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615화 (1,595/2,000)

1615. 제주도 푸른 밤-45-

* * *

다음 날.

도훈은 아침 일찍 일어나 지구대로 향했다. 어젯밤 신고자 관련진술을 했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 가능성을 대비해 정체 불명의 모자를 눌러 쓴 상태였다.

"혹시 윤보미 경위님 계실까요?"

"네? 무슨 일로 찾아오셨을까요?"

사무실에 근무 중인 다른 경찰들에게 윤보미의 행방을 물었다.

"아, 지난번 사건 처리 때문에 여쭤볼 게 있어가지고."

"윤 경위님은 지금 출장 중이신데···."

"네? 자리에 안 계시다고요?"

"네. 올레길 실종 사건 관련해서 현장 조사 나가셨어요. 아시죠? 최근에 뉴스에도 나왔었는데."

"아···."

설마 자리에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던 도훈은 꾸벅 인사만 하고 물러났다. 아침 일찍 나오기 위해 근처 찜질방에서 쪽잠을 잔 것이 헛수고였던 셈.

'젠장 가는 날이 장날이구만. 그나저나 올레길 실종 사건이라고?'

도훈은 급히 스마트 폰을 켜 해당 키워드로 검색을 시작했다.

올레길 실종 사건은 아직 전국구 사건은 아니었는지, 중앙지보다는 제주 관내의 도민 신문 같은 지방지에서만 다뤄지고 있었다.

'여성 여행자 행방불명이라··· 흠.'

실종 신고는 생각보다 비일비재하다. 관련 사고 건수만 해도 하루에도 수십 건이 넘는데 대부분은 그 대상은 청소년들이고, 가출로 결론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제주도 같은 관광지에서 20대 여성 실종은 흔치 않은 일이다.

'혹시 성범죄일까?'

[성범죄라뇨? 실종 사건이라지 않았습니까?]

'학생도 아니고 20대 성인 여성의 실종이잖아. 성범죄 피해는 물론 최악의 경우 살인에 암매장까지도 가능한 일이야.'

[그렇게까지 대형 범죄라고요?]

'물론 아직은 알 수 없지. 단순히 연락 두절인데 오해해서 가족이 오인 신고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기타 일신상의 다른 문제로 제주도 와서 잠적했을 수도 있고. 다만 실종자가 여성이라는 것이 문제야. 만에 하나 성범죄라면 증거 인멸을 위해 살인사건까지 번지는 경우가 허다하거든. 이거 골치 아프게 됐는데. 하필 윤보미가 복잡한 사건을 조사 중이라니.'

[때가 좋지 않군요. 신경이 가뜩이나 예민할 텐데 괜히 접근했다가 다른 오해를 받진 않을지.]

'그러게 말이야. '

도훈은 기사를 읽고 사건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했다.

거리가 생각보다 있었기 때문에 차를 렌트하기로 했는데, 처음엔 비싼 오픈형 스포츠카를 빌릴까하다 사람들 눈에 너무 띄는 건 좋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평범한 전기차를 렌트했다.

제주도는 에코시티를 표방하며 최근 전기차를 정책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도로 위에 흔하게 널려 있었다.

[그나저나 미호양이 의리가 있더군요. 주인님께 미리 연락을 준 것을 보면요. 특임대를 계속 감시 중인 모양입니다.]

'그럴 수밖에.'

[네?]

'미호는 지금 나랑 완전히 엮여있다고 봐도 무방해. 만약 내가 잡히면 미호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일종의 운명 공동체랄까?'

[주인님은 만약 붙잡히면 미호양의 정체를 발설할 생각이십니까?]

'당연히 나야 입 다물겠지. 근데 놈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호와의 관계를 밝혀낼 걸? 고문이든 정신 조작이든 말이야.'

[흐음. 엄한 미호양이까지 위험에 처할수도 있겠군요.]

'업보라고 봐야지.'

[업보요?]

'미호도 원래는 나를 사냥하려고 했잖아.'

[아하.]

도훈은 전기차를 몰아 실종 사건 현장으로 다가갔다. 올레길은 제주도 해안도로를 빙 둘러 있는데, 총 거리만 해도 300Km가 넘는 엄청난 산책로였다. 최근에 도보 여행자들의 필수코스라고 할 만큼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 중 하나였다.

차에서 내린 도훈은 올레길 주변을 탐색하며 소문을 수집했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과 같은 관광객이었고, 실종 사건에 대해서도 딱히 모르는 눈치였다.

'젠장. 이건 뭐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도 아니고···. 이래서 어떻게 윤보미를 찾지?'

수색 범위가 생각보다 넓은 편인지 주변에 경찰차 한 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아직까지는 단순 실종사건으로 취급하는 모양이었다.

[윤보미양이 정말 플레이어일까요?]

'아마도 90% 정도?'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단순히 이름이 같은 경찰일 뿐 인데요.]

'직위.'

[네?]

'경위 직급은 보통 순경에서 진급하면 20년은 걸려야 오르는 자리야. 하지만 사진상의 윤보미는 그렇게 나이가 많지 않았어.

그게 무슨 뜻이겠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바로 경찰대 졸업생이란 뜻이야. 경찰대를 졸업하면 경위부터 바로 시작하거든.'

[아하.]

'잘 생각해보라고. 윤보미라는 이름은 한송이가 과외를 받을 때 과외선생으로 둘러댔던 가명이었어. 맞지?'

[네.]

'그리고 경찰대 출신이라는 것도 기막힌 우연이지. 한 해에 경찰대 졸업생이라고 해봐야 120명 안팎이거든. 서울대 의대보다 정원이 작다고.'

[세상에, 정말 그거 밖에 안됩니까?]

'이 우연이 모두 맞아 떨어질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아?'

[하지만···. 외모가 너무 다른데요.]

도훈도 이 점은 인정했다.

사이코메트리 영상 속의 윤보미는 보기드문 미인이었다.

국성 대학에서 퀸카 취급을 받는 한송이마저도 옆에 서면 평범하게 만들 정도로 월등한 수준의. 미인을 많이 만나본 도훈도 감탄할 정도였으니 그녀의 미모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사진상의 윤보미양은 너무 평범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평범이하였죠.]

'맞아. 그래서 나도 유심히 봤거든. 근데 한가지 특징이 유독 눈에 띄더라고.'

[뭘 말입니까?]

'눈동자.'

[네?]

'한송이가 지나가는 말로 그랬거든. 과외 선생님의 눈이 우리나라 사람하고 다른게 살짝 붉은 기운을 띄고 있었다고.'

[아! 저도 기억납니다. 설마···.]

'맞아. 얼굴이 바뀐 윤보미도 눈동자 색은 여전히 붉은 색이더라고. 그럼 무슨 뜻이겠어?'

[윤보미양이 일부러 외모를 변장했을 가능성이 크군요.]

'그렇지. 이름에 출신대학, 거기다 흔치 않은 붉은 색의 눈동자 색까지. 모든 정황을 봐선 플레이이일 가능성이 훨씬 커.'

[저도 주인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나저나 문제는 윤보미를 어떻게 찾느냐는 건데.' 도훈은 올레길 주변을 탐방하다 문득 CCTV가 설치된 것을 확인했다. 범죄 예방을 위해 주요 포인트마다 감시 카메라가 설치된 것이었다.

'저거네.'

[네?]

'내가 윤보미라면 아마 실종자의 모습이 담긴 감시카메라부터 살필 거야.'

[감시카메라는 경찰서에서 담당하지 않습니까?]

'그렇겠지. 인근 경찰서를 들어봐야 겠군.'

* * *

"다음 후보는?"

"이 친구야."

"이 친구는···."

"어제 조대근 지부장님이 영상자료로 주고 갔던."

"아아, 그 야동배우?"

"세상에. 플레이어가 야동 배우라니···. 정말 할 짓이 없는 놈인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옛날에 지오코모 경도 플레이어로 밝혀졌잖아."

"지오코모가 누군데?"

"지오코모 카사노바."

"아."

고급 호텔 방의 가운데 커다란 테이블이 차려져 있었다. 암막커튼 덕에 참석자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모두 네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빔프로젝터에는 대적자의 후보군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도훈의 경우는 가면을 쓴 배트맨의 얼굴로 대체되어 약간 코믹한 모습이었다.

"그럼 영상자료 확인을···."

"난 됐어. 정말 악취미로군."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장 자리에서 누군가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진행자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영상을 시청했다.

영상이 흘러나오는 동안 모두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게 전부인가?"

"아니. 더 있어."

"더 있다고?"

"특이하게 중간에 일본까지 진출했었더라고."

"일본을?"

"크큭, 태극기라도 꽂고 온 거야? 생각보다 애국자인데?"

"농담말고. 계속 이어 볼까?"

"일단 확인을 해야 하니까."

사내들은 다시 두 번째 영상을 시청했다.

성인 방송에 불과했던 첫 번째 자료와 달리 두 번째 영상은 전문적인 야동 제작 업체에서 만든 AV영상이었다. 긴 영상이 끝나 고나자 방안의 분위기가 살짝 후끈해졌다.

"대단한데. 완전 스고이였어."

"근데 두 편 모두 가면을 쓰고 있는건 우연일까?"

"아니겠지. 놈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러니 처음부터 정체를 숨긴 거야."

"영상 자료까지 남아있다면 오히려 금방 찾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왜 이놈을 놓쳤지?"

"조대근 지부장님에게 확인해 본 결과 어디에도 놈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는 거야. 성방 BJ 같은 경우는 얼마 뒤 은퇴를 해버려서 신원 파악이 안됐다더라고."

"도쿄핫인가 하는 저 일본 AV업체는? 배우들하고 계약서가 남아있지 않아?"

"그것도 확인하기 위해 일본으로 직접 출장까지 갔는데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데."

"어떤 흔적도? 조사를 너무 대충한 건 아니고?"

"정신 조작계 능력자인 창범이 직접 갔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못 찾았으면 정말로 모른다고 봐야지."

"아, 그 말투 싸가지 없는? 왠지 시건방진 녀석이던데."

"그만둬. 지부 요원들이 본부에 갖는 반감은 적당히 이해해야지."

"크큭. 하긴. 능력이 있었으면 본부로 차출되었겠지. 지부에 처박힌 놈들의 열등감이란···."

"아무튼 이걸로는 근거가 너무 부족해. 결국 이 놈이 플레이어라는 정도만 확인되고 다른 능력은 전혀 알 수가 없잖아?"

"나도 같은 생각이야. 설사 놈이 플레이어라고 한들, 저런 싸구려 능력으로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잡지 못할 거야. 세상에 좆이 커지는 능력자라니. 그냥 미친 변태 새끼 아니야?"

"일단 중요한 건 지부에서 유일하게 못 잡은 플레이어라는 거야. 그러니 후보에 넣어 둔거야."

"어쩌면 출현한다는 대적자가 이 쪽 지부 관활이 아닌 거 아닐까?"

"무슨 소리지? 신탁을 부정하는 건가?"

"여기서 나타나기는 하는데, 다른 지역에서 넘어온 거지. 그러면 신탁에 딱히 위배되지도 않잖아."

"흐음···. 그러면 너무 수색범위가 넓어지는데···."

"일단 저놈부터 추적해 보자고. 그나마 가장 유력한 후보 같은데."

"이미 사냥당한 플레이어가 부활의 권능을 가졌을 가능성은?

지난번에도 하나 있지 않았어? 머리만 남으면 남은 신체를 다시 재생할 수 있는."

"그건 너무 특이한 사례야. 게다가 부활했다고 한들, 대적자로 성장할 만한 잠재력을 가진 케이스도 아닌 것 같고."

"저놈은 잠재력이 있고?"

"그거야 모르지. 차차 조사해 보는 수밖에."

* * *

경찰서에 들어가려던 도훈은 입구부터 막혔다. 문 앞에 선 보초가 용무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네?"

"경찰서 방문 목적이···."

도훈은 순간 당황하여 아무 말이나 둘러댔다.

"사기 신고좀 하려고요."

"사기요? 지금 사기 피해를 당하셨다는 건가요?"

"아··· 그러니까 중고딩나라 거래를 했는데···. 상대방이 물건을 안보내고 벽돌을 보냈더라고."

"아···. 그러면 들어가셔서 왼편으로 꺾으시면 민원인 주차장에 주차하시고 그 앞에 민원실로 가시면 됩니다. 지능범죄수사대 가셔서 경위서 작성하시고요."

"넵, 감사합니다."

지구대와 다르게 경찰서는 출입부터 깐깐한 편이었다. 보통 일반인들은 경찰서를 방문할 일이 없다 보니 도훈도 처음 묻는 질문에 당황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보다 건물이 큰데.'

주차를 하고 보니 경찰서는 생각보다 건물도 크고 복잡한 편이었다. 여기서 CCTV를 관리하는 부서까지 찾아가는 것도 굉장히 복잡한 일이 될 것 같았다.

'어떻게 한다? 대부분 출입 금지 구역인 것 같은데.'

[너무 위험한 것 같습니다. 그냥 기다리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디서. 주차장에서 윤보미가 나올 때까지? 언제 나올 줄 알고?'

[흐음. 골치아프게 됐네요. 사방이 감시카메라에, 출입 제한 구역이라 얼굴을 바꿔도 쉽지 않고요.]

'경찰로 위장하는 건?'

[위장이요?]

'제복만 입으면 모르지 않겠어?'

[주인님은 훤칠해서 바로 눈에 띌 겁니다. 게다가 출입 제한 구역은 경찰로 위장을 한다고 함부로 들어갈수도 없고요.]

'흐음, 그러면 어떻게 한다.'

고민하던 도훈은 갑자기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투명인간?'

[네?]

'왜, 저번에 한 번 써먹은 적 있잖아. 투명인간으로 변신하면 어차피 안 보일 거 아니야. 그러면 카메라에 걸릴일도 없고 출입 제한 구역도 몰래 들어갈 수 있겠지.'

[투명 인간 스킬은 시간 제한이 있는 거 아시죠?]

'알지. 근데 빠르게 움직이면 금방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주인님 생각이 정 그러시다면.]

도훈은 차 안에서 옷을 훌렁 벗기 시작했다.

투명화 스킬은 몸만 투명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걸치고 있는 모든 소지품을 제거해야 안 보이게 만들 수 있었다.

투명인간으로 변한 도훈이 주차된 차문을 열고 몰래 걸어나왔다. 난데없이 차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장면은 유령의 장난처럼 기괴했다.

알몸으로 변한 도훈이 맨발로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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