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2. 제주도 푸른 밤-52-
* * *
"내가 꼭꼭 숨으랬지? 뒤지기 싫으면."
이렇게까지 화가 난 적은 오랜만이다.
창고에서 차지희의 참혹한 모습을 발견한 순간, 시쳇말로 눈이 뒤집혀 버렸다.
내가 절대 착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나는 정의의 사도는 더더욱 아니며, 여자들의 순정을 짓밟고 기만하는 한낱 난봉꾼에 불과하다.
나 역시 수많은 여자들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었으며, 두번 다시 안 볼 사람에게 매몰차게 대한 적도 많았다.
어쩌면 몇가지 범죄를 저지르고도 운좋게 법적 처벌을 피한적도 있었을 것이고, 지금도 누군가는 나를 나쁜 놈이라고 매도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정말로 아니다.
사람이 이유없이 사람에게 저렇게 하면 안되는 것이다.
지희는 내가 제때 발견하지 못했다면 비참하게 죽을 운명이었다. 구덩이까지 미리 파놓은 놈의 의도는 뻔했다. 살아 숨쉴 때 멋대로 가지고 놀다가, 숨이 끊어지면 그대로 매장해 버릴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 사이 희생자가 겪어야 했을 고통과 공포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놈이 특별히 차지희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거나, 여행 객에 불과한 그녀가 놈에게 씻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도 아닐 것이다.
저 놈은 그저 자신보다 약한 여성을 희생양 삼아 저열한 욕망을 충족하려 했을 뿐이었다.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이다. 산채로 갈아마시고 싶을 지경이다.
"사, 살려줘! 경찰에 모두 자수할 게!"
"···자수?"
"그, 그래. 내 죄를 모두 인정할 테니···."
"그래. 죗값을 충분히 받을 수 있도록 특별히 살려는 드릴게.
오체불만족인 상태로 감방 생활을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히, 히익."
[주인님.]
'왜?'
[정말 불구로 만드실 작정은 아니죠?]
'그러면 안돼? 저 새낀 차지희를 죽일 작정이었다고. 대놓고 죽이진 않았어도 죽도록 방치 했겠지. 그리고, 아까 차지희 몸에서 희미하게 정액 냄새까지 나더라? 저 새끼가 불쌍한 여자를 유괴하고 감금한 것도 모자라 겁간까지 했다는 소리야.'
[아무리 그래도 경찰에 인계하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주인님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 되지만, 과잉 진압을 하실 경우 자칫 신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받을게.'
[···네?]
'신벌이 무서워서 저런 쓰레기 조차 처단하지 못한다면 이런 능력은 있을 필요가 없는 거잖아.'
[아, 아니 주인님.]
로시의 만류에도 나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자수 의사를 표명한 놈에게 필요 이상의 폭력을 가한다면 나 역시 가해자가 될 것이다. 법의 단죄는 어찌어찌 피해도, 능력 남용에 따른 신벌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수할 값어치는 있다.
차라리 신벌을 받을 지언정 놈을 반쯤 죽여놔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제, 제발 살려줘! 나, 나도 따지고 보면 불쌍한 사람이라고!"
갑자기 범인이 즙을 짜기 시작했다.
역겹기 짝이 없었다.
"어,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학대로··· 하악!"
귀가 썩을 것 같았다. 더 이상 놈이 입을 놀리지 못하게 쇠사슬로 놈의 뺨을 후려쳤다. 볼이 찢겨져 나가며 놈의 입 주변이 피투성이가 됐다. 떨어져 나간 살점에는 하얀 이도 몇개 섞여 있었다.
"크하악!"
"네 놈 가정사 따윈 관심없으니까 집어치워. 설사 네놈이 정말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한들, 그것이 무고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짓밟을 권리가 되는 건 아니니까."
"으윽, 흐윽!"
볼이 뜯겨져 나간 놈의 입에서 핏물이 왈칵 쏟아졌다. 경악과 공포에 질린 놈이 뺨을 감싸쥐고 도망쳤다. 하지만 이미 한 쪽 다리가 너덜거리는 상황에서 얼마 못가 철푸덕 주저앉을 뿐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네놈을 죽이진 않는다고. 다만 죗값은 받아야지. 평생 감옥에서 썩으면서."
"흐으악. 흐으!"
놈은 어떻게라도 살아보려고 포복자세로 기어갔다. 남의 목숨은 하찮게 여긴 놈이, 제 목숨은 끈질지게 붙들고 있는 모습이 역겨워 참을 수가 없었다.
[주, 주인님. 지금이라도 그만 두시는게···.]
'분근착골만.'
[네, 네?]
'겉보기에 외상은 그리 심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온 몸의 뼈를 모두 조각조각 바스러 지겠지. 사지가 붙어만 있을 뿐, 평생 제 발로 걷지도, 두 손도 쓰지 못하도록 만들 겠어.'
[아아, 주인님 이러면 정말 신벌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제발 자제를···.]
'내가 상관없다고 했잖아.' 놈의 발목을 붙들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만두지 못 해!"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목소리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단순히 목청이 큰 것이 아니라, 내공을 실은 사자후였기 때문에 몸이 반응한 것이었다.
"뭐야?"
그 순간 누군가 공중에서 날아들었다. 날아들었다고 표현한 데는 한치의 과장도 없었다. 정말로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내 앞에 착지했으니까.
체조 선수보다 우아한 동작에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윤보미?'
"이런 천하의 악랄한 놈! 부녀자 납치도 모자라 이젠 무고한 시민까지 해치려고!"
"잠깐, 뭐? 내가? 납치?"
"네 놈이 잠복중인 김형사를 공격한 여성 유괴범 맞지?"
"잠깐 지금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
"사, 살려흐헤요!"
그때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범인이 갑자기 윤보미 쪽으로 바득바득 기어가기 시작했다. 누가봐도 내가 범인을 괴롭히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윤보미는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잠깐, 나는···."
[주인님! 플레이어끼린 절대로 정체를 밝혀선 안 됩니다!]
'뭐라고?'
[잊으셨습니까? 플레이어는 자신의 신분을 다른 플레이어에게 절대 노출해선 안되는 규칙을요!]
'지금 윤보미가 나를 범인으로 오해하고 있잖아? 그럼 설명을 해줘야 할 거 아니야?'
[그렇다 하더라도 절대 주인님 입으로 밝히시면 안됩니다! 플레이어의 룰을 어기면 신벌 정도가 아니라 곧바로 능력을 회수당할지도 모릅니다.]
'뭐, 뭐라고? 그럼 어떻게 내가 플레이어라는 걸 밝히라는 말이야? 나는 윤보미가 플레이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잖아!'
[주인님처럼 윤보미도 직접 깨닫게 해야죠. 하지만 절대 발설해선 안됩니다. 그건 플레이어끼리의 룰을 위반하는 겁니다.]
나참. 이게 무슨 개떡같은 법이란 말인가?
호부호형을 못하는 홍길동도 아니고, 플레이어를 플레이어라고 부르지도 못한다니?
하지만 능력 회수 조치라는 로시의 엄포가 발목을 잡았다. 만에 하나 진짜로 내 능력을 강탈 당한다면, 나는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이다.
"뭐라고?"
"그러니까, 내가 범인이 아니라고."
"웃기고 있네! 차지희, 아니 네 놈이 납치한 여자는 어딨지? 아직 살아 있는 거지?"
"저쪽 창고에."
묻는 말에 대답을 했을 뿐인데 오히려 윤보미는 그것으로 인해 나를 더욱 오해하는 모양이었다.
"여자가 아직 안 죽은 것을 다행으로 알아. 안 그랬으면 너는 내 손에···."
"사, 사혀흐헤오."
그때 물개처럼 바닥을 기어가던 범인이 윤보미의 발 앞까지 다가가 다시 말했다. 보미는 아구창이 뜯겨나간 놈의 상처를 확인하더니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게다가 이젠 살인미수까지 추가되었군."
"저 놈이 범인이라니까?"
아무리 진실을 밝혀도 윤보미는 내 말을 들을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하필 잠복해 있던 김형사와 투닥거린게 화근이 된 것 같다.
"난 중문 지구대 소속 윤보미 경위다. 험한 꼴 보고 싶지 않으면 그 무기 내려놓는 게 좋을 거야."
"무기?"
손에 감긴 쇠사슬을 내 무기로 오해하는 보미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쇠사슬을 풀어 바닥에 내 던졌다.
"미치겠네. 나 진짜로 범인 아니라고. 저 새끼가 범인이라니까?"
"그건 서에 가서 말하고."
경찰임을 밝힌 윤보미가 뒷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냈다. 이대로 있다간 꼼짝없이 범인으로 몰릴 위기였으나, 그렇다고 무턱대고 같은 플레이어라고 정체를 밝힐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환장할 노릇이었다.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해. 저 사람이 범인이니까 저 사람도 나랑 같이 수갑 채워. 그러면 나도 순순히 따를테니."
나의 제안에 윤보미가 표정을 굳혔다. 못생긴 얼굴로 위장한 역용마스크가 기묘하게 일그러진다.
"···말귀를 전혀 못알아듣는 녀석이군."
"뭐라고?"
"말로 할 때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꼭 저렇게 매를 번다니까?"
갑자기 윤보미가 오른 주먹을 수평으로 들더니 내 가슴을 향해 정조준했다. 거리가 다소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행동이 무슨 의도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지금 뭐하는."
그 순간, 갑자기 보미의 오른 주먹에 푸른 기운이 맺히더니 그대로 나를 향해 폭사되었다.
[주인님! 피하십시오! 매직 미사일입니다!]
'뭐라고?' 직선으로 쏘아진 에너지탄은 순식간에 내 가슴으로 쏘아졌다.
피하려고 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에 순간적으로 몸이 반응할 수 없었다.
굳이 변명 하자면 피하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이기도 했고, 발사타이밍을 아예 가늠조차 못 했기 때문이었다.
퍼엉-!
에너지 탄이 가슴에 부딪히자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그 충격은 마치, 거인이 당구 큐대로 내 가슴을 정면으로 찍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대로 뒤로 날아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간만의 다운이다.
'크헉, 뭐, 뭔데 이 기술은?'
[매직 미사일입니다. 물리적 충격을 주는 풍계열 기초 마법 중 하나 입니다.]
'이게 기초 마법? 아주 갈비뼈가 다 나간 것 같은데?
명치 위를 정면으로 강타당해 숨이 턱 막혔다.
이런 고통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스캔결과 주인님의 근골은 멀쩡합니다. 주인님의 반탄강기가 일정 정도 데미지를 흡수했습니다. 다만 충격량이 워낙 커 뒤로 튕겨 나간 겁니다.]
"후-. 그러니까 말로 할 때 들었···."
"으으, 비겁하게 기습이나 하다니."
나는 두 발을 반동시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본 윤보미가 경악스럽게 나를 쳐다보았다.
"너, 너 뭐야? 어떻게 그걸 맞고도."
"뭐겠어? 한 번 생각해보라고. 매직 미사일을 맞고도 멀쩡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굴지 말이야."
어째 그 말은 실수였던 것 같다.
윤보미가 불쑥 살기를 드러내더니 온 몸에 에너지를 끌어 모으는 것이었다. 얼굴을 감추고 있던 역용마스크가 해제되며 본연의 얼굴이 드러날 만큼 강력한 분출이었다.
"PK단!"
이젠 하다못해 PK단으로 몰리고 말았다.
일진 한 번 더럽네.
* * *
"어? 김형사님 오늘 비번 아니십니까?"
푸드 트럭을 반납하고 경찰서에 들른 김형사를 향해 다른 후배가 인사를 건넸다.
"어, 깜빡하고 놔두고 간 서류가 있어서."
"에이, 쉬는 날엔 그냥 푹 쉬시지 무슨 집에서까지 사건 파일을 들춰 보신다고."
"그냥 오가는 길에 근처 들러서 생각나서 말이야. 어? 배형사출동갔어? 자리에 안 보이네?"
"배 형사님이요? 배 형사님은 지금 어제 중문 지구대에서 붙잡은 몰카범 취조하러 가셨습니다."
"몰카범?"
"못 들으셨어요?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수년 째 몰래 방에다 몰카 설치해서 손님들 촬영한 사건요. 어제 중문 지구대에서 인계된 사건입니다."
"아, 들은 것 같다. 나도 좀 가볼까?"
중문 지구대에 접수된 사건이라는 말에 김형사가 관심을 갖고 취조실로 향했다.
'요새 중문 쪽에 사건사고가 많네. 윤 경위님 안그래도 바쁜데 더 바빠지겠구먼.'
윤보미가 김형사에게 호감을 가진 것처럼, 김형사도 윤보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소개팅 건도 윤보미와 친해지기 위해 일부러 건수를 만들어 낸 것에 불과했다.
'참, 괜찮단 말이야. 뭐 솔직히 얼굴 이쁘다고 여잔가? 마음이 착해야 여자지.'
김 형사는 몰래 훔쳐본 윤 경위의 큼지막한 가슴을 떠올리더니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가슴도 착하면 더 좋고.'
윤 경위 앞에선 절대 내색하지 않았지만, 김형사는 어떻게 하면 윤 경위와 친해질 수 있을지 고민했다. 비번을 낸 휴식일에 윤 경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근데 다른 것보다 직급이 영 안 맞단 말이지.'
윤 보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김형사가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 그녀가 자신보다 나이어린 상급자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의외로 고리타분한 생각을 가진 김형사는 최소한 윤보미와 같은 직급까진 되어야만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될 것 같았다.
'아아, 1계급 특진만 하면 딱인데 어디 건수 하나 안 떨어지나?'
취조실에 도착한 김형사는 녹음실에서 녹음을 뜨고 있는 다른 형사들과 마주쳤다.
"어? 김형사가 여길 왜?"
"충성, 몰카범 취조한다길래 구경 좀 왔습니다."
"오늘 비번 아니었어?"
"할일 없어서 잠깐 들렀어요."
"쯔쯔.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냐? 쉴 때는 쉬어야지. 너 그러다 마흔 넘어서도 장가 못 간다."
"말씀만 말고 참한 아가씨들 있으면 소개 좀 시켜 주십쇼, 반장님."
"미안하다. 내 앞가림도 못했는데."
내부엔 유리로 막힌 취조실이 보였다. 그의 친구 배형사는 특유의 어르고 달래기 화법으로 게하 주인에게 자백을 받아내는 중이었다. 한참 취조를 구경하고 있는데 취조실로 순경 한명이 급히 뛰어왔다.
"지, 지원 요청요! 색달 해수욕장 인근에서 총성 신고가 왔답니다."
"총성이라고? 뭔 상황인데?"
"지금 현장에 중문 지구대 소속 윤 경위님 혼자 나가있다고 합니다!"
윤 경위라는 이름이 거론되자 마자 김형사가 번개처럼 뛰쳐나갔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쉬는 날을 잘못 잡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