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4. 정체불명의 그녀-49-
"넌 왜 밖에 나와 있어?"
도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기별도 없이 찾아온 미호가 불청객임을 어필하는 말투였다.
"불쾌한 냄새가 온 집 안에 진동해서 말이지. 환기는 좀 시키지 그랬어?"
"내 집인데 뭐 어때?"
"언제는 교수님 집이라며? 대체 무슨 작당을 벌이는 거야?"
"상관할 바 없잖아. 용건만 말하고 가."
"참나."
미호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손을 내밀었다.
"나도 한 대 줘."
"뭘?"
"담배. 말했잖아. 난 후각이 예민하다고."
"나한테 맡겨놨냐? 그리고 왜 다짜고짜 반말이야?"
"아직 눈치 못 챘나 본데, 난 미호가 아니거든. 너한테 존댓말을 할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
그제야 도훈이 미호를 눈여겨 보았다. 눈동자 색으로 구분되는 미호는 평소와 달리 푸르스름한 빛을 띄고 있었다.
"누구야 너?"
"두나."
"두나는 또 누구야?"
"그새 까먹었어? 담배나 달라고."
도훈은 뻔뻔한 두나의 태도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담배를 내밀었다. 두나에 빙의한 미호가 방금 전 도훈이 했던 것처럼 허공에 불꽃을 일으키더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다만 도훈이 일으킨 것과 달리 푸른색의 불길이었다.
"색깔은 왜 또 파래? 무슨 가스레인지야?"
"멍청하긴. 이건 도깨비불이라는 거야."
"멍청하다고?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됐고. 나도 여기 오래 있을 생각없으니까 용건부터 말할게."
순종적인 미호와 달리 두나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거칠고, 반항적이고 심지어 도훈을 약간 멸시하는 태도였다.
"당분간 아무것도 하지 마. 절대 눈에 띄는 행동 삼가고."
"뭐라고?"
"그 말 전하려고 온 거야."
"다짜고짜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겨우 그 거 전하려고 왔다고?"
"나도 네가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없거든? 근데 미호가 꼭 알려야 한다고 해서 내가 대신 온 거야."
"네가 미호잖아."
"난 두나라고."
"어차피 같은 사람이잖아!"
"전혀 달라. 암튼 내 말 알아들었지?"
"아니, 이유는 설명해 줘야 할 거 아니야?"
두나가 담배 연기를 도훈의 얼굴에 훅 뱉으며 대답했다.
"정말이지 귀찮은 녀석이군. 이래서 챙겨 줄 필요가 없다고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자꾸 혼자 뭐라고 떠드는 거야?"
"상부에서 우리 지부로 특임대를 파견했어."
"특임대라거?"
"예언자가 이곳에서 불길한 기운을 감지했다더라고."
"예언자는 또 누군데?"
"본래 그렇게 질문이 많은 타입이야?"
"내가 묻는 말에만 성실하게 대답해줬으면 좋겠는데?"
"난 네 부하가 아니야. 나한테 명령하지 마."
"와씨, 진짜. 말이 안 통하네. 그냥 미호 바꿔."
"군령자가 무슨 전화교환원인 줄 알아? ···아니 자꾸 짜증나게 굴잖아. 됐어, 내가 전달하면 그만이야."
"대체 누구랑 얘기하는 거야?"
"알 것 없어. 암튼 조심하라고. 난 상관없는데, 미호는 네가 뒤지면 슬퍼할 테니까."
도훈은 대화에 답답함을 느꼈다. 두나는 말투도 반항적이지만, 너무나 투박하고 불친절한 타입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싫어하는 감정을 너무 드러냈다.
'말하는 싸가지 좀 봐. 확 그냥 한 대 패주고 싶네.'
[주인님이 태도를 바꾸시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만.]
'뭐라고? 내가 뭐가 꿀려서? 겉만 사람이지 사실 짐승이잖아.
동물한테 굽신거려야 하나?'
[얄밉긴 하지만 두나라는 분의 말이 맞습니다. 동물 친화에 예속된 것은 미호지, 그녀에 속해있는 혼령들은 아니거든요. 그들은 주인님의 부하도 아닐뿐더러, 약간 적대하는 느낌도 있습니다. 주인님이 강압적인 태도를 보일수록 그들에게 반감만 살뿐입니다.
미호를 한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흠. 진짜로 짜증나네.'
도훈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답답한 대화를 이어가느니 비위를 맞추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알았어 미안. 나도 중간에 훼방 받아서 짜증나서 그랬어."
"무슨 짐승도 아니고···. 대체 얼마나 떡을 쳐댔길래 방안에 냄새가 진동을 한담? 적당히 좀 하지?"
"말했지만, 단순한 비즈니스였어. 내가 독특한 클래스의 플레이어라는 건 알고 있잖아."
"그래서 순진한 대학생 꼬셔서 사기를 치고 계셨어?"
"설명하기 복잡해."
"내 알 바 아냐."
"특임대가 뭔지 자세히 좀 설명해 줘. 예언자는 또 뭔데?"
두나는 꼬치꼬치 물어오는 도훈이 귀찮았지만, 설명을 안해주면 계속 피곤하게 할 것 같았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두나의 설명에 따르면 PK단에는 '예언자'라 불리는 단원이 있다고 한다. 조직 내에서도 상당히 높은 계급에 속하는 인물로 '성녀'라고 불린다고 했다.
"왜 근데 성녀야?"
"신탁을 받거든."
"신이라니? PK단이 신을 모시나? 신은 우리편인데?"
"무슨 소리야? 플레이어는 악마를 숭배하잖아."
[주인님. 저들이 하는 말은 세뇌에 의한 것이므로 걸러 들으셔야 합니다.]
'말이 전혀 안 통하는 구만.'
"암튼, 신탁을 받는다 치고. 예언자가 뭐라는데?"
어느 날 신탁을 받은 예언자가 미호가 속한 지부 주변에서 '대적자'가 곧 나타난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대적자라니?"
"PK단에 크나큰 위해를 가할 인물이라는 의미야."
대적자의 출현을 예감한 PK단은 지부의 인원으론 감당키 어려울 것이라 판단, 미리 특임대를 보내 싹을 자른다는 계획이었다.
"그럼 특임대는 또 뭔데?"
"PK단은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어. 전국 각지에 소규모 지부들이 흩어져 있는데, 많아야 지부당 5명 내외 정도야."
"그래서?"
"가끔 강력한 플레이어가 출몰하면 일개 지부 전력으론 감당이 안 되는 경우가 많거든. 그땐 인근 지부에서 인원을 보충 받거나, 그마저도 커버가 안 될 땐 본부 소속인 특임대를 파견하는 거야."
"흐음."
내용을 듣고 보니, 일종의 광역수사대 같은 개념이었다. 일개지부의 힘으론 감당이 안 되는 플레이어가 나타나면, 전국구급 실력자 그룹인 특임대가 파견되어 전력을 보충하는 것이다.
"그럼 특임대가 지금 나를 잡으러 올 거라고?"
"풉. 설마 네가 대적자라고 생각하는 거야?"
"뭐?"
"웃기시네. 미호만 엮이지만 않았어도, 너 정도는 우리 지부만 움직여도 처리할 수 있었어."
도훈은 자신을 무시하는 두나의 태도에 기분 나빴지만, 그녀의 능력을 떠올리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젠장. 기분 나쁜데 반박을 못 하겠네. 내가 근데 이 정도로 무시받을 정돈가?'
[미호가 속한 지부의 전력을 정확히 모르니, 저도 판단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주인님도 처음 미호를 만날 때에 비하면 훨씬 강해지긴 했습니다.]
"암튼 결론이 뭐야. 특임대가 플레이어를 색출하러 다닐테니 조용히 짱 박혀 있으라는 거야?"
"이제야 말귀를 알아 듣는 군. 그럼 난 간다?"
"잠깐."
"왜 또 질척거려?"
도훈은 여자한테 질척거린다는 말을 처음 들어보는 터라, 몹시 기분이 상했다.
'와 씨, 지금 나보고 질척거린다고 한 거냐?'
[들은 그대로 입니다만.]
'진짜 두나인가 뭔가 하는 쟤는 그냥 한 대 처박아 버렸으면 좋겠네.'
도훈은 울컥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쨌든 정보를 가진 쪽은 그녀였으므로 성질을 죽이고 물었다.
"특임대에 대해서 조금만 더 알려줘."
"내가 왜?"
"아니, 그래도 누군지는 알아야 대비를 할 거 아니야? 누구한테 도망 다니는 지 정도는 알아야지?"
"그냥 집에만 짱박혀 있으라니까? 돌아다니지 말라고. 눈에 띄는 사람은 무조건 검문할 테니까. 네 기는 예민한 사람이면 누구나 감지할 수 있어. 스캔 능력이 있는 능력자들은 보자 마자 플레이어라는 걸 직감할 거고."
"혹시 아무것도 모르는 거 아니야?"
"뭐?"
두나가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도훈은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기로 했다.
"몰라서 대답 못 하는 거라면 그냥 그렇다고 하면 되잖아."
"내가 뭘 모른다는 거야?"
"본부에서 파견하는 인원이라면 일개 지부급에선 모를 수도 있겠지."
"장난해? 내가 실력이 모자라서 지부에 속한 줄 알아?"
"그거야 나는 모르지."
과연 도훈의 예상대로 단순무식한 두나는 곧바로 발끈해서 도훈을 쏘아붙였다.
"진짜로 미호만 아니면 확 패죽이는 건데."
"모르면 모른다고 해. 다른 소리 말고."
"알거든?"
"누군데?"
쩌리 취급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두나가 열을 올리며 특임조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특임조는 쉽게 말해, 전국 각지에서 뽑힌 엘리트 단원이었다.
소위 전국구로 불리는 강자들이 강력한 플레이어를 상대하기 위해 구성되었다고 했다. 한 명 한 명이 지부장급 이상의 능력을 갖고 있어, 랭커급 플레이어도 상대할 수 있다고.
"랭커급 플레이어라고? 진짜로 있어?"
"당연히 있지."
"우리나라에도?"
"최근에는 제주도에서 한 번 출몰했었어."
"제주도?"
두나는 제주지부에서 벌어진 PK단 학살을 언급했다.
도훈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흥미를 가지고 경청했다.
"제주도에 있는 4개의 지부가 연합했는데 플레이어 한 명에게 몰살당한 적이 있었어. 그때 특임대가 파견됐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뭘 어떻게 돼? 당연히 도망쳤지."
"특임대가?"
"아니 플레이어가."
두나의 말에 따르면 20명의 PK단을 몰살시킨 랭커급 플레이어보다 특임대가 더 강하다는 뜻이었다.
"처음부터 특임대를 요청했어야 했어. 자기들끼리 해보겠다고 설치다가 각개격파를 당한 꼴이지."
"특임대가 모두 몇 명인데?"
"이번 기수는 다섯명."
"다섯 명? 혹시 누군지는 알아?"
"말해줘도 어차피 모를 걸."
"아니 어떤 능력자인지 정도는 알 것 아니야?"
"그냥 강해. 그것만 알고 있으면 돼."
"미호 너보다? 미호는 굉장히 강하잖아. 여러 영혼이 같이 있어서 능력도 다양하고."
"음. 원래 능력자 대결은 상성에 따라 갈리는 경우가 많아서 우열을 쉽게 가리기 힘들어.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미호 정도의 단원도 특임대 추천서에는 이름도 못 올린다는 것만 알아둬."
"이런 미친."
도훈은 진심으로 놀랐다.
대체 PK단엔 얼마나 많은 강자들이 속해있는지 가늠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제주지부를 혈혈단신으로 몰살 시켰다는 또다른 플레이어의 존재 역시 그의 흥미를 돋았다.
'랭커가 우리나라에도 있었구나.'
[당연히 없진 않겠죠.]
'대체 누구지? 아, 그나저나 미호라면 그 경찰대녀 플레이어에 대해 알지도 모르겠는데? PK단을 오래 활동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정보가 많아.'
[너무 위험합니다. 그녀가 배신하면 엄한 플레이어의 정체만 노출시키게 될 겁니다.]
'3년 전에 연락이 끊겼다고 했잖아. 어쩌면 이미 당했을지도 몰라. 어차피 죽은 사람이라면, 시간 낭비를 덜지도 모르고.'
[그렇긴 한데···. 두나만 봐도 저렇게 주인님께 적대적인데 과연 순순히 협조를 해줄까요?]
'두나가 아니면 상관없는 거 아니야?'
[네?]
'저번에 보니까 인격이 휙휙 바뀌더라고. 언제까지 계속 두나일리는 없으니까.'
"대답은 충분하지? 그럼 난 이만."
두나는 금방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은 모양이었다.
도훈이 그런 두나를 붙잡았다.
"뭐가 그렇게 급해? 오랜만에 봤는데, 얘기나 더 하다가지."
"난 너랑 얘기할 생각 없어. ···미쳤어? 됐거든? 저런 바람둥이 자식이랑?"
"왜? 누군데?"
"기생년이 자꾸 껴들잖아."
"미향이?"
"뭐야? 난 이름도 기억못하더니 미향이는 또 아네?"
두나는 그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도훈에게 빈정거렸다.
"흐응, 하긴 껄떡쇠같은 네 놈이랑 기생년이면 궁합이 잘 맞긴 하겠네."
"다른 여자랑도 잘 맞던데."
"웃기고 있네. 미호가 제약에 걸리지만 않았어도 누가 너 따위랑."
"에이, 그건 두나 네 생각이고. 다른 사람 생각도 들어봐야 하는 거 아냐?"
"이게 자꾸 뭐라는 거야? 확 한 대 쳐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두나가 난데없이 손날로 도훈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무가의 여식인 그녀는 육탄전에 능했는데, 자꾸 깐족거리는 도훈을 기절시킬 생각으로 기습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도훈은 과거의 도훈이 아니었다. 천상 크래프트에서 한 달 간 수련하는 동안 칠성권의 성취가 더욱 깊어져 그녀7의 출수에 곧바로 응대했다.
재빠르게 두나의 손날치기를 막아낸 도훈이 휘두르는 그녀의 힘을 역이용하여 곧바로 안으로 감아 업어치기를 시도했다.
"어, 어?"
뜻밖의 반격에 두나의 몸이 속절없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도훈은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끝까지 잡아주며 낙법을 유도했다.
잔디밭에 패대기쳐진 두나가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씨, 이게 진짜!"
"어허. 먼저 공격한 건 그쪽인데?"
도훈은 업어치기 자세 이후 곧바로 두나의 상체를 짓누르며 조르기에 들어갔다. 갑자기 제압당한 두나가 얼굴이 시뻘게져서 욕을 퍼부었다.
"이거 안 놔? 확 진짜 죽여버린다?"
"풀려나 봐. 자신있으면."
"이게 진짜!"
그러나 밑에 깔린 두나가 몸부림을 칠수록 도훈의 조르기가 더욱 견고해졌다. 난데없이 펼쳐진 그래플링에 자연스럽게 진한 스킨십이 이루어졌다.
"아오, 이게 진짜!"
"그러니까 왜 가만있는 사람을 건드려? 졌다고 항복하면 풀어줄게."
"내가 너 따위한테? 항복을? 이게 죽으려고!"
상체를 결박당해 있던 두나가 갑자기 몸을 둥글게 말더니 두 발로 도훈의 목을 휘감았다. 놀라운 유연성에 이번엔 두나가 두발로 도훈의 목을 졸랐다.
"으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