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4. 제주도 푸른 밤-14-
* * *
다시 4인실로 돌아온 도훈은 동갑내기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그래서 찬우 이 새끼가 대전에서 왔다는 여자애들한테 그러는 거야. 혹시 내일 감귤 농장 체험 같이 안 가시겠냐고."
"푸하하, 아니 무슨 제주도에 워킹 홀리 데이 왔냐? 다른 것 볼것도 즐길 것도 많은 왜 돈주고 일을 해야 하냐고."
"그러니까 말이야."
"순간 6명이서 같이 할 만한 걸 못 찾겠더라고. 말이 헛나왔어."
"그러니까 메이드가 될 리가 있나. 에이씨, 그냥 내가 들이댔어야 하는데."
셋은 오늘 맥주 파티에서 있었던 일을 신나게 떠들었다. 도훈은 처음 그들이 낯설고 귀찮았지만, 같이 웃고 떠들다 보니 다들 성격도 원만하고, 재밌는 친구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알고보니 웃기는 놈들이네.'
[네?]
'아니, 성격 좋다고. 제주도 와서 서로 처음 본 사일텐데, 오랜 부랄친구처럼 거리낌이 없잖아. 가식적인 것도 없고.'
[제가 봐도 특별히 모난 사람은 없어 보이는 군요.]
'하긴 혼자서 여행하는 사람들이니 성격이 나쁘긴 쉽지 않겠다.'
[그건 무슨 뜻인가요?]
'생각해봐. 여행을 혼자 다닐 정도라는 건 모험심도 있고, 기본적인 적응력이 좋다는 거거든. 그런 부류들만 모아놨으니 당연히 격의 없이 어울릴 수밖에.'
"야. 넌 설마 오늘 우리가 실패한 이유가 멘트가 구려서라고 생각하냐?"
"그럼, 뭔데?"
"도훈이가 갔으면 감귤 농장 체험이 아니라, 제주 해녀 체험을 같이 하자고 했어도 좋다고 했을 걸?"
"그게 무슨 뜻이야?"
"얼굴이 반은 먹고 들어가는 거라고. 여자들도 눈이 있는데, 기왕이면 잘생긴 애가 좋겠지."
"솔직히 우리가 그렇게 꿀리는 외모는 아니지 않냐? 도훈이 저 새끼가 너무 독보적이라 그렇지."
갑자기 지목된 도훈이 난처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뭘 또 그렇게까지."
"아니야. 내가 오늘 맥주 파티에서 남자애들 전체적으로 스캔해봤는데, 도훈이 너만한 인물을 눈 씻고 찾아봐도 없더라."
"나도 같은 생각이야. 도훈이가 아마 최상위 포식자인 듯."
"최상위 포식자라니?"
"원래 동물의 세계는 먹이 사슬이라는 게 있잖아. 이를 테면 도훈이 너는 사자처럼 먹이 사슬의 정점에 있다는 거지. 원하는 여자는 얼마든지 먼저 고를 수 있는. 일종의 우선선택권이랄까?"
"무슨 말도 안되는···."
"그리고 도훈이가 고르고 나면 그다음 서열이 고르는 식으로 ···. 마지막에 남은 애들은 그냥 하이에나야. 남이 물다 뜯은 찌꺼기나 건드릴 뿐이지."
개똥 철학을 늘어놓은 찬우를 향해 필두가 물었다.
"그 찌꺼기도 못 먹는 애들은 뭐냐?"
"초식 동물이지. 풀이나 뜯어 먹고 살아야지 별 수 있냐."
"최소한 육식에는 들어가야 고기 한 점이라도 먹을 수 있다는 소리네?"
"그렇지. 먹다 남은 게 어디야? 솔직히 우리야 다 설거지 신세지."
"설거지라니?"
찬우는 살짝 술에 취한 상태였는지, 얼굴이 뻘개진 채로 대답했다.
"야, 막말로 여기서 만난 애들 중에 처녀가 있을 것 같냐? 있어 봐야, 줘도 먹기 싫은 못생긴 애들 뿐이지."
"그거야 뭐···."
"그럼 그 많던 처녀들은 누가 다 먹은 거야? 세상의 반은 여잔데, 누구나 처녀인 적은 있었다는 소리잖아."
"그게 바로 도훈이 같은 놈들이라니까? 최상위 포식자."
찬우가 다시 가만히 있던 도훈을 물고 늘어졌다.
취해서 꼬장을 부리는 건지, 아니면 베타남의 열등감 때문인지 모르지만 자꾸 도훈을 의도적으로 저격하는 모습이었다.
"도훈이?"
"저런 잘생긴 애들이 어렸을 때부터 아다라는 아다는 죄다 폭격하고 다니는 거야. 그러니 수요에 비해 공급이 딸릴 수밖에. 내 말이 맞지?"
찬우는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는 것처럼 집요하게 물어왔다. 도훈은 별다른 반응 없이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거 새끼, 말투는 얄미운데 펙트로 조지니까 할말이 없네.'
[주인님한테 너무 불손한 거 아닙니까?]
'됐어. 차라리 앞에서 지랄하는게 나아. 뒤에서 호박씨 까는 애들보는 솔직하니까.'
"야 인마. 너 취했냐? 도훈이한테 왜 그래냐?"
"그래. 말이 좀 심하네. 도훈이가 무슨 천하의 호색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르지. 얼굴값 하고 다닐지도."
"에이, 니 말대로면 잘생긴 애들은 죄다 바람둥이라는 소린데 그건 너무 억까지."
"아니지, 도훈아?"
도훈은 굳이 쉴드를 쳐주는 애들에게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오해는 말라고. 난 도훈이를 비난하는 게 아니니까. 그냥 현실이 그렇다는 거야. 도훈이가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이 알아서 달려드는데 주는 여자를 뭐하러 거부하겠어. 주면 땡큐지."
"그런가? 하긴. 오늘 만났다는 그 여자애들도 지들이 먼저 깨톡하고 귀찮을 정도로 연락하더만."
"여자들이 원래 잘생긴 애들한테는 엄청 매달린다잖아. 우리같은 루저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
"맞다. 여자애들이 진짜 막 선톡하고 그래?"
"그게 뭔 소리야 찬우야?"
"아니, 잘생긴 애들 깨톡 보면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애들이 먼저 말 걸어서 항상 깨톡이 잔뜩 쌓여 있다고 하잖아. 우리같은 하이에나들에게는 맨날 읽씹하는 애들이."
"도훈아. 깨톡 한 번 시원하게 까주라."
"그래. 진짜 궁금하다."
도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너무 개인 정보라. 암튼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인기가 많고 그렇진 않아."
"도훈이가 엄청 겸손하네."
"우리 충격받을까 봐 배려하는 거겠지."
"솔직히 우리 같은 애들이 언제 도훈이 같은 인싸랑 말 섞고 술마셔 보겠냐. 여행와서 이렇게 룸메이트로 엮이지 않는 이상."
"아, 세상 불공평하다. 나도 조금만 잘생기게 태어났으면 남이 먹다 버린 애 설거지는 안 해도 될 텐데."
"웃기고 있네. 설거지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 여기 게스트하우스 온 남자들 중에 절반 이상은 헛물만 캐고 갈걸?"
"남녀 비율이 2:1까진 아니지 않냐?"
"그 소리가 아니라 여자들은 마땅한 상대가 없으면 굳이 메이 드를 포기해버린다는 소리야. 쭉정이 같은 남자를 고르느니 그냥 혼자이길 선택한 달까?"
"듣고 보니 슬프네. 흑흑, 제주도까지 왔는데 여자 손도 못 잡아 보다니."
"기운네 인마. 그래도 너에게는 영원한 동반자가 있잖아."
"누구? 우리 엄마?"
"아니. 너의 오른손."
"개새끼야. 나 왼딸이라고!"
시덥지않은 이야기들로 새벽이 지나가고 있었다.
남자들끼리 술취해서 하는 얘기라고는 여자이야기밖에 없었다.
'확실히 아직 다들 대학 졸업반이 아니다 보니 취업 걱정하는 얘기는 없구나.'
도훈은 환생이후 이렇게 많은 동갑 남자 친구들과 함께 대화하긴 오랜만이었다. 반말을 하면서 격의없이 대화를 나누나보니, 자신의 대학시절이 떠올랐다.
'하긴 나도 23살 때 생각해보면 지금 쟤들보다 더 못 나갔을 거야.'
[주인님은 그래도 공부라도 잘하셨잖습니까?]
'그나마 공부만 잘한거지. 결국엔 나도 설거지 당했잖아.'
[아···.]
'열심히 공부해서 대기업 취직하고, 악착같이 저축해서 결혼 상대 찾다 보면 죄다 어린 시절 알파남들에게 처녀 내주고, 훈남들에게 실컷 대주던 애들이 조용히 신분 세탁해서 기다리고 있단 말이지.'
[그래도 주인님은 입장이 바뀌셨잖습니까?]
'차라리 몰랐을 땐 다들 그렇게 사는가 보다 하고 무시했는데, 막상 내가 포식자 위치가 되고보니 어째서 그렇게 미련하게 살았나 싶어.'
[흐음.]
그때 필두가 도훈에게 말했다.
"도훈아. 우린 나가자."
"응?"
"이 새끼들 또 논쟁 붙었어."
찬우와 준성은 어느새 주제를 바꿔 누가 더 빡센 알바를 해봤느냐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말려도 듣지 않는 두 사람을 두고 필두가 도훈에게 잠시 바람이나 쐬자고 제안했다.
"그래. 가자."
"이 새끼들은 지치지도 않네. 우린 담배 좀 피우고 올게."
"올 때 메로나."
"뭔 메로나?"
"나간김에 편의점 들러서 아이스크림 좀 사달라고."
"이 새낀 돈도 한푼 안주고는."
"편의점 다녀올거면 술도 점 더 사다줘. 텐션 막 올랐는데 술떨어졌다."
"영수증 챙겨. 나중에 n빵하게."
담배 한 대 피우려다 졸지에 심부름을 하게 된 필두는 팍팍 짜증을 내면서도 막상 밖에 나오자 편의점 쪽으로 향했다.
"하여간 새끼들. 도훈아 그냥 편의점 가면서 길빵이나 하자."
"그래."
새벽 시간. 드문드문 불은 켜져 있긴 하지만, 거리는 인적도 거의 없이 조용했다. 두 사람은 담배를 피우며 게스트 하우스에서 멀지 않은 24시간 편의점으로 걸어갔다.
"근데 도훈이 넌 원래 그렇게 말 수가 없어?"
"어? 나? 아닌데."
"아니 아까 애들 얘기하는데 별로 말이 없길래. 재미 없나 싶어서."
필두는 조용히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는 도훈이 적응을 잘 못한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말했다.
"우리 셋은 아까 맥주 파티에서 이미 많이 친해져서 중간에 끼어들기 어색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냥 편하게 얘기해도 돼.
말만 저렇지 되게 착한 애들이거든."
"그런 것 같아. 착하네, 다들."
도훈은 자신을 배려하는 필두의 태도에 만족했다.
"여자애들한테 연락은 왔어?"
"누구?"
"아니, 아까 우리 얼굴 확인하고 같잖아. 누가 젤 괜찮은 것 같데?"
"아직 결정 안 한 것 같아. 시간 늦어서 자는지도."
"그렇구나. 이게 뭐라고 은근 쫄리네. 찬우랑 준성이 둘 중 하나가 될 것 같아."
도훈은 이미 필두를 점찍고 었지만, 필두는 자신이 없어하는 모습이었다.
"왜? 필두 네가 될 수도 있잖아."
"아니야. 막말로 내가 찬우보다 키가 크길 하냐, 아니면 준성이만큼 잘생기기를 하냐. 물론 다 갖춘 도훈이 너에 비할바는 아니고."
"너도 그건 크잖아."
"뭐가? 아, 좆은 또 내가 어디가서 빠지진 않지. 근데 생각해 봐."
"뭘?"
"여자애들이 딱 보고 좆이 큰지 작은지 어떻게 알겠냐고. 심지어 나는 발기할 때 많이 커지는 편이라 평소에는 잘 티도 안 나는데."
"그런가?"
필두가 답답한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솔직히 억울해. 여자들은 가슴 크면 밖으로 확 티가 나잖아.
몸매 좋은 것도 옷 입은 태만 봐도 알 수 있고. 근데 잦이는 섹스하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가 없단 말이지. 본선 경쟁력은 충분한데 예선에서 힘을 못 발휘하는 타입이랄까?"
"그런가?"
"여튼, 도훈이 너한테는 쉬운 일이겠지만 우리같은 평범한 남자들은 여자 빤스한 번 내리려면 진짜 작정하고 덤벼야 될까 말까거든."
"나도 쉽진 않지."
"에이, 겸손도 적당히 해. 딱 보면 견적 나오는 구만. 너 솔직히 말해봐."
"뭘?"
"이제까지 몇 명 따먹어 봤냐?"
"글쎄···."
"10명은 넘지?"
"사귄 애들 말하는 거야?"
"아니아니. 그냥 따먹은 애들. 원나잇 포함."
"그러는 필두 너는 몇 명인데?"
"난 한 손가락으로 셀 수 있어."
"다섯 명?"
"아쉽게도 세명."
"오. 잘 나가네."
[너무 기만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니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난 필두 나이 때까지도 동정이었거든.'
"뭘 잘 나가. 두 명은 사귄 여자였고, 한 명은 예전에 대천 해수욕장 놀러 갔다가 술 먹고 꽐라 돼서 원나잇 한건 데. 아침에 술깨고 보니까, 씨발 존나 화장빨이었어. 난 내 남동생이 옆에서 자는 줄 알았다니까?"
"푸하하."
"나 말해줬으니까 너도 말해봐. 10명은 넘지? 혹시 발가락까지 동원해야 하는 거냐?"
도훈은 손발을 다합쳐도 턱도 없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필두가 너무 충격받을까봐 적당히 둘러댔다.
"나도 정확히는 기억안나. 근데 생각만큼 엄청 많지는 않을 거야."
"10명은 확실히 넘나 보네. 부럽다."
[주인님은 100명더 넘어가시는 거 아닙니까?]
'모르겠어. 어느 순간부터 세는 것도 지겨워서.'
[확실히 최상위 포식자가 맞군요. 심지어 아다 폭격기라는 별호까지 붙으셨죠.]
'미션 때문에 어쩔 수 없었잖아.'
[그렇다고 주인님이 싫은 걸 억지로 하지도 않으셨죠.]
'하면 좋긴 해.'
"하-. 난 진짜 요새 뼈져리게 느낀다니까? 나이 먹고나면야 연봉이 얼마나 하고 그걸로 따지겠지만, 우리 나이엔 얼굴 잘생기고 인기 많은 게 장 땡인 것 같아."
"필두 너도 괜찮은데 뭘."
"인마. 아까 찬우 얘기 못 들었어? 난 끽해야 하이에나지. 남이 먹다 남긴 찌꺼기나 주워 먹는. 근데 또 웃긴 게 뭔지 아냐? 그거라도 주면 또 절하고 먹는다는 거야. 자존심도 없게."
도훈은 필두의 얘기를 듣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필두한테 좀 나눠줄까?'
[네? 뭘요?]
'귤희랑 리나 말이야. 어차피 하기도 싫은데 미션 때문에 하는 거잖아.'
[그렇다고 여자가 물건도 아닌데 뭘 어떻게 주신다는 건지···.]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걔들이 자연스럽게 필두에게 매력을 느끼게 만들면 되잖아. 필두가 다른 건 몰라도 물건 하나는 실하니까, 섹스만 생각하면 나쁘지 않는 생각 같은데.'
[과연 주인님 뜻대로 될까요?]
'주면 절한다잖아. 필두 절 좀 받아보자.'
생각을 굳힌 도훈이 필두에게 말했다.
"필두야. 너 진짜 주면 먹을래?"
"응?"
"방금 말했잖아. 주면 먹겠다고. 내가 주면 너 진짜로 먹을래?"
"도, 도훈아."
이제껏 조용히 있던 도훈이 갑자기 적극적으로 나오자 필두도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도훈의 눈빛이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