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592화 (1,572/2,000)

1592. 제주도 푸른 밤-22-

하지만 필두는 까칠한 귤희의 반응조차 깜찍하게 느껴졌다.

'오옷, 역시 예쁜 애들은 튕기는 게 매력이란 말이지? 여자가 너무 고분고분하면 또 재미가 없거든.'

"아하, 제주도 감귤할 때 그 귤? 혹시 부모님이 제주도 출신이 시니?"

"···뭐래?"

되지도 않는 농담에 귤희가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필두를 쳐다보았다. 그렇지않아도 도훈이 리나를 선택해서 짜증이 나는데 어딘가 모자란 사람처럼 실실거리는 필두가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필두 자체로만 보면 딱히 빠지거나 외모가 형편없다곤 볼 수 없지만, 주변의 모든 사내를 오징어로 만들어 버리는 도훈과 비교되다 보니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이씨, 짜증나. 하필 저런 오징어 새끼랑.'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귤희가 짜증을 숨기지 않고 오토바이 옆에 서 있는데, 필두가 안장을 들어 안에서 예비 헬멧을 꺼내 귤희에게 건넸다.

"이거 써. 바람이 많이 불어서 필요할 거야."

필두의 입장에선 나름 매너를 발휘하는 것이었으나, 모든 게 마음에 안 드는 귤희는 그마저도 딴지를 걸었다.

"이거 오빠가 쓰던 거 아니야?"

"어?"

귤희는 헬멧 안쪽에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더니 역겨운 표정을 지었다.

"우엑-. 안에서 썩은 내 나는 거 같아."

"아, 아니야. 예비용으로 사놓은 거라 한 번도 안 쓴 새 거야."

"근데 왜 냄새가 나지?"

필두가 까칠하게 반응하는 귤희에게 쩔쩔매는 사이 도훈도 바이크 뒤에 리나를 태우고 있었다. 그녀는 귤희에게 헬멧을 건네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도훈에게 물었다.

"우리도 저거 써야 하지 않아?"

"하이바? 쓰고 싶으면 너 써."

도훈은 자신이 써야 할 헬멧을 귀찮다는 듯 리나에게 던졌다.

문자 그대로 공중으로 내던졌기 때문에 리나가 엉거주춤하며 겨우 받아야 했다.

한껏 매너를 발휘하는 필두와는 완벽히 대조적인 태도였지만, 리나는 도훈의 성의 없는 태도에도 두근거림을 느꼈다.

'어젠 몰랐는데, 도훈 오빠가 은근 터프하네? 의외의 매력인데?'

"저, 저도 그냥 안 쓸래요."

도훈이 쓰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 리나도 따라서 헬멧을 포기했다. 도훈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솔직히 5킬로 가는데 무슨 하이바까지. 대충 해."

먼저 바이크에 오른 도훈은 고갯짓으로 리나에게 명령했다.

"타."

성의 없는 한마디였지만, 리나는 도훈의 뒤에 탄다는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도훈을 두고 리나와 경쟁하던 상황에서 자신이 선택받은 듯한 성취감이 든 것이었다.

'봤지? 귤희 넌 떨거지나 상대하라고. 하긴 아무나 다 대주는 걸레라서 누구라도 상관없으려나?'

리나는 신경질을 틱틱부리며 억지로 헬멧을 쓰고 있는 귤희를 비웃어 주고는 도훈의 뒤에 앉았다.

"저 오토바이 타는 건 처음···. 어, 어?!"

도훈은 리나가 뒤에 앉자마자 예고도 없이 바이크를 출발시켰다. 배기량이 높은 기종이라 생각보다 치고 나가는 힘이 굉장했기 때문에 하마터면 리나는 출발과 동시에 뒤로 나가 떨어질 뻔했다.

"꺄아! 오, 오빠!"

"꽉 잡아. 떨어지기 싫으면."

"아, 아니 말도 없이···으, 으아아! 너무 빨라요!"

운전감을 익히기 위해 시작부터 가속을 붙여보던 도훈은 리나가 두 손으로 꽉 허리를 껴안는 것을 느끼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진짜 느낌 없네.'

[네?]

'리나 가슴 말이야. 작다는 건 알았는데, 생각이상으로 절벽인데?'

[아니, 그 와중에 리나양 몸매를 파악하고 있었습니까? 운전에 집중하시죠. 오토바이는 처음 모신다면서요.]

'벌써 적응 끝났어.'

[벌써요?]

'내 운전 경력만 20년이야. 교통 흐름이나 신호 파악을 어차피 똑같고, 중요한 건 주행 중 벨런스 유지하는 건데 몸이 알아서 반응하던데?'

도훈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의 초인적인 운동신경은 처음 타는 오토바이임에도 이미 한 몸이 된 것처럼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었다. 해 본 적은 없지만, 처음 엑셀을 당기는 순간 완벽히 깨달은 것이었다.

도훈이 먼저 달려가는 모습을 본 귤희가 필두의 헬멧을 뒤에서 때렸다.

"뭐해요? 우리도 출발해야지."

"어, 어. 꽉 잡아.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내가 알아서 해요."

귤희는 굳이 팔을 뒤로 돌려 오토바이 뒷안장을 잡았다. 무게 중심이 뒤로 쏠리는 위험한 자세였지만, 필두의 몸엔 손도 까딱하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몸은 앞으로 밀착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귤희의 큰 가슴이 필두의 등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

필두는 아침부터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뭐야, 설마 이 물컹하는 건….'

리나와 비교하면 귤희는 상당한 글레머였다.

그것은 육안으로도 구분이 가능했기 때문에, 필두는 도훈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도훈이형, 고마워요. 나에게 이런 호강을….'

"그럼 출발하게."

"빨리 가라고. 우리가 앞서가기로 했는데, 왜 더 늦게 출발하는 건데?"

어느 순간 필두가 자신에게 쩔쩔맨다는 것을 간파한 귤희는 초면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오빠인 필두를 하인처럼 대하며 명령했다. 필두는 그것을 알면서도 한없이 받아주기만 했다.

부르르릉-!

필두가 최대한 스무스하게 오토바이를 출발시켰다.

날씨도 너무 좋았기 때문에 오토바이로 달리는 제주도 해안도로는 그림처럼 풍광이 예뻤다.

내내 툴툴거리던 귤희도 시원한 바람과 아름다운 경치를 보더니 입을 다물지 못하고 신나했다.

"오빠, 더 당겨봐. 오빤 속도 못내?"

"그, 그래도 안전하게 가야 하지 않을까?"

"뭐래? 오빠 쫄보야? 도훈 오빠네는 저렇게 달리는데."

그들보다 앞서가는 도훈은 헬멧도 쓰지 않고 신나게 내달리는 중이었다. 뒤에 탄 리나는 맞바람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도훈의 등에 파묻혀 있었다.

"그럼 좀 속도 올릴게. 위험하니까. 꽉 잡아야 해?"

필두가 손잡이를 당기자 오토바이가 모처럼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속도가 붙자 놀란 귤희가 손을 앞으로 돌려 필두의 배를 껴안았다.

"꺄아! 뭐야."

더욱 밀착해오는 귤희의 젖가슴에, 필두는 그저 행복할 뿐이었다.

'으으, 진짜 몸매 지린다. 싸가지는 좀 없지만, 가슴 하나로 이미 용서 가능.'

거리가 짧았기 때문에 두 커플은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도훈은 진즉 오토바이에서 내려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비흡연자인 리나는 배려도 하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이상한건담배 냄새를 질색하는 리나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붙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뭐야. 길 모른다며 우리보다 먼저 도착했어?"

"그냥 쭉 일방이라서 가다보니 보이더라고. 저기 맞지?"

도훈이 브런치 가게를 가리켰다.

"콜록콜록-."

결국 연기를 참다 못한 리나가 옆에서 기침을 하자 필두가 그 모습을 보고 대신 사과했다.

"아, 담배 못 피우시는구나."

"저는 괜찮아요."

리나는 필두에게 굳이 존댓말을 썼는데, 이는 그를 존중하거나 예우하는 게 아니라 전혀 친해지고 싶지 않다는 반증이었다.

"한 대 피우고 들어가자. 리나 네가 먼저 들어가서 주문해."

"그래."

리나가 가게로 들어가자 필두가 조금도 더 붙어 있기 싫었던 귤희 역시 따라서 들어갔다. 오토바이를 주차하고 담배를 꺼내 든 필두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귤희라고 했나? 나 쟤 엄청 마음에 드는데?"

"귤희?"

"응. 성격은 약간 까칠한 것 같은데, 되게 예쁜 것 같아."

처음엔 도훈이 먼저 고르면 나중에 남는 사람으로 고르겠다던 필두는 어느새 귤희에게 마음을 쏙 뺏겼는지, 도훈에게 먼저 요구하는 것이었다. 도훈이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웃었다.

[까칠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람 취급도 안하던데, 필두군은 뭐가 좋다고 저렇게 헤벌쭉 하는 걸까요?]

'하여간 저게 문제라니까. 처음부터 휘어잡으라니까 호구취급을 당한 줄도 모르고.'

[아무래도 귤희양과 필두군을 맺어주는 계획은 실패할 것 같은데요. 귤희양이 저렇게 질색을 하는데, 어떻게 연결시키려고요?]

'안 되면 되게 해야지. 귤희는 어차피 내 말에 따를 수밖에 없어.'

[정신조작을 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 그녀를 조종하시려고요?]

'정신조작도 필요없어. 좆 맛을 보여줬으니 이미 귤희는 내 장난감이나 마찬가지거든.' 도훈이 담배를 비벼 끄더니 필두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알았어. 내가 밀어줄게. 잘 해봐."

"고맙다 도훈아. 그런 의미로 오늘 아점은 내가 살게."

"너 혼자 왜? 다같이 먹는데 더치페이 해야지."

도훈은 굳이 여자들에게 생색을 내겠다는 필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필두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풀코스로 대접한다고 한들 여자들이 그에게 호감을 느낄 일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처음 소개받는 자리니까."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아니야. 내가 하고 싶어. 그냥 내가 계산할게."

[필두군은 혼자 배낭여행 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돈도 최대한 아끼려고 게스트하우스 4인실 잡은 놈이 여자들 대접하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네.'

[주인님이 사전에 그렇게 조언을 했는데도, 막상 여자들 앞에서 정신을 못차리는 군요.]

'어쩔 수 없다니까. 그냥 내가 나중에 따로 챙겨주던가 해야지.'

"마음대로 해 그럼."

"응."

네 사람이 도착한 브런치 가게는 옥상 테라스에 루프탑이 설치된 까페였다. 바다를 바라보는 배경으로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귤희와 리나는 도훈과 필두가 오기전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둘이 잘 어울리던데?"

"뭔 소리야?"

"아니. 필두 오빠랑 너 말이야."

"나랑 장난해?"

리나는 우연히 맺어진 커플을 계속 이어갈 마음으로 귤희를 몰아갔다.

"왜? 자상하고 매너도 좋던데."

"좋으면 너가 가져라."

리나의 속셈을 알아챈 귤희가 까칠하게 반응하는데, 리나가 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어, 저기 네 짝 온다."

"에이씨 진짜."

루프 탑으로 올라온 도훈과 필두가 테이블에 합류했다. 셀러드를 비롯 베이컨과 샌드위치, 그리고 과일 쥬스 몇 개만 주문했는데도 금액은 인당 2만원을 훌쩍 넘어갔다.

도훈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더럽게 비싸네. 무슨 풀떼기 몇 개 주면서."

"에이, 관광지가 다 그렇지. 그리고 여기 맛집이라잖아."

바가지요금에 예민한 도훈이 불만을 제기하자 필두가 대인배처럼 말했다.

"가격 신경쓰지 말고 먹고 싶은 거 더 시켜도 돼."

"이거 오빠가 사는 거예요?"

"어. 그래도 처음 만나는 건데 내가 대접해야지."

필두가 호탕하게 웃으며 쏜다고 했지만, 정작 여자들은 별다른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오히려 마음에 안드는 필두를 맥일 생각인지 그의 말을 듣자마자 귤희가 메뉴판을 펼치더니 추가로 커피를 주문했다.

"오빠 나 그럼 커피 한 잔만. 어젯밤 잠을 설쳤더니 너무 피곤해서."

"그래.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 것도 같이 시킬까 그럼?"

필두는 귤희가 낯선 여행지에서 잠자리가 바뀌어 잠을 설쳤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으나, 사실 귤희는 도훈을 향해 말하는 것이었다.

어젯밤 그렇게 괴롭혔으니 책임지라는 의미로.

하지만 진의를 파악한 도훈은 귤희의 투정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리나에게 말했다.

"리나 너도 잘 못 잤어?"

"저요? 아뇨. 그냥 뭐, 음악 듣다가 잠들었어요. 오빠는?"

"나? 잘 잤지."

"준성이 그 새끼 어제 엄청 코 골더라. 진짜 군대 생각 나더라니까?"

"군대?"

"아니, 군대에서는 코골이 심하면 얼굴에 방독면 씌워버리거든. 하하하!"

필두가 나름 재밌자고 군대 얘기를 꺼냈으나, 여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제일 듣기 싫어하는 얘기가 군대 얘기나 축구 얘기였는데, 필두가 눈치도 없이 금기를 깬 것이었다.

[필두군이 왜 여자를 못 사귀는 지 알 것도 같네요.]

'그러니까. 그리고 방독면 저건 거의 학대 아니냐.'

"도훈 오빠도 군대 다녀왔다 그랬나?"

"어."

"오빠는 그럼 어디 나왔어요? 왠지 특수 부대 같은 것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여자들은 필두의 얘기는 대충 흘려 넘기고 도훈에게만 집중했다. 도훈은 그런 여자들의 태도에 염증을 느끼고는 대충 둘러댔다.

"나? 방위."

"방위가 뭐예요?"

"지구 방위대?"

"아 맞다. 공익이라고 해야지."

"네?"

"공익이요? 왜요?"

"몸에 하자가 있으니 그랬겠지?"

[왜 굳이 거짓말을 하십니까?]

'필두를 돋보이게 해주려고.'

[그렇다고 멀쩡하게 병장 만기 전역해놓고 굳이 공익을 나왔다고 할 것까지는.]

'상관없다니까. 쟤들은 어차피 내가 미필이라고 해도 신경 안쓸얘들이야.'

"필두 넌 어디 나왔어?"

"어? 나…. 수색대."

"와, 거기 엄청 빡센데 아니야?"

"그, 그렇긴 하지."

도훈이 의도적으로 필두를 추켜 올렸으나 여자들은 여전히 필두에게 관심이 없었다.

"근데 몸에 하자가 있어?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오빠 엄청 건강해 보이는데."

도훈의 예상대로 여자들은 도훈이 공익을 나왔건, 면제를 받았던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필두도 눈치가 있다 보니 여자들이 자신에게 '1'도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 역시 안 되는구나. 내가 최전방 수색대를 나오건, 아니 설사 특수부대 출신이라도 공인 나온 도훈이가 더 관심을 많이 받으니.'

점점 소외되는 필두가 의기소침한 표정을 짓자 도훈은 아예 대놓고 그를 띄워주기 시작했다.

"아니야. 내가 의외로 약골이거든. 그나저나 필두 샤워할 때 보니까 몸 좋던데 수색대 나와서 그랬구나."

"필두 오빠 몸 좋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