 역용마스크를 쓸 필요는 없지 않아?"
"이해해. 그 답답한 걸 몇년간 쓰고 다녔다니. 지금도 쓰고 다니고."
"살려면 방법이 없더라고. 지금도 시간이 꽤 흐르긴 했지만, 여전히 본 얼굴을 드러내는 게 두려워. 언제 어디서 PK단이 들이 닥칠지 모르니까."
"지금은 안심해도 돼."
"무슨 소리야?"
"나에게 PK단 경보기가 있거든. 근처에 오면 알람이 울릴 거야. 현재까지 경보가 울린 적은 없었고."
"그런 아이템이 있었다고? 마켓에서 파는 거야?"
"아니. 기억은 잘 안나는데 미션인가 업적인가 하다가 우연히 받은 거야."
"아···. 탐나는 아이템이구나. 그나저나 도훈이라고 했지? 내 이야기는 충분히 했으니 이제 네 이야기를 들려줘. 넌 무슨 클래스야? 사명이 뭔데?"
보미의 물음에 도훈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가족이 살해당한 끔찍한 과거까지 숨김없이 밝힌 윤보미를 생각하면 사실대로 모두 털어놔야 될 것 같으면서도, 진실을 말했다간 오히려 그녀가 자신을 쓰레기처럼 볼 것이 두려웠다.
'이런···. 보미는 정의구현을 위해 경찰 플레이어가 되었는데, 나의 경우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나중에 주인님이 거짓말 했다는 걸 알면 서로간의 신뢰가 깨질텐데요.]
'그렇다고 내가 난봉꾼이라고 밝히라고? 날 완전 쓰레기 취급할 텐데?'
[진퇴양난이군요.]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한 순간이지.'
[뭐라고 둘러대시게요?]
'일단 지어내 봐야지.'
"나는···."
"응."
"나는 선생이 사명이야."
"선생? 너 그럼 교사야?"
"아니 아직은 대학생. 사범대 다니고 있어."
"신기한데? 다른 존재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어. 정체가 밝혀진 유명한 위인들도 있으니까. 그런데 선생님이 사명인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럼 뭘 가르치는 거야?"
"일종의 보건 교육이랄까?"
"뭐? 보건 교육? 남자 보건 교사야?"
"음, 설명하기 복잡한데, 아무튼 그런 쪽이야."
"난 경찰대만 다녀서 일반대 전공이나 교직 쪽은 잘 몰라."
"어쨌든 나는 너처럼 거창한 이유는 없었어. 사실 아까 말했지만 나는 지금의 나이가 아니야."
"그럼?"
"원래는 임용고시만 9수 하다가 실패하고 비관 자살하려던 30대 중반이었어."
"아···."
윤보미는 자신이 자살 직전 플레이어가 되었기 때문에 도훈도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신의 권능으로 20대 시절로 되돌아 갔지. 나이에 비해 너무 어려 보여서 나중에 신분증은 위조로 바꾸었고."
"그래서 지금 대학생인거야? 실제론 30대 중반이고?"
"그래."
"아까보니까 특이한 기술을 쓰는 것 같은데, 나와는 다른 마법을 익힌 건가?"
"내공이라고 불러. 일종의 무술이지."
"아."
"너처럼 마법을 쓰는 타입은 아니야. 굳이 말하면 타격기를 주로 쓰는 편이고."
"아까 그 불꽃은 뭔데 그럼?"
윤보미는 도훈이 주먹에 불덩이를 일으킨 것을 보고 자신과 비슷한 마법사 계열의 일종으로 착각하던 차였다.
"내공을 태워서 만들어낸 거야. 너처럼 막 던지거나 할 수 있는 종류는 아니고."
"흐음. 뭔가 복잡하지만 대충은 알겠어. 그럼 제주도까지 나를 찾아온 목적이···."
"너도 PK단에 쫓기고 있고, 나 역시 마찬가지 신세니 힘을 합쳐볼까 해서."
"우리 둘이서?"
"응. 하나보단 둘이 낫지 않겠어?"
윤보미가 지체없이 대답했다.
"아쉽지만, 네 제안은 사양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