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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575화 (1,555/2,000)

1575. 제주도 푸른 밤-5-

둘 다 외모는 봐줄 만하지만, 도훈의 성격상 절대 따먹고 싶지 않은 부류였다.

군대 간 남자친구를 보험 따위로 생각하는 귤희는 말할 것도 없는 인성 쓰레기고, 주관도 없이 부화뇌동하면서 결국엔 똑같이 행동하는 리나 역시 좋게 봐주긴 힘들었다.

원하면 마음에 드는 어떤 여자든 따먹을 수 있는 도훈의 입장에선, 모래사장에 뿌려진 모래알만큼이나 흔하디 흔한 여자중 하나일 뿐이었다.

'설마 저 두 사람이 공략 대상인 건 아니겠지?'

[정황상 맞는 것 같은데요?]

'왜?'

[낯선 환경, 독특한 성격, 처음 보는 여자. 미션이 만들어지기 딱 이상적인 조건이니까요. 미션을 열람하시겠습니까?]

'아냐. 이건 아니지. 줘도 안 먹을 여자를, 미션 때문에 억지로 따먹어야 한다는 거잖아? 이건 내쪽에서 거부하겠어.'

[주인님. 감정에 휘둘려선 대업을 이룰 수 없습니다. 싫어도 참고 견디는 게 플레이어의 자세가 아닐까요?]

'모처럼 휴가 왔는데, 시작부터 재수탱이 없는 계집애들 밑이나 닦으라는 거잖아. 안 해! 못 해!'

[허어. 왜 이렇게 감정적으로 되셨습니까? 우선 미션 내용과 조건부터 확인하시죠. 거부는 그 뒤에 하셔도 충분하니까요.]

로시의 간곡한 부탁에 도훈도 어쩔 수 없이 스마트 워치에 떠오르는 미션 글귀를 빠르게 훑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잠깐 시계를 보는 정도였지만, 동체 시력이 발달한 도훈에게는 눈으로 훑는 것만으로도 내용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우정 파괴자.

*절친 사이를 갈라놓는 미션입니다.

*여자들 사이에 남자 하나가 껴서 친구 사이를 의절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두 사람을 철천지원수로 만드셔야 합니다.

*최종적으로는 두 사람을 각각 따먹어야 미션이 완료됩니다.

*성공 보상으로 5,000포인트와 [긴급 탈출]아이템이 제공됩니다.

-긴급 탈출 : 버튼을 누르면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안전한 장소로 워프 됩니다. 본 아이템은 소모품이므로 단 한 번만 사용 가능합니다.

*정신 조작 계통의 아이템을 사용할 경우 미션이 자동종료됩니다.

*남은 시간 : 3Day

'이건···.'

[보상을 보니 느낌이 다르죠?]

'이런 보상이 여기서 나온다고?'

도훈은 미션의 내용보다 보상으로 주어지는 아이템에 주목했다.

긴급 탈출. 마법의 문고리처럼 장소를 지정하여 문을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단숨에 안전지대로 대피할 수 있는 1회용 아이템이었다. PK단의 위협이 현실화되는 시점에서 이보다 요긴한 아이템은 없었다.

'대박! 지금 나한테 딱 필요한 물건이잖아?'

[주인님. 아무리 상대가 싫어도···.]

'그 모순을 견디는 게 플레이어지. 미션을 수락하겠어.'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내용도 다시 생각하니 마음에 들고.'

[우정 파괴자 미션이요? 여성의 질투심을 극대화 시키는 종류로 보입니다만.]

'응. 안 그래도 둘 다 맘에 안 들었는데, 이번 기회에 확 찢어 버려야지.'

[뭐, 뭘 찢는다는 말씀이신지.]

'뭐긴 뭐야. 둘 사이의 우정이지.'

[아하.]

'저 둘은 붙어 다니면 안 좋은 쪽으로 시너지가 나는 타입이야.

저런 식으로 싸가지없게 굴면 언젠간 서로가 서로를 원망하고 미워할 때가 분명히 올 거야. 이 기회에 미리 싹수를 잘라줘야지.'

"뭐예요? 왜 시계만 보고 있어요? 지금 제 말 무시하시는 건가요?"

"아, 아닙니다."

"그럼 왜 대답을 못 하는데요? 설마, 정곡을 찔려서 놀라셨나?"

귤희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하여간 싸가지는 밥 말아 먹은 계집애였다. 엄청 예쁘지도 않은데 그 와중에 공주병까지 있었다.

하지만 도훈은 미션을 위해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며 연기를 시작했다.

"···맞습니다."

"네?"

"뭐라고요?"

"그쪽에 관심 있어서 쫓아온 것 맞다 고요."

"헐?"

"진심?"

도훈이 부끄러워하는 척 어리숙하게 대답했다.

"근데 다른 남자들이랑 같이 있는 걸 보니까 저도 모르게 욱하는 마음에···. 방금 전 경솔한 행동에 대해선 사과할게요."

"지금 저희랑 농담하는 거 아니죠?"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도훈의 고백에 리나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근데 왜 비행기에선 저희한테 그렇게 까칠하게 구셨어요?"

"제가요?"

"아니, 그쪽 찍는 것도 아니고 저희끼리 셀카 찍는 데 기분 나쁜듯 등 돌리셨잖아요. 솔직히 그때 좀 민망했거든요."

"아···."

도훈이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종전의 예리한 눈빛은 사라지고, 영락없는 덩치 큰 찐따의 전형이었다.

"제가 실은···. 여자들 앞에선 부끄러움이 많아서···."

"헐, 정말요? 전혀 그렇게 안 생기셨는데요?"

"여자친구 있으신 거 아니에요?"

"없습니다."

"거짓말하지 말고요. 혼자 여행 온 남자치고 솔직한 사람 한명도 못 봤는데."

"진짜로 없습니다. 헤어졌거든요, 최근에."

"아···."

"어머, 리나 너랑 비슷하네?"

"네?"

"야, 그 얘길 갑자기 왜 하는데?"

리나가 귤희의 팔을 꼬집으며 민망해했다.

도훈의 고백에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되며 두 사람도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못 들었네요. 저희보다 오빠 맞죠?"

"스물 셋이고요, 이도훈이라고 합니다."

"오빠구나."

"저흰 21살요. 전 김귤희. 이쪽은···."

"제 이름은 이미 알고 계시죠? 장리나요."

"반갑습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에이, 오빠한테 어떻게 그래요? 그럼 이제 도훈 오빠라고 부르면 되나요?"

"아니 뭐, 편하실 대로."

도훈은 누가 봐도 훤칠한 미남이었기 때문에 귤희와 리나의 입장에선 그가 관심을 보이자 기쁠 수밖에 없었다.

도훈 외에도 게스트하우스엔 서른 명이 넘는 남자들이 있었으나, 그와 키가 비슷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 더구나 얼굴까지 잘생긴 것으로 따지면 적수가 없다시피 했다. 한마디로 도훈은 이 구역에서 가장 잘난 사내였다.

'히히, 진짜 우리한테 관심이 있어서 쫓아온 거였다니. 완전 반전이네? 그것도 모르고 너무 까칠하게 굴었나?'

'근데 우리 둘 중 누가 맘에 든다는 거지? 설마 귤흰가?'

갑자기 도훈에게 급 관심이 생긴 두 사람은 그에게 꼬치꼬치 묻기 시작했다.

"저, 근데 저희 둘 중에 누굴 따라오신 거예요?"

"귤희, 너 아냐?"

"뭔 소리야. 오빠한테 폰번호 알려준 건 리나 너잖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를 밀어주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직 도훈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괜히 김칫국 먼저 마시는 것보다 보다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편이 나중에 자존심이 덜 상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저 그게···."

도훈은 일부러 대답을 머뭇거렸다.

"리나 맞나 보네."

"아니야. 귤희 너라니까?"

"오빠가 그냥 속시원하게 말해줘요. 저희 그렇게 꽉 막힌 스타일 아니에요. 오히려 개방적이랄까?"

"뭐, 뭔 소리야? 갑자기."

"맞잖아. 저나 리나나 여기 온 목적이 남자 사귀려는 거였거든요. 둘 다 솔로니까."

"아니 그건···."

리나는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현재 공식적인 솔로는 리나 자신 뿐이다. 귤희는 1년 동안 사귄남자친구를 군대에 보낸 상태. 하지만 평소 말하는 투로 봐선 언제든 기회만 있으면 갈아탈 생각처럼 보였다.

'와, 저 기집애 말하는 것 좀 봐? 민교랑은 나도 아는 사인데 어쩜 저렇게 뻔뻔한 거짓말을.'

그때 귤희가 테이블 밑에서 리나의 치마 사이로 손을 넣어 허벅지를 살짝 꼬집었다. 리나가 깜짝 놀라 쳐다보자 귤희가 조용히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나 남자친구 있다는 거 절대 말하지 마. 알지?'

눈빛만 봐도 서로 마음이 통하는 두 사람이었다.

"음,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어요."

"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그러니까 저희 둘 중에 누가 마음에 드는지 아직 모르겠다고요?"

"아, 아뇨. 그건 아닌데···."

"아휴 답답해. 오빠 보기보다 답답한 스타일이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어차피 눈치 볼 사람도 없는데."

도훈이 기침을 하는 척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재빨리 인벤토리에서 '오빠 믿지 립밤'을 꺼내 입술에 발랐다. 그 동작은 워낙에 순식간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전혀 알아 챌 수 없었다.

"실은···. 제가 엄청 신중한 성격이거든요."

"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솔직히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긴 한데, 아직 확신이 서질 않아서 고민하는 중이라서요."

"아···."

"그니까 뭐, 아직 고백할 만큼은 아니다 이거네요?"

"네. 대신 저는 마음 정하면 그대로 직진하는 스타일입니다. 당장은 서로를 더 알아가고 싶어요."

오빠 믿지 립밤의 효과 때문에 두 사람은 도훈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기 어려웠다. 너무 그럴싸하게 들리는 터라, 정말로 도훈이 진중한 성격이라서 확신을 갖기 전까지 보류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아, 생긴 건 완전 쾌남인데 보기보다 소심한 스타일이네?'

'아휴, 답답해. 그래서 누구라는 거야? 그냥 툭 까놓고 말해주면 안 되나?'

도훈은 두 사람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다시 한 번 말했다. 다만, 너무 우유부단하게 보이는 것은 호감도를 낮출 수 있기 때문에 무척이나 단호한 태도였다.

"오늘은 처음 뵌 거니까 바로는 좀 그렇고, 내일 저녁까지 제가 확실히 말씀드릴게요."

"정말요?"

"그럼 내일까지 저희랑 쭉 같이 다니신다는 말씀이세요?"

"네."

"근데 주무실 데는 있으세요?"

"저도 여기 게스트 하우스 예약했어요."

"엇? 정말요?"

"가방 찾으러 오신 거 아니셨어요? 근데 여길 미리 예약했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실은 아까 게스트하우스 주인분에게 사정 말씀드려서 빈방을 잡았어요."

"대박."

"여기 엄청 예약하기 어려운데, 운이 좋으셨네요."

"어디예요? 저흰 3층 2인실인데."

"아, 저는 2층에 4인실이에요. 마지막에 남는 방이 거기밖에 없더라고요."

"그러시구나."

"신기하다. 진짜로 우연이네요. 아니, 인연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 이러지 말고 다같이 짠 한 번 할까요?"

귤희가 술을 따르려고 하는데 하필 맥주가 다 떨어져 있었다.

"아, 술 떨어졌네. 더 시켜야겠다."

그때 도훈이 앞치마를 입은 점원을 불렀다.

"저기요. 여기 맥주 4병요."

"오빠가 사주시게요?"

귤희가 생글거리며 물었다. 남자한테 얻어 먹는 것이 익숙해 보이는 태도였다.

"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제가 사드려야죠."

"와아, 완전 매너남이네."

"아까 걔들보다 훨 낫네요."

"누구요?"

"아까 오빠가 쫓아낸 남자애들요. 아니, 갑자기 우리 테이블에 합석하자더니, 저희 술만 축내고 갔거든요. 지금 생각하니까 완전 양아치네."

"아하, 술은 얼마든지 드셔도 되니까 마음껏 시키세요."

"오빠 진짜 화끈하다!"

점원이 맥주 4병을 가져오자 도훈이 슬쩍 말했다.

"이거 아까 사장님이랑 얘기된 거거든요. 확인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세 사람은 새롭게 도착한 시원한 맥주를 한 병씩 따더니 병 주둥이끼리 맞부딪혔다. 야외다 보니 잔을 드는 것보다 병나발을 불기로 한 것이었다.

"어쨌든 반가워요, 도훈 오빠."

"치어스!"

"치어스."

술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사이 서로의 시선이 엇갈렸다. 리나는 도훈을, 도훈은 귤희를, 귤희는 리나를 보고 있었다.

'완전 재수탱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역시 잘생겼단 말이지?

아까 사투리 심한 걔네들하곤 비교도 안된다 진짜.'

도훈은 쿨한 척하는 귤희를 보고 생각했다.

'쟤부터 먼저 자빠뜨려야 겠어.'

[귤희양이요?]

'응. 아까 듣기론 리나는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다고 했잖아.'

[그랬죠.]

'그렇다면 비교적 최근까지 섹스를 해왔단 소리거든. 아마도 성욕은 남자친구가 군대간 귤희가 훨씬 왕성할 거야.'

[호오. 하지만 가능 하시겠습니까? 아직 주인님이 귤희양을 선택한 것도 아닌데요.]

'쉬워.'

[네?]

'귤희는 딱 보면 사이즈가 나와. 아까 우연히 엿들은 대화에서도 그랬잖아. 어차피 지금 군대 보낸 남친은 보험용이라고. 쟤는 진짜 작정하고 제주도까지 온 거야. 섹스할 사람 구하려고.'

[단순히 그런 목적이라면 유흥주점을 가는게 더 빠르지 않겠습니까? 굳이 제주도까지 온다고요?]

'아마도 두 가지 이유겠지.'

[뭔가요?]

'괜히 클럽이나 감성주점같은 데 다니다가 군대 간 남자친구 귀에 소문이라도 들어가는 게 두려운 거겠지. 사귄 정이 있어서 상처 주고 싶지 않다든가,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마무리는 깔끔하고 싶은 심리랄까?'

[또 하나는 뭔가요?]

'여행지에선 원나잇이 훨씬 깔끔하거든.'

[그건 왜 그렇죠?]

'어차피 주거지에서 만나는 게 아니잖아. 제주도는 전국에서 다 올 수 있는 곳이라고. 생긴게 마음에 들어서 원나잇을 했는데 생각보다 별로다? 그럼 사는 곳 다른 곳으로 둘러대고 연락처 차단하면 그만이라는 거지.'

[호오, 듣고 보니 그럴듯한데요?]

'귤희는 딱 보면 몹시 굶주려있어. 아마도 자기가 사는 동네 주변에선 여러 사정으로 남자를 못 만났던 것 같아. 그러다 리나가 마침 남친이랑 헤어지면서 핑계가 생기니까 대뜸 제주도로 날아온 거지. 오로지 섹스하고 싶어서.'

[주인님 예측이 맞아야 할텐데 말이죠.]

'좀 더 속마음을 떠보면 확실해지겠지.'

"근데 두 분은 정말 남자친구 없으세요?"

"···네?"

귤희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가 줄어들었다.

도훈의 질문에 긴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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