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605화 (1,585/2,000)

1605. 제주도 푸른 밤-35-

"도훈아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되냐, 여기 큰일 났다!"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배터리 떨어져서 충전하고 있었어. 방금 켠 거고.

"아니, 지금 여기 귤희랑 리나랑 대판 싸움 났거든!"

-어, 둘이 싸운 것 같더라.

"싸우는 정도가 아니라…. 암튼, 얼른 와봐야 할 것 같아."

-숙소로 돌아가는 중이니까 조금만 기다려봐.

"지금 도훈 오빠야? 나 좀 바꿔줘."

옆에 있던 귤희가 대뜸 전화를 뺐더니 연결을 시도했지만, 도훈은 제 할 말만 마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시 핸드폰 전원을 꺼버린 도훈은 피곤한 표정으로 오토바이를 출발시켰다.

[근데 여기서 추적은 끝입니까? 경찰대녀의 행방을 더 추적해 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미션도 끝났겠다 별로 급하지도 않은 숙소로 바로 돌아가는 것은 좀….]

'어차피 지금으로선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죠. 랭커 플레이어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자가 치료를 시도하긴 했지만, 분명 장기간 요양이 필요한 부상이었고요. 인근 병원 같은 곳을 찾아보면 치료한 흔적이 나오지 않을까요?]

'그 생각은 나도 해봤는데, 나라면 절대 제주도 내에서 병원을 방문하진 않았을 거야.'

[왜 그렇죠?]

'생각해봐.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그 사건은 제주 지부에 있는 PK단 대부분이 몰살당했을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어.

보분에선 특임대까지 파견했고, 천라지망인가 뭔가를 펼쳐서 전국적인 수색 작전까지 펼쳐졌다고. 근데 한가하게 부상 치료를 위해 병원을 들렀다? 그것도 사건 현장인 제주도에서? 그건 절대 말도 안 된다고 봐야지. 더구나 PK단이 그런 기초적인 조사도 안 해봤을까?'

[듣고 보니 그럴듯 하군요.]

'아이템의 효과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임시 치료를 통해 어느정도 부상은 회복된 상태였어.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선 분명 자가치료를 시도했을 거야. 그러니 이제와서 병원을 수색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지.'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일단 이후의 추적은 지난번 한송이에게 남겼다는 이메일에 집중해야 해.'

[이메일이요?]

'한송이가 그랬잖아. 1년 전엔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메일이 한통 왔었다고.'

[네, 기억납니다. 하지만 이메일만 가지고 어떻게 추적을 하죠?

자기 명의의 아이디나 컴퓨터를 이용해선 작성하진 않았을게 뻔한데요.]

'어쨌든 이메일을 보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IP주소가 남게 되어 있어.'

[우회하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전문적인 해커라면 몇 번을 우회해도 결국 최초 발신지를 찾아 낼 수 있어. 그리고 IP주소가 나오면 접속 위치를 알 수 있고. 그곳이 국내라면 거기서부터 다시 추적을 시작할 수 있겠지.'

[역시 주인님은 다 계획이 있으시군요.]

'내가 가장 궁금했던 건 제주도 학살자가 대체 어떤 인물이었냐는 거야.'

[그래서 알아내셨습니까?]

'응. 일단 그녀의 직업이 마법사라는 것. 그것도, 굉장히 무시무시한 수준의.'

[주인님은 굳이 따지면 전사에 가까우니 궁합이 잘 맞겠군요.]

'속궁합은 아직 모르지.'

[아니 그 궁합을 말하는 게 아니잖습….]

'그리고 PK단에 굉장한 원한을 갖고 있을 거라는 것. 놈들에게 거의 죽을 뻔했으니까. 공동의 적이 있다면 의기투합하기도 좋겠지.'

[아무튼 주인님 뜻은 알겠습니다.]

로시와 대화를 하는 사이에도 도훈은 엄청난 속도로 제주도 해안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배기량이 낮은 필두의 오토바이이 엔진이 터질 것처럼 굉음을 내질렀다.

* * *

도훈이 숙소에 도착했을 땐 어느덧 해가 떨어지고 사위가 어두워진 시각이었다. 도훈은 난장판으로 뛰어들기 전 핸드폰 문자로 필두를 밖으로 따로 불러냈다. 필두가 헐레벌떡 도훈에게 달려왔다.

"도, 도훈아."

"지금 어떻게 됐어?"

"몰라, 완전 개판 오분 전이야. 겨우 떼어놓긴 했는데 둘이 만나기만 하면 머리채 잡고 싸워서 숙소 사람들이 아주 난리도 아니야. 이러다 게하에서 쫓겨날 것 같은데…."

"쫓겨나면 조용해 지겠네."

"아, 아니 도훈아 그래도 우리가 수습을…."

"왜?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아니 그래도 이번 일은…."

필두가 우물쭈물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속으로는 이게 다 도훈이 너 때문이라는 걸 말하고 싶지만,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처지인 것 같았다.

"하여간 별 거지 같은 것들이 여행 분위기만 망치고 있네. 지금 애들 어딨어?"

"리나는 숙소방에서 짐싸고 있고, 귤희는 밖에…."

"내가 가서 얘기해 볼게. 필두 넌 이제 신경 안 써도 돼."

"저, 정말?"

"그래.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

도훈은 필두를 물리치더니 밖에 나와있는 귤희를 불렀다.

"귤희야."

"오빠!"

귤희는 도훈을 향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다시 만나니 반갑기도 하지만, 모든 일의 원흉이 된 그를 원망하는 눈치였다.

"가자, 리나한테."

"그년은 왜?"

"담판을 지어야지. 다른 사람들 불편하게 이게 뭐냐."

"아씨, 진짜 억울해서…."

"가서 얘기하자."

도훈은 딱 잘라 말하더니 귤희를 데리고 리나가 있는 숙소방으로 들어갔다. 짐을 챙기고 있던 리나는 귤희를 보더니 금방이라도 달려들것처럼 으르렁 거리다 도훈이 옆에 있는 걸 보고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필두가 옆에 있을 때는 그를 없는 사람취급 했던 둘이었지만, 도훈의 앞에선 최대한 절제하며 감정을 조절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근데 이젠 주인님 손을 떠난 거 아닙니까? 대체 어떻게 수습하시겠다는 건지.]

'수습은 무슨? 어차피 남보다 못한 사이로 갈라졌으니 아예 못을 박아야지.'

"너희들 덕에 혼자 우도 구경 잘 다녀왔다."

"오빠, 이건 오빠 책임도 있잖아."

"맞아. 우리가 왜 싸우게 된 건데!"

"왜 싸운 건데? 설명해봐."

리나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귤희 저년이 먼저 오빠한테 꼬리쳤다며? 어제 새벽에! 난 그것도 모르고…."

"야, 터진 입이라고 멋대로 씨부리지 말고. 도훈 오빠가 니거야? 맡겨놨어?"

"미친년. 그래 놓고 오늘은 필두 오빠랑 붙어 먹었니? 아주 남자만 옆이 있으면 자궁이 막 떨리니?"

"그건 도훈 오빠가!"

잠자코 듣고 있던 도훈은 자신에게 불리한 주제가 나오자 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잠깐. 너희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무슨 착각요?"

"저희가요?"

"일단 내가 두 사람에게 호감을 가졌던 건 맞아."

"그래서 오늘 저녁에 나한테 고백 한다며?"

"니가? 내가 아니고?"

"뭐래 미친년이. 한 번 대주면 남자들이 더 혹할 줄 알고?"

"너는 안 대줬어?"

"워워, 다들 진정하고 내 말부터 들어봐."

도훈이 이목을 집중시키더니 차분하게 설명했다.

"난 솔직히 둘다에게 조금씩 마음이 있었어."

"둘 다?"

"오빠 바람 둥이였어?"

"아니,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라고. 모두에게 호감이 있다고 그게 바람둥이라는 소리는 아니지."

"뭐가 아니야? 결국 오빠는 우리 둘 다…."

"말 똑바로 해야지. 내가 먼저 들이댔어? 너희들이 덤빈거지."

"그게…."

"와!"

"니들 말마따나 준다는데 내가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잖아. 세상 어떤 놈이 준다는 여자를 마다하겠냐고."

도훈의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대놓고 중간에서 와리가리 타면서 둘을 가지고 놀았다는 걸 뻔뻔하게 밝히는 도훈이 그렇게 가증스러울 수 없었다.

"나한테 그럼 거짓말한 거야? 오빠가 필두 오빠랑 자면 날 선택하겠다고 약속 했잖아!"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미친!"

"그건 무슨 소리야?"

"오빠가 나보고 필두 오빠랑 자라고 했다고!"

귤희의 폭로에 리나가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도훈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예상보다 훨씬 미친놈 이었던 것이다.

도훈은 어차피 미션도 끝났겠다, 다시 볼 사이도 없으니 막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아, 생각해보니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네. 근데 그걸 정말 할줄은 몰랐지. 농담이었는데."

"뭐, 뭐라고? 농담? 야이 씨발놈아!"

귤희가 눈이 뒤집히더니 도훈에게 뺨을 올려붙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지만 도훈에겐 슬로우 모션처럼 보일 정도로 느린 동작이었다.

도훈은 가볍게 손을 뻗어 귤희의 손목을 낚아채 저지시켰다.

"워워. 진정하라고. 나는 여자가 때린다고 맞아주는 호구가 아니거든."

"아, 안 놔? 감히 날 가지고 놀아?"

귤희가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지만 도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에 힘을 주며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니들이 이제껏 만나왔던 호구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까불지 마. 쳐맞기 싫으면."

살짝 살기를 내뿜었을 뿐인데도 귤희는 도훈의 눈빛을 보고 오금이 저릴 정도로 겁을 집어먹었다.

"놔, 놔달라고."

"그리고 어제부터 계속 반말 찍찍하는데, 언제 봤다고 나한테 반말이야? 앞으론 존댓말 써."

"놔주세요. 오빠."

"그래야지."

그제야 귤희의 손목을 놓아준 도훈이 숫컷 특유의 공격성을 드러내며 두 사람에게 경고했다.

"여자들은 가끔 주제를 모르고 덤빌 때가 있더라고. 안 맞아봐서 그래. 뒤지게 처맞고 나면 자기보다 센 사람에게 겁 없이 덤비진 못할 텐데 말이야."

"……."

도훈은 잔뜩 겁을 먹은 두 사람을 쳐다보며 계속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계산할 거 남아 있지 않아? 어제 내 택시비랑 숙박비 돌려줘야지?"

"태, 택비시요?"

"너희들이 가방 바꿔가는 바람에 일정에도 없는 이곳까지 밤에 택시타고 왔으니 말이야."

"택비시는 그렇다고 치고 숙박비는 왜…."

"난 여기서 잘 생각 없었는데, 니들 때문에 여기 묵었으니까.

택비시랑 숙박비 해서 도합 8만원이야. 계산은 깔끔하게 해야지?"

"아니…."

"……."

[주, 주인님 이건 좀 찌질한 거 아닙니까?]

'설마 내가 돈이 아까워서 그렇겠어? 나처럼 돈 많은 사람이?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백만원을 그냥 줄 지언정 저런 년들에겐 10원도 아까워.'

"뭐해? 당장 안 주고. 현금 없으면 입금해도 상관없고."

"오빠 진짜…."

"저는 현금으로 드릴게요."

리나가 먼저 지갑을 꺼내더니 현금을 꺼내 건넸다. 도훈은 현금중 4만원만 받고 나머진 다시 돌려주었다.

"두 당 4만원씩."

"와…. 오빠 이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귤희도 억울해 하면서 지갑을 찾아 돈을 내밀었다. 도훈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계산은 깔끔하게 해야지? 그리고 막말로 어제 대실비는 내가 냈거든? 그것도 더치페이 할까?"

"……."

귤희는 더 따졌다간 본전도 못 찾겠다는 생각에 재빨리 4만원을 내밀었다. 계산을 끝낸 도훈은 다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이걸로 우리들 사이 계산은 끝났어. 한 가지 더 알려주자면 어제까진 나도 둘 모두에게 호감이 있었는데, 오늘 일로 정이 뚝 떨어졌으니 이쯤에서 서로 헤어지는 게 좋겠어."

"지금 누가 할 말을!"

"오빠, 진짜 나쁜 사람이다."

리나가 눈을 흘기며 도훈에게 원망을 말을 쏟아냈다.

그러자 도훈이 곧바로 되받았다.

"나쁜 사람? 너희들도 똑같은 거 아니야? 한 년은 군대에 멀쩡히 있는 남친 두고 여행와서 다른 남자랑 자고, 또 한 년은 지도 몰래 바람 피운 주제에 남자친구가 바람 피웠다고 헤어지고."

이제껏 미션 때문에 꾹 참고 있던 도훈은, 미션이 해소되자 마자 하고 싶었던 말을 모조리 쏟아냈다.

"내가 조언하나 하자면, 니들 인생 그렇게 사는 거 아니야. 누가 누굴 욕해? 니들도 막상 당해보니 열 받지? 앞으론 남자 우습게 보지 마라."

"……."

"쳇."

두 사람은 서로 날을 세우며 싸운던 것도 잊고 어느새 도훈에 대한 분노와 원망으로 똘똘 뭉치고 있었다.

[어째 주인님의 쓸데없는 말 때문에 역효과가 난 것 같은데요?]

'어차피 미션 끝난 거 아니야?'

[끝나긴 했는데, 이게 또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서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게 아닌가 싶습니다.]

'뭐야? 설마 이미 끝난 미션이 철회될 수도 있다는 소리야?'

[그런 일은 거의 없지만, 또 아주 없는 일은 아닙니다. 어쨌든 마지막 멘트는 안 하시는게 더 좋았을 것 같네요.]

'흐음. 이럴 목적은 아니었는데, 갑자기 나도 흥분해서. 그럼 어쩌지?'

[두 사람을 확실히 갈라 놓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런 결말은 썩 예후가 좋지 않을 것 같거든요.]

'알았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냈던 도훈이 갑자기 두 사람을 보고 말했다.

"맞다. 이 얘기는 안 하려고 했는데, 마저 해야 겠다."

"?"

"뭘요?"

"내가 둘 다 먹어봤는데, 귤희 니가 더 쩔더라."

"……."

"지금 그게 이 상황에서 할 소리예요?"

"아니 혹시 궁금해 할 것 같아서."

귤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지만, 리나보다 더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씰룩이고 있었다. 반면 대놓고 비교를 당한 리나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끝내 한마디 했다.

"저랑은 제대로 하지도 않으셨잖아요!"

"뭘?"

"아니, 귤희랑은 방까지 대실해놓고 했다면서요? 저는 갑자기 무슨 오두막 같은 데서…."

"그래서? 원래는 더 잘할 수 있다는 거야?"

"제가 당연히 귤희보단 낫죠!"

"웃기고 있네. 니가? 니 까짓게?"

"미친년이 뒤질라고!"

"워워, 잠깐만. 싸우지는 말고 그럼 이렇게 한 번 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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