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8. 제주도 푸른 밤-8-
* * *
"오빠. 나 어깨 아픈데 마사지 좀 해주면 안 돼?"
아니나 다를까, 단둘이 남는 상황이 되자 곧바로 끼를 부리는 귤희였다. 이건 뭐 예상을 벗어나질 못하네.
'아주 천박함이 철철 흐르는구나. 하여간 싼 티 나는 계집애 같으니라고.'
[주인님은 원래 야한 여자 좋아하는 거 아니셨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야한 여자는, 내 앞에서만 야한 여자지 아무한 테나 가랑이 쩍쩍 벌리는 여자가 아니라고. 막말로 창녀들은 일이니까 그렇다 쳐도 얘는 대체 뭔데?'
솔직히 미션만 아니면 줘도 먹고 싶지 않았다.
얼굴이나 몸매가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얼굴은 흔녀보다는 좀 더 나은 수준이고, 아까 보니 가슴도 제법 큰 편이었다.
다만 하는 행동이 정떨어졌다. 남자친구가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바람을 피우는 행동도 그렇고, 친구의 사생활을 처음 보는 나에게 가십거리처럼 떠들어 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지금보다 못생겼어도 예의 바르고 인성이 좋았으면 그래도 한 번쯤 기분 좋게 눌러줬을 거야. 이건 뭐, 벌을 줘도 모자 랄 판에 상을 줘야 하는 상황이라니. 골 때리네 진짜.'
내가 가진 능력은 어쩔 수 없이 여자를 기쁘게 한다.
미운 년 떡 한 번 쳐주는 꼴이니, 마음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쪽이 좀 뭉친 것 같은데···."
어느새 뒤돌아 앉은 귤희가 혼자 자기 어깨를 두드렸다. 자꾸 보채는 행동에 그냥 뒤통수를 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로시. 미션 기간 안에만 둘 다 따먹으면 되는 거지?'
[네. 상관없습니다.]
'그럼 꼭 오늘 밤일 필욘 없겠군.'
"리나 혼자 너무 오래 놔둔 것 같아. 이만 가보자."
"···뭐라고?"
내가 마사지를 거부하자 귤희가 고개를 훽 돌리며 레이저를 쏘듯 나를 노려보았다.
"나중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난 분명 기회 줬다?"
"그게 아니라 여긴 사람들도 계속 들락거리고 그러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한 무리의 흡연자들이 몰려왔다. 귤희는 나의 거절이 괘씸한 듯 토라진 표정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나, 줘도 못 먹는 사람 처음보네. 됐다, 됐어."
그녀는 나를 표독스럽게 쏘아붙이더니 먼저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일부러 따라붙지 않고 그녀를 먼저 보냈다.
[안 붙잡으십니까?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은데요?]
'놔 둬. 아쉬운 사람이 어차피 매달리게 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호기부리시다 미션이 엎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경고에 언급된 것처럼 정신 조작은 불가능한 미션입니다.]
'맞다. 근데 오빠 믿지 립밤은 정신 조작 계열이 아닌가? 아까 쓰면서도 살짝 찝찝했는데.'
[그건 단순히 거짓말에 신뢰성을 높여주는 차원이라 정신 조작류 스킬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정신 조작이란 세뇌나, 강제로 호감도를 끌어올리는 종류의 아이템을 의미하거든요.]
'그렇구나. 암튼 귤희가 저러는 건 그냥 한 번 튕겨보는 걸 거야.'
[튕기는 거라고요?]
'자기가 먼저 시그널을 보냈는데, 내가 리나 핑계를 대면서 거절하니까 기분 상한 거라고. 정확히는 시그널을 안 받아준 것에 짜증났다기보다, 그 이유가 하필 리나라는 게 마음에 안들었겠지.'
[귤희양이 리나양을 견제하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아니 둘 다 마찬가진 것 같아.]
[호오. 무슨 근거로요?]
'아까 귤희가 벌칙 끝나고 화장실 갔을 때 리나가 바로 뒷담화를 깠잖아.'
[네, 그랬죠.]
'그리곤 이번엔 리나 혼자 두고 귤희랑 있을 때는 귤희가 리나를 흉봤고.'
[그럼 그 두 사람은 원래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라는 말씀인가요?]
'아니지. 분명 서로 잘 맞는 게 있으니 맨날 붙어 다니겠지. 어학연수도 같이 간다는 걸 보면 친한 건 틀림없는 사실일 거야. 근데 마음속으로 서로 자기가 더 잘났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일종의 경쟁심 같은 거군요.]
'그렇지. 사실 둘 다 생긴 건 고만고만하거든. 귤희가 좀 더 가슴이 크다면, 리나는 키가 커서 길쭉하고 늘씬한 편이지. 얼굴도 귤희가 발랑 까진 양녀 스타일이면, 리나는 범생인 척하면서 실상은 몰래 할 거 안 할 거 다 해 본 스타일이고. 근데 맘 속으로는 자기가 친구보다 조금이라도 더 낫다고 생각할걸?'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말 한마디면 대번에 드러나지.'
[어떤 말이요?]
'서로 닮았다고 한 마디만 해주면 돼.'
[얼굴이 닮았다고요?]
'응. 자기가 더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을텐데, 친구랑 비슷하다고 하면 자존심 상할 테니까.'
[그렇군요. 근데 자리로 안 돌아가십니까?]
'담배 한 대만 더 피우고.'
[지금요?]
'급할 필요 없다니까? 자기들끼리 이야기할 시간도 줘야지.'
[네? 그게 무슨···.]
'내 면전에서 못할 이야기도 자기들끼린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거든. 오히려 그게 더 분란을 일으키기 좋을 거야.' 나는 여유를 부리며 담배를 한 대 물었다.
* * *
"오빠는?"
귤희가 씩씩거리며 테이블로 돌아가자 리나가 물었다.
"몰라."
"같이 담배 피우러 간 거 아니었어? 왜 혼자 돌아와?"
"모른다고. 짜증나 진짜."
두 사람이 사라지자 은근히 가슴 졸이고 있던 리나는 귤희의 짜증스러운 태도에 뭔 일이 있겠거니 싶었다.
'뭐지? 둘이 싸웠나?'
"왜? 무슨 일인데?"
"아니야 아무것도···. 근데 도훈 오빠 생각보다 좀 답답한 성격인 것 같아."
답답한 성격이라는 말에는 기회를 줘도 못 먹는 병신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리나는 정반대로 생각했다.
'설마···. 귤희 쟤 오빠랑 단둘이 있을 때 꼬리 치다 까인 거 아니야?'
리나는 자신의 근거 없는 추측을 사실이라고 믿고 소리 없이 즐거워했다.
'하여간 김귤희 옛날부터 남의 걸 탐내는 버릇은 여전하네.'
도훈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고 있던 리나는 귤희의 불만 어린 표정을 보더니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했다.
"그런가? 난 잘 모르겠던데?"
"그게 아니라···."
귤희는 친구에게 사실대로 확 까발려버릴까 하는 충동에 휩싸였다.
실은 도훈이가 찍은 여자가 자신이고, 리나는 들러리일 뿐이라는 걸. 그런데 둘만 맺어지면 괜히 친구에게 상처가 될까 봐 아직 말을 못 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귤희는 그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지만, 겨우 참았다.
"···아니야 아무것도. 술이나 마시자. 알아서 오겠지 뭐."
중간에 말을 끊는 귤희의 태도에 리나가 확신했다.
'맞네. 오빠한테 까인 거. 하여간 주제도 모르고 어디서 들이댄 담? 맨날 저런 식이라니까?'
리나가 귤희를 의심하는 건 전적이 있어서였다.
예전에도 리나가 남자친구를 사귀고 정식으로 소개시켜주는 날에 보면 귤희가 민망할 정도로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나오곤 했다.
일부러 가슴골을 드러내고, 무릎에서 한 뼘이나 위로 올라오는 소위 클럽 복장으로 나온 의도는 뻔했다. 리나의 남자친구가 자신을 보고 흔들리길 기대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귤희는 그랬어. 우리 집에 가전 제품 바꿨다고 자랑을 하면, 일주일 안에 자기네 집도 새로 물건을 샀다고 뽐내길 일쑤였지. 그것도 더 비싸고 좋은 것으로. 나한테 열등감 있는 것 같다니까?'
리나는 자신의 전 남자친구에게 끼부러던 귤희의 모습도 떠올렸다. 상당한 훈남이었던 리나의 남친을 본 귤희는, 처음 소개시켜 준 날 술에 잔뜩 취해 못 된 술버릇을 선보였던 것.
다행히 당시 남자친구가 리나의 눈치를 보며 자제하긴 했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면 자신이 만약 그 자리에 같이 없었다면 둘이 어디까지 갔을지는 불보듯 뻔했다.
'맨날 군대 간 남친 별로라고 나한테 투정부리면서 말이야.'
리나의 전 남친에 비해 귤희의 군인 남친은 비주얼에서 확실히 밀렸다. 그것 때문인지 귤희는 유독 리나를 시기하고 부러워했다.
'쟤는 늘 내가 가진 것은 다 뺏어야 직성이 풀리는 얘란 말이야? 분명 이번에도 도훈 오빠한테 몰래 들이대다 까인 거겠지.'
둘이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도훈이 다시 테이블로 복귀했다.
"오빤 왜 늦었어요?"
"어, 화장실 좀 다녀오느라."
"아···."
세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귤희는 도훈을 쳐다도보지 않고 모닥불 쪽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의도적인 무시였다. 그리고 그런 귤희를 없는 사람취급하며 리나가 도훈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오빠는 내일 여행 계획이 어떻게 돼? 우린 산방산 쪽으로 가보기로 했는데."
"산방산?"
"응. 유채꽃으로 유명한 오름이래. 물론 지금 유채는 안 폈지만, 경관이 꽤 예쁘다던데."
"그렇구나. 난 딱히 계획 세운 건 없어. 그냥 되는대로 움직이는 스타일이라서."
"그래? 그럼 오빠 우리랑 같이 갈래? 일행 없으면."
"그래도 돼? 갑자기 껴든 것 같아서 민망한데."
도훈이 토라진 귤희의 눈치를 살피자, 리나가 도훈에게 명분을 주었다.
"오빠 면허는 있지?"
"운전 면허? 응."
"그럼 오빠가 우리 에스코트 해줘."
"에스코트?"
"응. 우린 면허증 없어서 렌트 못 했거든. 원래는 택시타고 돌아다니려고 했는데, 오빠가 렌트해서 같이 다니면 서로 편하고 좋잖아. 안 그래?"
말은 그럴싸했지만, 결국은 도훈을 기사로 부리겠다는 속셈이었다.
'얼씨구. 아주 남자 부리는 게 약아 빠졌구만.'
[말만 번지르르 하지 남자 등골 빼먹는 스타일 같습니다.]
'어쩌면 리나 남자친구가 바람 피운 것도 저런 성격에 염증난 것도 있는 것 같아. 잘한 행동은 아니지만, 이해는 될 듯.'
[주인님이 바람피운 남자 쪽 편을 드는 일도 있군요.]
'에이, 언제까지 트라우마에 시달릴 건데. 이제와서 보면 나도 별반 다를바 없는 쓰레기구먼.'
[아시니 다행입니다. 내로남불이 어찌나 심하시던지.]
'뭐 임마?'
"응? 뭐야. 왜 대답이 없어?"
"어, 어. 그래. 근데 나 아직 차 렌트 못 했어."
"왜?"
"아니, 신분증이 든 가방을 네가 바꿔 들고 가는 바람에."
"아, 맞다맞다. 가방 줘야 하는데. 지금 줄까?"
"말 나온 김에 주면 좋고."
"같이 가자 그럼. 우리 방에 있는데. 귤희 너 잠깐 여기서 기다릴래? 나 오빠랑 방에 좀 다녀올게."
그러자 이제껏 조용히 딴 곳을 쳐다보고 있던 귤희가 두 사람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나도 같이 가."
"으, 응?"
"같이 가자고. 혼자 심심하게 뭐하고 있겠어?"
리나는 자신을 방치하고 담배를 피우고 온 행동은 뭐였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괜히 싸움이 날 것 같아 꾹 참았다.
'귤희 저 계집애 눈치도 없네. 오빠랑 단 둘이 있고 싶었는데.'
한편 리나의 행동을 지켜보는 귤희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감히 나를 따돌리려고? 리나 쟤만 없었으면 오늘 밤 도훈 오빠랑 진하게 노는 건데. 아씨, 짜증나.'
세 사람은 맥주 파티를 마무리하고 숙소로 향했다. 리나와 귤희가 잡은 방은 2인실이었는데, 양쪽 벽면에 침대가 있고 그 사이에 짐이 쌓여 있었다.
"저게 오빠 가방인가 보다."
"어. 맞아."
가방을 다시 찾은 도훈은 곧바로 나갈 생각을 않고, 2인실을 둘러보았다.
"2인실이 확실히 좋겠다. 난 4인실이라 2층침대라는 것 같던데."
"불편하면 우리 방 와서 같이 자든지."
"뭐?"
"아니, 나랑 귤희랑 침대에서 자고 오빠는 가운데 바닥에서 자면 되잖아."
"진짜 그래도 돼?"
"당연히 농담이지 히히. 이 오빠 무슨 상상하는 거야 지금?"
"나도 농담인 줄 알았어. 아무튼 나도 내 방으로 올라 가볼 게."
"벌써 가게?"
"아직 짐도 못 풀어 가지고."
"그래. 내일 봐 오빠. 귤희야 오빠 간대."
하지만 귤희는 도훈에게 단단히 삐졌는지, 도훈이 방을 나가는데도 쳐다도 보지 않고 자기 침구를 정리하기만 했다.
"내일 보자."
방을 나온 도훈은 3층에 있는 4인실로 올라갔다.
방의 크기는 똑같고 정확히 침대가 있는 자리에 2층 침대가 놓인 구조였다.
'4인실이나 2인실이나 1인실이나 방 크기는 다 똑같은 가 본데?'
방 사람들은 아직 밖에서 파티를 즐기는 지 방안에는 도훈 뿐이었다. 나머지 3자리는 이미 짐이 놓여 있었고, 왼쪽 2층 침대만 비어 있는 걸 보니 그곳이 도훈의 자리로 보였다.
'와씨, 내가 이런데서 자게 될 줄이야.'
도훈은 짐을 침대 위로 던지고 단숨에 뛰어올랐다.
마치 장대 높이뛰기를 하는 것처럼 공중에서 몸을 눕히며 착지하는 솜씨는 내공을 발휘한 묘기였다.
쿵-.
[근데 벌써 주무시게요? 오늘 공략은 여기까지입니까?]
'당장은 둘이 붙어 있으니까 뭘 할 수가 없잖아. 게다가 귤희는 아까 일로 삐진 티 팍팍 내고 있으니.'
[오늘 밤 바로 덮칠 것처럼 구시더니, 생각보다 단념이 빠르시군요.]
'누가 단념했대?'
[아니 방금···.]
'지금은 둘 다 말똥말똥 눈 뜨고 있으니 안된다는 거지. 그리고 장담하는데, 저쪽에서 먼저 연락올 걸?'
[연락이요?]
도훈이 예지력을 발휘한 것처럼 도훈의 깨톡이 울렸다.
-장리나 : 오빠, 나 리나.
'봤지?'
[오오, 어떻게 아신 겁니까? 리나양이 먼저 연락할 거라는 걸요.]
'리나가 내 번호를 알잖아. 아쉽게 헤어졌으니 당연히 톡으로 더 얘기하고 싶었겠지. 귤희 눈치 안봐도 되고.'
-이도훈 : 어, 리나구나. 무슨 일이야? 아직 안 잤어?
-장리나 : 생각해보니까 내일 점심을 뭐 먹을지 안 정한 것 같아 가지고.
너무나 뻔한 핑계에 도훈이 코웃음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