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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614화 (1,594/2,000)

1614. 제주도 푸른 밤-44-

* * *

"그래서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요?"

"뭐가?"

"아니, 그 특공대인가 특임대인가 하는 놈들 말이에요. 진척은 좀 있데요?"

"낸들 어떻게 아냐?"

"대장은 그래도 지부장이잖아. 그러지 말고 뭐 소식 들은 거 없어요? 기왕이면 따끈따끈한 걸로."

"없어. 정말 자기들끼리 알아서 할 건 거 봐."

밤늦은 피씨 방에서 대근과 창범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야식을 먹는 타임인지 두 사람은 테이블에 도란도란 앉았다. 창범이 뜨거운 물을 부은 컵라면에 소시지를 손으로 뜯어 넣고 있는데, 갑자기 미호가 가게로 들어왔다.

"어? 미호 왔네."

"오늘은 요나거든?"

"이 시간에 근데 무슨 일로?"

"와, 치사하게 나 빼고 두 사람만 야식 먹는다 이거지?"

요나는 미호의 아홉 인격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캐릭터였다. 속된 말로 똘끼가 다분했는데, 감정 기복도 심해서 조증과 울증을 극단적으로 오가는 편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상태에서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모습일 땐, 말 안 듣는 장난꾸러기의 느낌을 물씬 풍겼다.

요나가 갑자기 창범에게 다가가더니 기습적으로 해드록을 걸었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꼼짝없이 당하고만 창범이 버둥거렸다.

"우, 욱. 뭐, 뭐하는 거야!"

창범은 해드록이 아프다기 보다, 가슴이 직접적으로 얼굴에 닿는 바람에 당황했다. 가슴도 큰 주제에 아무렇지 않게 남자 얼굴에 비벼대는 요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뭐긴? 나 빼고 야식 먹은 자의 최후지. 자, 남길 유언은?"

"노, 놓으라고!"

창범이 겨우 머리를 뺐지만, 뭉클거리는 미호의 가슴 감촉이 계속 아른거리는 바람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얼굴이 시뻘개진 창범을 향해 요나가 사과했다.

"미안. 숨 많이 막혔어? 너 얼굴이 엄청 빨게."

"에이씨, 진짜. 너도 하나 꺼내서 먹으면 될 거 아니야. 왜 갑자기 사람 목을 조르고 지랄인데!"

창범이 짜증을 내자, 듣고 있던 대근이 발끈해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먹을 거면 당연히 돈 내고 먹어야지!"

"네? 저도요?"

"몰랐냐? 알바비에서 계속 라면값 빼고 있는데."

"아니, 최저 시급도 안 맞춰 주면서 그 와중에 야식비를 따로 빼고 있었다고요? 양심 어디?"

"너야 말로 양심도 없는거지. 막말로 니가 건이처럼 열심히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가끔 카운터나 보는 주제에 정당한 임금을 요구하는 게 말이 돼? 피방비 안 받는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이런 악덕 사장 같으니!"

창범이 씩씩 거리더니 요나에게 말했다.

"미호 내 거 먹어. 난 하나 더 끓여올 테니까."

"요나라니까?"

"누구 입으로 들어가든 결국엔 미호가 먹는 거잖아."

창범이 라면을 끓이기 위해 물러나자 창범의 자리에 대신 앉은 요나가 생글거리며 대근에게 물었다.

"아저씨. 나 보고 싶었죠?"

"하하. 오늘은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이네?"

"당연하죠. 어제 생리 끝났거든요. 완전 개운해!"

"웁-!"

면치기를 하던 대근이 입에 담았던 라면을 뱉는 와중에 요나가 물었다.

"근데 특임대 애들 소식 없어요?"

"응? 신기하네? 오늘은 왜 물어보는 게 둘이 똑같지?"

"뭐가요?"

"아니 아까 창범이도 새로운 소식 없냐고 물어보더라고."

그 사이 컵라면에 물을 받아온 창범이 둘 사이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요. 오늘 대장이 특임대장 보러 갔었잖아."

"그거야 추가로 보충할 자료를 챙겨달라고 해서 간 거고."

"무슨 자료요?"

"왜, 년 초에 우리가 쫓았던 야동 배우 플레이어 있잖아."

"아 그 좆만 큰 놈?"

"어. 갑자기 그 놈이 나온 영상을 내어달라는 거야."

"헐. 어이없네? 하고 많은 플레이어들 두고···."

"그야 근래 우리 지부에서 유일하게 못 잡은 놈이니까 그렇겠지?"

"근데 영상 자료를 전달할 거면 이메일로 뚝딱 보내면 그만이지 무슨 인편 제출을 하라 그런데요? 그 새끼들도 은근 갑질이네?

누가 본부 소속 아니랄까봐."

"그게 아니라 음란물 자료를 메일로 보냈다가 괜히 기록 남으면 문제 생길까 봐 내가 USB에 담아간 거야. 나 예전에 한 번 저 작권 위반으로 합의금 물어주고 나니까 겁나서 파일은 못 보내겠더라고. 그쪽에서 먼저 요구한 건 아냐."

"지랄. 그러면 지들이 직접 찾으러 오던가? 싸가지 없게 사람을 오라가라. 가뜩이나 나이도 많은 사람을."

"지금 니가 더 맥이는 거 알지? ···응? 요나는 왜 갑자기 말이 없어?"

높은 텐션을 보이던 요나는 대근이 야동 플레이어 이야기를 꺼낸 직후부터 갑자기 입을 다문 상태였다. 특히 표정이 어두워지는 게 어딘가 우환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창범은 또 지랄 맞은 감정기복이 나타나는 줄 알고 조심스럽게 컵라면을 손에 쥐었다.

'저번에도 저러다 지랄 발광하고 테이블 엎어 버렸지 아마? 컵라면은 미리 챙겨야지.'

"암튼, USB 전달하면서 얼핏 들었는데 별 진척이 없어 보이더라고. 입만 신나게 털더니 우리랑 별반 다를 것도 없더만?"

"신기하네. 신탁이 틀린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아요?"

"그렇지. 근 2000년 넘게. 근데 이번 경우엔 신탁이 틀렸다고 할 순 없는 게, 이 근방에서 대적자가 나온다는 거지, 그 대적자를 특임대가 잡는다는 내용은 아니었으니까."

"하긴 그렇네."

"···그럼 놈들이 지금 그 야동 플레이어를 노리는 거예요?"

잠자코 듣고만 있던 요나의 말투가 진중하게 바뀌어 있었다. 두 사람은 직감적으로 미호의 또 다른 인격이 튀어나왔다고 생각했다.

"근데 뉘신지···."

"딱히 노린다기 보다는 별다른 단서가 없으니 되는대로 다 찔러보는 거 같아. 3년 전 우리가 잡았던 플레이어 기록도 열람하고 있더라고."

"이미 죽은 시체는 뭐하게요?"

"모르겠어. 가끔 부활의 권능을 가진 플레이도 있으니까. 혹시나 되살아 날 가능성까지 염두하고 있는 것 같아."

"여튼 별짓을 다하는 구만. 나중엔 무덤 파고 돌아다니겠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어, 어 그래."

"누군지 몰라도 참 예의 바르네. 아까 요나랑은 다르게."

"···."

화장실로 간 미호는 곧바로 도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별도의 연락을 위해 알려준 대포폰 번호였다.

"여보세요?"

-누구?"

"길게 말 못 하니까 잘 들어. 특임대가 너에 대한 자료를 확보했어. 당분간 절대 서울 올라오지 말고 계속 거기 숨어 있어. 무슨 소린지 알아 들었지?"

-특임대가 내 자료를? 어떻게?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어. 이만 끊을게."

통화를 마친 미호가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너무 위험해. 마치 살얼음 판을 걷는 기분이야.'

* * *

"특임대가 내 자료를? 어떻게?"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어. 이만 끊을 게.

통화는 그렇게 끊기고 말았다. 다시 전화를 걸어 자세한 내용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무슨 상황인지 모르니 그냥 다음 연락을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혹시나 PK단의 추적과 감시를 받는다면 꼬리를 밟힐 우려가 컸다.

[흐음, 특임대가 한발자국 더 주인님을 향해 다가가는 느낌이군요.]

'젠장. 내 영상자료까지 싹 다 넘어간 모양인데.'

[그래도 거기 얼굴은 안 나오지 않습니까?]

'얼굴은 몰라도 내 키랑 체형같은 건 들켰다고 봐야지.'

[확실히 위험하군요. 미호 말대로 당분간 제주도에 짱박혀 있는게 좋겠습니다. 설마하니 여기까지 추적하진 못할 테니까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여기서 그 사람을 발견할 줄은 몰랐으니까.'

나는 지구대를 나오기 전 우연히 본 조직도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바로 한송이의 과외 선생이자, 자칭 경찰대 졸업생이라는 윤보미였다.

[동명이인일 뿐 전혀 다른 사람 아니었습니까?]

문제는 여경의 얼굴이 사이코메트리 영상에서 봤던 윤보미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었다.

'모르지. 얼굴은 분장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니까. 나만 봐도 역용마스크 쓰면 전혀 다른 사람 보이잖아.'

[그러니까 지금 주인님은 윤보미인지 윤소미인지 하는 플레이 어가 얼굴을 바꾸고 경찰로 위장해 숨어있다고 의심하는 거군요.]

'그럴 확률이 높다고 봐.'

[근거는요? 한송이양에게 알려준 이름과 비슷할 뿐 전혀 생김새가 다른 사람 같은데요.]

'내가 윤보미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봤거든.'

[뭘요?]

'만약 자취를 감춘다면 어디가 제일 안전할까하고.'

[그게 제주도라고요?]

'빙고.'

[하지만 이곳은 PK단의 학살극이 벌어졌던 장소지 않습니까? 당연히 요주의 경계를 펼치지 않았을까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옛말에도 등 잔 밑이 어두운 법이라잖아. 오히려 초반의 위기만 넘기고 나면 가장 허술한 곳이 바로 제주도일 거야. 즉, 윤보미는 해저 동굴을 통해 자취를 감춘 이후 아예 밖으로 도망칠 생각조차 없었던 거야. 그러니 PK단 놈들이 천라지망인가 뭔가를 펼치고도 못 찾은 거겠지. 보미는 제주도를 나간적도 없으니까.'

[흐음. 그렇다면 내일 직접 만나보는 편이 확실하겠군요. 오늘은 이미 퇴근했다고 하니.]

'그러려고.'

도훈은 지구대 근방의 다른 숙소를 찾았으나 경찰조사를 마치고 나온 시각이 밤 11시라 숙소를 구하기 쉽지 않았다. 몇군데 더 찾아다니던 도훈은 나중에 귀찮아졌는지 인근 찜질방을 찾아 들어갔다.

'젠장. 돈이 많아 봐야 찜질방 신세로구만.'

[차라리 호텔을 알아보시죠. 호텔은 여유가 있을텐데요.]

'됐어. 거기까지 가기도 귀찮아. 내일 아침 윤보미가 출근하자마자 찾아봐야 하니까.'

찜질방에 들어온 도훈은 대충 샤워를 마치고 온돌방으로 들어갔다. 숙소보다 불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뜨뜻한 방바닥에 허리를 지지니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만약 그 경찰이 정말로 윤보미라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일단은 플레이어끼리 뭉쳐보자고 해야지. 그쪽이나 나나 PK 단에 쫓기는 건 마찬가지 입장이니까.'

[하지만 정체를 숨기고, 숨어 지내는 윤보미가 순순히 주인님께 합류할까요?]

'설득해 봐야지. 결국엔 이러다간 플레이어는 언젠가 사냥 당해 죽을 운명이니까. 상어밥이 되느니 상어가 되는 쪽이 낫지 않겠어?'

[상대도 주인님 주장에 동의해주면 좋겠군요.]

'그나저나 이해가 안되는 게 있어.'

[네?]

'윤보미 말이야. 만약 아까 사진에서 본 사람이 플레이어라면, 정말로 경찰대생이었다는 뜻 아닐까?'

[경찰대 졸업생 중에선 전혀 흔적이 없었는데요?]

'이름과 얼굴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면, 우리가 못 찾은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게 아니면 조금 끔찍한 가정을 해야 하거든.'

[무슨 가정이요?]

'플레이어 윤보미가 잠적을 위해 진짜 경찰 윤보미를 잡아 먹었다는 소리야. 남의 인생을 대신 살고 있는 거지.'

[아….]

'설마 그건 아니겠지? 플레이어는 살인을 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그렇겠죠. 지나친 억측입니다.]

'일단 내일 직접 만나보면 알겠지. 그나저나 플레이어가 공무원이라니 상상도 못했는데.'

[주인님도 예정대로 임용시험에 합격하시면 국가공무원이 되시는 거죠.]

'하긴. 선생 플레이어도 있는데, 경찰 플레이어가 없는 것도 웃기네.'

도훈이 그런 생각을 하고 눈을 감는데, 온돌방으로 한 커플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는데, 주변 사람들 눈치를 살피더니 구석 자리로 기어들었다.

'아씨, 저건 또 뭐야?'

[왜 그러십니까?]

'딱 보면 모르겠어? 둘이서 불장난하러 왔구만. 밤 귀도 밝은데 귀찮게 생겼네.'

도훈의 예상대로였다. 으슥한 구석에 자릴 잡은 커플은 누워서 무슨 짓을 하는지 곧 신음을 흘려댔다. 딴에는 최대한 입을 틀어 막고 소리를 죽이고 있었지만, 귀가 밝은 도훈에게는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왔다.

'아 놔 씨발, 진짜 공중도덕이라곤 없네. 차라리 모텔을 가던가.'

열 받은 도훈은 배게를 챙겨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남의 성생활에 딱히 관심도 없을뿐더러, 몰래 구경하는 취미는 더더욱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찜질방엔 누워 잘 자리도 부족했다. 여행객들이 비싼 숙소 대신 몰려온 탓인지, 사람이 누울만한 자리마다 미리 바닥요가 깔려있거나 누워자고 있었다.

'아으, 로시 네 말대로 호텔을 갈 걸 그랬다. 잠 잘 곳도 없다니.'

도훈이 뒤늦게 후회했다. 계속 잠잘 곳을 찾아 돌아다니던 도훈은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공간을 발견했다. 그곳은 바로 '아이스 방'이라고 불리는 냉골이었다. 하도 추워서 입김이 나올 정도로 온도가 낮은 방이다 보니 머물러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여기 괜찮네.'

[네? 여긴 사람 잘 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보통 사람에는 그렇지. 나한테는 상관없어.'

도훈은 이미 풍찬노숙에도 끄떡없는 몸으로 변해 있었다. 어지 간한 냉기로는 그의 체온을 떨어뜨리지 못했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운 도훈은 대자로 뻗어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으, 시원하다."

[주인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진짜 미친놈 같습니다.]

'상관없어. 조용히 잠을 잘 수만 있다면 말이야.'

도훈은 그대로 코를 골더니 잠에 빠져들었다. 중간중간 아이스방을 들르기 위해 방문한 사람들은, 냉방 한가운데 이불을 펴놓고 자는 도훈을 보고 식겁하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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