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1. 제주도 푸른 밤-51-
해머를 땅에 질질 끌고오던 성우는 도훈의 당당한 반응에 살짝 당황했다.
'···뭐지, 저 새낀?'
보통 사람들은 자신과 눈빛만 마주쳐도 시선을 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우가 딱히 덩치가 크거나 인상이 험악해서 그런것은 아니었다.
특유의 공허한 눈빛.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잃을 게 없는 사람임을 증명하듯.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그 허망한 눈빛이 알수 없는 공포감을 자아 냈던 것이다.
괜히 엮이면 좆될 것 같은 느낌.
시비 걸리면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은 암울함을 온 몸에서 뿜어 대는 사내였다.
하지만 낯선 청년은 너무나 태연한 표정으로 되묻는 것이었다.
"그 망치 뭐냐니까?"
"하-. 이 새끼···. 세상 무서운 줄 모르네."
성우는 도훈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몹시 거슬렸다. 특히 최근사람을 죽일 뻔한 적도 있던 그였기에, 자기도 모르게 느끼고 있던 우월감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 내가 세상 무서운 줄 알아야 해?"
"어린 노무 새끼가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네 까짓 놈이 끽해야 주먹다짐이나 몇번 해 봤겠지."
성우가 망치를 땅바닥에 질질 끌면서 도훈을 향해 걸어갔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로테스크한 모습이었지만, 도훈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상대가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한 성우가 일부러 악날하게 웃었다.
"근데 너 그거 아냐? 잃을 게 없는 사람이 어디까지 무서워 질수 있는지?"
"······."
"이제와서 빌어도 소용 없을 거야. 그 계집년이랑 같이 산채로 묻어줄테니까."
딴에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발언이었으나, 도훈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반색했다.
"어? 차지희 살아 있어?"
"···뭐라고?"
"니가 인신매매한 여자애 말이야. 여기다 숨겼지?"
뒤돌아선 도훈이 갑자기 창고문에 걸린 쇠사슬을 두 손으로 잡더니 좌우로 벌렸다. 마치 손으로 잡아 뜯으려는 것처럼 힘을 주는 모습에, 성우가 기가 차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미친, 니가 무슨···."
그때였다.
도훈이 쇠사슬을 붙잡은 손아귀에서 서서히 하얀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이었다.
"어?"
놀란 성우가 움찔하는 사이, 열기에 달궈 진 쇠사슬이 붉게 달아올랐다. 용광로에서 막 뽑아낼 때의 모습처럼 뜨거워진 쇠사슬은, 엿가락처럼 연결부위가 늘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고리한쪽이 점점 늘어지던 쇠사슬은 어느 순간 우득- 끊어지며 좌우로 분리되고 말았다. 내공으로 엄청난 열기를 가한 도훈이 맨손으로 쇠를 끊어낸 것이었다.
성우가 제 눈을 의심했다.
'미, 미친.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망치를 든 성우가 주춤거리는 데 도훈이 양손에 끊어진 쇠사슬을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모습은 마치 형벌을 받는 죄수가 결박을 풀어낸 것처럼 보였다.
"···잃을 게 없으시다?"
촤라락-.
쇠사슬을 거머 쥔 도훈이 무서운 눈으로 성우를 노려보았다.
도훈이 작정하고 살기를 뿜어내자 성우는 뱀을 마주친 개구리 마냥 몸이 뻗뻗하게 굳어 버렸다.
그가 해머를 끌고 오며 보여준 모습이 가짜 광기라면, 도훈이 지금 쇠사슬을 끊으며 보여준 모습은 진짜 광기였다.
촤르륵-.
"니가 왜 잃을 게 없어? 손가락 10개, 발가락 10개 아직 붙어 있잖아?"
"너, 너···."
"두 눈도 멀쩡하고, 신장에 콩팥, 심장까지 잘 붙어 있구만 뭘."
"이런 미친···."
"이번엔 내가 하나 묻자. 너 살면서 진짜 무서운 사람 한 번도안 만나 봤지?"
"오, 오지마!"
도훈이 다가오자 겁먹은 성우가 양손에 해머를 잡고 야구 배트처럼 부웅 휘둘렀다. 쇠말뚝을 박을 때 쓰는 해머는 쇠뭉치 부문의 무게만 10kg에 육박할 정도로 거대한 크기. 하지만 도훈은 손에 감긴 쇠사슬을 공중으로 한번 휘젓는 것으로 해머를 휘감아 빼앗아 버렸다.
"마, 말도 안돼···."
순식간에 해머를 빼앗은 도훈은 갑자기 사슬에 걸린 해머를 잡고 머리위로 붕붕 돌리기 시작했다.
부우웅- 부웅-
거대한 해머가 헬리콥터의 프로펠러처럼 빠르게 돌아갔다. 무력 시위를 하는 것처럼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던 도훈은 빙글빙글돌리던 해머를 공중으로 멀리 내던졌다.
대포를 쏜 것처럼 공중으로 높게 치솟은 해머가 장장 100여 미터 밖에 떨어진 말 목장 울타리까지 날아가더니 굉음을 내고 부딪혔다.
콰과광-!
울타리가 폭탄을 맞은 것처럼 산산조각나 부셔졌다.
놀란 말들이 투레질을 하며 번쩍 앞발을 치켜 들더니, 이윽고 부서진 울타리를 통해 하나 둘씩 도망치기 시작했다. 성우는 자신의 말들이 달아나고 있다는 사실보다, 도훈이 보여준 괴력에 압도 당할수 밖에 없었다.
'사, 사람이 아니야!'
"왜? 잃을 게 하나도 없는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까 많지?"
"······."
"니가 먼저 오함마로 공격했으니 이제부터 내가 너 패는 건 정당방위다?"
"사, 살려···."
"지랄하고 자빠졌네."
촤르륵-!
도훈이 남은 쇠사슬 하나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상당한 굵기를 가진 쇠사슬은 정확하게 성우의 오른쪽 무릎을 강타했다.
맞는 순간 무릎이 움푹 함몰되었다.
"우욱!"
다리가 잘려나가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성우의 다리가 너덜거렸다. 물론 이는 도훈이 힘조절을 한 결과였다. 바닥으로 주저앉은 성우가 비명을 질러댔다.
"흐아아아악!"
"이제 다리 병신이네? 또 어디를 망가뜨려줄까?"
"으악, 제, 제, 발 살려···."
"너한테 납치된 여자애는 살려달라고 안 하든?"
"사, 살아 있습니다. 아, 아직 저, 저기 차, 창고 안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성우가 존댓말을 하며 차지희의 생존을 알렸다.
[주인님. 일단 실종자부터 구하는게 먼저가 아닐까요? 어차피 범인은 다리가 부러져 멀리 못 도망갈 겁니다.]
'그래. 네 말이 맞겠다.'
"너 여기 꼼짝말고 기다려."
성우의 무릎 한 쪽을 아작낸 도훈이 시건장치가 풀린 창고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오랫동안 마구간으로 쓰이던 창고의 퀘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윽-."
도훈이 인상을 찡그리며 코를 틀어 막았다. 내부는 조명이 거의 없고 해가 들어오지 않아 어두웠지만, 도훈의 안력을 돋우자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한가운데 반쯤 파져있는 정체 모를 흙구덩이였다.
'저게 뭐지?'
[제 추측이 맞다면, 범인이 실종 여성을 암매장 하려고 했던 것 같던데요?]
'또라이 새끼네.'
도훈이 구덩이를 지나쳐 안으로 더 들어가자 허연 물체가 보였다. 그것은 발가벗겨진 채 쓰러진 차지희였다.
"아니!"
지희는 가축처럼 발가벗겨진 채로 개목줄에 묶인 상태였다. 온몸이 물에 흠뻑 젖은 것처럼 축축했는데, 추위에 떨다 기절한 것처럼 보였다.
며칠 제대로 먹지도 못한 것처럼 몸은 야위었고, 저체온증이 오는 지 입술이 시퍼래진 상태로 온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사람을 개돼지 취급하는 끔찍한 인격말살의 현장에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살의가 일어났다.
"이 씨발 새끼를 진짜!"
화가 난 도훈은 당장이라도 범인을 때려 죽이려 했지만 로시가 말렸다.
[주인님! 일단 차지희양부터 구해야 합니다. 저대로 두면 저체온 쇼크가 올 것입니다.]
'알았어.' 도훈이 겨우 냉정을 되찾더니 입고 있던 상의를 빠르게 벗어 지희의 몸을 덮어 주었다. 그러나 이미 찬물을 끼얹은 상태로 오랫동안 외부에 노출되어 있던 지희의 체온은 쉽사리 돌아오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내공을 써야겠군.'
도훈은 최근 내공을 이용해 온도를 완벽히 통제하는 기술을 습득한 상태. 작게는 손끝에 불꽃을 일으킬수도 있고, 혹은 방금 전 쇠사슬을 끊어낸 것처럼 수천도까지 온도를 끌어 올릴 수도 있었다.
도훈이 두 손바닥에 힘을 집중하자 은은한 열기가 피어 올랐다.
직접 살에 닿으면 자칫 화상을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도훈은 적당히 거리를 둔 상태로 지희의 몸에 열기를 공급했다. 문자 그대로의 생체 난로였다.
너무 급하게 서둘렀다간 몸에 탈이 날 수 있었기 때문에 도훈은 최대한 차분하게 체온을 끌어 올렸다.
[혹시 범인이 도망간 것은 아니겠죠? 시간이 생각보다 지체된 것 같은데···.]
'다리 하나가 망가졌는데 제까짓게 도망 쳐봐야 얼마나 가겠어? 다시 잡으면 그만이야.'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자 덜덜 떨고 있던 차지희의 낯빛에 혈색이 돌아왔다. 도훈은 충분히 위기를 넘겼다고 판단하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 개같은 새끼. 다리 병신 하나로는 성에 안 차겠는데?'
도훈은 간만에 진심으로 화가 난 상태였다.
처음엔 자신의 누명을 벗고, 플레이어 윤보미의 타켓인 범인을 대신 잡아 줄 목적이었으나 죽음에 이를 뻔한 희생자를 보는 순간 피가 거꾸로 도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다시 창고 밖으로 나간 도훈이 성우를 찾았으나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 이 새끼. 나랑 숨바꼭질 하자네?"
도훈이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꼭꼭 숨어라. 찾으면 뚝배기 깨버린다, 이 개자식아."
도훈이 오감을 폭발시키며 주변의 모든 소리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가 작정하고 내력을 폭발시키면 근방 50m 부근의 풀벌레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철컥
그때 뭔가 기묘한 소리가 도훈의 귀에 잡혔다.
마구간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응? 이게 무슨 소리지?'
생전 처음 듣는 사운드에 도훈이 의아해하는 데 갑자기 "탕!"
소리가 나며 뭔가 폭발음이 들렸다.
'···총?'
본능적으로 총성을 인식한 도훈이 빠르게 몸을 숙였다. 그 순간 그가 서있던 자리로 조그만 탄알이 날아들었다.
"이런 씨팔!"
탄흔으로 봐선 사냥용 엽총으로 보였다. 도훈이 차지희를 살리기 위해 시간을 허비한 사이, 성우가 다친 다리를 끌고 엽총을 챙겨 온 것이었다.
"이 새끼가 진짜!"
첫번째 탄환이 날아든 이후 도훈이 순식간에 대시를 시작했다.
상대가 명백한 살의를 보였으니 도훈도 더 이상 사정을 봐줄 이유가 없었다.
"너 이 개새끼 진짜로 죽인다!"
도훈은 겁도 없이 총성이 난 부근으로 뛰어들었다. 두번째 탄알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리고, 또 한 번 총알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도훈의 움직임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쇄도한 도훈은 총알을 눈으로 보고 고개를 돌려 피했다.
"허, 헉! 저, 저게 뭐야!"
오히려 당황한 쪽은 성우였다.
신출귀몰한 도훈의 움직임에 기가 막혔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도훈이 한손에 쇠사슬을 매달고 다가왔다.
"넌 뒤졌어 새끼야."
"오, 오지마!"
마구간에 숨어 있던 성우가 마지막 총알을 장전했다. 먼 거리라서 빗나갔지만 10M 거리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철컥-
성우가 도훈의 머리를 조준했다.
아무리 사냥용 엽총이지만, 근거리에서 정통으로 머리를 맞으면 죽을 수도 있었다.
"쏴 봐, 개새끼야."
살의를 드러낸 도훈이 성우를 도발했다.
성우 역시 잡히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앞뒤 가리지 않고 총을 격발했다.
탕-!
도훈은 이번엔 피하지도 않았다. 그의 동체시력은 날아오는 총알의 궤적을 읽을 정도였다.
휘리릭-
그는 탄도를 예측해 빠르게 쇠사슬을 휘두르더니 날아오는 탄환을 그대로 공중에서 격중시켰다.
"허, 헉!"
성우는 그야말로 기절할 것 같았다.
어느새 코 앞까지 다가온 도훈이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꼭꼭 숨으랬지? 뒤지기 싫으면."
* * *
푸드트럭을 반납한 김형사와 헤어진 보미는 차를 타고 다시 범인을 수색하던 중이었다.
김형사가 계속 돕겠다고 했지만, 자꾸 다친 어깨가 불편한 듯 팔을 붕붕 돌리는 그를 보며 보미가 만류했다.
-김형사님은 집에 가서 좀 쉬세요. 괜히 저 때문에 다치기까지하고 너무 죄송해요.
-아닙니다! 그 새끼를 제 손으로 꼭 잡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습니다.
김형사가 거부했지만, 보미는 더 부탁하기 미안했는지 완곡히 거절했다.
-그래요. 꼭 같이 잡아요. 근데 오늘은 용의자가 얼굴을 노출했으니 더 찾기 어려울 거예요. 일단 병원부터 가보시고, 내일부터 함께 찾아요.
그렇게 김형사를 먼저 돌려보낸 보미는 곽순경이 모는 개인 차량을 타고 다시 올레길 8코스를 순찰하는 중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곽순경! 들었지?"
"초, 총소리 아닙니까? 사냥철도 아닌데 무슨···."
"일단 멈춰봐. 확인해 봐야겠어."
총성을 인식한 보미가 갓길에 차를 세우더니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곽순경이 함께 있으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돌려 보내기로 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니까 곽순경은 지구대 돌아가서 지원 요청해."
"그럼 무전으로···."
"지금 순찰차 아니잖아."
"아 맞다! 그럼 전화로···."
"직접 가라니까? 자칫하면 우리가 상부지시도 없이 잠복 수사한 게 들통나게 나게 되잖아."
"경위님은요?"
"일단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게.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니까."
곽순경은 상급자의 지시를 어길 수 없었기 때문에 시키는대로 했다.
"아, 알겠습니다. 금방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윤경위님도 혼자 움직이지 마시고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알았어."
곽순경이 다시 차를 출발시키는데, 또 다시 총성이 들려왔다.
보미가 주먹을 말아쥐더니 총성이 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저기구나.'
그녀의 손이 푸른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