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624화 (1,604/2,000)

1624. 제주도 푸른 밤-54-

* * *

서귀포 경찰서 앞은 몰려드는 취재진으로 북새통이었다.

게스트 하우스 몰카범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경찰서로 몰려왔던 기자들은, 난데 없이 올레길 실종 사건이 부녀자 납치 및 살인 미수로 확대되자 특종이 떴다며 방송국에 연락해 카메라맨을 비롯한 방송 관계자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제주도 내에 모든 방송매체가 총동원된 것처럼 북적이는 경찰서 앞을 도훈이 유유히 걸어갔다. 어느새 말끔히 차려입은 그는 가짜로 만든 기자 패용증을 들고 자유롭게 경찰서 안을 돌아다녔다.

"최초 신고 후 실종자 조사를 이어가던 저희 서귀포 경찰서는, 부녀자 납치 쪽에 무게를 두고···."

정복을 차려입은 서귀포 경찰서장은 급조된 브리핑 전문을 낭독하는 모습에 검은 뿔테 안경을 눌러쓴 도훈이 피식 웃었다.

'웃기고 있네. 막상 잡은 건 난데, 왜 지들이 공을 가로채는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심지어 사건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던 사람도 윤보미 경윈데요.]

'하여간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저게 문제야. 남의 공을 가로채 자기것처럼 만드는 능력하나는 탁월하단 말이지.'

[억울하십니까?]

'억울할 게 뭐야. 어쨌든 실종자는 무사히 구출되었고, 범인은 법의 심판을 받을텐데. 현장에 증거가 고스란히 남아있으니 재판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을 건 다행이네.'

[그나저나 윤보미 경위는 어디로 갔을까요? 브리핑 현장에도안나타난 걸 보면요.]

'그러게. 특진감을 넘겨줬더니 코빼기도 안 비치네.'

브리핑 현장에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었던 윤보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도훈은 기자 패용증을 들고 경찰서 내부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PK단의 위협으로 신분 노출을 꺼린 윤보미가 자신의 공을 다른 사람에게 모두 넘긴 것 같았다.

'이렇게 편하게 들어올 수 있는 걸, 홀딱 벗고 투명인간 상태로 들어왔다니 나참.'

도훈은 이미 한 번 서귀포 경찰서를 와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내부 구조를 어느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그래도 조심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뭘?'

[윤보미 경위와 함께 잠복 수사하던 형사에게 얼굴을 들켰잖습니까?]

'아, 그 하와이안 셔츠 입은? 뭔 상관. 진범이 잡혔는데 지가 나를 어쩔 거야?'

[그래도 현직 경찰을 때려 눕히셨으니.]

'됐어. 그땐 선글라스 쓰고 있어서 제대로 못 알아볼거야. 지금은 누가봐도 기자같아 보이니까.' 도훈은 만능 변장세트를 이용해 완벽하게 변신한 상태였다.

말끔한 얼굴에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진녹색의 바바리 코트까지 걸치니 영락없는 기자차림이었다. 특히 사건 보고를 위해 다른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든 상황에서, 위조한 기자 패용증은 그 자체가 프리패스권이나 마찬가지.

'흐음, 대체 어디로 간 걸까?'

[혹시 본인의 지구대로 복귀한 게 아닐까요? 윤보미 경위는 경찰서가 아닌 중문지구대 소속이니까요.]

'평소라면 그렇겠지만, 사건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해 있었는데 설마 벌써 돌아갔을라고. 지휘 체계상 분명 수사부에 보고를 해야 할걸?'

도훈이 윤보미를 찾아 경찰서 내부를 돌아다니는데 건물 구석에서 누군가 큰 목소리로 통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이건 윤 경위님이 해결한 사건이지 않습니까? 그 공을 어째 저한테···."

도훈은 통화를 하는 사내가 일전에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잠복했던 형사라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어? 윤보미랑 통화 중인거 같은데?'

"아니, 경위님! 경위님! 나참!"

도훈이 귀를 기울여 통화 내용을 엿들으려고 했으나 이미 통화는 끊긴 상태였다. 전화를 끊은 김형사는 어이없어 하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니, 아무리 승진할 때까지 시간이 남았다고 해도, 이 정도 사건 실적이면 동기들보다 훨씬 앞서나갈 수 있을텐데 굳이 나한테 양보하는 이유를 모르겠네?"

그때 도훈이 김형사에게 다가갔다.

"저, 형사님?"

"네? 누구시죠?"

김형사는 말쑥한 기자 차림의 도훈이 접근하자 경계하는 태도를 취했다. 기자들을 믿고 사건에 대해 발설했다가 몇 번 뒤통수를 맞은 뒤로는 부쩍이나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혹시 핸드폰 한 번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급히 신문사에 전화를 해야 하는데 배터리가 떨어져가지고요. 아, 죄송합니다. 저는 제주도민일보의 이도훈 기잡니다."

김형사는 패용증의 사진과 도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건넸다.

"납치 사건 보도 때문에 오셨습니까?"

"네. 맞습니다. 급한대로 저만 먼저 달려왔는데 카메라를 안 챙겨 와서요. 아, 폰에 비번이 걸려있네요."

도훈이 다시 폰을 돌려주자 김형사가 비번을 해제해 다시 주며 물었다.

"이도훈 기자님, 근데 혹시 저희 어디서 만난 적 있던가요? 되게 낯익은 얼굴이라···."

"사건사고 때문에 경찰서 드나드는 중에 뵀을지도 모르겠네요."

도훈이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며 넘어갔다. 김형사는 눈썰미가 좋은 편이긴 했지만, 자신을 습격했던 여행객 차림의 도훈과, 기자 차림의 도훈의 분위기가 너무 달랐기 때문에 얼굴이 비슷하게 생긴 줄로 착각했다.

도훈은 김형사의 핸드폰을 열어 가장 최근에 통화한 번호를 확인하고는 아무곳이나 전화를 걸었다,

"예, 이도훈입니다. 급하게 경찰서로 넘어 오느라 카메라를 못챙겨서요. 네, 네. 입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전화 잘못 거신거 같은데요? 누구세요?

도훈은 당황하는 상대방의 물음을 무시하고는 곧바로 전화를 끊고 김형사에게 돌려줬다.

"덕분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혹시 성함이?"

"강력계 김관굽니다."

"아하, 네 김관구 형사님이시구나.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사회부로 넘어온 지 얼마 안돼서 인맥이 부족하거든요."

"그러세요."

"저는 그럼 카메라 좀 받으러···."

"잠시만요."

도훈이 돌아서서 가려는데 김형사가 도훈을 붙잡았다.

"네?"

[혹시 들킨 거 아닙니까?]

'설마. 분명 못 알아채는 눈치였는데.'

"혹시 기사 쓰시면 중문 지구대 소속 윤보미 경위님 이름도 꼭 넣어 주십시오?"

"윤보미 경위요?"

"네. 이번 사건 해결에 혁혁한 공을 세운 분입니다. 사건 브리 핑에선 굳이 이름을 빼달라고 했다고···."

"알겠습니다. 참고하죠."

김형사와 헤어진 도훈은 그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윤보미가 왜 노출을 꺼리는 지 전혀 모르는군. 저러면 좋아할 줄 알았나봐.'

[그래도 제법 의리가 있는 것 같은데요.]

'의리인지 아니면 연정인지 모르지.'

[연정이요?]

'윤보미의 이름을 말할 때 살짝 떨리는 목소리였거든. 어쩌면 여자로서 좋아하는 지도.'

[허어, 플레이어를 좋아하는 일반인이라니. 거참 골치 아프게 됐군요.]

'왜? 나도 여자들한테 인기는 많은데.'

[주인님과는 경우가 다르죠. 주인님이야 업적이나 미션 때문에 자연스럽게 맺어진 관계지만, 윤보미는 되도록 개인적인 관계를 만들지 않는 편이 유리할테니까요.]

'그런가?'

[잊지 마십시오. 플레이어는 자신의 정체를 민간인들에게도 노출해선 안됩니다.]

'하긴.'

다시 경찰서 밖으로 나온 도훈은 아까 김형사의 폰에서 본 번호를 기억해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낯선 전화번호라 그런지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일부러 받지 않는 눈치였다.

'통화를 피하는데?'

[PK단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그럴 겁니다. 낯선 사람 전화는 받지 않는지도 모르죠.]

'아무리 그래도 경찰이 민원인의 전화를 피하는 게 말이 돼?'

[혹시 개인 폰이 아닐까요? 업무용 폰은 따로 있고요.]

'그렇다면 말이 되는구나.'

도훈은 윤보미의 조심성이 유난한 편이라 여기며, 이번엔 문자를 남겼다.

-이도훈 : 문자 보면 전화줘요. 불꽃남자입니다.

[불꽃남자라뇨?]

'아까 살짝 능력을 보여줬잖아. 알아먹지 않을까?' 잠시후 도훈의 예상대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번호는 그가 알고 있던 윤보미의 폰이 아니라, 공중전화번호였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그 사이 공중전화로 달려가 전화를 건 것이었다.

-누구야 너.

"내 입으로 정체를 밝히기 곤란한 사람?"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그 정도 정보력도 없을까봐?"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일단 만나서 얘기해."

-아깐 당황해서 놓아주었지만 다시 만나면 죽일지도 몰라.

"침대에서 복상사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야."

-미친놈.

"경찰서로 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여기라면 네 동료들도 많으니 안심이지 않겠어?"

-너 딱 기다려. 혹시나 허튼 수작 부렸다간 네 목이 남아나지 않을 거야.

"휘유, 협박한 번 살벌하게 하네."

뚝-

전화가 끊기고 도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윤보미 이쪽으로 온다는데?'

[왜 자꾸 도발을 하십니까? 상대는 주인님을 아직 못 미더워 하는 것 같은데요.]

'PK단이면 절대 취하지 않을 것 같은 멘트를 날린 것 뿐이야.

감언이설로 꼬드겼으면 오히려 더 의심했을 걸.'

[아무튼 조심하십시오. 주인님은 아직 윤보미 양의 진짜 실력도 모르고,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니까 만나서 확인해봐야지.'

도훈이 계속 기자인척 경찰서 부근을 서성이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쓴 젊은 여성이 빠르게 다가왔다.

'윤보미?'

통화가 끝나고 5분도 지나지 않아서 도착한 걸 보면 아마도 근방에서 대기했던 모양이었다.

기자차림의 도훈에게 다가온 윤보미가 고갯짓을 하며 장소를 가리켰다.

"횡단보도 건너편 커피숍 이층으로 와. 여기선 아는 체 말고."

"경찰서에서 말고?"

"······."

윤보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쌩하니 스쳐갔다. 아마도 아는 사람과 부딪히면 곤란한 모양이었다. 도훈은 윤보미의 뒤를 따라 커피숍으로 이동했다. 떨어져 걷느라 도훈이 윤보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모양새였다.

'뒤태만 봐도 미인인 줄 알겠네. 이곳 경찰들은 다 눈이 삐었나? 저런 미인을 못 알아보고.'

[평소엔 저런 복장을 하지 않았겠죠.]

윤보미의 의상은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몸선이 확연히 드러나는 쫙 붙는 청바지에 상의도 상당히 타이트했다.

거기에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하고 있으니, 평소 그녀와 알고 지낸 동료들도 누군지 몰라볼 행색이었다.

커피숍 2층으로 올라온 윤보미가 한 쪽 구석에 자릴 잡았다. 도훈은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 윤보미가 앉은 테이블 맞은편에 자릴 잡았다.

마스크로 간신히 눈만 보이는 윤보미가 도훈을 향해 물었다.

"너 뭐야."

"이도훈."

"정체가 뭐냐고."

"네가 예측한 대로야."

도훈이 위장을 위해 쓰고 있던 뿔테 안경을 벗었다. 잘생긴 그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자 윤보미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역용마스크를 쓴다고 모두를 속일 순 없지. 윤보미 경위. 아니, 윤소미라고 불러야 하나? 아님 윤가람?"

"어, 어떻게 그 이름을···."

"내가 정보력이 뛰어나서 뒷조사를 좀 했지."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놀렸다간 제 명에 못 살 걸?"

"휘유. 얼굴은 예쁘장하게 생긴것 같은데 입은 되게 험하네."

마스크 너머로 보이는 윤보미의 얼굴은, 경찰로 위장할 때의 못생긴 얼굴이 아니었다. 그가 사이코메트리 영상으로 기억하고 있던 진짜 얼굴이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 치워. 난 지금 당장이라도 네 놈 목을 날려버릴 수 있으니까."

"내가 아까처럼 당하고만 있을 까봐서?"

"······."

윤보미도 도훈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공격을 피하거나 막아내는 데 그칠 뿐 한 번도 제대로 된 반격을 안한 것이었다.

"차지희는 대체 어떻게 찾아냈지?"

"발품 팔아서."

"자꾸 말을 그딴식으로 하는데···."

"왜 나한테 자꾸 묻기만 하지? 나한테 뭐 맡겨놨어? 그리고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데 마스크는 좀 예의가 아니지 않아?"

"······."

윤보미도 자신의 태도가 지나쳤다는 걸 의식했는지 조심스럽게 마스크를 벗었다. 마스크를 벗은 윤보미는 확실히 엄청난 미인이었다.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한송이 말이 맞았구나. 자긴 비교도 안될 거라더니, 일반인 레벨이 아니네.'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그 예쁜 얼굴을 감추고 다니느라 몹시 힘들겠어."

"뭐?"

"PK단에 쫓기고 있다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정보력이 우수한 편이라서 말이야. 실은 나도 같은 입장이기도 하고."

"그럼 역시 넌···."

"서로 카드패는 다 까보인 것 같으니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신벌은 피해야 하니까."

윤보미는 도훈이 플레이어라는 걸 확인한 뒤 살짝 긴장이 풀리는지 경직되었던 자세를 바로 고쳤다.

"휴-. 진작 밝히지 그랬어? PK단에게 덜미를 잡힌 줄 알고 얼마나 놀랐다고?"

"몇번을 말했는데 들을 생각도 없던 건 누군데? 덕분에 가슴팍에 한대 등판에 한대 얻어 맞았잖아."

윤보미는 자신의 오해로 도훈을 다치게했다는 생각에 곧바로 사과했다.

"미안. 다친 곳은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아. 나중에 골병들것 같아. 대체 나한테 무슨 스킬을 쓴 거야?"

[주인님 내상은 모두 회복되지 않았습니까?]

'나한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조금이라도 협조적으로 나올테니까.'

"아···. 맞다. 에너지탄에 맞았었지? 그건 겉보다는 내부에 충격을 가하는 스킬이야. 이를 어쩐다?"

윤보미가 미안함에 쩔쩔매자 도훈이 갑자기 꾀를 내기 시작했다.

"미안하면, 치료해 주든지."

"치료라고?"

"혹시 내상 치료 할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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