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8. 제주도 푸른 밤-48-
* * *
막상 윤보미를 발견하긴 했으나 도훈도 난처한 상황이었다.
'젠장. 이젠 나를 유괴범으로 오해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주인님은 전혀 그런 사실이 없는데 무얼 걱정하십니까?]
'당연히 나는 그런 사실이 없지. 심지어 사건이 벌어진 당시 게 스트하우스에 머물렀다는 증거도 있고, 알리바이를 증언해 줄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근데요?]
'윤보미가 과연 법대로 처리해 줄까 하는 점이야. 다짜고짜 나한테 그 원반을 날려버리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목부터 뎅겅 썰어버리면 반박할 방법이 없지 않겠어? 목이 잘린 채 말할 수 있다면 모를까.'
도훈은 사이코메트리 영상에서 본 윤보미의 윈드 커터 스킬을 떠올렸다. 그녀를 랭커까지 올려준 사기적인 마법 스킬로 PK단 단원 셋을 단숨에 도륙내는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그 장면을 떠올리자 도훈은 순간 소름이 돋는 지 목 주변을 더듬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배어나왔다.
[지나친 기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변명할 시간도 안주고 사람을 마구 죽이기까지 하겠습니까? 명색이 공무원인데다 경찰 신분인데요.]
'제주지부 PK단 학살할 땐 그럼, 경찰 아니라서 손속이 독했나? 수틀리면 그냥 다 썰어버리는 게 취미 같더만. 그리고 난 랭커급 플레이어가 지금까지 경찰이라는 것도 더 수상해.'
[네?]
'막말로 정의구현 핑계로 사람 잡기 딱 좋은 직업이잖아. 상황에 따라선 합법 살인도 충분히 가능하고.'
[설마요, 플레이어의 무분별한 살인 행위는 절대 좌시되지 않습니다.]
'아니 뭐, 그럼 옛날에 장군이었던 플레이어들은 수천, 수만명을 죽이고 다녔는데 그걸로 딱히 제재를 받은 것도 아니잖아.'
[그거야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이니까 그렇죠.]
'강력 범죄도 마찬가지지. 정당 방위 쯤이야 고의로 유도하면 그만이고. 지난 번 박회장 사건 때 기억나지? 나도 그때 사람 죽였어. 딱히 제재도 없었고.'
[흐음, 그렇게 까지 말씀하시면야 뭐···.]
도훈은 플레이어의 일탈 행위에 따른 처벌이 생각보다 유연하다는 생각을 진작부터 가지고 있었다. 행위의 의도와 결과가 늘 일치하지 않을 뿐더러, 어떤 식으로든 변명할 거리가 있기 때문에 무 자르듯 명쾌한 처벌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그나마 그가 딱 한번 받았던 신벌도 투명인간 스킬을 쓰면서 의도치 않게 성추행을 했을 때 뿐. 이제껏 그가 벌인 각종 악행(?)에 비하면 무척이나 경미한 처분이었다.
'윤보미가 나를 여성 납치 및 강간 혹은 살인자로 오해해서 다짜고짜 공격해 온다면 손 쓸 방법이 없다는 거야. 죽고 난 뒤 아차하면 뭐해?'
[그런 상황이 오면 주인님도 맞서 싸워야죠.]
'내가 과연 윤보미의 상대가 될 수 있을까?'
상대는 소문으로만 듣던 랭커급 플레이어.
도훈 스스로도 고수에 근접한 중수 플레이어이긴 하지만, 랭커까지는 두 단계의 격차가 났다.
윈드 커터 기술 하나도 제대로 피할 수 있을지 장담 못하는 마당에, 그녀의 다른 스킬이 무엇인지 파악도 못 한 실정이었다.
[주인님이 이렇게 쫀 모습은 처음 봅니다.]
'당연하지. 사람 모가지를 눈 깜빡할 사이에 따버리는 장면을 봤는데 그럼 안 쫄아? 내가 이제껏 상대했던 놈들은 끽해야 민간 인들 이었다고. 미호와 붙었을 때도 운이 좋지 않았다면 산채로 정기를 뽑혀 미라가 될 뻔 했고. 생각해보니까 열받네. 이게 다 로시 너 때문이잖아?'
[어째서 불똥이 저한테 튑니까?]
'니가 그 푸드트럭 가게 주인 범인임에 틀림없다고 꼬드겼잖아!
기억 안나?'
[아니, 마음의 소리로 들리는 내용이 확실히 수상하긴 했잖습니까? 주인님도 그땐 동의하셨고요.]
'무슨 천상계 인공지능이란 놈이 이렇게 멍청해? 인공지능이면 사람보다 더 뛰어나야 하는 거 아냐?'
[······.]
도훈은 엄한 로시에게 화풀이 했다는 생각에 곧바로 사과했다.
'미안. 표현이 과했다.'
[저도 죄송합니다. 변명은 아니지만 인공지능이라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은 없습니다. 주어진 정보만 가지고 가장 가능성 높은 판단을 내릴 뿐이죠.]
'알았어. 내 불찰이야. 윤보미가 잠복해있다는 소식만 듣고, 혼자서 움직일 거라고 안일하게 판단했어. 당연히 주변 동료를 부를 수 있다는 걸 예상했어야 했는데.'
[그나저나 이제 어쩌실 겁니까? 괜한 오해로 경찰들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는데요.]
'뭘 어째? 오해를 피하려면 진범을 직접 잡아다 바치는 수밖에.'
[주인님께서 진범을 직접 잡는다고요?]
'어. 진범 잡아서 경찰서 앞에 끌고가면 최소한 내 목은 무사하겠지. 윤보미에게 주는 일종의 선물이 될 수도 있고. 어쨌든 아쉬운 건 내 쪽이니까.'
[거참, 제주도 와서 별일을 다 겪는 군요. 몰카범을 신고하지 않나, 이번엔 실종사건 추적이라니.'
'생각해 보면 플레이어의 능력은 범인을 쫓는 형사나 탐정에 더 적합할지도 몰라. 윤보미도 그래서 계속 경찰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플레이어 마다 스킬 구성은 전혀 다릅니다. 주인님이 가지고 있다고 윤보미에게도 똑같은 스킬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나에게 없는 능력도 윤보미에겐 있다는 소리잖아? 그게 더 무섭다고 지금은.'
* * *
김관구 형사는 차량에 부딪힌 부위가 욱신 거리는지 팔을 붕붕돌려보았다. 머릿속으로 계속 복기를 해보았지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뭐하는 새끼지? 범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대놓고 활보하고 다니는 거 아닌가?'
경찰까지 몰려든 이상 잠복 작전은 실패였기 때문에 김관구 형사는 지인에게 빌린 푸드트럭을 반납하기 위해 차량을 끌고 되돌아 가는 중이었다. 보조석에는 윤보미 경위가 앉아있었다.
"윤 경위님. 이참에 그냥 공개 수사 전환 요청 하시죠? 조금 있으면 실종 72시간 쨉니다."
"아직 시간은 있어요."
"그러다 범인이 도주하기라도 하면요? 관할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타 지역으로 넘어가면 경위님 입장만 곤란하실 것 같은데 ···."
"제 입장까진 신경 안쓰셔도 돼요. 그런 목적으로 사건을 처리 한 적 한번도 없으니까요."
주제 넘었다 싶었는지 김형사가 곧바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런 뜻이 아니고···."
"그나저나 다친곳은 괜찮아요? 불편하면 제가 대신 운전 할까요?"
"무슨 이 정도가지고요. 끄떡 없습니다. 저 몇년전에 강도한테 칼맞고도 끝까지 안 놓던 김관굽니다. 아시죠?"
"알죠. 김형사님 실력이야. 그러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부탁을 드렸던 건데요."
윤보미는 자존심이 상한 김형사를 위로하면서 동시에 계속 용의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확실히 뭔가 이상해. 김형사님을 공격하고 도주한 청년이 정말로 진범일까?'
김형사에게 전해 듣기론, 실종자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것은 용의자였다고 한다. 일부러 모르는 척 했는데도 인상착의까지 들먹이며 계속 도발했다고.
'범인이 사건 현장에 다시 나타나는 건 정설에 가깝긴 해.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일부러 떠벌리고 다니는 건 절대 정상은 아니란 말이지. 특히 이런 사건일 경우는 더더욱.'
보미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혹시, 연막전술일까?'
연막전술이란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일부러 다른 용의자를 고의로 전면에 노출시키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보미는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상대가 그렇게 용의주도한 놈일리는 없지. 그렇게 똑똑한 놈이었다면 납치 증거를 그렇게 흘리고 다니지도 않았을 테니.'
보미는 해당 사건이 결코 실종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우연히 사건 현장에서 실종자가 흘린 물건을 습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바로 부녀자 납치 사건으로 격상시킬 수도 있었지만, 윤보미는 일부러 증거를 은폐하고 혼자 수사에 나섰다.
'분명 놈은 아직 여자를 죽이지 않았어. 만약 살인을 했다면 내가 몰랐을리가 없으니까. 문제는 과연 여자를 어디에 숨겼냐는 건데···.'
보미가 계속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데 트럭을 운전하던 김관구가 심각한 주제를 돌리기 위해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근데 경위 님은 요새도 매일 야근 하세요?"
"네?"
"아니, 한창 때인데 연애도 하고 그래야죠. 젊다고 방심했다간 저처럼 한 방에 훅간다니까요?"
"···그런 쪽은 별로 취향이 아니라."
"에이, 윤 경위님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연애할 수 있죠.
그거 모르죠? 경찰서 총각들 사이에서 윤 경위님 엄청 인기 많은거."
"제가요? 왜요?"
"아니 뭐···. 경찰대 출신 재원에···. 음,"
김관구는 차마 예쁘다는 말을 덧붙일수 없었다. 윤보미가 객관적으로 막 예쁜 얼굴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확실한건 몸매는 끝내주게 좋았다. 평소에는 늘 몸매를 감추는 옷을 입고 다녀서 잘 몰랐는데, 우연히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었을 때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러나 자신보다 나이는 어려도 직급도 높은 상사에게, 특히 몸매가 섹시하다는 칭찬이 괜한 희롱으로 받아들여 질까 말을 아꼈다.
"에이, 김형사님도 참. 그렇게 아부 안 하셔도 이번엔 꼭 소개시켜 드린다니까요. 지금 소미 때문에 그러죠?"
윤소미의 이야기가 나오자 노총각 김관구가 얼굴을 붉혔다.
"아, 아닙니다."
"이번엔 진짜예요. 저 때문에 괜히 쉬는 날 잠복 서시다가 부상까지 당하셨는데···. 제가 어떻게 해서든 꼭 제주도 오라고 해볼게요."
"하하, 말씀만 들어도 좋네요. 사촌지간이라고 하셨죠?"
"네."
"소미씨가 그럼 동생?"
"왜요? 소미가 저보다 어려보였어요?"
"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저야 사진으로만 봤으니."
김관구가 윤소미를 알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보미와 함께 공조수사를 할 때 증거사진으로 찍은 사진첩에서 엄청난 미인 사진이 튀어나왔던 것.
우연히 발견한 사진이었지만, 첫눈에 반한 김형사가 누구냐고 꼬치꼬치 물었고 보미는 서울에 사는 자신의 친척이라고만 했다.
그 이후로 계속 기회만 되면 딱 한 번만 소개시켜 달라고 졸라 댔는데, 윤보미 입장에서도 김관구 형사의 도움을 받을 일이 잦았기 때문에 마지못해 허락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참고로 저랑은 동갑이에요. 걱정마세요. 제가 이번에 내려오면 꼭 형사님이랑 만나게 해드릴테니."
"감사합니다. 그때 경위님도 같이 오시는 거죠?"
"저요? 소개팅에 주선자가 같이 나가는 게 어딨어요? 그게 얼마나 촌스러운 건데요."
"정말요? 제가 실은···. 형사밥 먹느라 여자랑 도통 말을 못해 봐서. 너무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윤보미가 피식 하더니 눈을 흘겼다.
"뭐라고요? 그럼 저는 한개도 안 부담스러우신가 봐요?"
"아, 아닙니다."
"저도 여자잖아요. 설마 저는 여자로도 안 보이세요?"
"그럴리가요. 아니, 제가 경위님을 여자로 보면 안 되죠. 전 공사 구분은 확실하거든요."
"흐음, 알겠어요. 참고할게요."
보미는 창가로 시선을 돌리며 생각했다.
'칫. 소미가 바로 난데, 하여간 눈치도 없다니까?'
보미도 사실 김형사가 싫지는 않았다. 만약 정말로 마음에 안들었다면 우연히 사진을 들켰을 때 모르는 사람이라고 잡아땠을 것이다.
김형사는 30대 중반으로 노총각이긴 했지만, 보기 드물게 정의감 넘치는 형사였고 특히 자신에게 늘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다.
제주도에 숨어지낸 지 벌써 3년차에 접어든 이상, 윤보미도 가까이 지내는 김형사와 조금은 연애감정 비슷한 것이 생겨났던 것이다.
다만 자신의 분장한 외모와 너무 괴리감이 큰 윤보미의 얼굴로 어떻게 김형사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그게 걱정이었다.
'윤소미의 모습을 못 보여주는 건 어쩔 수 없지. 그 얼굴은 이미 PK단에게 노출되었으니까. 괜히 정체를 드러냈다가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윤보미는 여전히 그날의 기억을 떨칠 수 없었다.
추락해서 떨어진 곳에 우연히 해안 동굴이 뚫려 있지 않았더라면 분명 남은 잔당들에게 척살당했을 것이다. 부상을 회복하는데만 상당한 시일이 걸렸으니, 그녀 역시 겨우 목숨만 부지한 셈이다.
그 뒤로 윤보미는 철저하게 얼굴을 숨기고 살아왔다.
아침마다 역용마스크를 뒤집어 써야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돼. 이번 업적만 잘 해결하면 다음 스킬이 열리게 돼. 그럼 분명 PK단을 상대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목적지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죠."
* * *
진범을 찾기로 결심한 도훈은 실종자의 신원부터 파악하기 시작했다. 지방 신문에는 20대 여성이라고만 나와있었지만, 경찰들은 이미 실종자에 대한 신원을 알고 있을 것이다.
"번개야, 잘 지냈냐?"
-앗, 행님. 어쩐일이십니까요?
"내가 너한테 전화 할 일이 뭐 있겠어?"
-이번엔 또 누굴 찾아오면 되겠습니까?
"찾아올 필요는 없고, 실종 신고된 사람 한명 만 알아봐줘."
-실종 신고요? 네 알겠습니다.
도훈은 최번개의 이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무슨 부탁을 하든 이유를 묻지 않는 다는 점이었다.
그는 돈만 충분히 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최선을 다했다.
"며칠전 제주도 올레길 8코스에서 실종된 20대 여성이 한명있거든. 신문에 짤막하게 보도가 되었는데 이름이랑 나이 가능하면 몽타주도 하나 부탁해."
-알겠습니다요.
"아, 그리고 또."
-네?
"중문 지구대에 윤보미 경위라고 있거든? 이 사람 내력도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