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3. 정체불명의 그녀-48-
도훈은 찐텐으로 놀랐다.
설마 이 시간에 누가 집에 방문할 줄은 본인도 예상 못 했던 것.
"헉! 교, 교수님께서 오셨나봐요."
"교수님이라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윤창흠 교수로 분장한 것은 바로 도훈 자신. 공포영화도 아니고, 가상의 인물이 실제 현실에 나타날 순 없었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송이는 갑작스러운 방문객의 등장에 도둑이 제발 저리는 심정이 되었다. 송이가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바짝 긴장하며 손톱을 깨물었다.
"어, 어떡하죠? 분명 교수님이 출발 전에 연락 주신다고 했는데!"
송이가 호들갑을 떨면서 급히 소리쳤다.
"오, 오빠 얼른 그거부터 집어 넣어요!"
"알았어."
도훈은 꼴린 대물을 억지로 바지속으로 욱여넣으며 생각했다.
'로시,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왜 충돌경보가 울리지 않은 거야?'
[충돌경보라뇨?]
'우리 집 주소를 알고 있는 사람은 과 후배들 밖에 없다고. 8선 녀 중 한 명이 기습 방문한 거라면, 집으로 찾아올 때 송이랑 동선이 겹쳐야 하는 거 아냐? 그럼 어장관리 어플에서 경보가 울려야 하고.'
[주인님 말씀이 논리적으로 맞습니다만, 어장에 들어있지 않은 인물이라면 경보가 당연히 울리지 않는 게 맞겠죠?]
'어장에 들어있지 않는데, 우리집 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도훈은 순간 패닉에 빠진 것처럼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여자는 없었다.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고?'
[사람이라곤 안했습니다만?]
'서, 설마 미호?'
반인반수인 미호는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이성을 관리하는 어장관리 어플에 포함되지 않았다.
동시에 도훈의 집 주소를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띵동-. 띵동!
다시 한번 초인종이 울렸다. 송이는 급하게 흔적을 치우기 위해야단법석을 피웠다.
"오, 오빠 일단 문부터 열어 드려야 할 것 같아요."
"그래. 내가 일단 나가볼게."
도훈이 현관문을 열고 대문으로 달려나갔다. 문틈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실루엣은 분명한 여자였다.
'이크, 진짜 미혼가?'
"지, 지금 나가요!"
도훈이 날 듯이 뛰어가며 대문을 열어주었다. 예상대로 단정하게 차려입은 미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을 열자 미호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왜 이렇게 문을 늦게 열어?"
"무, 무슨 일이야? 연락도 없이 갑자기 집을 방문하고."
"급하게 상의할 일이 생겼어. 통화는 상부에서 추적당할지도 모르거든. 응?"
미호가 갑자기 도훈의 옷에 대고 코를 킁킁거렸다.
"…여자 냄새네?"
"뭔 소리야?"
"내 후각이 얼마나 예민한지 몰라? 방금까지 여자랑 있었지?"
"그걸 네가 왜 추궁하는데?"
도훈은 미호를 문전박대할 생각으로 단호하게 나왔다. 무슨 사정으로 집까지 찾아왔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게다가 미호는 동물 친화 패시브 덕에 자신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는 상태. 당장 돌아가라고 해도, 대들지 못할 것이다.
"일단 얘기는 나중에 하고…."
"교수님, 일찍 돌아 오셨네요?"
그때 송이가 갑자기 현관문으로 마중을 나왔다. 아무래도 혼자 나가고 집 안에 있으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미호가 집에서 나온 송이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송이 역시 대문 앞에 선 미호를 보고 당황했다.
"…에? 교수님이 아니네요?"
송이가 떨떠름한 얼굴로 도훈을 쳐다보았다. 미호 역시 허리에 손을 올리더니 마찬가지로 도훈을 쳐다보았다. 양여자 사이도 낀 도훈은 수습 불가의 사태 속에서 속으로 욕설을 내 뱉었다.
'시발, 좆됐다. 쟤는 안에 짱박혀 있지 왜 갑자기 튀어 나와가지고는.'
[이제 어떻게 합니까 주인님?]
'가만있어봐. 미호 전음 받을 줄 알지?'
[전음이리뇨?]
도훈은 천상 크래프트 게임에서 익힌 전음을 미호에게 시전해 보았다. 내공을 음성으로 변환해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플레이어에 속하는 미호라면 자신의 전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미호, 내 말 들려?}
{응? 지금 전음으로 말하는 거야?}
{들리는 구나. 다행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라는 데로 연기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자세한 내용은 내가 나중에 설명할테니까.}
"아, 교수님 손녀분이시라고요?"
"?"
"손녀분이세요?"
느닷없이 윤교수의 손녀가 된 미호는, 대충 돌아가는 눈치를 보더니 실실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어머, 네. 맞아요."
"저흰 교수님하고 상담하는 대학생들인데, 지금 집에서 교수님 기다리는 중이었어요."
송이도 거들었다.
"교수님이 집으로 돌아오시다 교통사고가 나시는 바람에….
아, 너무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가벼운 접촉사고라 다치시진 않은 것 같더라고요."
{일단 알겠다고 해.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정말요? 할아버지 지금 그럼 집에 안 계신 거예요? 어쩐지 제 전화를 안 받으시더라."
"금방 돌아오신다고 했어요."
"그럼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죠, 뭐."
미호의 돌발행동에 이번엔 도훈이 당황했다.
{지금 뭐하는 거야? 내 전음 못 들었어?}
{들었어.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지금 급하거든.}
"네, 들어오세요. 저희 집은 아니지만."
송이는 깜짝 등장한 사람이 윤교수가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했는지, 미호를 친절히 집안으로 안내했다. 도훈은 말을 듣지 않는 미호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뒤따랐다.
"윤 교수님 손녀분이시라고요?"
"네. 그쪽은 저희 할아버님 제자?"
"아, 아뇨. 물론 저희 학교 교수님이긴 한데, 전 그냥 상담받는 학생이에요."
"그럼 그쪽도?"
미호가 뻔뻔하게 도훈에게 물었다.
"네."
"흐음. 그러시구나. 근데, 두 분만 왜 집에 계신 거예요?"
"그게…. 교수님이 오늘 지방 출장 갔다가 오시는 길에 갑자기 사고가 나셨거든요. 그래서 둘이서 기다리는 중이었어요."
"둘이서만?"
"예?"
"…아니에요."
소파에 앉은 미호는 예민한 후각을 발동해 방금전 이곳에서 질펀한 섹스가 있었다는 걸 파악했다. 심지어 그 냄새는 집안 곳곳에서 사정없이 풍기고 있었는데, 화장실에서도, 그리고 문이 열려있는 작은 방에서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주 둘이서 광란의 파티를 벌이셨구만?}
{비지니스거든? 신경 꺼.}
{저 여자애 계속 여기 둘 거야? 나도 지금 급하다니까?}
{난들 어떻게 해? 당장 쫓아낼 방법이 없는데.}
{내가 할 게 그럼.}
"차라도 한 잔 내어드릴까요? 아님 과일이라도."
"아니에요. 잠깐 할아버지랑 통화 좀 하고 올게요.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다른 손님이 있어서 저도 좀 당황스럽네요."
"아, 네."
미호는 마사지 베드가 들어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닫고 통화를 하는 척했다.
물론 실제로 통화를 하진 않고 코를 킁킁대며 베드에 잔뜩 묻어 있는 정액과 애액 냄새를 맡더니 코끝을 찡그렸다.
'무슨 짐승들처럼 섹스를 해댔나보네. 얼마나 싸댔길래 냄새가 이렇게 진하게 배였담?'
뭔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던 미호가 다시 거실로 나가면서 말했다.
"방금 할아버지랑 통화했는데, 오늘 좀 늦어질 것 같다고 두 분먼저 돌아가시라는데요?"
"네? 정말요?"
"네. 못 믿겠으면 한 번 통화해 보시던가요."
미호가 너무 당당하게 나왔기 때문에 송이도 더는 반박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이곳은 남의 집이었고, 무단으로 점거해 섹스까지 벌인 쪽은 본인이었다. 지은 죄가 있다보니 집에 계속 버티겠다고 하기엔 너무 창피했다.
"아, 아니에요. 그럼 다음에 다시 오는 걸로 할게요."
한편 자신의 집에서 쫓겨나게 된 도훈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그럼 살펴가세요."
"네. 안녕히 계세요."
도훈이 인사도 없이 집 밖으로 나오자, 송이가 물었다.
"오빠, 괜찮아요?"
"응? 뭐가."
"아니, 기분 별로 안 좋으신 것 같아서."
"아니야. 저분이 우릴 의심하는 것 같길래."
"의심이라뇨?"
"아니, 아까 문 열어 줬을 때 누구냐고 묻는데, 날 마치 도둑처럼 보는 것 같았거든. 우리도 교수님이 집에서 기다리라고 해서 있던 것 뿐인데."
"정말요?"
"하긴, 오랜만에 할아버지 보러 왔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이 집을 차지하고 있으면 기분 나쁠 순 있겠지만."
그러자 송이가 발걸음을 뚝 멈췄다.
"잠깐. 근데 저희도 혹시 모르니 확인해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확인이라니?"
"윤교수님 손녀라는 말은 저분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잖아요.
솔직히 교수님 손녀라기엔 너무 나이 들어 보이기도 하고."
송이가 의심하며 폰을 들어 윤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훈은 전화를 받아야 했기에, 난데없이 골목으로 달려갔다.
"오빠, 어디 가요?"
"아니 나 담배."
"네? 지금요?"
"너무 오래 참았더니 금단 증세와서. 넌 교수님이랑 통화하고 있어."
"아, 알았어요."
도훈이 골목길로 사라지자 윤교수와 통화가 연결되었다.
"교수님. 저 한송이에요."
-그래, 송이학생.
"계속 기다리다가 교수님 손녀분 집에 오셔서 얼굴도 못 뵙고 가네요."
-어. 내가 그러라고 했다네. 이거 참, 공교롭게도 병원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아…. 네. 그럼 저랑 도훈 오빠는 먼저 집으로 갈게요. 다음에 다시 연락 드릴게요."
-그래. 시간 내서 왔는데, 내가 미안하고만.
"아니에요. 갑자기 사정이 생기셔서 그런 건대요."
-도훈군하고는 좀 친해졌나? 난 두 사람이 서로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같이 집단상담을 하려고 했는데.
"음, 네. 어느 정도는요. 감사해요, 신경 써 주셔서."
-아닐세. 그럼 난 또 검사받으러 가봐야 겠군.
"네. 몸조리 잘하세요. 교통사고는 뒤늦게 후유증이 올 수도 있다고 하니까요."
-알겠네.
통화가 끝나자 담배를 피우러 갔던 도훈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와 물었다.
"벌써 교수님하고 통화 끝났어?"
"네. 손녀분이 맞긴 맞나봐요. 근데 오빤 갑자기 그렇게 담배피우러 가시면 어떻게 해요?"
"미안. 원래 내가 보기보다 꼴초라. 1시간 이상 참으면 금단 증세 오거든."
"진짜요?"
"그래서 아까도 마당에서도 못참고 피웠잖아."
"담배 좀 줄여요. 몸에도 안 좋은 걸."
"알았어. 근데 이제 집으로 갈 거야?"
"네. 가야죠. 오빠는요?"
"나도 가야겠어. 그럼 여기서 헤어질까?"
"네?"
도훈이 집까지 바래다 줄 것을 기대했는지, 송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급한일 있으세요?"
"어, 그게 담배 피우다가 친구한테 연락왔는데 풋살하는데 멤버가 부족하다가도 지금 당장 풋살장으로 와달라네?"
"그러시구나."
송이는 조금 실망한 눈치였지만, 바쁜 도훈을 붙잡기엔 염치가 없다고 느꼈는지 더 요구하지 않았다.
"알겠어요. 그럼 다음에 봬요. 교수님이 다시 약속 잡으신다니까."
"그래. 너도 조심히 들어가."
"네."
꾸벅 인사를 하고 물러나던 송이가, 뭔가 할 말이 떠올랐는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빠."
"응?"
"오늘 일은…."
"알았어. 누구에게도 말 안해. 송은이한테도."
"네, 저도 그럴게요."
송이가 지하철 역쪽으로 사라지자 도훈도 그제야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에이씨, 갑자기 일이 이렇게 되다니.'
[뭔가 끝이 좀 흐지부지 되었군요.]
'괜찮아. 어쨌든 원하는 정보는 다 얻었으니까.'
[다시 집으로 돌아가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미호양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가야지. 담배 한 대만 피우고.'
도훈은 통화를 하느라 실제로 못 피웠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손끝에 내공으로 불꽃을 만들어 불이 붙이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나저나 집까지 찾아올 급한 일이란 건 대체 뭐지?'
[PK단 쪽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는 걸까요?]
'전화부터 할 것이지. 내가 집에 없으면 어쩌려고.'
[상부에 추적당할 수도 있다고 하는 걸 보면, PK단이 감시가 생각보다 빡빡한 것 같습니다.]
'아니. 자기 요원을 왜 통화까지 감시하는데? 아예 집에 CCTV까지 달아 놓은 거 아냐?'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죠.]
'하여간 정신 나간 단체라니까?'
[그러고보니 미호에게 물어봐도 되는 거 아닙니까?]
'뭘?'
[경찰대 플레이어요. PK단에서 오래 활동했으니 만큼 플레이 어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지 않을까요?]
'호오. 그런가? 근데 미호가 안다는 것은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닐 것 같은데?'
[네?]
'PK단에서 플레이어의 존재를 알면, 이미 죽었거나 추적중이라는 소릴테니까 말이야. 소식이 끊겼다는 게 어쩌면 살해당했다는 의미일수도 있거든.'
[아…. 그건 정말 안 좋은 소식이군요.]
'그리고 난 아직까지 미호를 못 믿겠어.'
[미호가 배신할 수도 있다는 소립니까? 주인님에게 위해가 되는 행동을 못 할 텐데요?]
'그러니까. 나에게만 위해가 안가는 일이라면, 뭘 해도 상관없다는 뜻이기도 하잖아. 잘못하면 잘 숨어있던 다른 플레이어를 P K단에게 노출시키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거야.'
[이런. 신중해야 겠군요.]
'아직까지 미호가 내 편인지도 모르겠어. 일단 무슨 얘길 하러 왔는지 들어는 봐야지.'
다시 집 앞으로 돌아온 도훈은 주변을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더니 담벼락을 훌쩍 뛰어 넘었다. 고양이처럼 조용히 착지하는데, 미호가 마당 밖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 계집애는 잘 보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