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7. 제주도 푸른 밤-7-
게스트하우스는 3층짜리 건물이었다.
앞에는 맥주파티를 즐길 수 있는 커다란 마당이 있었고, 건물 뒤편으로는 창고로 쓰이는 건물과 서로 마주 앉을 수 있는 6인용 탁자형 파라솔이 설치되어 있었다.
파라솔 테이블 위에는 철제 분유통이 놓여 있었는데, 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어 흡연공간으로 이용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기 앉으면 되겠다."
두 사람은 파라솔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귤희가 조그만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익숙하게 불을 붙였다.
"아, 살 것 같다. 난 꼭 술 마시면 이게 땡기더라? 오빠도 그래?"
담배를 맛깔나게 빨아재끼는 모습을 보며 도훈이 생각했다.
'잦이도 쪽쪽 잘 빨게 생겼네.'
"안 마셔도 자주 펴."
"히히, 맞아. 난 제주도 놀러 오면 면세 담배 살 수 있어서 좋더라? 리나 것까지 해서 두보루 샀지롱."
"리나는 비흡연자야?"
도훈이 일부러 리나 얘기를 꺼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의식하는 걸 알면서 일부러 싸움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응. 오빤 담배 피우는 여자 별로야?"
"아니. 내가 피우니까 같이 맞담배 피울 수 있는 여자가 더 좋지."
"진짜? 남자들은 대체로 싫어하지 않나?"
도훈은 귤희가 어느 정도 개방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곧바로 섹드립을 날렸다.
"왜 싫겠어? 땀 한번 쫙 빼고, 같이 피우는 재미가 있잖아."
"응? 무슨 뜻이야?"
귤희는 설마 도훈이 대놓고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군대 가기 전에 사귀었던 여친이 흡연자였거든."
"아하. 그 소리였구나?"
귤희는 도훈의 야한 얘기가 싫지는 않은지 배시시 웃으며 덧붙였다.
"하면서도 같이 피울 수도 있잖아."
"어떻게?"
"시범 보여줄까?"
"여기서?"
"뭐 어때? 우리 둘 밖에 없는데."
귤희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갑자기 도훈에게 다가왔다.
이미 눈빛이 살짝 풀린 게 성욕이 잔뜩 올라간 모습이었다.
"오빠 그대로 있어봐."
귤희가 도훈의 무릎 위에 앉았다. 느닷없이 무릎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귤희를 보며 도훈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얼씨구?'
[와,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남자 허벅지를 깔고 앉는 걸까요?]
'리나 말로는 술 취하면 스킨십이 심해진다더니 이걸 말하는 거였구나.'
"봤지? 이렇게 하면 오빠랑 나도 같이 피울 수 있잖아."
"근데 이 자세로는 못하지 않아?"
도훈은 귤희가 과감하게 나오자 한 술 더 뜨며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휘감았다. 그러자 귤희가 몸을 돌리며 도훈을 얼싸안는 것처럼 정면으로 마주보는 것이었다.
마치 앉아서 들어박기 자세를 하는 것처럼 벤치에 앉은 도훈의 위로 완전히 포개진 귤희가 도훈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하면 되지?"
도훈과 귤희는 서로를 껴안은 상태로 서로 반대편을 보며 담배연기를 뿜었다.
'와 씨, 졸라 까졌네. 이건 뭐 갈보도 아니고.'
"괜찮네. 솜씨를 보니 자주 해본 것 같은데?"
"아니거든? 오빠가 더 많이 해봤을 듯?"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몸이 닿았다. 비록 옷을 입고 있다곤 하지만 가슴과 가슴, 그리고 사타구니가 완전히 밀착된 상태였다. 도훈은 귤희의 허리를 꽉 끌어 안은 채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 취한 거 아니지?"
"왜? 나 취했으면 어떻게 해보게?"
귤희가 도발적으로 물었다.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도훈이 귤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서로 마주 앉은 상태라 너무나 가까웠다.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간격이었다.
'이건 쉬워도 너무 쉬운 거 아니냐?'
[단순히 따먹는 데 그치는 게 아니고, 두 사람을 갈라놓는 게 미션의 내용입니다만.]
'아, 그렇지?'
서로 시선이 얽히자 도훈이 말했다.
"너 담배 맛 보고 싶어."
그리고는 갑자기 입술을 부딪쳤다.
"흡!"
도훈은 귤희의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꼭 끌어안고는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귤희도 도훈이 달려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혀가 마중 나왔다.
진한 키스가 끝나자, 도훈이 민망한 듯 말했다.
"미안. 갑자기 못 참겠어서."
"담배 맛 어땠어?"
"맛있네."
"오빠 것도 맛있어."
금방이라도 불이 붙을 분위기였다.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일행이 흡연실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이크, 사람 온다."
귤희가 재빨리 몸을 일으키자, 모퉁이에서 남자 셋이 몰려왔다.
"저기가 흡연실인가?"
"어? 사람 있는데?"
"뭔 상관?"
남자 셋은 도훈과 귤희가 먼저 파라솔을 차지하고 있자, 테이블로 오지 않고 구석에 서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불청객 때문에 분위기가 깨진 귤희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아깝네. 저 사람들 아니었으면 줄려고 했는데."
"뭘?"
"오빠가 생각하는 거."
이젠 대놓고 야한 얘기를 꺼내는 귤희를 보며 도훈도 맞장구쳤다.
"야외에서도 가능?"
"못할 것 없지? 근데 여긴 사람이 너무 들락거리잖아."
"하하. 너 진짜로 솔직한 성격이구나."
"오빠도 좀 솔직해져봐."
"나?"
"그래. 아까 왜 머뭇거린 거야? 오빠 나한테 관심있잖아."
이젠 멋대로 도훈의 마음까지 확신하는 귤희였다. 도훈은 이때 다 싶어 이간질을 시작했다.
"물론 귤희 너야."
"그럴 줄 알았어."
"근데, 옆에 친구가 같이 있으니까 괜히 눈치보이더라고."
"리나? 그게 뭐?"
"혹시나 리나가 기분 상할까봐."
"아···."
"괜히 내가 의좋은 친구 사이에 껴들어서 분탕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더라고."
"분탕? 꺄하하!"
귤희가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오빠. 보기보다 엄청 소심하네? 뭘 그런 걸 신경 써? 리나랑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베프야. 걔랑 나랑 같은 고등학교 나와서 대학도 같이 갔거든."
"그랬어?"
"응. 우리 사이에 비밀같은 거 안 만들어. 그냥 다 까놓고 말하는 편이야. 집안 문제든, 남자 문제든. 오빤 별 걸 다 신경쓴다."
"난 몰랐으니까. 둘이 여행왔는데, 한 사람만 대시 받으면 어색해 질까봐."
"안 그렇다니까?"
"아니. 여행 막 출발하는 상황이잖아. 둘이서 세운 계획도 있을 텐데, 갑자기 내가 껴들면 좀 그럴까봐."
"아, 그 소리였구나. 괜찮아. 리나는 충분히 이해해 줄 거야. 혼자 왔다고 했지? 오빤 제주도 얼마나 있을 건데?"
"난 원웨이 티켓이야. 편도로 끊었어."
"그럼 잘됐네. 우리랑 같이 놀자. 리나한테 사정 말하면 이해해줄걸?"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왜?"
"아까 들어보니까 걔 남자친구랑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다면서?
그런데 우리가 같이 여행하면서 붙어 있는 걸 보면 기분 나쁠 수도 있으니까."
"에이, 오빠 진짜 리나 그런 애 아니라니까?"
리나를 변호하던 귤희도 도훈이 둘 사이에 낀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맞다. 근데 리나가 나 남친 있다는 거 오빠한테 말하는 건 아니겠지?'
혹시 모르지만, 만에 하나 그럴 경우 본인만 입장이 난처해지는 상황이었다. 군대에 있어서 못 본지 오래긴 했지만, 어제도 통화를 하고 다음 휴가 때 만날 약속을 잡았던 것이다.
'아씨, 그냥 헤어지자고 해버릴걸. 미안해서 그냥 놔뒀더니 걸림돌만 되게 생겼네.'
도훈의 잘생긴 외모와 근육질의 몸에 매료된 귤희는 갑자기 남자친구가 꼴도 보기 싫어졌다. 군대 가기 전엔 나름 옷도 잘입고 훈훈한 남친이었으나, 머리를 짧게 밀고 군복을 입혀놓으니 너무나 못생겨 보였던 것이다. 휴가 나올 때마다 시내에 손잡고 나갈 때 얼마나 쪽팔렸는지 모른다.
'안 되겠다. 리나에게 먼저 말해 놓는 게 안전하겠다. 괜히 오빠가 오해하면 곤란하니까.'
"그런가? 그럼 그냥 지금 가서 리나에게 말할까?"
"아, 아니야."
"응?"
"아니야. 생각해보니까 오빠 말이 맞는거 같아. 그냥 내일 저녁에 알려줘."
"아니 방금은···."
"나도 생각해 보니까, 리나랑 나랑 아무리 친해도 헤어진지 얼마 안되는 리나 앞에서 너무 잔인한 행동같아."
"그치?"
"응. 내가 슬쩍 떠볼테니까, 일단 오늘은 말하지 말아봐."
"그래. 근데 리나는 어쩌다 헤어진거야?"
"아···. 리나?"
리나도 그렇지만 귤희도 친구를 뒷담화할 기회가 생기자 신이 난 것처럼 떠들기 시작했다.
"남잘 잘못 만났지 뭐."
"잘못 만나다니?"
"좀 양아치 같은 새끼였어."
"리나 전남친이?"
"응. 리나 몰래 바람을 폈더라고."
"헐."
귤희는 담배를 한 대 더 꺼내 불을 붙였다. 아까 온 불청객이 담배를 피우고 돌아가길 기다리는 셈치고 하나 더 피우며 시간을 때 울 생각이었다.
"그냥 바람 정도가 아니라, 리나한테 들켜버렸거든."
"들키다니? 바람 피우다가?"
"아니, 자기 집에 불러놓고 떡치다가."
"억."
"남자애가 자취했거든 학교 앞에서."
"응."
"지지난주 일요일인가? 리나가 원래는 주말이라 가족끼리 어디 가기로 했었나 봐."
"가족여행?"
"응. 그래서 주말에 못 본다고 했더니, 남자친구가 자긴 그냥 친구들이랑 술이나 마신다고 했나봐."
"근데?"
"그래놓고 클럽 간 거지."
"클럽을?"
"실은 리나 가족 여행이 전날 밤 취소됐거든. 리나 고모 할머닌가?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장례식장 가야한다고 해서."
"응."
"리나가 밤늦게 여행 취소된 걸 알리려고 전화를 했는데 안 받더라는 거야."
"일부러?"
"그건 모르겠는데 전원을 꺼놨든, 일부러 차단했던 밤새 전화가 안 되더래."
"아. 클럽가서 다른 여자 만나려고 폰 꺼놨구나."
"딱 그거지. 그래서 리나가 혹시 아파서 누워있나 싶어서 아침 일찍 죽을 사들고 걔네 집으로 병문안을 간 거야. 원래 자취하는데 아프면 엄청 서럽잖아."
"그치."
"리나도 자주 들락거려서 걔네 집 비번 다 알고 있거든. 번호키누르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현관에 못 보던 빨간 구두가 있더래."
"헐!"
"전날 밤 클럽에서 꼬신 여자앨 집으로 부른거지."
"원나잇 이있어?"
"원나잇인지 올나잇 스탠드인지는 모르겠고, 암튼 아침에도 또 떡을 치고 있었던 거야."
"대박! 그럼 리나가 그걸 본 거야? 난리 났겠네."
"아니. 리나가 자존심이 엄청 세거든. 어차피 남자애가 매달려서 사겨 준 거라서 솔직히 먼저 좋아하지도 않았단 말이야. 그냥 욕 퍼붓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대."
"완전 충격이었겠네."
"그러니까 말이야."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왜?'
[주인님 트라우마랑 비슷한 상황같아서요.]
'음, 그렇긴 한데 지금은 뭐···. 그리고 걔네는 결혼한 것도 아니니까.'
"나중에 듣기론 남자친구가 집 앞까지 찾아와서 무릎 꿇고 싹싹 빌었다는데, 리나는 뭐. 얄짤 없지."
"당연히 그렇겠지. 나라도 손절했을 듯."
"그니까. 사실 그래서 이번 제주도 여행도 같이 오자고 한 거야. 리나 기분 전환 좀 시켜주려고."
"근데 내가 너를 꼬신 거야?"
"응. 오빠가 나빴네."
"리나를 꼬셨어야 했나?"
"뭐?"
귤희가 정색하며 말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마."
"미안."
"리나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둘 사이에 남자 하나를 두고 다투는 일은 절대 없으니까. 차라리 남자를 손절하고 말지."
"알았어. 미안, 그냥 농담한 거야."
"그건 별로 재미없었어."
"그냥, 리나도 힘들 것 같아서."
"당연히 힘들겠지. 눈앞에서 자기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랑 떡치는 걸 봤는데. 아주 아침부터 미친놈처럼 박고 있었다잖아. 리나가 문 열고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들을 정도로."
"헐."
귤희는 말하면서도 계속 담배 피우러 온 세 명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들이 가기만 하면 아까 하던 짓을 다시 시작할 요량이었다.
"진짜 충격이 컸을 거야. 자기 남자친구가 그런 쓰레기인 줄은 전혀 몰랐던 것 같더라고. 솔직히 한 번만 그랬다곤 못 믿는 거잖아. 안 그래? 그때 처음 걸린 거지, 그 전에 얼마나 그렇게 놀았을지 알 수 없으니까."
"그렇긴 하지."
도훈은 귤희의 마지막 발언을 들으며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귤희 너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네?]
'아까 봤지? 바로 남자 무릎 위에 올라타는 거.'
[저도 조금 놀랬습니다. 저렇게 개방적인 여성일줄은.]
'아무리 취했다지만 스스럼없이 남자한테 안기는 걸 봐선, 허구한 날 저랬다고 봐야지. 굳이 내가 아니라도 상관없었을 걸?'
[아주 성욕에 굶주려 있군요. 공략이 더 쉽겠는데요?]
'지금도 눈 돌아가는 거 봐봐. 담배 피우러 온 애들 가면 바로 덮칠 기세야.'
[주인님도 바라시는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좀 더 애타게 만들어야지. 너무 쉽게 주면 오히려 흥미가 식을 것 같은 타입이란 말이지.'
담배꽁초를 정리한 도훈이 말했다.
"우리도 이제 테이블로 돌아갈까?"
"벌써?"
"아니, 리나 혼자서 기다리기 심심할 것 같아서."
"그냥 둬."
"응?"
"혼자 앉아 있어야 다른 놈들이 쉽게 껄떡대지. 여기 혼자오는 여자들도 은근히 많다더라고."
"정말?"
"몰랐어? 게스트하우스라고 해놓고 사실상 헌팅 할 수 있는 헌팅 포차 느낌이거든."
"어쩐지. 맥주 파티 참가비를 오만원이나 받더라니, 그게 그 값이었어?"
"돈을 받았다고?"
"응? 아니 아까 주인이 참가비 오만원이라던데?"
"아···. 남자한테는 받는 구나. 여자들은 그냥 숙박비에 포함이던데."
그 말을 들은 도훈이 뒷목을 붙잡았다.
'뭐야? 씨발 남녀 차별이었어?'
[너무하는군요. 아무리 장삿속이라지만.]
'하긴. 여자들보고 5만원 내고 헌팅 당할거냐고 하면 누가 한다고 하겠어? 공짜라고 해도 남탕인데.'
그때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던 셋이 마당으로 돌아갔다.
귤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도훈 옆으로 다가왔다.
"오빠. 나 어깨 아픈데 마사지 좀 해주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