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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576화 (1,556/2,000)

1576. 제주도 푸른 밤-6-

"아까 그러셨잖아요. 여행지에서 솔직한 사람 별로 없다고."

"저희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말씀이세요?"

"아니, 그건 아니고요."

"정말로 없어요. 리나는 얼마 전에 남자친구랑 대판 싸우고 헤어졌고, 저는 전에 사귀던 사람 있었는데 군대 가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어요."

"아, 군대."

"오빠는 군대 다녀왔어요? 전 그냥 앞으론 군필자만 만나려고요."

귤희는 도훈이 곧이곧대로 믿는 것처럼 연기하자, 뻔뻔할 정도로 쉽게 거짓말을 쏟아냈다.

'아주 입말 열면 구라네.'

[사정을 다 아는 친구가 옆에 있는데도 저렇게 대놓고 거짓말을 해도 되는 걸까요?]

'원래 친구 사이에서 이성 문제는 관여 안 하는게 국룰이거든.'

[왜 그렇습니까?]

'사생활이잖아. 정말 원수 같은 사이면 모를까, 친구가 바람을 피우건 다른 사람과 썸을 타건 못본 척 해주는 거지. 자기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으니까.'

[진정한 친구면 오히려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바람을 피우는 건 어쨌든 지탄받을 행동인데요.]

'막말로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심지어 유부남이나 유부녀가 불륜을 저질러도 눈 감아주는 게 태반인데 뭐.'

[그렇게 속일거면 왜 사귀는가 싶네요.]

'짜릿하거든.'

[네?]

'바람피우는 게 은근히 짜릿하다고.'

[주인님 경험인가요?]

'나는 반대로 당한 입장이지.'

[그렇죠. 주인님은 그래서 절대 바람은 안피우겠다는 주의였잖습니까. 한때는요.]

로시의 지적에 도훈이 발뺌하듯 말했다.

'그래서 아무도 안 사귀잖아. 누구의 연인도 아닌 사람은, 만인의 연인이 될 수 있거든.'

[궤변입니다만?]

'어쨌든, 연애라는 게 원래 좀 그래. 처음 좋은 모습만 보고 사귈 땐 죽고 못 살 것처럼 붙어다닌단 말이야. 콩깍지 씌이고 나면 단점이 안 보이거든. 그냥 손만 잡고 있어도 좋은 시절이지.'

[그런데요?]

'그런데 이것도 결국 호르몬의 작용 때문이란 말이지. 점점 같이 있는게 지겨워지고, 단점이 보이니까 그것 때문에 다투고, 다른 이성이 슬슬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그러다 결국 바람까지 나는 거지.'

[후우-. 정말이지 인간들이란 복잡한 동물이군요.]

'처음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봤을 때 귤희라는 계집애는 이번이 처음이 아닐 거야. 군대 보낸 남자친구 몰래 여러번 남자 만났을 걸?'

[흐음.]

"네, 전 올해 전역했어요."

"와 정말요? 언제요?"

"8월인가?"

"그럼 지금 복학 하신거예요?"

"아직요. 경험 좀 쌓고 싶어서 이런저런 알바 하다가 이번에 다 그만두고 여행 다니고 있어요. 지금도 그래서 제주도에 혼자 온 거고요."

"아하!"

"두 분은 근데 대학생일텐데 어떻게 제주도에 왔어요? 지금은 방학도 아닐텐데. 혹시 휴학?"

"맞아요. 어학연수 가려고요."

"어학연수요?"

"스펙 쌓으려면 한 번쯤은 다녀와야 한다더라고요. 그래서 둘이 같이 호주 가기로 했는데, 그쪽 어학원이 다음 달에 시작한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렇구나. 어학연수라니 부럽네요."

"오빠는 연수 안 가세요?"

"전 딱히 영어랑 상관없는 전공이라서요."

"어딘데요?"

"사범대 체육교육과예요."

"아하, 어쩐지. 몸이 운동한 사람같더라니."

병나발을 불던 귤희는 살짝 얼굴이 빨개진 상태였다. 술이 생각보다 약한 모양인지, 똑같이 마셨는데 혼자만 변해있었다.

술에 취한 귤희가 갑자기 도훈의 팔뚝을 어루만졌다.

"한 번 만져봐도 돼요? 저 근육있는 남자 엄청 좋아하거든요."

귤희는 허락을 받기도 전에 이미 도훈의 팔을 주무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리나가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또 시작했네. 김귤희.'

리나는 귤희의 헤픈 행동이 마음에 안 드는지 말없이 맥주병을 들이켰다.

'하여간 쟤도 버릇이 잘 못들었다니까? 술만 마시면 남자들 앞에서 질질 흘리고 다니니···.'

함께 술을 자주 마셨던 리나는 귤희가 술에 취하면 남자에게 스킨십을 자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종의 주사였는데, 문제는 귤희가 아무 남자에게나 똑같이 행동했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몇 번 오해가 벌어진 적이 있었다.

당연히 남자 입장에선 여자가 몸을 맞쳐주니 호감이 있다고 생각하고 들이대면, 귤희가 화들짝 놀라면서 정색을 하는 것이다.

'도훈 오빠만 불쌍하게 됐네. 귤희 쟤는 마음에도 없이 남자들 가지고 노는 거 엄청 좋아하는데.'

리나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두 사람의 행동을 쳐다보았다.

그런 리나의 시선을 의식하며 도훈이 말했다.

"하핫, 근육 다 빠져가지고."

"정말요? 아닌데? 엄청 단단한데?"

"군대 막 전역했을 때가 제일 좋았는데, 몇 달 알바하면서 운동을 못 했더니···."

"이게 별로라고요? 그럼 옛날엔 얼마나 좋았다는 거야?"

"아니 뭐···. 그냥 봐줄만은 했죠."

"오빠 식스팩도 있어요?"

귤희가 손을 배로 뻗자 도훈이 난처해 하면서 말했다.

"옛날엔 있었죠."

"한 번 만져봐도 돼요?"

"네? 아니 그래도 거긴 좀···."

"아잉, 한 번만요."

도훈은 유난히 리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것이 다른 사람 앞이라 부끄럽다는 건지, 리나에게 마음이 있는데 귤희가 들이대는 것이 불편하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도훈이 자신을 의식하자 리나도 흠칫하는 기분이 들었다.

'뭐야? 설마 나였어?'

리나는 도훈이 안절부절하자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 이러면 좀 곤란할지도.'

"오빠, 그럼 저 식스팩 만지게 해주면 오빠도 제 몸 아무곳이나 만지게 해줄게요. 됐죠?"

"네? 아니 그게 무슨···."

귤희가 일방적으로 통보 하더니 갑자기 도훈의 배 위를 손바닥으로 쓱 쓸어내렸다. 얇은 티 하나만 걸치고 있었기에, 그의 우락부락한 복근이 뚜렷하게 전해졌다.

"우, 우아! 장난 아닌데?"

"귤희야 그만해. 오빠 불편한 것 같은데."

"리나야 진짜야. 너도 만져봐. 오빠 진짜 근육 짱짱맨이야!"

보다못한 리나가 귤희의 허리를 잡아 떼어냈다.

도훈이 계속 자신을 보며 구원의 눈길을 보냈던 것이다.

"아잉, 더 만지고 싶었는데."

"귤희 너 좀 취한 것 같아."

"뭔 소리야. 하나도 안 취했어."

"오빠 죄송해요. 귤희 얘가 원래 취하면 장난기가 심해져서."

"아, 아닙니다."

"나 안 취했다니까?"

귤희는 친구인 리나가 자꾸 자신을 취한 사람 취급하자 불만을 터뜨렸다.

"그냥 얼굴 좀 빨개진 거야. 하나도 안 취했어. 내가 무슨 말 했는지도 다 기억한다고."

"뭐?"

귤희가 갑자기 자신의 팔을 좌우로 넓게 벌렸다.

"자, 오빠도 이제 만져요. 제가 약속했죠? 복근 만지게 하면 아무곳이나 만져도 된다고."

"어머, 얘가 진짜 왜 이래?"

"저, 저기 그건 좀."

"리나 네가 왜 참견이야? 나랑 오빠 사이 약속인데. 그죠?"

귤희는 계속 훼방을 놓는 리나가 점점 신경쓰였다.

자기 딴에는 도훈과 먼저 친해져 장난을 치고 놀고 있는데, 괜히 씹선비처럼 옆에서 미주알고주알 잔소리를 늘어 놓는 것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오빠. 약속은 약속이니까 허락할게요."

도훈은 다시 곤란한 표정으로 리나를 쳐다보았다.

그럴수록 리나는 점점 도훈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착각했다.

'맞네, 맞아. 오빠가 호감을 가진 사람은 귤희가 아니라 나 였던 거야. 그게 아니면 왜 계속 나랑 눈이 마주치겠어? 귤희가 눈치도 없이 계속 들이대니까 엄청 민망해하는 거잖아.'

"얼른요."

귤희가 자꾸 보채는 통에 도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눈 감아봐요."

"헐! 이 오빠 제법 놀 줄 아네? 사람 흥분시키고?"

취기가 오른 귤희가 야한 스킨십을 기대하며 눈을 감았다. 도훈이 테이블에서 일어나 귤희쪽으로 다가갔다.

"눈 뜨지 마요."

"알았어요."

하지만 도훈은 귤희가 아닌 리나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갑작스러운 귓속말에 리나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민망하니까 리나씨가 저 대신 만져줘요.

-진짜요?

-네. 제가 옆에서 바람 넣을게요.

갑자기 장난기가 치민 리나는 도훈의 부탁을 수락했다.

"언제 시작하는데요?"

"지금요."

도훈의 눈짓에 리나가 대신 귤희의 뒤로 다가갔다.

도훈은 바로 옆에 서서 계속 말을 걸어주었다.

"근데 정말 아무 데나 만져도 상관없는 거죠?"

"저 한 입으로 두 말 안해요."

"아니, 괜히 나중에 기분 나쁘다고 하면···."

"절대 안 그래요. 그냥 게임이잖아요."

도훈은 충분히 보증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리나에게 고갯짓했다. 리나는 귤희의 행동이 괜히 얄밉게 느껴져 잔뜩 골탕을 먹여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눈뜨면 안 돼요? 눈 뜨면 반칙!"

도훈이 단단히 주의를 주는 사이, 뒤로 돌아간 리나가 불쑥 귤희의 젖가슴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흡!"

도훈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리나가 계속 말을 걸라는 사인을 보냈다.

"눈 뜨지 말아요."

"아··· 저, 음···."

눈을 감고 있던 귤희도 설마 가슴을 대놓고 만질 줄은 몰랐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리나는 당황해하는 친구의 반응이 재밌는지 아예 대놓고 젖가슴을 주물렀다.

"아, 아아···. 어, 언제까지 만지실 건데요."

"이제 그만 할게요. 아직 눈 뜨지 마요."

도훈이 신신당부를 하는 사이 리나가 손을 떼더니 재빨리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됐어요."

귤희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도훈은 자리로 돌아가 있고, 리나가 핸드폰을 보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와, 이 오빠 진짜···."

"아무 곳이나 만지라면서요.?"

"그래도···. 흠, 뭐 알았어요. 게임은 게임이니까."

"뭐야? 둘이 무슨 일 있었어?"

"방금 못 봤어?"

"응? 나 엄마한테 연락와서 톡하고 있었는데?"

리나는 아무것도 못 봤다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도훈의 눈치를 보면서 묘하게 웃고 있었다.

"흠흠. 나 잠깐 화장실 좀. 얼굴에 열나는 것 같아."

귤희가 잠깐 화장실로 향하자 테이블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도훈이 그녀에게 말했다.

"귤희 진짜로 오해하는 거 아니에요?"

"왜요? 그러라고 만진 건데?"

"아니 그래도 초면인데···."

"신경쓰지 마요. 원래 저렇게 노는 애니까."

"네?"

도훈이 무슨 뜻이냐며 되물었다. 친구가 잠시 사라지자 곧바로 뒷담화를 까는 리나였다.

"귤희 쟤 술버릇이 좀 안 좋거든요. 오빠한테만 그러는게 아니라, 아무 남자한테나 자주 스킨십해요, 술 취하면."

"아···. 어쩐지 아깐 좀 당황했거든요."

"자기도 당해보면 어떤 기분인지 알겠죠 뭐."

"그래도 좀 민망했어요. 나중에 꼭 제가 안했다고 전해주세요."

"그래요. 근데 왜 오빠 계속 존댓말해요? 나이도 이미 깠는데?"

"초면이니까···."

"에이, 너무 예의 차리지 말고요. 오빠 말 편하게 해요."

"그럼··· 그럴까?"

"나도 말 편하게 할게."

"응?"

"왜? 반말 싫어?"

대뜸 말을 놓는 리나의 모습에 도훈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것봐라?'

[의외의 모습인데요? 귤희양이 훨씬 까진 줄 알았는데.]

'끼리끼리 논다고, 도긴개긴이긴 한데 리나도 한 인성 하네.'

[그러니까요. 친구 화장실 가자마자 바로 뒷담화를 하는군요.]

'지금 리나는 아까 내가 계속 눈빛으로 시그널을 주는 바람에 내가 자길 마음에 들어한다고 착각하는 모양이야.'

[의도된 플레이죠?]

'당연하지. 둘 다 그렇게 믿게 만드는게 질투의 시작이니까.'

"아냐, 뭐. 말 편하게 하면 나도 좋지."

"술 한 잔 하자, 오빠."

"응."

도훈과 리나는 맥주병끼리 부딪히며 서로 병나발을 불었다. 그사이 귤희가 다시 돌아왔는데, 아까와 달리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은 모습이었다.

"왔어?"

"응. 나 좀 취한 듯."

"오빠랑 말 편하게 놓기로 했어."

"진짜? 나도 그럼 반말해?"

"오빠가 괜찮대."

"히히, 잘 됐다. 오빠 그럼 나도 반말 할게."

"응."

도훈을 보는 귤희의 시선이 처음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친구 앞에서 대놓고 가슴을 주무르다니···. 쑥맥은 무슨? 존나 놀아 본 사람이네. 차라리 잘 됐지 뭐.'

귤희는 애초부터 섹스 파트너를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훈이 자신에게 관심을 있다는 걸 알고부터는 몸이 달기 시작했다. 방금 화장실에 간 것도 지나치게 흥분한 마음을 가라 앉히기 위해서였다.

'간만의 애무라 너무 흥분해 버렸잖아. 오빠 몸 좋은 거 보니, 잦이도 엄청 클 것 같아.'

귤희는 이미 도훈과 끝까지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옆에 있는 리나의 눈치가 보였다.

'근데 저 계집애는 눈치도 없이 계속 붙어 있을 생각인가? 하씨, 오빠랑 단 둘이 있어야 별을 따든지 할텐데.'

그때 갑자기 뭔가 떠오른 귤희가 도훈에게 말했다.

"오빠 혹시 담배 펴?"

"나? 응."

"한 대 피우고 올까?"

"지금?"

도훈이 리나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따로 떨어지는 게 목적이었던 귤희는 리나를 애써 무시했다.

"응. 주인 아저씨가 담배 피울거면 뒷마당 가서 피우랬거든. 거기 흡연실 만들어 놨다고."

"리나는 그럼?"

"리나는 담배 안 펴. 리나야, 우리 잠깐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올게. 괜찮지?"

평소 친구가 담배를 피울 때면 늘 밖에 나가라고 구박했던 리나였기에, 이제와서 따라간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알아서 해."

"오빠랑 금방 갔다올 게. 난 취하면 꼭 그게 당기더라?"

귤희가 애매한 말을 남기며 도훈과 함께 뒷마당으로 향했다.

도훈은 난처한 표정으로 계속 리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어깨를 으쓱하는 연기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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