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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602화 (1,582/2,000)

1602. 제주도 푸른 밤-32-

[드디어 본격적인 PK단 추적이 시작되는군요. 저는 임무를 망각하신 줄 알았습니다.]

'드디어라니? 고작 반나절 지났을 뿐이라고. 생각해봐. 어젯밤에 비행기 타고 숙소에서 하루 잤으니, 지금 착수하는 것도 늦은 건 아니지.'

[그렇게 되나요? 워낙에 많은 일들이 있어서 보름쯤 지난 줄 알았지 뭡니까?]

도훈의 우도 출발은 늦은게 아니었다. 사실상 어젯밤 리나와 귤희와 얽히지 않았어도 본격적인 조사는 오늘부터 시작하는 게 맞았다.

'보고서를 보니 마지막 행적이 남아있는 곳이 우도였더라고. 여기서부터 역으로 추적해 들어가면 분명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우도는 제주도에서도 배를 타고 들어가는 부속 도서다.

즉, 우도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것은 말 그대로 섬 안에 섬에서 증발했다는 이야기였다.

[근데 이상합니다. 차라리 제주도 내에서 사라졌다면 추적이 훨씬 복잡했을 것 같은데, 왜 하필 우도일까요?]

'무슨 뜻이지?'

[우도는 섬에 딸린 섬이지 않습니까? 막다른 길로 스스로 들어간 셈이랄까요?]

'하긴? 듣고 보니 그것도 이상하네.'

제주도는 생각보다 큰 화산섬이다.

사람이 주로 모여 사는 곳은 용수의 공급이 용이한 해안가 주변이며, 한라산이 있는 중심의 넓은 땅은 사실상 황무지나 마찬가지다. 작정하고 숨으면 모습을 감출 곳도 많고, 또한 비행기나 배편을 이용해 다양한 탈출 루트를 확보할 수 있는 본섬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숨을 곳과 탈출 루트가 많아진다는 것은 추격하는 PK단 입장에선 막아야 할 곳이 그만큼 늘어난다는 뜻이므로, 추적에 혼선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랭커급 플레이어는 마지막 탈출지로 우도를 택했다.

도훈으로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가보면 뭔가 단서를 찾을 수 있겠지.'

선착장에 도착한 도훈은 오토바이를 주차장에 정차시키고, 곧바로 우도행 배편을 끊었다. 섬이 유명해지면서 관광객도 많이 늘었기 때문에 드나드는 배는 자주 있는 편이었다.

"와, 저 사람 좀 봐."

"엄청 잘생겼는데?"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던 도훈은 이내 문제점을 발견했다.

여행객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제주도로 관광 온 여성 무리들이 그를 연예인 보듯 쳐다보았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안 꾸미고 평범한 차림으로 왔는데도 이목을 끄는 것을 본 도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젠장. 잘 생겨지니 너무 주목 받아서 피곤하네.'

[못 생겨서 주목 받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조용히 임무수행해야 하는데, 이러면 걸어다니는 광고판이나 다른 없잖아.'

그때 도훈을 더욱 곤란하게 하는 일이 생겼다.

중년으로 보이는 한 여성 관광객이 도훈에게 다가와 어설픈 한국말로 말을 거는 것이었다.

"너무 잘생기셨스무니다. 혹시 한고쿠 연예인 이시므니까?"

딱 봐도 전형적인 일본 중년 여성 관광객이었다.

혹시나 싶어 사인받을 종이와 팬까지 들고 접근하는 일본 여성을 보자 도훈은 완전히 학을 떼고 말았다.

"아닙니다. 사람 잘못 보신 것 같네요."

"한고쿠 남성들은 너무 잘생기셨스무니다! 스고이!"

'이 얼굴로 조그만 섬을 돌아다니는 건 무리겠어.'

[어쩌시려고요?]

'최대한 평범하게 변신해야지.' 도훈은 말없이 화장실로 가더니, 화장실 칸에 들어가 변장을 시작했다. 역용 마스크로 얼굴을 완전히 바꾸는 건 너무나 번잡스러웠기 때문에, 만능 변장도구 세트와 정체 불명의 모자를 쓰는 것으로 얼굴을 최대한 감추었다.

화장실 칸막이에서 나온 도훈은 평범한 야구모자에 커다란 안경을 쓴 청년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젠 더 귀찮게 안하겠지?'

[잘생긴 용모도 가끔 귀찮을 때가 있군요.]

'그래도 잘 생긴게 낫지. 잘생긴 건 이렇게 숨길 수 있지만, 못생긴 건 감출 수도 없거든.'

[아…. 역시 유경험자의 통찰인가요?]

'닥쳐.'

[그나저나 필두군은 더 안 기다리시고요?]

'어차피 리나도 돌려보낸 마당에 필두 커플과 만나는 건 의미없는 일이지. 그리고 혼자 움직이는 편이 나아.'

[혹시나 상황을 모르는 필두군이 주인님을 기다려면요?]

'이미 리나 통해서 다 듣지 않았을까? 당분간 그쪽 일은 더 신경 쓰고 싶지 않아. 필두가 두 사람 사이에서 알아서 하겠지.'

[역시 주인님은 먹튀의 제왕이십니다. 미션 끝나니까 곧바로 안면 몰수에 들어가시고.]

'말은 똑바로 해야지. 먹기는 했는데 아직 튄 건 아니거든?'

다시 선착장 대합실에 앉은 도훈은 주변의 시선을 더 이상 신경쓰지 않고 혼자 폰을 열어 PK단의 보고서를 훑었다.

'우도…. 왜 하필 우도지? 혹시 우도에 포탈이 있었나?'

[네?]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잖아. 막다른 섬으로 기어 들어간 이유가.'

[마법의 문고리 아이템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지만 해당 아이템은 모든 플레이어에게 허락된 게 아닙니다. 주인님도 운 좋게 업적을 통해 얻으신 거구요.]

'업적에 따른 아이템이 플레이어마다 다르단 소리야?'

[네. 업적 또한 플레이어의 직업에 따라 달라지는걸요. 심지어 같은 직업이라도 각각의 업적은 조금씩 상이합니다.]

'그렇게 복잡하다고?'

[복잡하긴요. 그래봐야 플레이어당 108개의 업적이 전부잖습니까? AI가 랜덤으로 생성하는 난수표에 따르면 수천만가지 조합이 가능합니다. 그 중에 108개는 아주 미미한 숫자죠.]

'장난 아니네. 그럼 아이템도 플레이어마다 다 다를수도 있겠네? 보상으로 받는 것도 랜덤이면.'

[기본적으로는 공용으로 쓰이는 아이템은 대동소이합니다만, 해당 직업에 특화된 아이템도 있습니다. 주인님의 물건에 삽입 장착된 에로마늄 팔찌는 주인님과 같은 섹서에게 특화된 아이템이 죠.]

'이해했어. 한마디로 마법의 문고리같은 포탈 능력을 모든 플레이어가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지?'

[네.]

'음, 그럼 더 설명이 안되는데. 왜 하필 우도지?'

그때 선착장으로 배가 입항하는 경적 소리가 들렸다.

* * *

"왜 전화를 안 받아 이년은?"

도훈과 중간에 헤어지고 다시 숙소로 돌아온 리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상태였다. 벌써 귤희에게 건 전화 통화만 10번째. 하지만 귤희는 일부러 안 받는 것처럼 계속 리나의 전화를 씹고 있었다.

"하-. 진짜 이게 나랑 끝까지 해보자는 거지?"

리나가 다시 11번째로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마침 귤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뭐야? 전화했어? 오토바이 타고 가느라 오는 줄도 몰랐네, 미안.

"야이 씨발년아! 너 지금 어디야!"

-…….

다짜고짜 욕부터 박는 리나의 모습에 귤희가 한동안 말을 못 이었다. 리나는 흥분한 나머지 감정을 절제 못하고 혼자 떠들었다.

"너 이 씨발, 도훈 오빠랑 어제 새벽에 붙어먹었다며? 다 들었어.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니가 친구야? 니가 친구냐고!"

리나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눈에 핏발이 설만큼 흥분해 있었는데, 감정이 절제가 안 되는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한참 동안 욕을 듣기만 하던 귤희가 마침내 한마디 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어, 어쩌라고? 지금 그게 할 소리야?"

-아니 씨발 내가 누구랑 자던 니가 무슨 상관인데? 내가 내 아랫도리 굴리는데 니년 허락 받아야 돼?

"뭐, 뭐라고?"

-안 그래도 잘됐네. 내가 진짜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너 옛날부터 엄청 역겨웠거든? 뭐? 남자친구가 바람 피워서 배신 감을 느껴? 너는? 너는 그렇게 떳떳해? 너랑 니 전남친의 차이는 걸리고 안 걸리고 차이 아니야? 내가 이제껏 눈감은 것도 모르지?

"이게 진짜 터진 입이라고 아무말이나!"

-웃기고 있네. 너 그렇게 살지 마, 장리나. 나는 차라리 솔직하기라도 하지.

"이 씨발년이 진짜 너 어디야? 당장 튀어와."

-왜 한 판 할까? 싸움도 못 하는 년이 설치기는.

"튀어오라고!"

-니가 와, 이 쌍년아. 한 번 와보시던가.

"너 어디야. 딱 기다려. 내가 지금 바로 튀어 갈테니까."

-와. 안 말리니까.

뚝-

자기 할 말만 마치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귤희의 태도에 리나는 눈이 돌아버렸다.

"주, 죽여버리겠어!"

리나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숙소에 있는 리나의 캐리어를 풀어 해치더니 안에 든 옷을 다 꺼내 해집었다. 그래도 화가 안 풀리는지 두 손으로 옷을 잡고 찢어발겼다.

"이 씨발년 진짜, 이러고도 니가 안 오나 보자."

리나는 일부러 찢어진 옷을 핸드폰으로 찍은 다음 귤희의 폰에 전송했다.

* * *

"방금 누구랑 통화한 거야?"

"리나."

"엄청 싸운던데 무슨 일 있어?"

"상관마. 미친년 생리하듯 지랄발광하는 거니까."

"규, 귤희야."

만족스러운 섹스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필두는 난 데없이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핸드폰을 들고 악을 지르며 싸우던 귤희를 보자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리나는 도훈이랑 같이 있는 거 아니었나? 왜 갑자기 전화를 걸어서 싸우지?'

영문을 모르는 필두가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데, 핸드폰 문자를 본 귤희가 갑자기 비명을 내질렀다.

"악! 미친년이 진짜!"

"왜, 왜 그래?"

"오빠! 지금 바로 숙소로 다시 돌아가자."

"수, 숙소로? 우리 우도 가기로 했는데…. 도훈이 기다릴거야."

"어차피 다 끝났어. 리나 지금 숙소에 가 있다고."

"뭐, 뭐?"

갈수록 점입가경이었다. 필두는 어째서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고, 왜 자신이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 이제는 고래 싸움에 등터지는 새우꼴이 되고 말았다.

'아씨, 이게 아닌데….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얼른 가자고, 숙소로!"

하지만 귤희가 길길이 화를 내며 날뛰는 바람에 필두는 아무말도 못하고 다시 운전대를 잡아야 했다. 마치 사지로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 * *

파도를 가르며 나아가던 쾌속선 위에서 도훈은 로시의 알림을 확인했다.

[주인님. 감축드립니다. 끝내 미션을 성공하셨군요.]

'응? 갑자기?'

[두 사람에 대한 공략이 끝난 뒤 마지막 충족 조건이 완성된 것 같습니다.]

'호오. 그럼 두 사람이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는 소린가?'

[아마도요.]

'이크, 그럼 핸드폰 수신 끊어야 겠네. 좀 있음 전화통 불나겠는데.' 도훈은 곧바로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꾸며 수신을 차단했다.

[그나저나 중간에 낀 필두군만 곤란하게 됐군요.]

'어쩔 수 없지. 떡값은 치러야 하니까.'

[떡값요?]

'당연하지. 귤희가 대준 게 공짜는 아니잖아. 재미만 보고 발 빼면 곤란하지.'

[근데 주인님은 지금 먹튀 하신 것 아닙니까?]

'나는 입장이 다르지.'

[뭐가 다르죠?]

'난 여자들에게 만족감을 줬잖아. 살면서 나만한 대물 접하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어?'

[그건 너무….]

'그리고 잘 생각해봐. 나도 재미만 본 건 아니라고. 축복과도 같은 성수를 먹이고 몸에 뿌려줬으니, 분명 효과는 있을 거야.'

[마법의 정액요?]

'어.'

[아니 그건 좀….]

'몰라. 이젠 두 사람 문제야. 난 발 뺄래. 내 할 일도 바쁜데 캣파이트에 참전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역시 무책임 대마왕.]

'업보라고 해두자.' 어느새 배는 우도의 부둣가에 이르렀다. 본섬에서 우도까지는 생각보다 짧은 거리라 배를 탄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도착한 것이다.

'근데 이 거리면 헤엄을 쳐서 빠져 나가는 것도 가능했겠는데?'

[네? 바다 헤엄이요?]

'일단 나는 가능할 것 같아. 막말로 현해탄을 건너간 사람도 있는데, 제주도에서 우도까지야 뭐 맘 먹으면 쌉가능이지.'

[호오. 그러고 보니 그런 탈출 루트도 가능했겠군요.]

'뭐? 바다 헤엄?'

[네. 배를 타지 않고 빠져 나갈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주인님만 해도 마음만 먹으면 헤엄을 쳐서 나갈 수 있을 정도면요.]

'그것도 일단 따져보자고.'

우도에 내린 도훈은 곧바로 렌터카를 빌렸다. 신분증을 다시 찾았기 때문에 렌트를 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차로 돌기엔 너무나 좁은 섬이군.'

렌터카를 타고 도로를 따라 계속 나아가던 도훈은, PK단이 마지막으로 남긴 장소에 이르렀다.

그곳은 가파른 기암절벽으로 유명한 후해석벽이라는 곳이었는 데, 생각보다 절경이라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우와, 제주도에 이런 곳이 있었어? 외국 온 줄 알겠네."

멀리서 절벽의 모습을 확인한 도훈은 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관광객이 바글바글 몰려있고, 바다에는 보트가 떠다니며 해안절벽을 구경하는 인파들이 있었다.

[이곳이 마지막 목격장소라는 거죠?]

'응. 정확히는 PK단 추적대의 교신이 마지막으로 끊긴 장소라고 해야겠지.' 절벽을 향해 걸어가던 도훈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가만. 절벽 아래쪽에 해안 동굴같은게 있으려나?'

[네?]

'대놓고 절벽 위에서 사라질 리가 없잖아. 그렇다면 분명 동굴 안으로 들어갔을 것 같은데?'

[설마 해안 동굴까지 탐사해 보시겠다는 소립니까? 그곳은 관광객의 접근이 제한되어 있을 텐데요?]

'상관없어.'

도훈은 바다위에 보트가 떠 있는 곳을 확인했다. 분명 그곳에 해안 동굴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나 잠수하면 얼마나 오래 참을 수 있으려나?'

도훈이 주변 눈치를 살피더니 갑자기 벼랑 아래로 뛰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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