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4. 제주도 푸른 밤-34-
도훈이 간만에 사이코메트리 스킬을 떠올렸다.
사물에 깃든 기억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해당 스킬은, 사용자가 애착을 가진 물건일수록 훨씬 생생한 기억을 담고 있었다.
[쓰다가 버린 1회용 물건이라면 기억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하지만 동굴을 빠져나올 때까지 소중히 지니고 있던 물건이라면 분명 건질만한 게 있을 거야.' 도훈이 스킬을 실행하자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리게 흐르더니 이내 장소가 바뀌었다. 그곳은 바다로 뛰어들기 전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우도의 후해 석벽이었다.
도훈은 드론으로 위에서 촬영하는 것처럼 부감도로 해안 절벽을 내려 보고 있었다.
'저기다.'
도훈이 시선을 돌리자 절벽 위에서 싸우는 사람들 모습이 보였다. 모두 네 사람이었는데, 흉흉한 무기를 든 사내 셋이 여자 한 명을 벼랑 끝으로 조금씩 밀어붙이고 있었다.
'어? 부상을 입은 것 같은데?'
[네?]
'저 여자가 그 경찰대녀 플레이어 맞지?'
도훈이 영상에 나온 여자를 가리켰다. 흰 티를 입은 여성의 옆구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는데, 멀리서 볼 땐 프린트 된 디자인인 것처럼 보였으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이 핏물이 밴 부상의 흔적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근데 부상이 생각보다 심각해 보이는데요?]
PK단의 공격에 치명상을 입은 모습.
사내들의 협공에 계속 뒤로 밀려나던 여성이 부상 부위를 부여 잡고 신음했다.
"흐읏."
"그만 포기하시지. 네년이 아무리 괴물이라도 그 상태로 바다로 뛰어들었다간 시체로 떠오를 테니까."
부상을 입었다고는 하나 여성은 너무 무기력해 보였다. 제주도 학살자라 불리던 플레이어의 모습이라고 믿기 힘든 장면이었다.
'저게… 랭커라고? 생각보다 너무 약한데?'
[네?]
'저 정도 실력으로 어떻게 20명 넘는 제주지부 조직원을 학살했다는 거지? 말도 안 돼.'
도훈은 천상 크래프트를 통해 이미 무기술 익힌 상태. 무기를 들고 선 자세나 보법만 보아도 얼추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경찰대녀의 실력은 형편없었다.
[혹시 옆구리의 부상 때문 아닐까요?]
'내장이 튀어나온 것도 아니고, 칼끝에 베였을 조금 뿐이야. 저 정도 부상으로 전투력을 상실했다고 보기엔 너무 어설퍼.'
도훈은 랭커 플레이어의 실력에 납득할 수 없었다. 중수인 자신이 지금 싸워도 경찰대녀보다 낫다고 확신했다.
'뭔가 이상한데? 혹시 전혀 다른 방식의 능력자인건가?'
[어떤 능력이요?]
'PK단의 목을 벴다고 했잖아. 알고 보니 스스로 목을 치게 만드는 정신 조작계 능력자라든지 말이야.'
[세뇌로 자살을 유도했다는 뜻입니까?]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돼. 저따위 실력으론 상대의 목을 베기 는커녕 다가가다가 자기 목이 먼저 떨어질걸?'
그때였다. 위기에 몰린 경찰대 녀가 머리 위로 커다란 원반을 만들어 낸 것은.
부웅-
'저건 뭐지? 설마 공격 마법인가?'
푸르스름한 기운을 띈 원반은 직경 1M 크기의 원형 톱날처럼 보였다. 머리 위로 떠 오른 원반이 부메랑처럼 사내들을 향해 벼락같이 쏟아졌다. 그 속도는 예상외로 너무 빠르고 움직임이 각도가 예리했기 때문에 도저히 피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사내들이 급하게 무기로 막아보았지만, 칼로 두부를 자른 것처럼 원반이 무기를 손쉽게 자르더니 목까지 뎅겅 자르고 지나갔다.
[윈드 커터!]
'뭐?'
[마법입니다! 풍계열 마법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그럼 랭커 플레이어가 마법사였다는 소리야?'
사내 하나의 목을 쳐낸 원반은 속도를 줄이지도 않고 두 번 째사내를 향해 쏘아졌다. 마치 스스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정확한 궤적으로 날아간 원반은 또다시 다른 사내의 목을 떨어뜨렸다. 불과 1초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으으, 이 마녀!"
놀란 마지막 사내가 손에 든 단검을 투척하더니 뒤로 돌아섰다.
하지만 채 등을 돌리기도 전에 그의 몸은 좌우로 분리됐다. 회전한 마법의 원반이 이번엔 세로로 그의 몸을 갈라버렸던 것. 완전히 반으로 쪼개진 몸체가 비현실적으로 분리되었다.
"컥-!"
하지만 경찰대녀 역시 마법을 컨트롤 하느라 상대의 반격을 놓쳤는지 왼쪽 어깻죽지에 단검이 박히고 말았다. 어찌나 세게 박혔는지 충격으로 뒤로 세걸음 물러났고, 하필 그녀가 서 있던 위치는 해안 절벽의 벼랑 끝이었다.
"으아아!"
그대로 여성이 바다 속으로 추락하며 영상이 끝이 났다.
'와, 이럴 수가. 내가 방금 본 게 뭐지?'
[마법입니다. 제주도 학살자의 정체는 바로 마법사였군요.]
'어쩐지. 아무리 생각해도 상대의 목을 자를 만큼의 무기술은 없어 보였는데, 마법이라고 하니까 이제 납득이 가는 군. 근데 저런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째서 막다른 길까지 몰린 걸까?'
[마나 고갈이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법은 위력은 빼어나지만 무한히 쓸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마지막에 날린 공격은 마지막으로 아껴두었던 마나를 모조리 쏟아낸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우도까지 온 것이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진짜로 코너에 몰린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사이코메트리로 영상을 확인한 도훈은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일단 경찰대녀 플레이어의 클래스는 마법사.
그것도 바람 마법을 익힌 풍 계열 마법사로 보였다. 상대가 끔찍하게 당한 이유는 그녀의 검술이 아니라, 칼날 보다 예리한 윈드 커터 마법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마지막으로 그녀를 포위했던 상대의 대응으로 봤을 때, PK단은 그녀의 주력 스킬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생각보다 지독한 여자였네.'
[네?]
'자신이 극강의 마법사라는 걸 상대가 끝까지 몰랐다는 것은, 마주친 PK단을 모조리 살해해 버렸다는 뜻이거든. 그러니 저렇게 무방비로 당해버린 거지.'
[또 신체적 능력은 주인님 수준까지도 안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맞아. 일반인 보다야 뛰어나겠지만, 그렇다고 주먹으로 바위를 쪼갤 정도는 안되는 것 같아. 공격을 당해 부상을 입은 것만 봐도.'
[다른 영상으로 넘어가시겠습니까?]
'그래. 계속 보자.'
이어지는 영상은 칠흑같은 용암동굴 속에서 플레쉬 라이트를 켜는 것으로 시작했다.
불빛에 드러난 여성의 상태는 무척 심각해보였다. 옆구리에 자상도 심각했지만, 어깻죽지에 박힌 단검 역시 여전히 박혀 있었다. 숨소리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였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의식을 잃을 것처럼 보였다.
도훈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플레이어의 상태를 체크했다.
'저기서 어떻게 살았지?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상황인데?'
당장 응급실에 가지 않고선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상황.
하지만 플레이어가 뭔가를 꺼내 상처에 바르자 조금씩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도훈은 그녀가 치료 아이템 종류를 썼다고 확신했다.
'그렇구나. 플레이어니까 마켓을 이용해서 아이템을 구매해 상처를 치료한 거였어.'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기력을 회복한 플레이어는 방금 전 도훈이 그런 것처럼 동굴 안쪽 깊숙이 들어가더니 섬 안의 나무뿌리 쪽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임무를 다한 플레쉬가 바닥에 버려지며 영상이 끝이 났다.
사이코메트리 영상을 모두 확인한 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모든 비밀이 밝혀졌군. 제주지부 학살자는 포탈을 이용해 빠져나간 게 아니었어. 몰리고 몰리다 벼랑 끝에서 추락한 뒤 우연히 이 동굴을 발견해서 살아난 거지.'
[그렇다면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방법은 모르지만, 아마도 시간을 들여 제주도를 무사히 빠져나겠을 가능성이 크지. PK단에서 발견한 것은 절벽 위에서 끔찍하게 살해당한 세 구의 시체 뿐이었을 테니까.'
[그럼 그 뒤로 플레이어가 모습을 감췄고, 추적이 종료되었군요.]
'충분히 그럴만해. 랭커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상대는 엄청난 위력의 마법사야. 공격은 뛰어나지만 보다시피 내구성은 형편없지. 일종의 유리대포랄까?'
[유리 대포요?]
'무작정 포탄을 갈겼다간 본인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뜻이야.
다만 제주지부의 PK단이 학살 당한 건, 자신의 스킬을 들키지 않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처였다고 봐야지.'
[아, 그러니까 죽이지 않고선 약점을 들킬수 밖에 없으니 죽여서 입막음을 했던 것이군요.]
'맞아.'
[하아, 그나저나 아쉽게 됐군요. 랭커급 플레이어의 흔적을 찾으러 왔는데 결국엔 도망친 과정만 확인하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어쨌든 능력도 알았고,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면 국내 어딘가에 조용히 숨어 살고 있다는 소리겠지. 그렇다면 언젠간 만날수 있어. 얼굴은 알고 있으니까.'
[그녀를 만나면 동료로 삼으실 생각입니까?]
'최대한 협조를 구해봐야지. 어차피 저 여자도 PK단의 공적인건 마찬가지야. 살기 위해서라도 나와 함께하지 않겠어?'
[물론 주인님의 업적도 채우시고요?]
'업적? 무슨 업적?'
[플레이어와 하룻밤 말입니다.]
'아하. 그거야 굳이 애쓰지 않아도 알아서 덤비지 않겠어?'
[너무 자신감이 넘치시는 것 아닙니까? 여자들에게 인기 좀 많다고 상대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은데요?]
'자신감이야 무공을 모를 때도 넘쳤지.'
우도에서 모든 단서를 파악한 도훈은 훨씬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본섬으로 돌아가는 배를 탔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갔다가 괜히 봉변을 당하는 게 아닐지.]
'내가? 내가 뭘?'
[리나양하고 귤희양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으셨으니까요. 주인님께 불똥이 튈지도 모릅니다.]
'그거야 내가 알아서 잘 하면 되고. 어쨌든 필두한테 빌린 오토바이느 가져다 줘야 하잖아.'
[아, 그렇군요.]
'게다가 그 몰카범도 응징해야 하고.'
[게스트 하우스 주인이요?]
'응. 그런 새끼는 제대로 콩밥 한 번 먹여야지. 내가 제일 혐오하는 새끼가 그런 몰카범 놈들이거든.'
[근데 주인님도 일전에 설치하신적 있는 것 같은….]
'내가 다른 사람 떡치는 거 구경하려고 설치하진 않았지. 하여간 그놈은 그냥 두면 안 돼. 남 일이라고 나몰라라 했다간 애꿎은 피해자만 계속 늘 테니까.'
[주인님이 정의를 위해 움직이는 모습은 오랜만인데요?]
'정의? 정의는 전혀 아니지.'
[그럼 뭔가요?]
'나쁜놈이 더 나쁜놈을 처단하는 거랄까?'
[역시!]
* * *
도훈이 우도에서 일을 마치고 있을 무렵.
이미 숙소에 도착한 귤희와 리나는 대판 싸우는 중이었다.
"야이 씨발년아!"
"뭐이 씨발년아!"
머리채부터 붙잡고 드잡이를 시작한 두 사람의 모습에 필두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육탄으로 저지했다.
"싸, 싸우지마!"
"오빤 빠지라고!!"
"넌 또 뭔데 껴들어?"
괜히 남의 싸움에 참견하는 바람에 필두는 오지게 핡퀴고 두들겨 맞았지만, 어떻게든 중재를 시켜야 겠다는 각오로 감내했다.
"비키라고!"
"왜 저년 편드는데?"
사방에서 얻어 터지던 필두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쥔 채 생각했다.
'내, 내가 왜 맞아야 하는 거지?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아침에 기분 좋게 출발했던 여행 메이트가 서로 욕하고 싸우는 꼴을 차마 지켜볼 순 없었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니가 도훈 오빠 먼저 꼬리쳤지?"
"꼬리는 니가 먼저 쳤겠지, 걸레년아!"
"뭐? 걸레? 너 말 다했어?"
"왜? 모를 줄 알아? 너 저 새끼랑도 붙어 먹었다며?"
난데없이 지목된 필두가 움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 들었거든? 아주 씨발, 만나는 새끼마다 다 주고 다니고 있네."
"뭐라고? 이 씨발년이 터진 입이라고 진짜!"
"그, 그만!"
참다못한 필두가 크게 소리쳤다. 두 사람이 잠시 소강상태에 빠지자 필두가 양쪽을 번갈아 보면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내가 볼 땐 이건 두 사람이 싸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그럼?"
"저년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니까? 내 옷 다 찢어놨잖아."
"일단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 우선 도훈이가 다시 돌아와야 얘기가 될 것 같아."
"도훈 오빤 어디갔는데? 넌 왜 혼자 돌아왔어?"
"참나, 그걸 니가 왜 궁금해해? 아침에는 필두 오빠한테 붙었다 저녁되면 도훈 오빠한테 가게? 아주 그냥 니가 다 헤쳐먹어라."
"이게 진짜 뒤질라고!"
두 사람이 다시 손톱을 세우며 달려들자 필두가 샌드백처럼 중간에서 온 몸으로 저지했다.
"아, 알았어. 내가 도훈이 한테 전화 해볼게!"
"뭐?"
"도훈이가 내 오토바이 끌고 갔잖아. 분명 돌려주러 다시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보자고."
"씨발, 진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밖으로 나가자."
"내 방인데 내가 왜 나가?"
"아니, 도훈이 올때까지만이라도."
두 사람을 떨어트려 놓아야겠다고 판단한 필두가 귤희의 손을 끌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귤희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지 씩씩 거리고 있었다.
"씨발년이 진짜 저딴 게 친구라고."
"귤희야 너무 흥분하지 말고 진정해. 담배라도 피우고 있을래?"
"신경쓰지마! 내가 알아서 펴."
귤희가 담배를 물고 있는 사이 필두가 도훈에게 전화했다.
사실 아까부터 계속 통화를 시도했지만, 전화기가 꺼진 것처럼 연결이 되지 않았다.
'도훈아…. 제발 좀 받아봐. 여기 지금 난리났어.'
필사적인 마음으로 다시 통화를 시도했는데, 갑자기 수신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 걸린다!'
-여보세요?
도훈이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