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0. 정체불명의 그녀-55-
"본부 놈들은 돈도 많은가 보네. 모텔도 아니고 호텔에 임시 숙소를 잡다니."
창범은 고개를 완전히 젖혀도 꼭대기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호텔의 높이를 보고 비아냥 거렸다.
"창범이 넌 그 말투부터 좀 고쳐라. 뭐든 왜 그렇게 삐딱하게만 보는 거야?"
대근이 창범을 나무랐다.
"아니 그렇잖수? 말단 직원들은 생계도 유지 안 될 정도로 쥐꼬리 만큼 월급 주면서 정작 본부 놈들은 파견 나오면 호텔에 숙박을 한다는 게."
"그렇다고 간부급 인물들이 싸구려 모텔에 있는 것도 이상하잖아. 우리 조직이 무슨 3류 단체도 아니고 말이야."
"하여간 대장은 속편한 소리만 하네. 난 말이유, 옛날부터 그게 의심스럽더라고."
"뭐가?"
"우리 본부는 대체 무슨 수로 수익을 내서 직원들 쥐꼬리 같은 월급을 꼬박꼬박 챙겨주는 지 말이유. 막말로 우리가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는 단체도 아닐 뿐더러, 플레이어 사냥에 힘쓴다고 기부금을 받는 것도 아닌데."
"뭘 그런걸 꼬치꼬치 따지고 있어? 그런 일이야 본부에서 알아서 하는 거지."
창범은 대근의 대답이 시원치 않은지 꼭 한마디 덧붙였다.
"어쩌면 본부놈들은 우리 능력을 돈벌이에 쓰지 않는가하는 의문이 들어서요."
"뭐라고?"
"그렇잖수. 우리의 능력은 사적인 일에 못 쓰게 철저하게 통제해놓고 자기들은 마음껏 쓰는 거지."
"허튼 소리 마라. 본부 사람들 귀에 들어갔다간 아주 큰 일날소리구나."
"옛날부터 내려오는 유명한 경구가 있잖아요. 감시자들은 누가 감시하는가? 안 그래요? 미호도 얘기 좀 해봐. 나만 이상해? 이상황이?"
하지만 그들과 함께 온 미호는 유난히 말이 없이 묵묵히 둘의 대화만 듣고 있었다.
미호가 꾹 입을 다물고 있자 창범이 다시 물었다.
"뭐야. 갑자기 묵언 수행이라도 하는 거야?"
"오늘은 네놈과 말 섞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어쭈? 이 말투 뭐지? 이번엔 또 누군데? 세나? 요나? 까칠한 거 보니까 두난가?"
"···닥치라니까?"
미호가 정색하며 노려보자 창범도 머쓱해져서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한마디 덧붙이는 건 잊지 않았다.
"거 오늘따라 겁나게 까칠하네. 한대 치겠어 아주."
"창범아. 네 놈이 오늘 아주 매를 버는 구나. 미호씨 오늘 저기 압인거 같으니까 까불지 말고."
호텔 프런트에 도착한 세 사람은 어제 태홍이 알려주고 간 호실을 말했다. 프런트 직원이 객실로 연락을 하더니, 세 사람을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10층, 복도 맨 끝방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미호는 자기도 모르게 손톱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후우. 떨려 죽겠네.}
{창범이 저놈은 왜 맨날 저렇게 깐족거려?}
{맨날 오냐오냐 받아주니까 어린놈이 겁을 상실해서 그렇다니까? 확 그냥 날잡아서 패버려야 했는데.}
{왜 그래? 창범이가 말만 그렇지 얼마나 미호를 아끼는 지 알면서. 제딴엔 긴장을 풀려고 그런 거잖아.}
{그나저나 다들 정신 바짝 차려. 미호가 플레이어인 도훈과 내 통한 걸 특임대가 알게 되면 오늘 밤이 우리 제삿날이 될테니까.}
{설마 미호의 속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자가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능력자에 대한 정보는 없었잖아. 의심받을 행동만 안하면 문제 없을거야.}
미호의 몸속에 깃든 영혼들은 저마다 의견을 내고 있었다. 동시에 9명이 머릿속에서 떠들다보니 미호의 머릿속은 터질것 처럼 복잡했다.
띵-
10층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신호음에 대근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긴장할 필요없어. 어차피 이번 임무에서 우린 보조일 뿐이니까. 그냥 협조만 잘해주면 끝날 일이야."
"긴장은 무슨. 대장 긴장했어요? 난 그냥 특임대로 뽑힌 놈들이 얼마나 잘났는지 궁금할 뿐인데?"
"···누가 마중을 나온 것 같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미호가 먼저 말했다.
텅 빈 공간에 대고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자 창범이 소름이 돋았는지 팔뚝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왜요? 귀신이라도 봤어요? 미호가 그런말 하니까 진짜 같잖아."
"농담하는 거 아니야. 앞에 있어."
"으응?"
대근이 상황을 파악하고 텅 빈 공간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지부장 조대근입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갑자기 중절모 하나가 두둥실 떠올랐다. 떠올랐다기 보다는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났는데, 모자가 떠 있는 높이를 보건데 175 정도의 키 높이로 보였다.
"투, 투명인간! 미스터 엑스?"
"무례를 용서 하십시오. 방문자를 확인하는 게 제 역할이라."
중절모 주변에서 기계음 섞인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자 창범이 움찔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으앗! 진짜로 있었네?"
"숙녀분이 그 유명한 미호씨 맞죠? 제 기척을 죽이고 있었는 데, 바로 알아채시다니 정말 소문대로 뛰어난 능력자시군요."
미호는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후각이 남보다 예민해서요."
"이런. 상상도 못했군요. 늘 무색무취로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어디 있는지는 몰랐어요. 누군가 있다는 것만 알았지."
"하하. 그래도 제 은신을 알아차리신 분은 몇년 만에 처음 봅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미스터 엑스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모자만 떠올라 있던 허공에 레인코트를 입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중절모 아래론 레이밴선글라스와 검은 마스크가, 신발은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롱부 츠를 신고 있었다. 가죽 장갑까지 끼고 있어 맨살은 전혀 드러나지 않았는데, 마스크와 선글라스 사이에 빈 공간은 뻥 뚫려있어, 여전히 투명인간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본부 특임대 소속 미스터 엑스라고 합니다. 편하게 엑스라고 불러주시길."
"존함은 익히 들었습니다. 만나봬서 영광입니다."
대근이 대표로 악수를 건네자 가죽 장갑을 낀 엑스가 악수를 받았다. 투명인간의 손을 처음 잡아본 대근은 유령과 악수를 나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놀랍구나. 몸에 닿는 물건은 모두 투명화 시킬 수 있다고 하더니,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것인가?'
악수를 마친 엑스가 앞장서서 방으로 안내했다.
"절 따라 오시죠."
"어? 안내 데스크에선 복도 끝방이라던데요?"
"아, 거긴 시연의 방입니다. 방을 두개 잡아서요."
어제 먼저 방문한 태홍과 미스터 엑스는 남자, 임시연은 여자였기 때문에 각기 방을 나눠 잡은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비싼 숙소에 묵는다고 불만이 가득하던 창범은 방을 두개나 잡았다는 소리에 속으로 또 코웃음을 쳤다.
'쳇. 나랑 미호는 숙소 잡을 돈도 없어서 일본에서도 혼숙했는데 말이야.'
그때 미호의 전음이 날아들어다.
<얼굴에 싫은 감정 드러내지 마. 다 티나니까.>
<미호?>
<그래. 대장 괜히 곤란하게 만들지 말고, 잠자코 있어. 부탁이니까.>
<쳇. 오늘따라 둘다 나한테 더럽게 뭐라고 그러네.>
<창범이 네가 본부에 불만이 많은 건 아는데, 그렇다고 특임대에 그걸 따져봐야 서로 좋을 게 없다는 거야.>
<알았다고.>
엑스가 다른 룸의 문을 열자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태홍과 시연이 앞까지 마중을 나와 대근 일행을 반겼다.
"오셨군요.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대근은 여전히 휑한 정수리를 드러내며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지부장 조대근입니다."
위계에 따르면 본부 소속의 특임대는 지부장보다 상급자였다.
하지만 그들은 나이가 많은 대근이 불편하지 않도록 먼저 존댓말로 예의를 차렸고, 대근도 이를 알고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는 것이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지부장님 소식은 가끔 본부에서 들었어요."
"제 소식을요?"
대근이 놀라서 되물었다.
임시연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잘 모르시겠지만, 본부에 있다보면 전국 각지의 소식이 모두 들어온답니다. 지부장님 활약이 대단하시던데요? 얼마전 인천에 파견도 가셨었죠?"
대근은 예의상 한 말인 줄 알았으나, 시연이 가장 최근의 인천파견까지 알고 있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정말로 다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이어서 시연은 창범을 보며 말했다.
"창범씨는 마인드 리딩 능력자시죠? 제 속마음은 들여다 보지 마세요. 창피하니까요."
"으, 음. 플레이어를 상대할 때가 아니면 능력을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창범은 시연의 앞에서 말을 더듬거렸는데, 다른 게 아니라 시연이 보기드문 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스크린을 막 찢고 나온 것처럼 연예인을 닮은 빼어난 외모는, 당장 연예계에 진출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굉장한 미모를 자랑했다.
'세상에. 저런 얼굴로 뭣하러 PK단을 하고 있담? 그냥 얼굴만 뜯어 먹고 살아도 팔자 늘어지겠는데.'
한낱 PC방 알바인 조소연만 해도 얼짱 알바라는 소문이 돌면서 손님들이 줄을 서는 세상이다. 외모지상주의의 씁쓸한 일면이긴 하지만, 특임대 임시연의 외모는 소연의 존재를 순간 삭제시킬 정도로 빼어난 편이었다.
"이런, 저희가 경우없게 손님을 입구에 세워놓았네요. 안으로 드시죠."
대근 일행은 시연의 안내를 받아 호텔방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이라고 해서 침대가 딸린 호사스러운 분위기를 예상했던 창범은 전혀 다른 내부의 모습에 당황하고 말았다.
'뭐야? 방을 완전히 개조해놨잖아?'
특임대가 묵는 호텔방은 이전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무실 책상과 스탠드형 화이트 보드. 그리고 노트북과 서류가 잔뜩 쌓인 모습은 마치 형사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수사본부와 같은 느낌이 물씬 났다.
실제로 화이트 보드에는 여러 서류와 사진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었는데, 하루만에 상당한 자료를 수집한 모습이었다.
"방이 원래 이렇게 생기진 않았죠?"
"네. 프런트에 양해를 구하고 내부를 좀 변경했습니다. 퇴실할 때 전부 원상복구해주는 조건으로요."
"아···."
창범이 또 똥씹은 표정이 되자 대근이 얼른 끼어 들었다.
"맞다. 말씀하신 자료는 모두 챙겨왔습니다. 지난 5년간 저희 지부에서 관리한 플레이어 자료입니다."
대근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 가방을 건넸다. 가방 안에는 저녁내내 피시방 프린터로 뽑은 자료들이 담겨 있었다.
"감사합니다. 잠시 테이블에 앉으실까요?"
특임대의 대장인 태홍은 모두를 착석 시킨 뒤 바닥에 놓인 지도를 펼쳐 작전 브리핑을 시작했다.
"이번 임무는 성녀님의 계시로 시작된 것으로···."
아까부터 말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던 미호는 천천히 눈을 굴리며 특임대로 파견나온 세 사람을 눈여겨 보았다.
'저 자가 태홍이구나. PK단 최고의 마도사라는.'
미호는 자연스럽게 태홍에 주목할 수 밖에 없었다.
미스터 엑스나 연예인처럼 예쁜 임시연도 존재감이 상당했지만, 기운을 감추지 않고 사방으로 뿜어대는 태홍에 비할바는 아니었다.
실제로 미호는 태홍의 강력한 기운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 정도였다.
'굉장한 사내다. 대체 어떻게 어린 나이에 저런 도력이···.'
전생자라는 소문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태홍은 감히 예측할 수 없는 수준의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미호는 그가 도훈을 발견하면 1분도 걸리지 않고 단숨에 제압할 것으로 보았다.
'엄청난 자로구나. PK단 최고의 마도사라는 게 허언이 아니었어. 뛰어난 단원들을 많이 봐왔지만 저렇게 압도적인 사람은 처음이야.'
미호는 이번엔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미스터 엑스를 쳐다보았다.
'투명인간은 능력을 예측할 수 없겠어. 단순히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능력의 전부는 아닐거야. 분명 뭔가 숨기고 있어. 그게 뭐든 미리 알아내야 해.'
태홍이 설명을 이어가는 동안 미호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처리하며 이번엔 임시연을 쳐다보았다.
'쓸데없이 예쁘게 생겨가지고 신경쓰이네.'
미호는 능력에 대한 궁금증보다 임시연의 놀라운 외모가 거슬렸다. 바람둥이인 도훈이 본다면 꼬시려고 안달이 날 만큼 빼어난 외모였다.
'제주지부 지역장 출신이라고 했지? 타고난 능력으로 초고속승진을 했구나.'
태홍이 등장하면서 빛을 바래긴 했지만, 임시연 역시 이례적으로 빠르게 간부급에 오른 인물이었다. 혹자는 그녀의 타고난 스피드만큼 빠른 승진이라고까지 했다.
"저, 근데 성녀님께서 보셨다는 인물이 남자인가요 여자인가요?"
"네?"
창범이 그새를 못 참고 브리핑 중인 태홍에게 질문했다.
"아니, 찾는 상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알아야 저희도 수색을 시작할 수 있을것 같아서요."
미호도 궁금했던 부분이었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태홍의 대답을 기다렸다. 태홍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글쎄요. 신탁에 대적자의 성별에 대한 언급은 따로 없으셨습니다."
"아니 그럼 상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몇 살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수색을 해야 한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아니 무슨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도 아니고."
창범이 또 삐딱해지자 대근이 주의를 주었다.
"인마. 넌 무슨···."
"아, 한가지 아는 건 있습니다."
태홍이 다시 말했다.
"성녀님이 신탁을 받은 내용 중에서 중요한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게 뭐죠?"
"그런 게 있었어?"
같은 특임대인 임시연도 몰랐다는 듯 태홍에게 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태홍이 성녀가 전해준 신탁을 전했다.
"대적자는 우리가 찾지 않아도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