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0. 제주도 푸른 밤-20-
그것은 매우 기괴한 소리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청음할 수 없는 미세한 기계음.
도훈은 귤희 쪽을 한 번 쳐다보았다. 대물에 신나게 뚫린 뒤 오열하듯 경련을 일으키는 그녀는 정신 줄을 놓은 상태였다. 당연히 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
'귤희는 아닌데···?'
도훈은 귤희가 가지고 온 소지품에서 나는 소리라고 생각했으나, 상태를 봐선 그녀가 뭔가를 조작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방안에 뭔가 있다는 소린가?'
[왜 그러십니까?]
'못 들었어?'
[네? 뭘요?]
'아니 분명 이상한 소리가 방안에서 났단 말이지?'
[주인님이 너무 예민하신 게 아닐까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섹스 도중 귤희가 내지른 교성이 꺼지자 방안은 쥐죽은 듯 조용해진 상태였다. 가벽으로 나뉜 옆방의 커플은 진즉 쓰러진 것처럼 새근새근 숨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완벽한 침묵.
그러나 도훈은 오히려 그러한 적막 속에서 기이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야. 방안에서 분명 이질적인 소리가 났단 말이지. 기계 음 같은?'
도훈은 다시 의식을 집중했다.
분명 놓친 게 있었다.
[괜한 과민반응이 아닐까요?]
'전혀. 내 청력이 30미터 밖에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감지 한다는 걸 잊지 말라고. 남들이 못 듣는 소리까지 다 캐치할 수 있으니까.' 도훈이 예민한 감각을 본격적으로 활성화시켰다.
평소 의식을 집중하면 너무 많은 정보가 홍수처럼 밀려드는 정보의 과부하에 빠질 우려가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작정하고 귀를 쫑긋 세웠다.
기이잉-
'이 소리다!'
그것은 뭔가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정확히는 렌즈가 초점을 맞추면서 나는 아주 미세한 소음.
'···렌즈 ···카메라?'
도훈은 단박에 그것이 카메라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방안에 설치된 카메라라면 몰래카메라 밖에 없을 터였다.
'이런 씹, 방에 몰카가 있는 것 같은데?'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가요?]
도훈은 자신이 몰카를 당했다는 사실에 격분했고, 곧바로 범인을 유추했다.
'게스트하우스에 몰카를 설치했다면 가장 유력한 범인이 누굴거 같아?'
[설마 이곳 주인인가요?]
'빼박이지. 가만있어봐. 그럼 지금도 훔쳐보고 있는 거 아니야?'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고 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도훈의 움직임이 신중해졌다.
[주인님, 정말 몰카라면 큰일입니다! 만에 하나 주인님의 동영상이 퍼져나가기라도 한다면···.]
도훈은 일전에 BJ가영의 성방에 출연했다가 PK단의 추적을 받은 적이 있었다. 혹시라도 이번 영상이 새롭게 가세한 특임대에게 빌미를 준다면 또다시 쫓길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 새끼를 진짜!'
[주인님. 신중 하십시오. 증거를 온전히 확보하고, 엄중하게 대응하셔야 합니다.]
'당연하지.'
주인을 조지는 건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다만 혹시라도 찍힌 파일이 곧바로 인터넷으로 업로드되거나, 증거를 완벽하게 인멸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일단 놈이 지금도 나를 지켜볼 수 있으니까 이 방에서 나가는 게 좋겠어.'
[그 다음에는요?]
'감시가 소홀해 진걸 확인하고 다시 돌아와야지.'
도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기지개를 켜더니, 침대에 쓰러진 귤희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뭐야? 설마 잠든 거 아니지?"
"으으···. 기절할 것 같다고."
"경험 많다고 자랑 엄청하더니, 생각보다 약골인데?"
"장난해? 오빤 사람 아니야, 짐승이야."
"칭찬으로 듣겠어. 일단 일어나야 할 것 같아."
"좀만 쉬면 안 될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데. 아직 대실 시간 남았잖아."
"어차피 잘거면 방에 돌아가 자야지. 리나가 깨어나면 의심할지도 모르니까."
리나 얘기가 나오자 나른한 표정을 짓던 귤희가 돌변했다.
"뭐야? 설마 리나에게 들킬까봐 나보고 일찍 돌아가라는 거야?
왜? 들키면 리나 못 따먹을까 봐 그래?"
"뭔 소리야? 괜히 피곤한 일 생길까 그렇지. 리나가 우리 둘이 몰래 붙어먹은 걸 알면 오밤중에 난리 피우지 않겠어? 감당할 수 있겠어?"
"음···."
"어차피 내일이면 리나도 다 알게 될 거야."
"하긴. 알았어. 여기서 잠들면 아침까지 못 일어날 듯."
귤희가 말귀를 알아듣고 주섬주섬 옷을 챙겼다.
그 와중에도 도훈은 계속 방안을 두리번거리며 카메라의 위치를 파악하는 중이었다.
'너무 소리가 작아서 위치가 분간이 안 돼. 분명 방안 어딘가 설치되어 있는 건 확실할텐데.'
[모텔 주인이 직접 설치했다면 어설프게 숨겨두지 않고 어딘가에 매립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가능성이 크긴 하겠네. 일단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뒤져야겠다.'
채비를 갖춘 도훈은 귤희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새벽이라 게스트하우스 전체가 고요했다. 모텔 주인이 잠든 1층 카운터 방도 불이 꺼진 상태였다. 도훈이 카운터 앞 수거함에 키를 반납하고는 말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 아침이나 같이 먹자고."
"아침은 무리야. 보나마나 점심때나 깨어날 걸?"
"그럼 아점으로 해."
"오키."
귤희가 하품을 크게 하더니 2층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도훈 역시 3층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방향을 돌려 1층으로 다시 내려왔다.
'그냥 주인부터 조질까? 법보다 주먹이 빠르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은데.'
[일단 증거부터 확보하십시오. 카메라에 저장된 파일이 있다면 지우셔야 하니까요.]
'아, 그렇지.'
도훈은 매립된 카메라가 어떤 방식으로 촬영분을 저장하는 지알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카메라부터 확보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카운터 방 앞에 서서 잠시 귀를 기울이는데,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딱히 도훈처럼 청력이 발달하지 않아도 누구나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심한 코골이였다.
'염병, 언제는 우리보고 시끄럽다더니 지는 더하네.'
도훈은 괘씸한 표정을 짓더니 방금 전 귤희와 함께 있던 방으로 다시 돌아갔다. 무척 빠른 움직임에도 발걸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잠입이었다.
'로시. 천상계 아이템 중에서 몰카 같은 거 찾아내는 종류는 없을까? 그런 건 시중에서도 판매하잖아.'
[당연히 있죠. 몰카 탐지기를 구매하시겠습니까? 비용은···.]
'그냥 줘. 지금 가격이 중요해? 내가 여자 따먹는 게 몰래 찍힌 마당에.'
[알겠습니다. 마켓에서 구매 후 인벤토리로 전송하겠습니다.]
잠시 후 로시가 아이템 전송을 알려왔다.
[인벤토리로 몰카 탐지기를 전송 완료 했습니다.]
'오케이.' 도훈이 허공으로 손을 쑥 집어넣더니 손안에 쏙 들어오는 리모컨 같은 장비를 끄집어냈다.
'생각보다 작은데?'
[작아도 기능은 막강합니다. 스캐닝 버튼을 누르시면 반경 5m 안에 존재하는 모든 카메라 장비 위치로 레이저 포인트를 쏘아 보낼 겁니다.]
'스캐닝 버튼? 이건가?'
도훈이 리모컨 가운데 달린 빨간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잠시 후 리모컨에서 녹색의 레이저가 쏘아지더니 도훈의 호주머니와 옷장을 향해 두 줄기 빛을 뿜어냈다.
"···저긴가?"
호주머니는 도훈의 핸드폰 카메라를 가리키는 것일 테니, 또다른 하나는 방에 설치된 몰카의 위치일 것이다.
"하-. 이 새끼 옷장을 개조했나 본데?"
몰카 탐지기가 쏘아낸 빛은 네비게이션처럼 정확하게 카메라의 위치를 추적했기 때문에 도훈은 빛을 당도한 위치를 바로 확인했다.
과연 옷장 윗부분에 빈공간이 있는데 그곳에 조금만 구멍이 뚫려있고, 내부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찾았다."
하지만 발견된 카메라는 일반적인 디지털카메라나 캠코더와는 생김새가 달랐다. 정확히는 저장이 가능한 카메라라기보다 일종의 cctv처럼 촬영만 가능한 기종 같았다.
"음, 뭐지? 전원선도 따로 없고 설마 배터리 구동식인가?"
도훈이 몰카를 발견하고도 난감해하는데, 로시가 조언했다.
[탐지기의 녹색 버튼을 누르면 스캔한 기종의 정보가 주인님의 스마트 워치에 표시될 겁니다.]
'오잉? 그런 것도 가능해?'
[당연하죠. 별것 아닌 기능입니다. 개인이 자작한 물건이 아닌 기성 제품인 경우 사진 인식만으로 인터넷 검색이 가능한데, 거기서 데이터베이스를 추려 제품의 사양과 성능을 소개하는 정도니까요.]
'그래도 놀라운데? 이 조그만 기계로 그런 것도 가능하다니.'
[천상계의 기술력으로 제작되었으면 이런 조잡한 몰카를 쓰진 않았겠죠.]
도훈은 지난번 박회장의 자택에 침투했을 때 잠깐 사용했던 천상계 몰카를 떠올렸다. 그것은 일반적인 카메라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밀하게 제작된 나노 테크 기술의 집약체였다.
"하긴."
도훈이 발견한 몰카에 대고 녹색 버튼을 누르자, 로시의 말대로 스마트 워치의 디스플레이에 제품 정보와 사양이 표시되었다.
도훈은 꼼꼼히 내용을 읽은 뒤, 이것이 일종의 WIFI형 CCTV이며 촬영한 영상을 저장하진 못하고 전송하는 기능만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흐음. 기기 설명으로 봐선 저장된 영상은 따로 없었나 본데. 그나마 다행인가?'
[지금 기계에서 저장은 불가능하지만, 전송된 영상 자체를 직접 녹화하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요?]
'주인놈이 뒤지고 싶어 환장을 했으면 따로 저장해 놨겠지. 아, 이제 알겠네. 왜 아까 중간에 쳐들어왔는지.'
[네?]
'아까 주인 새끼가 귤희랑 1차전 끝나고 갑자기 여기로 온 적있잖아.'
[네.]
'이제 보니 그게 몰래 방에서 몰카로 보고 있다가 온 거였네. 다른 손님이 항의한 게 아니라.'
[그렇군요. 근데 왜 그랬을까요? 몰래 훔쳐보는 주제에 괜히 심술이라도 났던 걸까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아무튼 존나 개새끼라는 건 이걸로 확실해졌어. 이 변태 새끼가 게스트하우스에 대실 룸을 만든 목적이 너무나 불순하네.'
도훈은 카메라를 손에 쥐고 부셔버리려다가, 자칫 증거를 훼손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겨우 참았다.
[이제 응징하러 가시는 건가요? 몰카 촬영은 엄연한 범죄니 경찰에 바로 신고하셔도 형사처벌을 받을 겁니다.]
'아, 그렇네. 그럼 바로 여기 영업정지 당하는 거 아니야?'
[그렇겠죠? 주인님이 지금 신고를 한다면요.]
도훈은 카메라를 들고 곰곰이 생각했다.
'신고를 하긴 할 건데, 시기가 문제겠구나. 당장 내일 아침에 경찰이 조사하러 나온다면 주인은 현행범으로 구속 될 테고, 이곳 게스트하우스는 폐쇠 될 테니.'
[그렇겠죠?]
'지금 장소를 옮기는 건 곤란해. 아직 미션을 해결 못 했으니까.'
[그럼요?]
'일단 내일까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어. 내가 해결할 미션부터 마무리하고, 그 다음에 응징을 하더라도 해야지.'
[괜히 찝찝하지 않겠습니까? 주인이 주인님의 영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데요.]
'촬영 장비로 봐서는 영상을 저장하려는 용도는 확실히 아닌 것 같아. 이 새낀 대실 룸에 커플을 밀어 넣고 실시간으로 남의 섹스를 관음하는 변태니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습니까.]
'당연히 경찰 부르기 전에 싹 다 털어낼 거야. 혹시라도 촬영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도 모두 인멸해야 할테니. 지금까지 대체 몇 명이 몰카를 당했는지 모르겠군.'
[주인님 생각이 정 그러시다면 원하는 대로 하셔야죠.]
'어차피 놈은 내 손에 죽을 만큼 혼나게 될 거야. 오늘 뒤지느냐 내일 뒤지느냐의 문제지.'
도훈은 다시 카메라를 원래 자리에 숨긴 뒤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당한만큼 확실하게 보복하는 그의 성격상, 주인은 분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 * *
"으아아! 뻐근하다. 도훈아, 아직 자냐? 아침 먹으러 안 갈래?"
2층 침대에서 눈을 뜬 도훈은 주섬주섬 추리닝을 껴입는 방 친구들을 보았다.
"···아침?"
"어. 게스트하우스 1층에서 조식 제공해 주거든, 10시 전에 안가면 다 치워버린데."
"지금 몇신데?"
"9시 55분."
도훈은 새벽 늦게 돌아와 잠들었지만, 피로는 완벽히 풀린 상태였다. 다만 귤희와 약속한 게 있었기 때문에 조식을 굳이 먹을 필요는 없었다.
"···난 그냥 더 잘래. 너무 피곤해서."
"후회하지 마라. 여기 조식 생각보다 평이 좋던데?"
"그럼 간다."
"잠깐 필두야."
"응?"
도훈이 필두만 따로 불렀다.
"나 할 말 있는데, 잠깐만."
"야. 5분밖에 안 남았다니까?"
"우리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있을게."
나머지 친구들이 나가고 도훈이 2층 침대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오, 몸이 엄청 가벼운데?"
"나 체육교육과라니까."
"아 맞다. 근데 왜? 밥시간 늦겠는데."
"아침 먹으러 갈 거야?"
"응. 배고파서 뒤질 것 같거든. 난 아침 안 먹으면 빈혈 오는 편이라."
도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여자애들이랑 아점 먹기로 했는데, 혼자 가는 수밖에."
"여, 여자들이랑!"
필두의 눈이 튀어나올만큼 커졌다.
아점보다 여자라는 소리에 훨씬 강하게 반응하는 그였다.
"아니, 그런 거면 진작 말하지! 난 또 왜 부르나 했네."
필두는 폰을 꺼내 친구들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야, 나 아침 거를테니까 니들끼리 먹어라."
-왜?
필두는 대답도 않고 끊어버린 뒤 도훈을 구세주처럼 쳐다보았다.
"도훈이형, 지금부터 저는 뭘 하면 될까요?"
그는 도훈의 말만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칠수 있다고 굳게 믿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