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9. 제주도 푸른 밤-9-
-이도훈 : 난 아무거나 다 잘 먹으니까 너희들 원하는 것으로 골라.
-장리나 : 그런 게 어딨어요? 기왕 제주도까지 왔는데 삼시세끼 맛집으로만 다녀도 모자랄 판에?
'거참, 피곤한 성격이네.'
도훈은 여전히 40대의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액면만 어리지 실제론 40대 아저씨라고 봐도 무방했다.
'맛집 찾아가서 사진 찍어 인스타 올리고 이런 게 요즘 애들의 스타일이란건 알지만···.'
[주인님 성격하곤 좀 안 맞긴 하네요.]
'난 그냥 식사는 배만 불러도 상관없다는 주의란 말이지. 특히 음식 먹기 전에 사진부터 찍는 애들은 무슨 정신머린 줄 모르겠어. 남한테 보여주려고 사는 애들 같아서.'
[아무래도 어릴수록 그런 부분이 있죠. 과시욕이랄까?]
'옛날엔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나대지 마라 그랬는데 요샌 플렉스라고 하면서 대놓고 자랑하고 다니더라고. 그런 애들 너무 생각 없어 보이던데.'
-장리나 : 그럼 오빠, 제가 맛집 리스트 하나 올려드릴 테니까 이 중에서라도 골라봐요. 가장 먹고 싶은 걸로.
잠시 후 리나가 인터넷 블로그 링크를 하나씩 올리기 시작했다.
제주 먹물 파스타니, 흑돼지 삼겹살 연탄 구이니, 해묵 통오징어 라멘이니 하는 메뉴들이 속속들이 올라왔다.
사진만 봐도 군침이 돌만큼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었으나, 도훈은 굳이 리나의 장단을 맞춰가며 호감을 쌓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쓸데없는 잡담으로 시간을 때우며 톡질을 하는 것은 적성에도 맞지 않았다.
-이도훈 : 다 맛있어 보이긴 하는데, 내가 제일 먹고 싶은 건 메뉴에 없네.
-장리나 : 오빤 뭘 제일 먹고 싶은데요?
'여기서 그냥 풀악셀 밟을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차피 따먹으려고 만나는 거잖아. 그러니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들어가자는 거야.'
[주인님은 오직 따먹으려고 여성을 만납니까?]
'응.'
[역시, 목표가 뚜렷하신 분!]
-이도훈 : 너
-장리나 : 네?
-이도훈 : 메뉴를 고를 수 있다면, 난 너를 선택하고 싶은데?
[역시 상남자! 이런 미친 멘트를 날릴 용기는 주인님 밖에 없을 겁니다! 근데 미션 실패하시더라도 상관없으신 겁니까?]
'있어 봐. 반응 보고 후퇴하면 되니까.'
[네? 이게 지금 무마가 될 정도의 수위인가요? 섹드립을 너머그냥 추행 아닙니까?]
'언어적 추행이란 상대가 성적 모욕감을 느껴야 인정되는 거야. 하지만 오히려 좋아한다면 취향인 거지.'
[반응이 늦어지는 걸 보니 무리수였나 싶긴 합니다만···.]
'만약 정색하고 기분 나빠하면 오해라고 둘러대면 그만이야.'
[무슨 오해요?]
'귤희랑 리나 중에서 너를 골랐다는 표현이었다고 말이지.'
[하지만 맥락상 쉽게 납득이 안될 것 같습니다만···.]
'어쩌겠어?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데.' 리나의 답변이 늦어지자 도훈도 뒤늦게 후회감이 밀려왔다. 하는 행동을 봐선, 자기에게 분명 마음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너무 이르게 들이댔나 싶었던 것이다.
더구나 앞에서 보고 말할 때와, 핸드폰으로 톡을 주고 받을 때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는 점도 있었다. 잘생기거나 예쁜 사람과 마주 보며 대화할 때는 외모 버프를 받아 같은 말을 해도 훨씬 잘먹히는 반면,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문자로 주고받는 대화에서는 오로지 말빨로 승부를 봐야 하는 것이다.
[반응을 보니 풀악셀이 아니라 급발진 한 것 같습니다만···.]
'아이씨, 튼 것 같은데 미리 대가리 박을까?' -이도훈 : 하하! 혹시 오해하는 거 아니지? 난 귤희랑 너 중에
···
도훈이 다급히 변명의 멘트를 적고 있을 때였다.
한참 잠잠하던 리나의 답변이 올라왔다.
-장리나 : ···오빠 나 먹고 싶어요?
"헉, 씨발!"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욕지거릴 내뱉더니 쓰고 있던 문자를 지웠다.
[이 반응은 뭘까요?]
'뭐긴 뭐야, 물고기가 떡밥을 문 거지. 내 직설화법이 통했다는 뜻이야.'
[괜히 잘못 대답했다가 오히려 미션만 망치는 거 아닐지 우려스럽습니다만.]
'정말 싫었다면 저런 대답이 나오진 않았겠지. 이건 백프로 그 린라이트야.' 도훈은 자신의 감을 믿고 좀 더 밀어 붙였다.
-이도훈 : 주면 땡큐지.
짧지만 강렬한 문장.
다소 가볍게 보일 수도 있는 대답이었지만, 도훈은 애초에 리나가 진중하고 순진한 여자가 아니라는 건 파악한 상태였다. 유유상종이라고 절친이라는 귤희가 자신에게 했던 짓을 떠올리면, 그 친구인 리나도 별반 다를 바 없는 타입인 것이다.
'귤희는 리나가 바람둥이에게 상처를 받은 순진한 여자애처럼 묘사했지만, 내 생각은 달라.'
[어떻게요?]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소리야. 초록은 동색이라고 끼리끼리 어울리는 법이거든.'
[하지만 가끔 보면 정 반대의 타입끼리 친해지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지나친 확증편향 같은데요?]
'모르겠어? 아까 공항에서 가방 바꿔치기 당했을 때. 물론 의도적으로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귀책은 여자애들한테 있었잖아.'
[그렇죠.]
'하지만 차 좀 돌려달라니까, 나보고 여기까지 오라고 했었지.'
[다시 생각해도 괘씸하군요.]
'그때 통화한 게 리나였잖아. 아무리 친구가 옆에서 부추긴다고 해도, 제대로된 인성이면 중간에라도 택시를 돌렸겠지. 결국 똑같은 애라는 거야.'
[일리가 있습니다.]
'그것뿐이 아니야. 게스트하우스에 막 도착했을 때. 그 여자애들 누구랑 있었는지 생각해봐.'
[또래 남자 둘하고 술마시고 있었죠.]
'그치? 귤희도 그렇지만, 리나도 결국엔 같은 목적으로 제주도에 놀러 온 거야. 사귄 남자친구랑도 헤어졌겠다, 어차피 솔로니까 얼마든지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기회거든. 그러니 도착 첫날부터 맥주파티 와서 곧바로 헌팅에 응한 거지.'
[결국 주인님 생각엔 리나양도 귤희양과 다를 바 없다?]
'다를 바 없는게 아니라 어쩌면 더 음흉한 것 같기도 해.'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적어도 귤희는 가식적이진 않거든. 아까 뒷마당에서 담배 피울 때 내 무릎 위에 올라와서 키스할 때 봤지? 감정 기복이 심하기도 하지만 좋고 싫은 건 확실하게 표현하는 애야. 겉 다르고 속 다른 타입이 아니라는 거지.'
[그럼 리나양은 겉과 속이 다르다고요?]
'셋이 있다 헤어지고 선 톡 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정말로 내일 일정을 의논하고 싶었으면 셋 다 참여할 수 있는 단톡방으로 만들지 않았겠어?'
[아···. 그것도 그렇군요.]
'결국 단 둘이 얘기를 하자는 것은, 귤희를 따돌리고 둘이서만 놀자는 의미거든. 그러니 양아치라는 뜻이지.'
[이햐, 주인님 예측이 맞길 바라겠습니다.]
-장리나 : 저 아무한테나 주는 여자 아닌데?
[실패한 것 아닙니까?]
'아니지. 이건 밀당이지. 딱 보면 몰라?' -이도훈 : 나도 아무나 먹진 않거든.
[이야, 너무 과감한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미 드립에 반응했다는 것은 자기도 생각있다는 거거든. 두고 봐.'
-장리나 : 자신감 엄청 난데? 남자들은 원래 말만 그렇잖아요ㅎㅎ-이도훈 : 꼭 찍어 먹어봐야 맛을 아는 건 아니지.
-장리나 : 뭐, 조금은 궁금하긴 하네요. 그렇게까지 자신있게 말씀하시니.
[헐, 이게 된다고요? 이렇게 쉽게?]
'쉽게는 맞는데, 애초부터 쉬운 상대였어. 줄려고 작정하고 제 주도까지 날아온 애들인데 마침 적당한 상대를 만난 거지.'
도훈은 오늘 귤희의 돌발 행동이나 리나의 태도를 볼 때 자신이 아니었더라도 다른 남자애들하고 만났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다만 오늘 밤 거사를 치르지 못하는 것은, 2인실을 쓰는 두 여자와, 4인실을 쓰고 있는 환경적인 영향이 컸다.
도훈이 그 방으로 넘어가려니 눈치 보이고, 4인실에 따로 부른다는 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나머지 3명이 난데없이 초대남이 되는 꼴이기 때문이었다.
[와, 역시 주인님의 과감한 도발이 제대로 먹혔군요. 대단한 용기십니다.]
'용기는 무슨. 실패해도 아쉬울 게 없으니까 막 던져본 거지. 다행히 상대가 쉬운 여자였을 뿐이고.'
[근데 좀 이상한 게 리나양은 남친이 바람피워서 헤어졌다고 했는데, 저렇게 헤프게 행동하는 게 맞는 걸까요? 너무 자기 모순같은데요.]
'원래 좀 그런게 있어.'
[뭐요?]
' 애인이 바람피워서 안 좋게 끝난 애들은 거의 둘 중 하나거든.'
[어떤 겁니까?]
'하나는 실연의 충격으로 한동안 이성을 멀리해 버리는 거지.
어차피 남자들은 다 똑같다, 다신 배신 당하지 않겠다 뭐 이런 자기 보호 심리 같은?'
[또 하나는 뭡니까?]
'또 하나는 반동 형성이야. 자기가 그런 심한 일을 당했으니, 이제 자신도 막살아 버리겠다는 반항심으로 리미트가 풀려버리는 거야.'
[양쪽 다 너무 극단적인데요?]
'원래 사람이 자존감에 상처를 받으면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거든. 물론 그 와중에도 꿋꿋하게 자기 삶에 충실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대다수라서.'
[하긴 주인님도 따지고 보면 반동 형성에 가깝군요. 세상에, 플레이어 목표를 최대 다수의 최대 성교로 세우시는 분은 처음 봤습니다.]
'음, 그때는 진짜 욱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거긴 했는데 이제와서 어쩌겠어. 아무튼 리나는 지금 삐뚤어지기로 작정한 것 같아.
받아주는 걸 보니, 귤희보다 리나가 더 빠를지도 모르겠는데?'
[여기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머리를 굴려 봐야지.'
-이도훈 : 아쉽네. 여기가 4인실이 아니라 1인실이었으면 좋았을 걸.
-장리나 : ㅎㅎ오빠 너무 굶은 거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은 왔어요?
-이도훈 : 아직. 혼자 있어. 다들 파티에서 여자랑 놀고 있나 봐.
-장리나 : 저희도 더 놀 걸 그랬어요. 귤희가 괜히 방으로 따라오는 바람에.
-이도훈 : 왜? 둘이서만 가방 찾으러 방으로 갔으면 덮치려고 그랬어?
-장리나 : ㅎㅎ 제가요? 오빠가 아니고? 오빠가 더 하고 싶은 거 같은데?
-이도훈 : 모르지 그거야.
[리나양이 완전 신난 것 같은데요? 답장이 칼답입니다.]
'텐션이 좀 오른 것 같아. 얘는 원래 톡으로 대화하면서 흥분하는 스타일인가봐.'
-장리나 : 귤희는 침대에 누워서 게임하고 있어요. 귤희만 없으면 저희 방으로 놀러 오면 되는데.
-이도훈 : 있어도 가면 되지.
-장리나 : 안 돼요. 귤희 오빠한테 삐진 것 같아요.
-이도훈 : 삐지다니?
-장리나 : 저야 모르죠. 오빠 얘기는 한 마디도 안 하던데요?
아까 담배 피울 때 무슨 일 있었어요?
-이도훈 : 아, 아까···.
도훈은 이쯤에서 두 사람을 본격적으로 이간질시킬 계획을 품었다. 미션을 성공하기 위해선 두 사람의 갈등을 폭발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도훈 : 이거 귤희한테는 말하면 안 돼. 너만 알고 있어.
-장리나 : 뭔데요, 뭔데요? 사람 궁금하게.
-이도훈 : 약속부터 해. 안 그럼 얘기 안 할거야.
-장리나 : 둘만의 비밀을 만들자는 건가요?
-이도훈 : 안 말 할거지?
-장리나 : 네.
-이도훈 : 귤희가 갑자기 너 얘기 하더라고.
-장리나 : 무슨 얘기요?
-이도훈 : 너 남자친구랑 안 좋게 헤어진 일.
-장리나 : 귤희가 어디까지 얘기했는데요?
-이도훈 : 그냥 다 말했어.
-장리나 : 와씨, 진짜 어이 털리네? 그걸 왜 오빠한테 말해요?
-이도훈 : 그러니까. 나도 듣고 있다가 이건 아닌 것 같아서 남얘기 하지 말랬거든. 그걸 내가 왜 알아야 하느냐고.
-장리나 : 그래서 뭐라는데요?
-이도훈 : 그냥 여기까지만 말하면 안 될까? 괜히 친구 사이 갈라놓는 것 같아서···.
-장리나 : 오빠. 그냥 다 말해줘요. 귤희한테는 모른 척 할 테니까.
-이도훈 : 좀 심해서 그래.
-장리나 : 괜찮아요. 저 그런걸로 상처 안 받으니까 솔직하게 말해줘요.
-이도훈 : 귤희가 그러더라고. 너 전남친이 왜 다른 여자랑 바람폈는지 알겠다고.
-장리나 : 하-. 씨발년이 진짜. 뭔데요 이유가?
-이도훈 : 너랑 하는 거 별로라서 그랬을 거라고.
[와, 이건 좀···.]
'너무 심했나?'
[있지도 않은 얘기를 그렇게 꾸며서 사람 모함해도 되는 겁니까?]
'나도 내키진 않는데 미션이 그런 걸 어떻게 해?'
[역시 한 인성하시는 군요.]
-장리나 : 귤희가 진짜로 그렇게 말해요? 전남친이 저한테 만족 못해서 바람 폈다고요? 완전 어이없네?
-이도훈 : 아니 뭐, 정확하게 그렇게 말한 건 아니고 그냥 뉘앙스가.
-장리나 : 아니 지가 뭘 알고 그렇게 말한 대요? 내가 하는 거 본 적도 없으면서.
-이도훈 : 혹시 귤희가 네 전남친이랑 같이 만난 적 있어?
-장리나 : 몇 번 같이 봤죠. 오래 사겼으니까.
-이도훈 : 아, 그래서 그 말을 했구나.
-장리나 : 또 뭐라는데요?
-이도훈 : 전 남친이 자꾸 자기 가슴을 훔쳐보더라는 거야. 약간 노골적일 정도로. 그때 느꼈대, 아 전남친이 글래머 스타일을 밝히는 구나 하고. 근데 너는···.
도훈은 그쯤에서 말을 끊었다.
잘못하면 야밤에 대판 싸움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장리나 : 하, 씨발 걸레같은 년이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이도훈 : 워워. 너무 흥분하지마. 솔직히 듣고 있으니까 너무 역겨운 거야. 귤희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이유가 있더라고.
-장리나 : 뭔데요?
-이도훈 : 귤희가 날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어. 한참 널 흉보다가 갑자기 나한테 들이대더라고. 자기 어떠냐고.
-장리나 : 하, 어이 털리네. 오빠. 귤희가 어떤 앤줄 알아요? 제 얘기 듣고 나면 진짜 정나미가 뚝 떨어질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