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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571화 (1,551/2,000)

1571. 제주도 푸른밤-1-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니까 플레이어가 떡하니 저희 앞에 나타날 거라고요? 대가리에 총 맞았답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지 창범이 발끈했다. 태홍이 그런 창범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해당 발언은 신탁을 불신한다고 해석될 요지가 있습니다만?"

태홍의 말투엔 상당한 노기가 실려 있었다. 어찌나 냉랭한지 주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 붙었다. 보다못한 대근이 수습을 위해 끼어들었다.

"불신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저 친구 말투가 원체···."

"저는 지금 지부장님한테 말한게 아닌데요?"

태홍은 여전히 무뚝뚝한 말투였다.

이제껏 예의를 갖춘 것은 모두 가식이었다는 걸 증명하듯 대근을 차갑게 쏘아붙인 그는 창범을 향해 다시 물었다.

"지금 성녀님의 신탁을 부정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창범은 숨이 막히는 압박을 느꼈다. 태홍이 분노하자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실제로도 한기를 느낀 것처럼 온 몸에 닭살이 돋았다.

'뭐, 뭐야? 이건.'

같은 마도사인 미호는 태홍이 지금 빙결 오러를 뿜어대는 걸 알아챘다.

'설마 서리한?'

서리한은 빙결계 마도사가 지닌 호신강기의 일종이었다. 감정에 따라 오러가 자동으로 발동되는데, 지금처럼 흥분하거나 노기를 띄게 되면 주변의 공기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며 한기를 뿜어댄다. 급박한 상황에선 반경 30미터 안으로 서리가 맺힐 정도로 강력한 호신강기이다.

"태홍."

임시연이 태홍을 만류했지만, 태홍은 창범이 발언을 철회하기 전까지 압박을 멈추지 않을것처럼 보였다. 창범은 어쩔 수 없이 사과를 표했다.

"···제가 말 실수 했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창범이 꼬리를 내리자 그제야 태홍이 서리한을 거두었는지 차갑게 퍼져나가던 빙결의 기운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다들 놀랐지만 마도사인 미호는 태홍의 능력에 큰 충격을 받았다.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인물이구나! 내 도깨비불로는 어림도 없겠어.'

마도사들은 오행의 기운을 바탕으로 계열이 결정된다. 미호는화 속성의 마도사였고, 태홍은 수 속성이었다. 오행에 따르면 각각의 다섯 속성은 서로 물고 물리는 상성을 갖게 되는데, 화 속성의 상극은 바로 수 속성이었다. 안 그래도 도력의 차이마저 나는 데, 속성까지 상극인 태홍은 미호에겐 천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도훈이가 저 괴물에게 발각되는 순간 끝장이야. 내가 도와줘도 상대도 안 될 거야.'

태홍이 다시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껏 보이던 가식을 벗어던진 그는 처음보다 훨씬 오만한 인상으로 보였다.

"아시겠지만, 성녀님의 신탁은 절대적입니다. 늘 믿음을 가지 셔야 합니다. 불신은 곧 배신이니까요."

"크흠."

대근은 점점 노골적으로 태도가 바뀌는 태홍이 불편했다.

하지만 조직의 위계에 따르면 특임대의 조장인 태홍은 자신의상급자나 마찬가지였기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수 없었다.

각자의 임무를 나누고 회의를 마친 PK단원들은 호텔 회동을 마무리하고 헤어졌다.

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보조석에 앉은 창범이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손잡이를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씨발, 좆같은 새끼 진짜. 누굴 협박하고 있어?"

"야이 새끼야! 애꿎은 내 차에 왜 화풀이야!"

"어차피 똥차 내년에 바꾼다면서요?"

"아직 몰라 인마. 퍼질때까진 타야지."

"사고 날까봐 인천까지도 왕복 못하는 고물차를 무슨···."

"그러는 너는 차는 있고? 뚜벅이 새끼가 오너 드라이버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내가 가난하고 싶어서 가난해요? 씨발 진짜 본부 새끼들은 파견을 나와도 호텔에서 지내고, 우린 무슨 숙박비 영수증 하나 제대로 끊어주지도 않고."

"···창범아."

"왜요?"

"잘 참았다."

"좆 같아요 진짜. 아니 무슨 묻지도 못하게."

"특임대 조장이라는 놈 실력 봤잖아. 우리가 상대할 레벨이 아니야."

"아주 깡패 새끼더만요? 특임대면 특임대지 지들이 무슨 상전인냥, 우리한테 이래라 저래라. 확 그냥 자살시켜 버릴까 보다."

"미친 놈. 또 선 넘네."

"제가 못 할거 같아요? 그 새끼 창문으로 돌진해서 뛰어내리게 하는 거 아무 것도 아니에요."

"뒷감당은 할 순 있냐?"

"지가 스스로 자살한 건데 제가 왜 뒷감당을 해요?"

뒷 좌석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미호가 끼어들었다.

"안 통해."

"뭐?"

"정신조작 같은 거 안 통한다고. 태홍에게는."

"무슨 소리야? 지가 무슨 매그니토 헬멧을 쓴 것도 아니고."

매그니토 헬멧이란 X-MAN에 나오는 캐릭터가 정신 조작을 막기 위해 고안한 물건이었다. 특정 아이템이나 스킬을 이용하면 정신 조작을 방어할 수 있는데, 태홍에게는 그러한 장비가 없다는 뜻이었다.

"놈의 호신강기 때문이야."

"호신강기?"

"아까 봤지? 사방의 공기를 얼어 붙게 만드는 거. 그게 서리한이야."

"그거랑 정신조작이랑 무슨 상관인데?"

"서리한 오러의 특징이 정신공격 면역이거든."

"헐? 진짜로?"

"그래. 그러니까 혈기만 믿고 괜히 까불지마. 거기 있는 인물중에 네 정신 공격이 통할 상대는 한명도 없을테니까."

"그 여자도?"

"네 생각이 도달하기도 전에 창범이 네 목이 날아갈걸?"

임시연의 순간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날아오는 야구공의 실밥을 셀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감히 상상이 가지 않는 가속능력이었다.

"미스터 엑스는?"

"보이지 않는데 뭔 수로?"

"젠장. 거지같네 진짜. 미호도 안 돼?"

"나랑 대장이랑 합세 하면 한 명을 겨우 상대할까 말까야. 그마저도 태홍에게는 어림도 없을 거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대근이 타이르듯 말했다.

"왜 이래 이거? 누가 보면 플레이어랑 붙는 줄 알겠네. 둘 다 정신차려. 특임대는 우리편이라고. 싸울 생각 말고 협조할 생각을 해야지."

"대장은 배알도 안 꼴려요?"

"뭐 인마?"

"애 새끼가 말하는 싸가지가 아주 좆같더만. 사람을 졸로 보고."

"끄응. 넌 굳이 그걸···."

"태홍이 그러는 것도 이해가 가."

"무슨 소리야 미호는? 같은 마도사라고 놈 편 드는거 아니지?"

"마도사이기 이전에 태홍은 전생자야."

"그래서?"

"몇번을 다시 태어났을지 모른다는 거지. 수백년의 기억을 가진 채 환생했다면 겉모습과 달리 실제론 수백살일지도 모른다는 소리야. 그런 정신연령을 가진 사람에게 우리가 얼마나 어려 보이겠어?"

"근데 미호도 비슷한 거 아니야? 실제론 할망구잖아?"

"뒤지게 처맞고 싶니?"

"항복."

창범은 아까와 달리 금방 꼬리를 내렸다.

특임대와의 만남은 썩 유쾌하지 않았지만, 셋이 차안에서 떠드는 동안 어느새 기분 나쁜 감정은 어느정도 해소될 수 있었다.

대근이 정리하듯 말했다.

"암튼, 우린 그냥 적당히 협조만 해주자고. 어차피 놈들도 우릴 그냥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하는 것 같은데, 까짓거 보릿자루 한 번 해주지 뭐."

"그래요. 말하는 싸가지가 영 마음에 안들어서 난 그냥 태업하려고요. 미호도 도와주지마."

"으, 응."

미호는 도와주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배신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 * *

"···그렇게 3명이 온 거 같아. 능력은 방금 설명했듯이 하나같이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들이야. 그중에서도 특히 조장인 태홍을 조심해야 해."

"음, 놈이 그렇게 강하다고? 미호인 너랑 비교해도?"

"난 특성상 놈에겐 상극이야."

"상극이라니?"

"내 천적이라고. 화속성이 수속성 계열을 이기려면 두배의 공력이 필요해. 뜨거운 불로 물을 모두 증발시키려면 말이지."

"참나. 별 놈이 다 있네."

"아무튼 몸 조심해. 놈들을 만나면 내가 도와주고 싶어도 도움이 안될 만큼 강한 놈들이니까."

"알았어. 고마워."

"아마 조금만 버티면 될 거야."

"그건 무슨 소리야?"

"신탁에 따르면 대적자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했거든."

"내가 왜?"

"무슨 소리야? 도훈이 네가 왜 대적자야."

"내가 여기 사는 플레이어잖아. 신탁에선 여기서 대적자가 나타난다고 했고. 그럼 나 말하는 거 아니야?"

미호는 자기도 모르게 빵 터졌는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소리야 대체! 대적자가 이곳에 나타난다는 거지, 여기 살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잖아."

"으잉?"

"그리고, 막말로 아직 고수도 못 된 네가 무슨 대적자라는 거야? 능력도 이상한 것만 잔뜩 있으면서."

"그럼 내가 목표가 아니었다고?"

"꿈도 크네. 아무튼 사태가 잠잠해 질때까지 조용히 집에만 숨어 있어. 내가 전달할 내용이 생기면 아까 준 대포폰으로 연락할 테니까. 암튼 난 이만."

할 말만 전한 미호는 담벼락을 훌쩍 뛰어넘더니 사라져버렸다.

집에 홀로 남겨진 도훈은 거울을 보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놈이 찾는 대적자가 내가 아니었다는 거야 그럼?"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미호의 의견은 아니라는 쪽이지만요.]

'뭐, 그럼 나야 다행이지. 내가 타깃이 아니라는 것만 해도 한숨돌린 기분이니까.'

갑작스러운 특임대의 등장에 강제 칩거에 들어가게된 도훈은 어떻게 해야 출결을 보완할 수 있을 지 고민했다.

'그나저나 등교가 당장 내일인데 이것참 난감해졌네.'

[출석 좀 빠진다고 별 문제 있을까요? 학점이야 시험만 잘봐도 잘 나오는 거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너무 많이 빠지면 출결일수에서 감점을 당한단 말이지. 이게 일주일이 될지 한달이 될지 알수가 없으니까.'

[흐음. 무단 결석만 아니면 되지 않습니까?]

'불가피한 공식적 핑계를 대자는 거야?'

[네. 이럴때만 찾는 것 같아서 그렇긴 한데, 미국에 계신 부모님 찬스를 쓰는 수밖에요.]

'미국?'

[네. 미국에 계신 부모님이 위독해져 급히 출국한다는 핑계를 대면 되죠.]

'그러니까 병간호 같은 건가?'

[그게 제일 좋지 않을까요?]

'흐음. 대충 왕복 시간 계산하면 최소 2주일은 벌 수 있겠구나.'

[또한 더 좋은 것은 진짜로 미국으로 넘어가시는 겁니다.]

'미국으로?'

[특임대가 받은 계시는 이곳에서 대적자를 만날거라는 것이었으니까요. 주인님이 다른 곳으로 대피해있으면 더더욱 놈들과 만날 일은 없다는 뜻이 아닐까요?]

'오, 괜찮은데? 근데 진짜로 미국으로 날아가는 건 좀.'

[미국이 아니라 다른곳이라도 어쨌든 멀리 달아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다면···.'

도훈은 곰곰이 생각했다. 어설프게 서울 인근이나 경기도로는 불안하니 확실한 건 비행기를 타고 날라야 했다. 하지만 외국으로 넘어가는 건 너무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었다.

'제주도는 어때?'

[제주도요?]

'윤보민가 윤소민가 하는 플레이어 말이야. 마지막으로 목격된 위치가 제주도라고 했잖아.'

[그래서요?]

'어차피 놀러 가는 김에 플레이어 흔적이나 찾아보자는 거지.'

[벌써 2년도 전의 사건입니다.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까요?]

'혹시 모르잖아. 탈출 방법을 알아낼 수도 있으니까.'

생각이 거기에 미친 도훈은 방금 전 헤어진 미호에게 연락했다.

본부의 도청을 우려하는 그녀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대포폰을 건네주었기 때문에 편하게 통화할 수 있는 상태였다.

"나야, 미호."

-뭐야? 방금 헤어져 놓고 왜 또 전화야?"

"혹시 PK단에서 추적했다는 윤소미에 대한 정보 좀 얻을 수 있을까?"

-그게 무슨 말이야?"

도훈이 핑계를 댔다.

"그냥 개인적인 궁금증이 생겨서. 아까 네가 봤던 여자애가 애타게 찾고 있거든."

-별걸 다 궁금해 하네.

"해줄 수 있지?"

-워낙에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본부 데이터베이스에 관련 자료가 남아있긴 할 거야. 기다려봐 알아보고 연락줄게.

통화를 마친 도훈은 곧바로 조교인 강민주에게 연락했다.

이럴때만 그녀를 이용할 것 같아서 미안하긴 했지만, 결석 사유를 확실히 만들어 놓기 위해선 그녀에게 도움을 청할 수 밖에 없었다.

도훈의 사정을 들은 민주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급하게 미국으로 가야 한다니 제가 잘 말해 놓을 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금방 쾌차하실 수 있을 거예요.

"번번이 미안해."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무튼 출결은 신경쓰지 말고 충분히 간호해 드리고 오세요.

"그래. 고마워."

민주와 통화를 마친 도훈은 여행 채비를 시작했다.

처음엔 트렁크에 이것저것 챙기다가, 나중에는 귀찮아 졌는지 백팩 하나에 필수품만 집어 넣었다.

'생각해보니 짐을 굳이 쌀 필요도 없겠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데 짐을 더 챙기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 그냥 필요하면 현지에서 사버리면 되잖아. 옷이든 속옷이든. 돈도 많은데 무슨 짐을 바리바리 싸갈 필요가 있을까?'

[부자라 그건 좋군요.]

'그렇지.'

대충 짐을 싸고 밤늦게 급히 집을 나갈 채비를 하는데 미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자료 찾았어. 이메일로 보내면 위험해서 USB로 가져다 줄게.

"내가 지금 갈테니까 어디있는지 알려줘."

-집에서 나오지 말라니까? 놈들이 수색을 시작했어. 밖은 너무 위험해.

"걱정마. 그것 때문에 그냥 서울을 떠날 작정으로 나가는 거니까."

-서울을 떠난다고? 어디로 가게?

"왜? 미호도 같이 갈래?"

-아니. 난 여기 남아서 특임대를 보조해야해. 내가 사라지면 오히려 놈들이 의심할 거야.

"그렇구나. 암튼 좀이따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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