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2. 제주도 푸른 밤-2-
급하게 국내선 예약을 마친 도훈은 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미호와 접선했다. 증거를 남기지 않아야 한다면서 CCTV도 없는 으슥한 곳에서 마주친 미호는 차량 창문 너머로 USB 드라이브를 하나 건넸다.
"여기. 본부 데이터 베이스에서 내려받은 자료."
"고마워."
"이걸 뭐하는데 쓰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잠자코 숨어 있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난 분명히 경고 했어."
"알았어. 누구도 찾지 못하는 곳에 짱박혀 있을 테니까, 몸조리나 잘해. 놈들한테 들키지 말고."
"흥."
미호는 작별인사도 없이 다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도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민망함에 어깨를 으쓱했다.
'빈말이라도 몸조심 하라는 말 한마디를 안하네.'
[미호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시는 군요. 기억 하십시오. 그녀는 얼마전까지 주인님을 노리던 PK단원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아. 미호 아니었으면 이번엔 정말 위험했겠지. 적과의 동침이 이럴 때 효과를 발휘하는고만.'
[사전적인 의미와 다르게 주인님은 진짜 동침을 하셨지요.]
USB를 인계받은 도훈은 곧바로 차를 몰아 공항으로 이동했다.
얼마전 안소영을 마중나갔던 국제공항이었다. 야간에 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편이 그곳밖에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공항 주차장에 차를 대고 출국장을 통과해 대합실에 들어선 도훈은 출발 시간을 확인했다.
[1시간 넘게 기다려야겠군요.]
'이 시간에 비행기를 잡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봐야지. 안 그럼 내일 출발하거나, 인천 항에서 10시간 넘게 배를 타야 했을 테니까.'
[이렇게 서두르시는 이유라도?]
'특임대 놈들이 오늘 전격적으로 회동을 열었잖아. 내일부턴 본격적인 수색에 들어간다는 소리야. 그러면 어디서 부터 뒤지겠어?'
[설마 국성대인가요?]
'당연하지. 미호 말로는 최근 5년간 조사했던 플레이어 의심자 자료를 모두 넘겼다고 했잖아. 가장 최근에 미해결된 사람이 바로 나였고.'
[후우-. 듣고보니 간발의 차였을지도 모르겠군요.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신 셈이랄까요.]
'놈들이 국성대를 들쑤셔봐야,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을 거야.' 비행기를 기다리느라 시간이 남은 도훈은 미호가 건넨 USB 드라이브를 떠올렸다.
'시간 남는 김에 이 파일좀 봐야겠다.'
도훈은 공항 내 편의점에서 OTG변환 젠더를 구매해 핸드폰으로 USB파일을 열었다. 해당 내용은 PDF로 깔끔하게 편집되어 있어서 폰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흐음. 제주지부 학살 사건이라. 파일 제목 하고는.'
[앞에 숫자는 무슨 뜻일까요?]
'아마도 사건이 일어난 년도와 사건 번호 같은 건가봐. 2년전에 벌어졌고 당시 번호로 242번째 사건이라는 뜻이겠지.'
[오호, 역시 주인님은 똑똑하시군요.]
'이게 뭐라고? 파일을 정리하는 방식이 경찰이랑 유사한 것 같아.'
[경찰이요?]
'응. 미호의 말대로 거대한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해서 전국의 모든 지부의 단원들이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도록 케이스를 정리하는 거지. 그래야 유사 사건이 벌어졌을 때 참조할 수 있을 테니까.'
[나름 체계가 있는 집단이었군요. PK단은.]
'수백년 동안 플레이어를 찾다보니, 현대에 이르러 일종의 수사기관 형식으로 변모한 것 같아. 전국단위 지부라는 점조직 방식이나, 윗선을 알 수 없도록 조직의 규모를 노출시키지 않는 점, 그리고 특임대라는 존재만 봐도 전형적인 특수 수사대 같은 느낌이야.'
도훈은 깔끔하게 정리된 파일을 훑으며, 전문적으로 사건 케이 스를 정리하는 인력이 별도로 존재함을 깨달았다. 육하원칙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내용은, 굉장한 디테일과 증거들로 가득했다.
'난 이제껏 놈들이 마구잡이로 플레이어를 사냥한다고 생각했는데, 사건마다 이런식으로 상세한 기록을 남겨놨다면 정말로 무시무시한 집단이겠어.'
[그만큼 조심하셔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도훈이 대합실 의자에 앉아 말없이 폰을 들여다 보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
"네?"
고개를 들어보니 젊고 예쁜 묘령의 아가씨였다.
"죄송한데 혹시 핸드폰 한 번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여자가 난처한 표정으로 도훈에게 사정했다.
행색을 보니 남자친구와 여행이라도 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쌀쌀해진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어깨가 파인 나시티를 걸치고 있었는데, 양손엔 짐이 하나도 없는 모습이 여행객 치고는 너무나 가벼워 보였다.
"제 폰을요?"
도훈은 미호의 경고가 떠올랐는지 평소와 달리 방어적인 태도였다. 일반인으로 위장한 PK단이 언제 쫓아와 기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죄송해요. 제가 잠깐 화장실 가느라고 친구랑 헤어졌는데, 친구가 제 옷이랑 가방을 다 들고 어디로 사라져 버렸거든요. 제 폰도 가방에 있어가지고."
여자의 사정을 모두 들은 도훈이었지만, 혹시나 PK단의 끄나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선뜻 폰을 건네기를 망설였다.
'왜 하필 나지?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주인님이 잘 빌려주게 생겼나 보죠.]
'미호 말을 듣고 나서 인지, 말 거는 사람 하나하나가 괜히 의심스럽단 말이야.'
[너무 걱정 마십시오. 설마 이 시간에 공항까지 쫓아왔으려고요.]
'그렇겠지?'
도훈이 마지못해 폰을 내밀자, 여자가 감사하다는 듯 꾸벅 감사를 표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금방 통화한 번만 할게요."
여자가 도훈의 폰으로 전화를 거는데, 도훈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여자를 계속 감시했다. 그때 뒤에서 캐리어를 잔뜩 실은 카트를 밀고 또다른 여자가 다가왔다.
"리나야? 거기서 뭐해?"
"귤희야! 너 말도 없이 어디갔었어! 없어진 줄 알고 한참 찾았잖아!"
리나라고 불린 여자는 잃어버린 엄마를 찾은 아이처럼 울먹이는 목소리로 친구에게 투정했다.
"아니 난 면세점 가서 담배···."
"죄송해요. 친구 찾았네요. 여기 폰요."
"네."
도훈은 다시 폰을 받아들고선 아무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PK단의 내부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훈의 근처에 자릴 잡은 두 여자가 자기 얘기를 하는 통에 영 집중 할 수 없었다.
제딴에는 몰래 속삭인다고 목소리를 낮춰서 중얼거렸지만, 도훈의 예민한 청각에 모두 들렸기 때문이었다.
-담배는 왜? 아까 편의점 들러서 사지 않았어?
-한 갑으로 어떻게 제주도에서 일주일을 버티니? 한 보루는 사가야지. 근데 담배 파는 면세점이 저 끝에 있더라고. 너 화장실 있는 동안 금방 다녀오려고 했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
-기집애. 내 가방에 폰이 있는데, 가방 째 들고가면 내가 어떻게 연락하라고.
-미안 리나야. 근데 아까 잘생긴 오빠는 누구야? 설마 헌팅 당했니?
-뭐래? 너 잊어 버린 줄 알고 급하게 폰 빌려서 전화하려고 한 거야.
-진짜? 대박. 그럼 내 폰에 남은 부재중 번호가 저 잘생긴 오빠번호라는 거지?
대화를 몰래 엿듣던 도훈은 움찔 놀라고 말았다.
PK단을 피해 제주도로 대피하는 와중에 괜히 모르는 사람에게 폰 번호만 노출한 꼴이었다.
'에이씨, 전화가 걸렸었나 보네. 못 걸고 끊은 줄 알았더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갑자기 가서 번호를 지워달라고 하는 것도 좀 웃기잖아.'
도훈이 이래저래 난처해 하고 있는데, 두 사람의 속삭이는 대화가 계속 들려왔다.
-히히, 이것도 인연인데 모르는 척 한 번 연락해봐?
-미쳤어? 귤희 너 남자친구 있잖아. 내가 다 일러버린다?
-뭐래? 3개월 사귀고 1년째 군대간 놈도 남자친구니? 그냥 환승용이지.
-환승용이라니?
-그냥, 새로운 사람 만나기 전까지 심심하니까 만나주는 거라고. 휴가 나올 때 만나만 줘도 얼마나 지극정성인데.
-허이구, 이 나쁜 계집애.
-리나 네가 나를 비난하면 안 되지. 너도 남자친구랑 일주일전에 헤어지고 홧김에 제주도 놀러가자고 한 거잖아. 가서 남자 안만날 거야?
-그, 그래도 이건 아니지.
-왜? 혹시 리나 네가 벌써 점찍어 둔 사람이야? 그럼 내가 양보하고.
-미쳤니? 무슨 처음 본 사람을···.
-그럼 왜 저 오빠한테 폰 빌렸어? 다른 사람도 많은데.
-그, 그냥 가까이 있으니까. 혼자 있기도 하고.
-근데 여자친구 있게 생기지 않았어? 깨톡에 친구추가 해서 한번 봐볼까?
조용히 보고서를 훑고 있던 도훈은 깨톡에 친구 추가를 한다는 소리에 얼른 깨톡을 열어 사진을 확인했다. 혹시나 단서를 남길만한 사진들을 모두 지우기 위해서였다.
[지금 뭐 하십니까?]
'사진 지워야겠어.'
[갑자기요?]
'그게 아니라, PK단 놈들에게 빌미를 줄만한 단서가 있으면 안되잖아. 혹시나 싶어서.' 도훈은 프로필에 올려놓은 사진을 모두 지워버렸다.
-방금 친구 목록에 떠서 확인했는데, 아무 사진도 없는데?
-진짜? 한장도?
-응. 여자친구 없나봐.
-모르지. 오히려 바람둥이들이 사진 같은 거 일부러 안 올린다니까.
-뭐야, 리나 너 관심있었네?
-아, 아니. 전 남친이 딱 그랬거든. 언젠가부터 나랑 같이 찍은 사진을 싹 다 지워버리더라고. 배경 사진 같은 것만 올려놓고.
-그럼 그때부터 바람 피웠던거야? 왜 의심 안했어?
-그냥, 학부모나 학생들이 보면 괜히 신경쓰인다고 하길래.
-참나.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 오빠 옛날부터 바람기 많다고 유명했다잖아. 어떻게 기간제로 들어가서 같은 학교 선생이랑 바람을 피우냐? 이렇게 예쁜 대학생 여친을 두고 말이야.
-됐어. 다 지난일인데 꺼내서 뭐해.
-너도 너무 바보처럼 참지말고 확 학교 찾아가서 한바탕 뒤집어 버렸어야지. 어떻게 자취방에 불러들여서···.
-그 얘긴 그만해. 이제 끝난 사이니까.
-미안. 암튼 우리 제주도가면 남자들 왕창 꼬셔버리자.
-그런 목적으로 가는 거 아니래도?
-웃기시네. 너 수영복 일부러 야한 거 샀잖아. 그거 누구 보여 주려고 샀는데?
-그, 그냥 그건··· 자기 만족이지.
-풉. 암튼 기대해도 좋아. 요새 제주도가 혼자 가면 셋이서 돌아오는 곳이라잖아.
-둘이 아니라?
-애까지 임신해서 말이야.
-미, 미쳤어. 무슨 우리 나이에.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요새 게하에 가면 남자끼리 여자끼리 놀러온 팀 엄청 많다잖아. 처음본 사람끼리 술마시다가 눈맞으면···. 알지?
-하여간 귤희 넌 너무 애가 문란해. 그런 생각만 하고.
-두고봐. 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올라타는 걸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
-난 절대 그런 목적 아니야.
"아씨, 도저히 집중 안돼서 못 읽겠네."
눈은 폰을 들고 보고서를 훑고 있지만, 두 사람의 대화가 신경쓰여 전혀 집중이 안되는 도훈이었다.
[대화를 들어보니 단순히 여대생 둘이 제주도 여행을 가는 모양입니다.]
'나도 들었어. PK단 끄나풀은 아닌 것 같으니 안심이네.'
[근데 제주도면 주인님이랑 여행지가 겹치는 것 아닙니까?]
'그거랑은 상관없지. 어차피 난 윤소미가 출현했던 곳 위주로 돌아볼테니까.'
[간만에 혼자 떠나는 여행이로군요.]
'그러게.'
도훈은 여름방학 때도 정신없이 미션과 업적을 수행하느라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었다.
여름 캠프로 해수욕장도 다녀오고, 필라테스 원장인 미나와 사이판에도 다녀왔지만 정작 쉬었다는 느낌보다 일을 하고 왔다는 생각이 강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모처럼 길게 휴가를 떠난다고 생각하십시오.]
'근데 귀가 너무 예민해도 문제네. 주변 사람들 목소리가 다 들리니까 도저히 집중이 안 되잖아.'
도훈은 대책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공항 내 잡화점으로 가서 블루투스 헤드셋을 바로 구매했다. 값비싼 브랜드의 무선 헤드셋이었지만, 노이즈 캔슬링 기능으로 주변 소음을 완벽하게 차단해준다는 말에 서슴없이 구매했다.
'진작 살 걸 그랬네.'
헤드셋을 착용한 도훈은 음악을 들으며 주변 소음으로 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그때 대합실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서서히 줄을 서기 시작했다. 비행 출발 시간 30분 전 입장이 시작된 것이었다.
도훈이 가방을 메고 줄을 서는데 그의 바로 뒤에 아까 말을 걸었던 여학생 둘이 따라 붙었다. 리나라고 불린 여학생이 도훈을 향해 배시시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까 폰 고마웠어요. 혼자 제주도 가시나 봐요?"
도훈은 괜히 그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가볍게 목례 하며 헤드셋을 쓰고 돌아 섰다. 겨우 용기를 내 아는척을 했던 리나는 민망해 하며 그 뒤론 말을 걸지 않았다.
비행기에 탑승한 도훈이 수화물칸에 가방을 밀어 넣고 창가쪽에 앉는데 하필 아까 그 여학생 두명과 나란히 한 줄로 앉게 되었다. 원래 가운데 자리였던 리나는 도훈이 불편했는지 친구인 귤희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아씨, 하필 자리도 나란히 앉을 건 뭐람.'
[이쯤 되면 질긴 인연이군요.]
'됐어. 딱 보니 바람난 남자친구한테 차인 여자애랑, 군대간 남자친구한테 권태기 느낀 둘이서 질펀하게 제주도가서 즐기고 올모양인데 괜히 껴들어서 피곤하고 싶지 않아.'
[호오, 주인님이 여자를 다 마다하고.]
'미션도 아닌데, 굳이? 저런 여자애들이야 원하면 언제든 식은 죽 먹기지.'
도훈은 아예 상대를 안 하겠다는 마음으로 헤드셋을 낀 채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훈이 하도 철벽을 치고 나오자, 리나와 귤희도 어이가 없었는지 그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곧 비행기가 이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