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620화 (1,600/2,000)

1620. 제주도 푸른 밤-50-

* * *

조성우는 한마디로 불우한 청년이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제주도에서 말을 기르는 일을 했는데,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하며 규모가 크게 줄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나마 남은 재산마저 술과 계집질로 깡그리 날려 버렸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는 폭력적이기까지 해서 남은 재산을 지키려던 어머니를 두들겨 패고, 어린 성우도 매일 같이 때렸다.

결국 알콜 중독으로 쓰러진 아버지가 합병증으로 사망한 뒤, 빚잔치를 끝낸 그에게 남은 것은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의 십분지 일도 안되는 조촐한 말 목장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낙담하지 않고 다니던 고등학교마저 중퇴하고 열심히 말을 기르는데 온 힘을 다했다. 하지만 한 번 기울어진 가세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자리걸음. 그는 시궁창에 빠진 기분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잘못 둔 죄를 자신이 대신 받는 것 같았다. 그의 속은 점점 썩어 문드러졌다. 매일같이 말똥을 치우며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해도, 그의 손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젊은 말 목장주라는 타이틀은, 결국 경매로 넘어갈 뻔한 목장을 지키고 남은 허울뿐인 명예일 뿐이었다. 그가 벌어들인 대부분의 수입은 은행 이자라는 이름으로 눈 녹듯 사라졌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조성우의 상황을 묘사하면 딱 그랬다. 그는 평생 가난할 운명이었고, 불행히도 그건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혼기가 찬 성우는 30대 중반에 이르렀을 때 마을 어른의 주선으로 맞선을 보게 되었다.

그의 맞선 상대는, 성우를 말 목장을 운영하는 30대 능력 있는 경영인 쯤으로 착각하고 교제를 시작했으나, 실상 그가 아무것도 없는 개털이라는 걸 알고 난 뒤부터 그를 대놓고 멸시했다.

특히 관계를 정리하면서 던진 한마디는 조성우에게 크나는 상처를 남겼다.

-솔직히 네 몸에서 말똥 냄새나. 참을 수 없을 만큼 역겨운.

조성우는 그날로 망가져 버렸다.

육신은 멀쩡했으나, 정신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바뀌는 게 없는 삶 속에서, 결혼마저 실패한 그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다. 특히 자신에게 상처를 준 여자에 대한 분노가, 여성 전체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다.

겉으론 티를 내지 않았지만, 지나가는 여자를 볼 때마다 입에도 못 담을 쌍욕을 퍼붓곤 했다.

그날도 성우는 말 축사를 정리한 뒤 돌아가는 길이었다. 올레길을 걷는 여행자들의 수려한 복장과, 추레한 작업복 차림에 장화를 신은 성우의 모습은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누군가는 휴가를 즐기러 제주도에 놀러와 즐거운 산책을 하고 있는데, 자신은 시궁창 같은 인생을 오물 냄새나는 마굿간에 갈아넣고 있었다.

그때, 인적드문 길에서 한 여자가 반대편에서 걸어왔다.

젊고 예쁜 여자. 이미 그 순간 성우는 배알이 뒤틀렸다.

'씨발년. 팔자도 좋네.'

성우는 여느 때처럼 속으로 욕지꺼리를 내뱉고 한쪽 켠을 피해 길을 내주었다. 그런데 여자가 갑자기 자신을 보더니 악취가 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것이 멸시의 의도였는지, 반사적인 행동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성우는 모멸감을 느꼈고, 그 순간 그의 이성이 끊어져 버렸다. 그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뒤통수에 삽자루를 맞고 쓰러진 여성이 있었다.

순간 당황한 성우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귀신에 씌인 것처러이성을 잃고, 생면부지의 여성을 기절 시킨 것이었다.

성우는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도로로 차가 드물게 지나가긴 했지만, 운좋게 바닥에 쓰러진 그녀를 발견하진 못한 것 같았다.

성우는 겁을 먹고 여자를 근처 수풀 사이로 숨겼다. 그리고는 다시 농장으로 돌아와 생각했다. 여자가 만약 죽었으면?

더 이상 추락할 것도 없을 줄 알았던 막장 인생에, 그 아래 지하층이 열리는 셈이었다. 성우는 결단을 해야 했다.

'시체를 숨겨야 한다.'

그가 아는 짧은 법률 상식에 따르면, 시체와 살해도구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설사 용의자로 의심받아도 살인죄의 처벌이 어려웠다.

그 생각이 든 성우는 급하게 트럭을 몰고 다시 범행장소로 되돌아갔다. 갓길에 차를 세운 성우는 수풀에 숨겼던 여자의 시체를 찾았다. 성우는 시체를 짊어지고 트럭에 눕힌 후 다시 자신의 말목장으로 데려왔다.

'창고에 묻어 버려야겠어.'

그에겐 신축으로 올린 마굿간 말고, 오래전부터 쓰던 구형 막사가 하나 있었다. 지금은 창고로 쓰고 있지만, 나름 건물의 형태를 띄고 있어 안에 파묻으면 누구도 찾지 못할 장소였다.

여성을 둘러메고 창고에 내려둔 성우가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때 여성의 입에서 끙끙거리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 흐으응… 사, 살려주세요."

'주, 죽지 않았었어?'

기절한 여성을 죽었다고 착각한 성우는 삽질을 멈추고 멍하니 여성을 쳐다보았다. 실종 여성 차지희가 눈을 떠서 처음으로 본것이 구덩이를 파고 있던 성우의 모습이었다.

"꺄, 꺄악!"

놀란 지희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성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 목장 주변 500M 근방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안심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창고 안이기 때문에, 그 소리마저 차단되고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아저씨! 제, 제발 죽이지 마세요!"

성우는 울고불며 비는 지희의 모습에 이상한 희열감이 솟아났다. 다짜고짜 뒤통수를 후려쳐 기절시킨 것도 자신이고, 죽은 줄 알고 암매장을 하려고 구덩이를 판 것도 자신인데 상대는 존댓말까지 써가며 애원하는 것이었다.

상대가 죽이 않았으니 살인자를 면했다는 안도감보다, 성우는 상대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우월감에 더 주목했다.

"…너 안 죽었네?"

"히, 히끅!"

성우의 괴이한 표정에 지희가 겁을 먹고 자기도 모르게 딸국질을 했다. 그의 눈빛은 어딘가 망가진 것처럼 정상이 아니었다.

"히아, 이거 참 곤란하게 됐네. 내 얼굴을 봐버렸으니."

성우는 그제야 지희의 얼굴과 몸매가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예쁘장한 얼굴에 먹음직스러운 몸매였다.

"사, 살려주세요. 한번만 살려주세요 아저씨!"

"살려줘? 내가 왜 널 살려줘야 할까?"

죽은 줄 알았던 시체가 다시 살아나자 성우는 불쑥 엉뚱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네, 네?"

"벗어 쌍년아! 산채로 묻히기 싫으면."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 * *

도훈은 벌써 3곳을 허탕 치고 오는 길이었다.

올레길 8코스 부근의 축사와 농장을 샅샅이 뒤졌으나,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특히 하우스 농사를 짓는 농장 부근을 수색 한다고 서성거렸을 땐 서리범으로 오해를 받고 주인에게 욕을 한 사발 얻어듣기까지 했다. 자전거를 타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변명하는데도 곡괭이 같은 걸 들고 설쳐대는 고약한 농장주였다.

"젠장.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주인님. 아무래도 주인님의 생각이 틀린 게 아닐까요? 범인은 어쩌면 이미 제주도를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떠났다고?'

[올레길 도보 여행 중에 만난 관광객이라면 그럴수도 있다는 소리죠.]

'그러니까 멀쩡히 길 가던 도보여행자가 갑자기 혼자 가는 여자를 강간하고 싶어서 범행을 저질렀다? 그게 말이 돼?'

[하지만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지 않습니까? 막무가내로 뒤지는 것이 과연 효율적인 방법일지 모르겠습니다.]

로시의 우려도 일견 타당한 부분이 있었다. 실종자가 아직 생존해 있을 거라는 것도 도훈의 추측일 뿐이니까.

'…아니야. 난 윤보미를 믿어.'

[네?]

'윤보미는 아직 차지희가 생존해 있다고 확신하고 있어. 무슨 근거인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움직임을 봐선 그렇다고 봐야지.'

[윤보미가 어떻게 생사를 확신할 수 있다는 소린지.]

'모르지. 근데 이럴수도 있잖아. 만약 이번 사건이 하나의 미션이라고 생각해보자고.'

[경찰 플레이어인 윤보미양에게요?]

'어. 근데 미션 실패 조건이 실종자의 죽음이라면? 그러면 미션의 유지 여부에 따라 생존자의 사망 여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지 않겠어?'

[흐음…. 듣고보니 일리가 있는 의견이군요.]

'아무튼 윤보미가 포기하지 않는 다는 뜻은, 분명 생존 확률이 높다는 뜻일거야. 생존한다면 분명 근방에 억류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고.'

[알겠습니다. 다음 목적지까지 3Km 남았습니다.]

'다음은 말 목장이었지?'

자전거를 탄 도훈이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잠시 후 말 목장 인근에 도착한 도훈은 목초지에서 뛰노는 말들을 멀리서 구경했다.

'나 말도 탈 수 있을까?'

[네? 뜬금없이 그건 왜 물으십니까?]

'생각해보니까 아직 천상크래프트 게임이 안 끝냈잖아. 무협 세계관이니까 나중에 말도 탈 일이 있을까 봐서.'

[오토바이 탈 때 보니 금방 배우실 것 같습니다. 감각이 워낙에 좋으니시.]

'그렇지? 나도 그럴 것 같아.'

도훈이 목장 울타리 부근에 서 있는데, 마굿간 안에서 장화를 신은 인부 한 명이 걸어 나왔다. 위에는 회색 앞치마 같은걸 두르고 있었는데, 정육점에서나 쓸 것 같은 반짝이는 재질이었다.

"누슈?"

"안녕하세요. 자전거 여행 중인데…."

"근데?"

"하필 가다가 체인이 빠져 가지고 혹시 공구 좀 빌릴 수 있을까 해서요."

앞서 여러번 문전박대를 당한 도훈은 일부러 체인을 빼놓고 핑계를 만들어둔 상태였다. 기어에서 빠져나온 체인이 볼품없이 늘어져 있었다.

앞치마를 입은 인부는 체인 빠진 자전거와 여행객 차림의 도훈을 빤히 쳐다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없어."

'저 새낀 왜 근데 다짜고짜 반말이지? 일부러 나이도 늘어보이게 꾸몄는데.' 현재 자전거 여행자 차림으로 변장한 도훈은 40대 정도의 얼굴이었다. 한데 상대가 고작해야 30대 중후반으로 보였는데, 처음부터 계속 말을 놓는 게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마시고, 저 간단한 도구만 있으면 되는데…."

"없다고!"

사내가 갑자기 화를 내더니 손에 든 커다란 삽을 치켜들었다.

말에게 건초를 퍼주는 재설용 플라스틱 삽이었다.

"당장 안 꺼져?"

"…가, 갈게요. 가면 되잖아요."

도훈은 자신을 협박하는 말 목장 인부에게 겁먹은 척 자전거를 끌고 물러났다. 하지만 눈으로는 이미 말 목장에 있는 건물 위치를 모두 파악한 상태였다.

'뭔가 수상하지 않아?'

[네?]

'아니. 다짜고짜 성을 팍 내는게 마치 작정하고 쫓아내려는 것 같잖아.'

[아까 농장주도 곡괭이 들고 설치지 않았습니까? 그때도 의심하셨지만 아무것도 없었는데요.]

'그땐 내가 서리범인 줄 알았겠지. 하우스에서 훔쳐갈 게 많으니까.'

[근데요?]

'근데 말 목장은 내가 훔쳐 갈 것도 없잖아. 내가 갑자기 말을 훔쳐서 달아나지 않는 이상. 그것에 비해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 같단 말이지. 마치 뭔가를 감추려는 사람처럼.'

[주인님 입장에서야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긴 한데, 의심이 과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냥 성격이 안 좋은 사람일수도 있고요.]

'오케이. 그건 인정. 그래도 일단 싹 뒤져봐야겠지.'

말 목장 밖으로 완전히 물러난 도훈은 자전거를 수풀 사이에 숨기고는 다시 도보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말 목장 건물은 크게 3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주거용으로 보이는 단층 주택 건물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말을 먹이고 잠을 재우는 커다란 마굿간, 그리고 굉장히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창고였다.

마굿간에서는 까칠한 인부가 계속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훈은 우선 주택부터 뒤졌다.

[주인님. 이거 불법 침입인 거 아시죠?]

'사람 살리려는 데 어쩔 수 없잖아.' 만능열쇠가 자연스럽게 문을 따고 들어간 도훈은 빠르게 집 안을 뒤졌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인지 홀아비 냄새가 진하게 났다. 사방이 어지러져 있고, 살림 살이가 전혀 정리가 안돼 엉망 진창이었다.

'아무래도 집구석은 아닌 것 같은데.'

다시 조용히 집을 빠져 나온 도훈은 이번엔 허름한 창고로 향했다.

'응? 어째서 문이 쇠사슬로 묶여있지?'

창고의 문은 두꺼운 체인으로 칭칭 감겨 있었다. 허름한 건물에 비해 너무나 과한 시건장치에 도훈은 곧바로 의심을 품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귀중품이 들어있을리도 없는데 확실히 수상하군요.]

'그치? 아무래도 이번엔 제대로 찾아온 것 같은데.'

도훈은 구석에 숨어 축골공을 해제했다. 근골이 뒤틀린 상태로는 제힘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혹시나 모를 육박전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두둑-!

축골공이 풀리자 170 초반까지 줄었던 몸이 갑자기 헐크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입고 있던 옷이 찢어질 것처럼 타이트해졌고, 작아진 얼굴에 맞춘 역용마스크 또한 늘어나면서 피부가 팽팽해졌다.

"으, 이제 좀 살 것 같네."

몸을 다시 원래대로 회복한 도훈이 창고 문 앞에서 쇠사슬을 붙잡았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넌 또 뭐하는 새끼야?"

고개를 돌리자 손에 커다란 해머를 든 인부가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축골공을 해제할 때 다가오는 바람에 도훈이 기척을 놓친 것이었다.

[주인님. 상대 눈빛이 이상합니다.]

'내가 봐도 그래. 제대로 돌은 놈 같은데?' 쇠사슬의 잠금을 해제하려던 도훈이 좌우로 고개를 까딱거리며 사내, 아니 조성우에게 말했다.

"그 망치 뭐냐? 그걸로 나 한 대 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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