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3. 제주도 푸른 밤-13-
[주인님, 혹시나 이 상황을 귤희 양이 숨어서 다 훔쳐보는 건 아니겠죠?]
'아닐 거야. 아까부터 숨소리가 일정한 거 보니까 이불 속에 숨어 있다가 깜빡 잠든 것 같아.'
[그나저나 큰일입니다. 얼른 귤희 양을 방으로 돌려보내야 할 텐데 말이죠. 시간 더 지체되면 리나양이 친구가 실종됐다고 신고 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든 애들을 내보내야 할 것 같아.'
[무슨 수로 말입니까?]
'쟤들 머릿속에 여자 생각밖에 없잖아. 그러니 여자 핑계를 대야지.'
"음, 근데 이걸로 결정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나의 말에 필두가 펄쩍 뛰었다. 남자들 앞에서 좆을 까고 일부러 꼴리기까지 했는데, 갑자기 말을 뒤집으니 성이 난 것 같았다.
"뭐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상대 쪽에서 마음에 안 들어 할 수도 있으니까···."
결정이 바뀔 기미를 보이자 옆에 있는 다른 친구들이 갑자기 내 편을 들었다.
"맞네. 도훈이 말이 일리가 있다."
"그렇지. 사실 여자들한테 선택권이 있는 거 아냐?"
"그럼 어떻게 하자고?"
필두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나는 타이르듯 필두에게 말했다.
"방금 얘기했는데, 잠깐 밖에서 음료수나 마신다고 하니까 직접 가서 볼래?"
"지금?"
"지금 나온다고?"
"친구도?"
"응. 그러니까 너희들은 밖에서 담배 피우는 척하면서 기다리고 있어 봐. 그럼 걔들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직접 고르게 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여자들이 선택하게 한다는 거지?"
"그거 괜찮네. 무슨 좆대봐라야? 크다고 잘하는 것도 아니고."
"와, 이 새끼들 말 바꾸는 거 봐.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해. 큰게장땡이지 인마."
"크기랑 테크닉은 아무 상관 없거든?"
"웃기고 있네. 그거 작은 애들이 하는 변명이지."
"까고 있네. 야, 막말로 니가 뭐 얼마나 크다고? 좀 굵다뿐이지."
"굵기가 핵심이야 인마."
"너희들은 계속 싸우고 있어라. 나는 옷이라도 갈아입으련다."
준성이 갑자기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자, 찬우와 필두도 서둘러 옷을 바꿔입었다. 어떻게든 여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조금이라도 성의를 보이는 것이었다. 다들 옷을 갈아입자 내가 말했다.
"그럼 준비됐어?"
"어."
"이건 보나마나지. 걔들도 눈이 있으면 니들을 고르겠냐?"
"누가 할 소릴?"
"나중에 까이고 울지나 마라."
"그럼 나가자."
"도훈아, 여자애들한테는 말해 놨어?"
"지금 나온대?"
"응. 1층 음료 자판기 앞에서 보기로 했어."
[주인님. 리나양에겐 아무 언질도 안 하셨잖습니까?]
'당연하지. 그래야 다시 올라올 핑계를 댈 수 있으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있어봐. 귤희를 내보내는 게 최우선이니까.'
나는 남자애 셋을 데리고 게스트하우스 1층으로 내려갔다.
1층 공간은 조식을 해결할 수 있는 싱크대와 조리기구, 그리고 컴퓨터를 쓸수 있는 휴게공간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무 때나 음료수를 뽑아 먹을 수 있는 자판기도 설치되어 있었다.
늦은 시간 남자들끼리 자판기 앞에 모여 있으면 모양새가 우스웠기 때문에 나는 애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밖에서 잠시만 담배 피우고 있어 봐. 내려오면 내가 사인 줄게."
"그래 도훈아."
"음료수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내가 뽑아줄까?"
"이 새끼, 벌써 뇌물 먹이네? 그런다고 도훈이가 너 밀어줄 것 같아?"
"잠깐. 이거 하나만 확실히 해."
"뭔데?"
"어쨌든 여자들이 고르는 거야. 난 아무 참견 안 할게."
"오케이 콜."
"그게 공정하지."
"여자들도 대물은 알아볼걸?"
"잔말 말고 우린 일단 나가 있자."
셋은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자판기 쪽을 주시했다.
그러나 당연히 여자들이 내려올 리 없었다. 담배 한 대를 다 태울 때까지 소식이 없자, 답답했는지 필두가 들어와서 물었다.
"애들 아직 안 왔어?"
"음, 아무래도 내가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여자애들 방 알아?"
"응. 2층에 있어."
"내가 같이 갈까?"
"아니야. 괜히 부담스러울 거야. 다른 애들이 불공평하다고 할지도 모르고. 혼자 금방 갔다올 게."
"어, 그래. 우린 기다리고 있을 게."
나는 남자애들을 뒤로하고 3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사람들이 안 보는데 서는 단숨에 계단을 넘어가며 날 듯이 방으로 돌아왔다.
"귤희야, 귤희야. 나야."
텅 빈 방에 혼자 남아있던 귤희는 정말로 잠이 든 것인지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결국 이불 속에 곤히 잠든 귤희를 흔들어 깨워야 했다.
"설마 자는 거야?"
"으으···. 술기운 때문에 잠깐 잠들었나 봐."
"얼른 일어나. 여기서 나가야지."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갔어? 아까 한참 얘기하더니."
"일단 나 좀 따라와 봐."
나는 귤희를 겨우 깨워 1층으로 다시 내려갔다. 귤희는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연신 하품을 했는데, 눈이 살짝 충혈된 게 금방이라도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았다.
"우리 방 애들이 너랑 리나랑 같이 놀고 싶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밖으로 빼내려고 어쩔 수 없이 거짓말했어. 그러니까, 그냥 애들 보여주면 대충 고개만 끄덕이면 돼."
"고개만 끄덕이라고?"
"응. 걔들은 네가 셋 중 한 명을 고르는 줄 알거든."
"내가 왜? 난 오빠랑 놀 건데?"
"아니 그러니까 그걸 리나한테 토스하려고."
"오빠 방 룸메이트를 리나에게 소개시켜 준다고?"
귤희가 잠이 확 깨는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아니, 어쨌든 쪽수가 맞아야 리나도 덜 심심할 거 아니야. 성가시게 안 하고."
"아하, 그러니까 리나한테 고추하나 붙여주자는 거구나? 먹고 떨어지라고? 난 또."
"뭐, 그런 셈이지."
[귤희양은 리나양이 주인님에게 관심있는 걸 전혀 모르는 눈치군요.]
'당연하지. 리나랑은 깨톡으로만 얘기했고, 두 사람은 아까 감정이 상한 이후로 서로 말을 안 하고 있으니까.'
"오케이. 근데 누구로 고를 건데? 오빠가 이미 점찍어 둔 사람 있는 거 아니야?"
"응. 셋 중 가장 튼실한 녀석이야."
"튼실해?"
"암튼 지금부터 그냥 내가 하는 말대로 고개만 끄덕이면 돼."
"알았어."
1층 자판기 앞에 도착한 나는 밖에 서 있는 남자애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여자와 함께 도착한 것을 본 녀석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갑자기 폼을 잡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저쪽 쳐다보면서 대충 고개만 끄덕여줘."
"저기 모자라 보이는 애들?"
"응."
"풉-. 꼴을 보니 리나랑 잘 어울리겠네."
건물 안과 밖이랑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세 사람은 귤희가 무슨 얘기를 하는 지도 모르고 계속 폼만 잡고 있었다. 자신을 선택해 달라는 구애의 몸짓이었지만, 귤희 말대로 오밤중에 옷을 한껏 차려입고 거들먹대는 꼴이 살짝 모자라 보이기도 했다.
"됐어. 귤희 넌 이제 올라가 봐. 리나가 아까 찾더라."
"리나가?"
"어. 너 없어졌다고 나한테 연락했던데?"
"미친. 그래서 뭐랬어?"
"모른다고 했어. 그냥 담배 피우러 간 것 같다고."
"언제부터 지가 나 신경 썼다고."
"그래도 괜히 싸우지 말고. 둘이 여행 와서 틀어지면 끝날때까지 피곤해."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암튼 약속 잊지 마? 나 새벽에 안자고기다린다?"
"알았어. 나도 어차피 쟤들 잠들어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연락해."
귤희가 다시 2층으로 올라가자 나는 캔 음료수 4개를 사들고 밖으로 나갔다. 놈들은 내가 나오자 득달같이 달려왔다.
"도훈아, 어떻게 됐어?"
"쟤가 너랑 얘기하던 걔야?"
"골랐대? 아까 나보고 웃는 것 같던데?"
"잠깐만. 여긴 건물에서 너무 가까우니까 뒷마당 가서 얘기하자. 위에 다 들리겠다. 음료수도 하나씩 골라."
나는 남자애들을 데리고 흡연구역이 있는 뒷마당으로 갔다. 음료를 먹으며 자연스럽게 누가 담배를 꺼내자 나도 손을 내밀었다.
"나도 한 대만 줘 봐."
"어? 도훈이 너 담배 안 피운다며?"
"그것도 구라였어?"
"아니. 원래는 끊었는데, 너희들 피우는 거 보니까 그냥 다시 피울까 하고."
"에이, 힘들게 금연결심 했는데 그러면 안 되지. 얼마나 끊었는데?"
"오늘 하루? 제주도 온 기념으로 끊으려고 했지."
"야야 씨."
"그냥 펴 인마 그럼."
우리 넷은 모두 흡연자였기 때문에 담배를 피우며 마저 얘기를 이어갔다.
"일단 세 사람 얼굴은 봤으니, 돌아가서 친구랑 얘기해 본대."
"왜 근데 걔 혼자만 온 거야?"
"같이 와서 본다는 거 아니었어?"
"한명은 갑자기 배가 아파서 화장실 갔대. 그래서 늦게 나온 건데, 내가 가니까 니들 기다린다고 혼자서라도 보고 오겠다고."
"아···."
"걔도 꽤 예쁘던데. 혹시 걔가 너 파트너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아직 못 골랐어."
"뭐?"
"깨톡하던 애랑 메이드 된 거 아니었어?"
"아니 그냥 연락처를 받아서 걔랑 연락하는 거지 딱히 둘 중 누굴 고르는 건 아니야."
"도훈아. 내가 선택되면, 나는 너한테 무조건 우선권을 양보할게. 난 그냥 여자기만 하면 돼."
"도훈아 나는 그냥 구멍만 있어도 돼."
"도훈아, 나는 니가 먹다 버린 거라도···."
"야이씨, 그건 아니지."
"자존심 안 챙길래?"
"아니 근데 그래서 누군데? 우리 셋 중에?"
필두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까 좆대봐라를 이기고도 또다시 선택을 기다려야하는 입장이 다보니 누구보다 절실해 보였다.
"뭐, 돌아가서 친구랑 얘기해보고 고르겠지. 근데 만약에, 내일 더블데이트를 하면 나머지 둘은 어떻게 하려고?"
"설마 남자끼리 좆 비비고 놀겠냐? 낮에 다른 애들 꼬셔봐야지."
"2대 2로 찢어지면 오히려 좋아. 그게 더 승산이 높거든. 4명은 솔직히 쪽수가 너무 안 맞고."
나는 이미 필두로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그게 필두에게 좋은 일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일단 내일까지 연락 준다니까 이만 들어가자."
"으으, 제발! 나 뽑아라."
"오늘 밤에는 기도하고 자야겠네."
"잘 안 돼도 도훈이 너 원망 안 할 게. 그래도 넌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래. 이건 여자들이 고른 거니까 도훈이 원망하기 없기."
"당연하지 그건. 남은 맥주나 마저 치우자."
* * *
"···뭐하다 이제 들어와?"
그 사이 방으로 돌아온 귤희를 보며 리나가 새침하게 물었다.
걱정했다기보다 추궁하는 목소리에 귤희가 대답도 없이 쌩까고 침대에 누웠다.
"뭐야, 이제 대답도 안 하네?"
"통화하다 왔어."
"통화? 누구랑?"
"누구겠어? 남자친구지. 하여간 군대에 핸드폰을 반입시켜 주면 안 된다니까?"
"근데 밤늦게 핸드폰으로 통화가 가능해?"
"오늘 당직 근무 있어서 몰래 빼돌렸대. 당직사관 몰래 화장실가는 척 통화한 거고. 근데 리나 네가 언제부터 내 일에 그렇게 관심을 가졌다고?"
리나가 시비를 건다고 생각한 귤희가 짜증을 내자 리나도지지 않고 받아쳤다.
"남자친구를 그렇게 생각하는 애가, 제주도까지 와서···."
"내가 뭐?"
"아니다, 됐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야. 말은 똑바로 해. 누가 누굴 비난하는데? 넌 전남친 있을 때 다른 남자 안 만났어?"
"내가? 내가 언제?"
"저번에 나랑 클럽 간 건 헤어지고 간 거야? 아니잖아."
리나가 말문이 막혔는지 얼굴이 빨개져서 대답했다.
"야! 그건 네가 하도 같이 가자고 졸라서···. 하, 진짜 어이가 없네? 그게 남자 만난 거야? 그냥 친구 따라간 거지."
"따라간 것 치곤 엄청 열심히 놀던데? 처음 보는 남자랑 손도 잡고."
"걔가 억지로 잡은 거라고!"
"적극적으로 빼지도 않던데 뭘?"
"참나, 야. 너 진짜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너 그때 클럽 룸화장실에서···."
"내가 뭐?"
"아니다 됐다. 말해봐야 내 입만 더러워지지."
"너 진짜 그딴 식으로 말할 거야?"
"니가 먼저 시작했잖아!"
"이게 진짜 씨!"
두 사람은 금방이라도 싸울 것처럼 언성을 높였다.
그때 리나의 폰으로 도훈에게서 연락이 왔다. 리나는 잠시 핸드폰을 보더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너 방금 도훈 오빠 만났니?"
"만났으면 뭐?"
"이게 뜬금없이 뭔 소리야? 귤희 네가 본 남자애들이랑 내일 같이 놀기로 했다니?"
"몰라. 오빠 방에 있는 남자애들이 우리랑 같이 놀자고 했다잖아. 그래서 나보고 같이 가서 얼굴 보자고 하더라고."
"아니 무슨 이런 걸 상의도 없이···."
리나는 갑작스럽게 진행된 일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혼란에 빠졌다. 그녀는 귤희와의 말싸움을 멈추고 도훈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다 귤희가 옆에서 듣고 있는 걸 의식하고는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오빠, 이게 무슨 소리야? 오빠 귤희랑 있었어?"
-톡으로 하지. 방에 애들 같이 있는데.
"아니 너무 황당하니까···."
-그게 아니라, 귤희가 마침 밖에 있길래 잠깐 불렀어. 우리 방애들이 쪽수 맞춰서 내일 놀자고 하더라고.
"쪽수를 맞춰?"
-일단 진정하고. 남자가 나 혼자만 있으면 괜히 너희 둘이 다툴까 봐서.
"흠···. 그래도 나한테 말이라도 해주지 대뜸 귤희한테만."
-원래 널 부르려고 했는데 마침 귤희가 지나가더라고. 그리고 네가 그랬잖아. 귤희는 어차피 남자만 있으면 된다고.
"그럼 귤희 떼놓으려고 다른 남자를 섭외했다는 뜻이야?"
-뭐, 굳이 따지면? 이건 귤희한테 말하지 마. 우리가 따돌리려는 거 알면 괜히 또 감정상할라.
"안 그래도 방금 한바탕 했어."
-뭔 소리야?
"말을 존나 싸가지 없게 하더라고. 갑자기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
-원래 여행 오면 아무리 친한 사이도 사소한 거 가지고 다툰다잖아. 너무 열 내지 말고.
"사실 별로 친하지도 않아. 그냥 놀 사람 없으니까 같이 다녔던 거지."
-암튼. 나 지금 다시 방에 들어가 봐야 하니까 톡으로 얘기해.
"알았어."
통화를 끝낸 리나가 방으로 돌아갔을 때 귤희는 혼자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고 있었다. 더 말해봐야 괜히 싸움만 날 것 같다는 생각에 리나도 핸드폰을 들고 침대에 누웠다. 두 사람이 서로 벽을 보며 돌아누운 모습은, 처음 제주도에 도착했을 땐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