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617화 (1,597/2,000)

1617. 제주도 푸른 밤-47-

* * *

내가 가진 몇몇 스킬들은 탐정이란 직업과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다.

자유자재로 목소리와 외모를 바꿔가며 탐문 수사를 할 수 있다는 점도 그렇고, 사물의 기억을 불러들여 영상화시키는 사이코메트리 스킬은 증거확보에 탁월하다.

하지만 이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스킬은 바로 '마음의 소리' 스킬이다. 상대의 머릿속 생각을 생생하게 들려주는 해당 스킬은, 몇 번의 질문 만으로 진범을 단번에 추려낼 수 있는 사기 기술이다.

바로 지금의 경우처럼.

{이, 이 새끼 대체 정체가 뭐지?}

푸드트럭 주인에게서 불쾌한 땀 냄새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젖은 겨드랑이와, 등골에서 올라오는 식은땀이 나의 예민한 후각을 자극한다.

그 밖에도 살짝 초점이 흔들리는 동공과 미세하게 떨려나오는 대답은 점점 그를 이번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글쎄. 금시초문이래도 그러네? 그걸 왜 나한테 묻는지 ···."

[주인님. 확실히 수상합니다.]

'나도 동감이야. 하지만 이것만으론 아직 단서가 부족해.'

뜬금없이 실종 사건에 대해 묻는 상대를 의심하는 정도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보다 확실한 증거 확보를 위해선 유도 심문이 필요했다.

"실은 제가 엊그제 묵었던 게하 주인 아저씨가 그러더라고요.

그 실종된 여학생이 사라지기 전날까지 계속 머물렀다나? 경찰도 몇 명 찾아왔다고 하던데."

"아···. 그런 일이 있었어?"

나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상대가 동요할만한 질문을 던졌다.

"네. 실종 당시에 빨간 잠바를 입고 있었다죠? 머리는 샛노랗게 염색했고요. 얼굴도 되게 예뻐서 눈에 확 띄는 여학생이라고 하던데."

{빨간 잠바라고? 흰색 후드티가 아니라? 염색은 또 무슨 소리야?}

[주인님, 놈이 걸려들었습니다! 실종된 여학생의 의상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놈이 올레길 실종 사건의 납치범이 확실합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세상에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나. 하필 우연히 올레길 중간에 서 있는 푸드트럭을 찾아왔는데 사건의 범인과 딱 마주치다니.'

"흐음, 그렇구만."

푸드트럭 주인의 눈빛은 나의 질문 이후 눈에 띄게 적대적으로 변했다. 당장이라도 나를 때려 눕힐 것처럼 바짝 몸에 힘을 주고 있었다. 놈의 땀 냄새도 점점 악취를 더해갔다.

{놓쳐선 안 돼. 놈을 잡아야 한다.}

[주인님을 타겟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살인 멸구 할 작정입니다!]

'살인멸구 같은 소리하네. 얼굴은 벼멸구처럼 생긴 새끼가, 처맞고 뒤질라고.'

"학생, 거기서 잠깐만 기다려보게."

"네?"

"아니, 실은 나도 흡연자인데 같이 담배나 태우자고."

푸드트럭 주인이 갑자기 뒷문을 열더니 차에서 내려왔다. 나를 붙잡아 어떻게 해보려는 수작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조금도 긴장되지 않고 어느 때보다 마음이 평온했다.

'미친놈. 나를 잡겠다고? 알아서 덤벼주니 이보다 좋을 때가.'

푸드트럭 주인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더니 나에게 물었다.

"학생 혹시 불 좀 빌려줄 수 있나?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라이터가 도통 안 보여서 말이야."

"네, 붙여 드릴게요."

[주인님이 라이터 불을 붙이는 동안 제압할 생각인가 봅니다.

백주 대낮인데 과감하군요. 주변에 보는 눈도 많은데.]

'범인인 게 딱 걸리니까 눈에 뵈는 게 없는 거지. 오냐 한 번 덤벼봐라. 오히려 좋지.'

"여기 불이요."

"어···. 고맙네."

바람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손으로 감싸 내미는 순간, 상대가 벼락같이 움직였다. 갑자기 내 손목을 휘어잡더니 허리 뒤로 꺾으려고 한 것이다. 빤히 보이는 수법이었지만, 의외로 연습을 많이 했는지 정교한 기술이었다.

'응? 이 새끼 뭐야? 어째서 포박술을···.'

보통 사람이라면 단숨에 제압 당했겠지만, 당연히 당해줄 리 만무했다. 나는 금나수 수법을 이용해 미꾸라지처럼 손목을 풀어낸 뒤 어깨로 놈을 들이받았다.

"어딜 감히!"

내공을 실은 나의 숄더 차징은 무려 8톤 트럭에 치이는 수준의 충격량이다. 힘 조절을 잘못했다간 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힘을 빼 기절할 정도로만 어깨로 들이받았다.

퍼억-!

예상대로 용의자는 단숨에 나가떨어지더니 푸드트럭에 등을 부딪히고 튕겨 나왔다. 놈이 본색을 드러낸 이상 나 역시 숨길 필요가 없었다.

"이런 천하의 추악한 새끼! 너 오늘 임자 만난 줄 알아."

"커헉-."

하지만 아무리 힘 조절을 했더라도 역시 민간인은 버터기 힘든 공격이었던 모양이다. 어깨로 한번 받았다고 놈이 대로변에 대자로 뻗어버린 것이다. 그때 넘어진 충격으로 놈의 바지품에서 검은 물체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무전기?"

-치익···. 김형사, 무슨 일이야? 왜 긴급 호출 신호를 보냈어?

혹시 범인을 발견한 거야?

무전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범인에게 무전기가···.]

'이런 씨팔, 좆됐다.'

[네?]

'푸드트럭 주인이 범인이 아니라 잠복 중인 형사였어!'

[네? 형사요?]

어쩐지.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내가 실종 사건을 물었을 때 놀란 것이나, 실종된 여성의 인상착의를 범인처럼 상세하게 알고 있었던 것도. 그리고 갑자기 차에서 내려 나를 붙들려고 한 것도 상대가 위장 잠복 수사 중인 형사였기 때문이었다.

'범인이 아니었다고! 이런 빌어먹을.'

[정말로 범인이 아니라고요?]

나는 확인을 위해 배를 깔고 쓰러진 푸드트럭 주인의 뒷주머리를 뒤졌다. 지갑 속에 예상대로 경찰 뱃지가 붙어 있었다.

"아오! 제기랄!"

"소, 소매치기다! 꺄악! 소매치기야!"

푸드트럭이 주차된 해수욕장 주차장을 지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나를 향해 소리쳤다. 아마도 쓰러진 상대에게 지갑을 꺼내든 나를 보고, 퍽치기 범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 그게 아닙니다!"

당황하니까 말도 헛나왔다.

"여기 누가 경찰에 신고 좀 해주세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러나 오해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잠복 수사 중인 현직형사를 때려눕혔으니 단순 폭행이 아닌 공무집행방해, 거기다 지갑을 꺼낸 것으로 강도 혐의까지 뒤집어 써도 할 말이 없었다. 다시 무전기에서 치익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형사! 무슨 일이냐니까?

'진짜로 좆된 듯.'

[이제 어떻게 합니까?]

당장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오해로 사람을 때려눕힌 건 그렇다고 쳐도 이미 주변으로 구경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은 게 특징이다.

'일단 튀자.'

[네?]

'다른 방법이 없잖아. 내 오해로 형사를 때려 눕혔는데.'

나는 지갑을 다시 뒷주머니에 꽂아 준 뒤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일부 용감한 시민들이 나를 뒤쫓기 위해 따라 나섰다.

"저, 저놈 잡아라!"

"강도다!"

하지만 내가 마음 먹고 달리면 세상 누구도 나를 잡을 수 없다.

시선을 따올리기 위해 골목길로 뛰어든 나는 속도를 올리며 미친듯이 튀어 나갔다. 어느새 나를 뒤쫓던 사람들과 거리가 어마어마하게 벌어졌다.

"미, 미친. 뭐가 저렇게 빨라?"

결국 나를 뒤쫓던 사람들이 모두 나가떨어진 뒤에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변장을 위해 정체불명의 모자를 눌러쓴 나는 급하게 옷도 다시 갈아입었다.

담벼락에 기대 숨을 몰아 쉬는데 절로 짜증이 올라왔다.

"아오, 그러니까 왜 수상하게 행동을 해가지고."

[죄송합니다. 저 역시 당연히 푸드트럭 가게 주인이 범인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 왜 형사 새끼가 그딴 복장으로 잠복해 있느냐고. 하와이 안 티셔츠는 왜 입어가지고. 포박술을 쓸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만.'

[혹시 윤보미 경위가 부탁한 게 아닐까요? 아는 형사한테 도움을 청했다든지요.]

'···가만 윤보미?'

그 순간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던 다급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젊은 여성의 목소리. 그리고 나이 든 김형사에게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던 것까지.

무전기의 주인공이 바로 윤보미였던 것.

"···찾았군. 어찌됐건."

마침내 나는 윤보미를 찾는데 성공했다.

계획대로는 전혀 아니었지만.

* * *

김관구 형사는 10년 차 베타랑이다.

형사치고는 나름 순해 보이는 인상 덕에 함정 수사에 많이 차출되었는데, 이번에도 푸드트럭 커피가게 주인으로 낙점되어 잠복근무를 서고 있었다.

보통 형사들은 최소 2인 1조로 움직이며 잠복근무의 경우 당연히 대기조를 포함 여럿이 팀을 이뤄 행동해야 하지만 김관구 형사는 이번엔 혼자 작전을 수행 중이었다. 이번 잠복이 사실 정식으로 수사전환되지 않은 단순 실종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윤 경위님. 이럴 거면 차라리 정식 납치사건 전환하시라니까요? 굳이 상부에서도 모르게 은밀히 처리해야 할 이유가 있을지.

하지만 평소에도 고집스러운 면이 있던 보미는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아직 실종자가 살아있다면요? 정식으로 수사로 전환되면 범인이 겁을 먹고 증거를 인멸하려고 들 거에요. 자칫하면 실종자가 아니라 죽은 시체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죠. 일단 외부에는 단순 실종 사건으로 알려지는 편이 혹시 모를 실종자 구출에 있어서 훨씬 유리해요.

-거참. 그렇다고 비번인 저를 불러 현장에 투입 시키면 어떻게 합니까? 형사도 사람입니다. 쉬는 날이 있는 거라고요. 수당도 안나오는 일을···.

-미안해요, 김 형사님. 제가 나중에 꼭 보답해 드릴게요.

-저번에 보여주신 사촌 동생분 꼭 소개 시켜 주시는 겁니다?

저 진짜 경위님만 믿고 최근에 들어오는 소개팅도 다 거절했다고요.

-소미요? 알았어요. 다음 달 제주도 온다니까 그땐 꼭.

-맨날 다음달, 다음달.

-김형사님, 한 번만 도와주세요. 혼자서는 역부족이라서 그래요. 제가 부탁할 사람이 김형사님 말고 또 어딨어요.

-어휴, 내가 미친놈이지. 그래, 어디서 짱박히면 됩니까?

그랬던 김형사가 쓰러진 채 발견됐다. 다른 구역에서 잠복하고 있던 윤보미 경위가 달려온 것은 10분이 지난 뒤였다.

다행히 김형사는 큰 부상이 아니었는지 스스로 정신을 차렸다.

"이, 이 개새끼 어딨어?"

범인에게 역으로 제압당했다는 생각에 수치심에 얼굴이 빨개진 김형사가 눈을 차리자마자 씩씩거렸다. 그의 옆에 윤보미 경위가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고, 지구대 소속이자 보미의 파트너로 따라온 곽순경이 몰려든 사람들을 통제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괜찮아요?"

"당했습니다. 범인한테."

"범인을 봤다고요?"

"확실합니다. 갑자기 이쪽으로 다가와선 실종자에 대해서 묻더라고요. 그때 딱 감이 오더라고요."

김형사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은 정확히 못 봤는데 담배 피울 때 보니까 하관이 무척 잘생긴 청년이었습니다. 굉장한 미남이었어요."

"미남이요? 키는요?"

"키는 한···."

일어선 김형사가 머리 위로 손 등을 세우더니 눈대중으로 짐작했다.

"180 중반? 대충 185 정도로 보였습니다."

"말랐나요?"

"아뇨. 키만 큰 마른 놈한테 설마 제가 당했겠어요? 완전 근육질이에요. 힘이 엄청 세더라고요."

"흐음··· 김형사님이 당할 정도면···. 혹시 유단자였을까요?"

김형사는 아까도 말했지만 10년차 베타랑 형사다. 대부분 형사가 그렇듯 결혼도 못 하고 수사에 매진하는 성실한 형사였고, 덕분에 범인을 잡는 것만큼은 프로중에 프로였다. 어지간한 맨손 싸움에서는 조폭들도 한 수 접을 만큼 실력자였는데,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당했다는 사실이 어이없을 정도였다.

"너무 빨랐습니다. 제가 먼저 기습을 했는데, 순식간에 풀어내더니 갑자기 어깨로 이렇게 들이받는데."

김형사는 도훈의 액션을 따라하다가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이상한데요? 이런 무술이 있었나?"

도훈의 동작은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기괴한 동작이었다.

손목을 풀어낸 금나수는 듣도 보도 못한 호신술이었고, 연이어 몸을 둥글게 말아 어깨로 가슴을 들이받는 수법 역시 기존의 어떤 격투기에서도 다룬 적이 없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중국의 태극권의 동작의 일종처럼 보였다.

"어쨌든 얼굴은 봤다니 다행이에요. 곽 순경님 혹시 범인 쫓은 사람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모여드는 인파를 통제하던 곽순경이 묻기도 전에 젊은 청년 둘이서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쫓아갔습니다."

"저도요."

"혹시 어느 방향으로 가던가요?"

"아, 그게···."

범인을 쫓았다는 사람들의 말은 더 가관이었다.

"미친, 엄청 빠르더라고요. 아니 제가 곧바로 쫓아갔는데 달리 기가 무슨."

"말도 안 됐어요. 제가 실은 마라톤 풀코스 3번이나 완주했거든요. 맨날 1시간씩 조깅하는데 달리기로는 도저히 잡을 수가 없더라고요."

보미는 두 사람의 말에 살짝 과장이 섞여 있다고 판단했다. 아무래도 눈앞에서 범인을 놓쳤으니, 어떻게든 자기 합리화를 하려는 것이라고.

"알겠습니다. 그럼 어느 쪽으로 가던가요?"

"그게···"

"중문 방향일 거예요."

"해수욕장 쪽은 확실히 아니었고요."

도움이 되는 정보가 전혀 없었다.

보미는 푸드트럭이 세워져 있던 색달 해수욕장 주차장 주변을 살폈다. CCTV의 위치를 확인했지만, 하필 사각지대였다.

김형사의 말로는 범인이 CCTV가 있는 곳에 안나타 날것이라고 판단해 굳이 없는 곳에 자릴 잡았다고 했다.

'···대체 누구지? 이렇게 대범한 놈이 연약한 부녀자 납치범이라고?'

윤보미 경위가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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