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6. 제주도 푸른 밤-46-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하기는 도훈도 처음이었다. 일전에 투명인간 스킬을 썼을 때는 체육관에 딸린 조그만 샤워실과 탈의실 정도였다. 같은 투명 인간 상태라도 건물 내부를 다니는 것과 외부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
'이거 생각보다 스릴 있는데?'
[예?]
'스트리킹이라 하던가? 남들 앞에서 알몸으로 활보하는 거 말이야. 의외로 짜릿해.'
[주인님 혹시, 변태십니까? 아, 불필요한 질문일지도.]
'그건 아닌데, 만약 걸리면 변태로 잡혀가기 딱 좋겠군. 알몸으로 경찰서 방문이라니.'
투명화 상태의 도훈은 발걸음을 줄여 경찰서 내부로 들어갔다.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자신을 못 알아보는 것이 신기했다. 하지만 투명 인간이 곧 유체화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다녀야 했다. 도훈은 시간제한을 고려해 최대한 빠르게 관제센터를 찾았다.
'그나저나 CCTV 영상은 어디서 관리하는 거지?'
건물 내부 구조를 살피던 도훈은 점점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살펴도 CCTV 관제 센터의 위치를 찾을 수 없었던 것. 한참 알몸으로 서 있던 그는 마침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젠장, CCTV 관제 센터가 경찰서에 안에 없는 거였어?'
[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번지수를 완전 잘못 짚은 거 같은데? CCTV를 관리하는 곳이 여기가 아닌 것 같아.'
도훈은 그제야 어렴풋한 기억이 떠올랐다. 경찰청 정도의 규모가 아닌 이상 지역 감사카메라는 CCTV 관제센터라고 불리는 곳에서 일괄적으로 관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보통 관제센터는 경찰서 건물과는 별도로 떨어져 있었다.
[아니 그러면 여긴 뭐하러 온 겁니까? 투명 인간 스킬까지 써가 면서요.]
'젠장! 낸들 알았나. 준법정신이 투철해서 경찰서를 와 본적이 있었어야지 말이지. 아침부터 삽질의 연속이구만!'
경찰서를 일찍 방문하기 위해 근처 찜질방에서 잔 것도 모자라, 투명 인간 스킬을 쓰느라 쓸데없이 포인트까지 허비했음에도 아무 소득도 없는 것이었다. 도훈이 스스로 이마를 치며 자책했다.
'하여간 머리가 안 좋으면 손발이 고생한다더니….'
[주인님 IQ는 이제 평균 이상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움직였다는 거야.'
도훈이 경찰서 1층 로비에서 한탄하고 있는데 지나가는 경찰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들었어? 어제 몰카 사건? 중문 지구대에서 현행범으로 붙잡았다면서?"
"몰카 사건?"
도훈은 자신이 신고한 사건이 남자 경찰사이에서 떠돌자 귀를 쫑긋 세우며 대화를 몰래 들었다.
"아니 글쎄, 중문에 유명한 게스트하우스 있잖아. 핫 플레이스라 불리던."
"어어, 거기? 거기서 몰카 사건 터졌어? 하여간 변태 새끼들은 어딜 가나 말썽이구만. 누군데? 여행객이야?"
"여행객이면 그나마 다행이게. 거기 주인이래."
"주인이? 주인이 손님들 몰카를 찍었다고?"
"어제 밤늦게 현장 조사 나간 동기가 깨톡으로 알려줬는데, 아주 가관이더라고. 가구를 개조해서 그 안에 몰카를 설치해놓고 게 스트 하우스에서 대실 룸까지 운영했다는 거야. 그게 무슨 게하야? 모텔이지."
"완전 또라이 자식이네. 현행범으로 잡혔으니 빼도 박도 못하겠네. 범행 증거까지 싹 다 확보됐고."
"그러니까 말이야."
"근데 중문 지구대, 올레길 실종 사건도 맡고 있지 않았나?"
"어. 윤 경위님이 한참 조사 중일걸? 아까 계장님 말로는 오늘도 잠복 들어갔다고 하던데? 벌써 이틀째야."
"아직까진 단순 실종 사건으로 다루는 거 아니야? 그래서 지구대에서 관활하는 거잖아. 근데 무슨 단순 실종에 잠복 수사까지해?"
"내 말이. 윤 경위님은 원래 자기가 맡은 사건 끝까지 파해치려고 하잖아. 열정이 쓸데없이 과하다니까?"
도훈은 두 사람의 대화에서 윤 경위라는 이름이 나오자 깜짝 놀랐다.
'방금 분명 윤경위라고 했지?'
[네. 저도 똑똑히 들었습니다. 올레길 실종사건에 윤경위면 주인님이 찾던 윤보미 경위를 말하는 것 같은데요?]
'이게 여기서 얻어걸리다니!'
도훈은 알몸 상태로 좀 더 다가가 대화를 엿들었다.
"거참, 그럴거면 지구대 여성 청소년부를 맡을 게 아니고 아예 경찰서 형사부로 옮길 것이지."
"대체 무슨 속인지 모르겠어. 승진할 생각이 있긴 한 건지. 경찰대 졸업해놓고 지구대에 그렇게 오래 짱 박히는 것도 별로 좋은 판단은 아닌데 말이야."
"외지에서 왔다지? 고향이 서울이랬던 것 같은데."
"근데 너 윤 경위님한테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 설마 좋아하냐?"
남자 경찰 하나가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귓속말로 속삭였다.
"야. 윤 경위님이 알고 보면 엄청 글래머야. 몰랐어?"
"진짜?"
"원래 맨날 헐렁한 옷만 입고 다녀서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러는데, 저번에 춘계 친목 체육대회에서 추리닝 입은 거 보고나서 알았잖아. 가슴이 아주 그냥…. 미사일인 줄."
"넌 얼굴은 아예 안 보는구나? 윤 경위님 솔직히 예쁜 편은 아니잖아."
"그래도 봐줄 만은 하지."
"이 자식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막말로 네 말대로 글래머라고쳐. 윤 경위님이 너나 나 같은 말단 순경한테 관심이나 있겠냐?
가뜩이나 경찰대 출신 재원이면."
"사랑에 직급이 어딨냐? 계급장 떼고 만나는 거지. 넌 인마 침대 위에서도 어깨에 견장 붙이고 뒹구냐?"
"미친놈. 정신 차려 인마."
"봐서 그냥 오늘 오후 연차 내고 잠복하는 데 몰래 찾아가 볼까? 우연히 만난 것처럼 말이야. 올레길 8코스 쪽에 있다던데."
"돌았네. 잠복 중인 경찰한테 아는 척하면 퍽이나 반기겠다. 정신 차려 인마."
"아, 진짜 딱 내 스타일인데…."
대화를 모두 엿들은 도훈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윤보미의 위치를 찾았군.'
[운이 좋으셨군요. 삽질 끝에 얻어 걸린 느낌이지만요.]
'운도 실력이지. 올레길 8코스에 잠복하고 있다니까 그쪽에 숨어 있겠군. 위치는 확보했어.'
[그나저나 윤보미양이 생각보다 인기가 많은 모양입니다. 본부에 근무하는 경찰에게도 이름이 알려진 걸 보면요.]
'당연하지. 한해에 120명밖에 안 되는 경찰대 출신, 그것도 여경이잖아. 제주도 발령이면 많아 봐야 5명 안팍일테니까. 발령 당시 유일한 홍일점이었을 가능성도 크지.'
[호오.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요?]
'게다가 나이는 어린데 벌써 경위란 말이지. 어리고 매력적인 여상사. 남자라면 한 번쯤 정복하고 싶어지는 조건이 아닐까?'
[어린 여상사인건 맞는데 매력적이진 않은 거 아닙니까? 호불호가 제법 갈리는 거 같은데요.]
'내가 볼 땐 저 친구가 여자를 잘 보는 것 같아.'
[네?]
'얼굴만 보는 건 하수거든. 예리한 눈썰미로 보미의 우월한 몸매를 캐치해 낸 거라고. 얼굴은 바꿨는데, 몸매는 그대로였던 모양이야.'
[하긴 주인님도 역용마스크 쓸 때 보면 얼굴은 바뀌어도 체형은 그대로니까요.]
'아무튼 잘 됐다. 윤보미의 행방도 알았겠다, 이제 찾기만 하면 되겠군.'
도훈은 알몸인 상태로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투명 인간 스킬을 헛되게 날리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 * *
올레길 8코스는 제주도 중문 부근의 월평아왜낭목쉼터에서부터 대평포구에 이르는 약 20Km 구간의 코스였다. 바다를 끼고 도는 구간이기 때문에 인기가 많은 코스였고, 특히 주상절리와 중 문색달 해수욕장등을 들를 수 있어 유난히 사람이 많이 다녔다.
8코스의 출발점에 도착한 도훈은 차를 주차시키고 도보 여행객처럼 위장했다.
'여기서부터 쭉 훑으면서 잠복해있는 윤보미를 찾아봐야 겠군.'
[근데 잠복해 있는 사람을 어떻게 찾으려고요? 말 그대로 모습을 숨기고 숨어 있는 거 아닙니까?]
'그래봐야 차 안에 있겠지. 잠복수사할 때 경찰들 다 차에서 죽치잖아. 젊은 여자가 차 안에서 계속 앉아 있으면 금방 눈에 띄지 않겠어?'
[과연 그렇게 쉽게 눈에 띄는 곳에 있을지.]
'일단은 찾아 보자고.'
도훈은 만능변장 세트를 이용해 적절한 의상으로 갈아입은 상태.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와 스카프를 이용해 얼굴을 거의 감추었다. 옷은 평범한 반 팔에 카고바지였고, 신발은 트래킹전용 등산화에 여행가방을 매자 영락없는 도보 여행자의 행색이었다.
혼자서 계속 8코스를 따라 걸으며 근방에 주차된 차를 눈여겨 보는데, 다른 여행객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대체로 둘, 혹은 셋이서 무리를 이루고 있었는데 드물게는 도훈처럼 혼자서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의외로 혼자 다니는 사람들은 남자들보단 여자가 더 많았다.
'이거 납치당하기 딱 좋은 코스구나.'
[네?]
'우리나라 사람들은 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한 편이란 말이지. 여자가 혼자 다녀도 딱히 무서운 일이 없으니까.'
[대낮인데다 다른 여행객들도 있으니 그걸 믿는게 아닐까요?]
'그 방심을 이용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코스가 긴 만큼 앞뒤로 전혀 사람이 없는 경우도 있잖아.'
[그렇긴 하죠.]
'그때 저런 수풀 사이에 숨어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덮치면?'
[대낮에 말입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봐. 오히려 밤이면 여자들도 조심하겠지. 최소한 혼자 이런 외진 길을 돌아 다닐 일도 없을 테고. 근데 범죄자가 낮이고 밤이고 가리겠어? 꼴리면 덮치는 거지.'
[일리가 있는 의견이군요. 대낮에 부녀자를 유괴라니.]
'유괴로 끝나면 다행이게. 나도 윤보미랑 생각이 같아. 왠지 강력 사건에 휘말렸을 것 같은 예감이 들거든.'
도훈은 하염없이 걷기만 했다. 다른 사람에게 땡볕에 20Km를 걷는 것이 고통이었겠지만, 체력이 강화된 도훈에겐 산보하는 수준이었다.
'음, 여기까지 눈에 띄는 차량은 없었는데 말이야.'
[지금 절반쯤 왔습니다.]
'나머지 코스 절반에 숨어 있으려나? 일단 저기서 커피라도 한 잔 사가야겠다.'
[색달해수욕장이요? 설마 다른 목적으로 들르시는 건 아니죠?]
'뭔 소리야. 제주도가 무슨 비키니 입은 미녀들이 선탠하러 오는 곳도 아닌데.'
[아닙니까?]
'적어도 제주도는 그런 문화가 아니야. 대부분 가족 단위 관광객이라 진짜 건전하게 입고 물놀이만 한다고. 그나마 10월이라 물 속에 들어가는 사람도 없을텐데 뭘.'
도훈의 말대로 색달해수욕장은 생각보다 한산한 편이었다.
모래사장을 맨발로 밟으려는 관광객 일부와 사진을 찍는 사람들만 오순도순 모여있었다. 도훈은 푸드트럭이 모인 곳에 가 커피를 시켰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요."
"네, 손님. 혼자 여행중이신가 봐요?"
트럭에 탄 남자는 인상 좋은 중년이었다. 덥수룩한 턱수염과 꽃무늬로 프린팅된 하와이안 셔츠가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네, 올레길 걷고 있어요."
"하하. 요새 그것 때문에 많이들 오시더라고요. 어디서 오셨어요?"
"서울이요."
"그렇구나. 저도 원래 서울 출신입니다."
"네."
도훈은 커피가 내려지기까지 기다리기 지루해 담배를 꺼내들었다.
"혹시 근처에 담배 태울만한 곳이 있나요?"
"그냥 여기서 태우세요. 해수욕장 안은 금연이라서요."
"아, 네."
도훈이 담배를 붙이기 위해 입을 가린 스카프를 내리자 털보 사내가 씩 웃었다.
"아이고, 미남이셨구만."
"저요? 하하, 별말씀을."
"잘생긴 얼굴 그렇게 가리지 말고 내놓고 다니시지. 올레길 같이 걷다가 눈맞은 커플도 은근 많다던데."
"그래요?"
"여자들도 은근 혼자서 여행을 많이 오거든요. 혼자 여행하는 여자들은 판타지가 있는 것 같아요. 여행지에 가서 근사한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그렇구나. 맞다. 혹시 여기가 거기 맞죠?"
"네?"
"왜, 신문에서 보니까 최근 여기서 실종 사건이 발생했다고 하던데요."
"…그래요? 저는 처음 듣는 얘기네요."
반 박자 느린 대답. 선글라스 속에서 도훈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뭐지, 저 반응?'
[네?]
'방금 이상하지 않았어? 목소리가 살짝 떨렸던 것 같은데?'
[설마 푸드트럭 커피가게 주인을 납치범으로 의심하시는 겁니까?]
'가만있어봐. 뭔가 수상하긴 한데….'
도훈은 빠르게 푸드트럭을 살폈다. 트럭 전체가 광고판처럼 커피가게의 이름이 페인팅 되어 있었기 때문에, 누가 봐도 커피를 파는 차라는 걸 알수가 있었다.
'아까 올레길 옆으로 도로가 나 있었지?'
[네. 일부는 겹치고, 일부는 갈라졌죠.]
'만약 도로와 인접한 곳에소 실종된 여성 여행자가 혼자 걷고 있었다고 쳐보자고. 갑자기 커피 트럭이 가까이 접근하면 경계할까?'
[그건 잘…. 보통은 지나간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근데 하필 도로 위에 다른 차가 한대도 없는 거야. 지나가는 여행객도 없고.'
[호오.]
'그리고 저 트럭 뒤에 누군가를 납치해 실었다면 아무도 흔적을 못 찾을 거고 말이지.'
도훈은 갑자기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 방문한 푸드트럭에서 단서를 발견한 것이었다.
"커피 다 됐습니다."
"네."
도훈이 커피를 받아들더니 주인에게 물었다.
"근데 정말로 못 들으셨어요? 올레길 8코스에서 엊그제 실종된 20대 여성 여행자 이야기요."
도훈은 일부러 자극적인 질문을 던지며 가게 주인의 속마음을 읽었다.
'로시, 마음의 소리 준비해.'
[넵. 준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