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7. 정체불명의 그녀-42-
"앗, 교수님, 교통 사고 당하셨다면서요? 몸은 괜찮으세요?
송이는 노령의 윤교수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에 다급히 안부를 물었다.
"나는 괜찮네. 큰 사고는 아닌데, 경찰이 올 때까지 꼼짝없이 도로에 갇히고 말았구만."
"아···. 죄송해요 저땜에 괜히."
"자네 때문이 아닐세. 어차피 서울로 올라와야 했으니까. 상담시간에 늦게 생겼구만."
"아니에요 교수님. 병원에도 다녀오셔야 하니 오늘 상담은 다음으로 미룰게요."
"혹시 이도훈군은 아직 안왔나?"
"네? 도훈 오빠요?"
"그래. 아까 연락왔길래 집에 가 있으라고 했거든. 도훈군은 우리집에 몇 번와서 현관 비번을 알고 있거든."
송이는 윤교수가 도훈을 언급하자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도훈을 슬쩍 쳐다보았다. 도훈은 등을 돌린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 저랑 같이 집에 있어요. 먼저 와있더라고요."
"잘 됐구만."
"네? 잘 되다뇨?"
"송이양. 의도친 않았지만 이건 기횔세."
"네?"
"자네가 남성 공포증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 말일세. 도훈군과 함께 기다리면서 트라우마에 직면에 보게."
"교, 교수님···. 그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어허. 계속 피하기만 해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네. 자네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
"아까 잠깐 같이 있었는데, 너무 불편하더라고요."
"어허.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린 거야. 더구나 도훈군은 자네가 겁낼 필요가 없다는 걸 잘 알지 않는가? 전에도 말했지만, 심인성발기부전 장애가 있으니까."
"그건 그렇지만···."
"차근차근 마음을 열어보게나. 내 최대한 빨리 수습하고 돌아가겠네. 알았지?"
"저, 교수님, 교수님?"
통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윤교수의 부재에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송이는 무척 난감해졌다.
'아···. 교수님 없이는 너무 부담스러울것 같은데···.'
애초에 송이가 집단 상담을 약속한 것은 윤교수라는 중재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단둘이 남자와 있는 것만 아니면, 불안지수가 크게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도훈과 단둘이 교수의 집에 남게된 이상 피할 공간이 없었다.
'어쩌지? 교수님을 기다려야 하나?'
송이가 안절부절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데 밖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던 도훈이 통화를 끊고 안으로 들어왔다.
사정을 모르는 도훈이 송이에게 물었다.
"혹시 교수님이랑 통화했어? 뭐라셔?"
"그게···. 좀 이따 오신다고 오빠랑 같이 기다리고 있으라는데요."
"음, 난 괜찮은데, 넌 불편하지 않겠어? 아니면 교수님 오시면 내가 연락해 줄 테니까 잠깐 밖에 나갔다가 올래? 한시간 안에 오실것 같은데."
도훈의 제안에 송이가 솔깃했다.
어차피 집안에서 기다리는 것이나, 밖에 나갔다 오는 것이나 상관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윤교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계속 피하기만 해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네. 자네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
'그래. 한 번 극복해 보는 거야. 교수님 말대로 도훈 오빠는 이상한 사람도, 위험한 사람도 아니잖아. 나 혼자 쓸데없이 겁먹은 것 뿐이야. 계속 피하기만 하면 늘 제자리일 거야.'
교수의 조언에 마음을 굳힌 송이가 도훈에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저도 안에서 기다릴게요."
"아님 내가 나갔다 올까?"
도훈이 한 번 더 배려했지만, 송이가 반대했다.
"오빠도 그냥 여기 계세요. 교수님 금방 오신다니까."
"음···. 그렇다면 뭐."
말과는 달리 송이는 도훈의 앞에 서자 긴장이 풀리지 않는지 계속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보다 못한 도훈이 송이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권했다.
"잠깐 앉아 있어. 내가 마실것좀 가져올게."
"아···. 네. 오빠."
도훈은 마치 자기집인 것처럼 익숙하게 주방을 뒤적거렸다. 현관 비번을 알고 먼저 들어와 있던 것도, 그렇고 지금 모습을 봐도 윤교수의 집을 한 두번 온 것이 아닌것 같았다.
마실 것을 준비하는 도훈을 보고 송이가 소파에서 물었다.
"오빤, 교수님 집에 자주 와보셨어요?"
"응?"
"되게 익숙해 보여서요."
"아···. 응. 상담받은 지 좀 오래 됐거든. 이따금 교수님 일 도와드리려고 집에 왔었어."
"일이요?"
"응. 교수님이 혼자만 계시다보니 힘 쓸 때 나를 찾으시더라고.
가구 옮기거나, 전등 같은 거 갈아드리러 왔었지."
"아··· 그러셨구나."
도훈은 따뜻한 차와 함께 냉장고에서 과일을 몇개 꺼내 과도와 함께 들고왔다.
"아까 교수님이 기다리는 동안 먹고 있으라고 하더라고."
"어, 이건 제가 저번에 올 때 선물로 가져왔던 건데···."
"그랬어?"
"네. 처음인데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요."
"잘됐네. 고마워, 잘 먹을게."
"아, 아니에요. 많이 드세요."
도훈과 테이블 하나를 두고 마주 앉은 송이는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이상해. 왜 도훈 오빠가 낯설지가 않지?'
그녀가 도훈을 본 것은 친구인 송은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을 때 뿐이었다. 그것도 벌써 3일전의 일인데, 이상하게 도훈과 함께 앉아있는 장면이 낯설지가 않았다.
'생각만큼 떨리지도 않고···.'
송이는 사과를 깎고있는 도훈을 보며 적잖이 안도감이 들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불안감이 덜했다. 송이는 윤교수와 상담을 나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실제로 윤교수라고 알고 만난 사람은 변장한 도훈이었고, 자주 마주하는 사이 그에게 자연스럽게 적응한 결과였다.
"자, 먹어."
사과를 예쁘게 깎아낸 도훈이 포크와 함께 내밀었다.
"고마워요. 오빠 되게 친절하시네요."
"그래 봐야 뭐하겠어. 여자친구도 제대로 못 사귀는데."
자신의 칭찬에도 도훈이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송이는 아차 싶었다.
'맞다. 도훈 오빠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했지?'
송이는 도훈이 여자를 못 사귀는 것이 발기 부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민망한 마음에 송이가 도훈을 위로했다.
"금방 호전 되실 거예요. 계속 상담 받고 계시니까."
"어?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 그, 그게···."
송이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둘러댔다.
"아니 우연히 교수님한테 오빠 증상을 들어가지고···."
"교수님이 다 말씀하셨구나."
"아, 아니에요. 그냥 어쩌다 나왔는데, 저도 모르게···. 죄송해요."
"아니야. 괜찮아. 숨긴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니까."
도훈의 표정이 우울해 보이자 송이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마치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너 장애잖아.' 라고 놀린 기분이었다.
"기분 나쁘셨으면 다시 한 번 사과드릴게요."
"아니야. 네가 왜 사과해? 이건 내 문제인데."
송이는 가시 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괜한 말을 꺼내 도훈의 감정을 상하게 한 것 같았다.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됐어. 난 괜찮으니까 과일이나 맛있게 먹어. 아, 그리고 홍차에 브랜디 타 줄까?"
"브랜디요?"
"응. 교수님이 즐겨 드셔서 나도 따라 먹어봤는데 맛있더라고."
"아···. 네. 좋아요."
도훈은 브랜디까지 가져와 홍차에 조금 섞었다.
젊은 사내와 단 둘이 앉아 다과를 즐기는데도 송이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신기해. 도훈 오빠랑 그렇게 편한사이도 아닌데, 하나도 안 무서워. 평소라면 얼어서 눈도 못 마주쳤을텐데.'
송이는 그것이 상담 덕이라고 생각하고 조금씩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오빠는 그럼 교수님이랑 얼마나 상담 받아오신 거예요?"
"나? 난 거의 반년 됐지 아마?"
"와, 정말요?"
"응, 상담심리 복수 전공 시작하면서 윤교수님이 내 지도교수님이 되셨거든."
"아···. 그때 알게 되신 거구나."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 상담을 배우는 사람은 자기 자신부터 되돌아봐야 한다고. 그러니 혹시 말못할 고민이 있는 학생은 겁먹지 말고 본인한테 말을 해보라는 거야."
"아··· 그래서···."
"뭐, 어차피 너도 이제 다 아는 거니까 그냥 편하게 말할게. 난 작년부터 그게 시작됐거든."
송이는 그것이 '발기부전'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그냥 일시적인 건 줄 알았어. 그 전에는 그런 문제가 없었으니까."
"네."
"근데 한달이 지나도, 두 달이 지나도 도무지 나아지질 않더라고. 그래서 병원에도 찾아갔었어."
"병원에요?"
"응. 비뇨기과."
"아···. 네."
"거기서 약처방을 해주더라고. 비아그라라고 알아?"
"들어 본것도 같아요."
"그게 혈행개선 통해 발기력을 지속해 주는 약품인데, 의사 말로는 효과가 정말 좋다는 거야."
"그, 그래요?"
성기능 개선제에 대한 대화는 젊은 남녀가 나누기엔 다소 민망한 주제였지만, 송이는 도훈의 심각한 고민을 들어주고 싶어 조용히 넘겼다.
"근데 웬 걸. 아무 소용이 없더라고."
"아···. 약물로도 안되는 군요."
"엄청 좌절했지. 생각해봐. 여자 친구를 사겼는데, 막상 그게 안 서면···."
"저, 전 잘 모르겠어요."
"암튼, 충격이 너무 커서 나중엔 우울증까지 오더라니까?"
"생각보다 심각했나보네요."
"솔직히 너한테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대부분 남자들은 고자가 된다고 하면 그냥 죽고 싶을 걸."
"그, 그 정도예요?"
"아무짝에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거든. 식욕도 없고, 의욕도 없고, 그냥 다 부질 없는 것 같고···. 진짜 난생 처음으로 자살충동까지 느꼈어."
"저런···."
"그러던 중에 교수님을 만난 거야."
"네."
"어쩌면 내 스스로도 계속 답을 찾고 있었는지 몰라.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면, 정신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고 관련된 서적을 뒤지다보니까 결국 상담치료가 눈에 들어오더라고."
"아···. 그래서···."
"그렇게 교수님을 만나게 된 거야."
"잘 됐네요. 교수님 엄청 친절하시고 실력도 좋으시잖아요."
"그렇긴 한데 송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상담 몇번 안 해보지 않았어?"
"아···. 두 번 해보고 바로 알았어요. 저 지금 보시면, 멀쩡한 것 같지 않아요?"
"뭐가?"
"저도 실은 오빠만큼은 아니지만, 트라우마 같은 게 있었거든요. 남자랑 대화를 못 하는 거요."
"아, 맞다. 그랬지? 지금은 괜찮아?"
내막을 아는 도훈이 뻔뻔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오빠 처음 봤을 땐 좀 무서웠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행이네. 교수님과의 상담이 효과가 있었다니."
"오빠는요? 오빠도 많이 좋아지지 않았어요?"
"나? 나는 좀···."
도훈이 말을 얼버무렸다.
"정말요? 아직도 그대로예요?"
"아니야. 원인을 알고 나서부터는 많이 좋아진 것 같긴 해. 근데, 여전히 두려워. 막상 실전이 되면 또 똑같을 까봐.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거야."
"아···."
"또 그럴까봐 겁이 나니까 여자를 못 만나겠고, 여자를 못 만나니까 이젠 멀쩡해 졌는지 실험을 못 해봤어."
"그러시구나."
민망한 이야기에 송이가 홍차를 홀짝거렸다. 그러나 브랜디가 든 홍차는 마시면 마실수록 몸을 뜨겁게 만들 뿐이었다.
'하아. 좀 덥네. 교수님 오시려면 아직 멀었으려나?'
계속되는 기다림에 대화가 살짝 루즈해지려고 할 때였다.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했다.
"나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
"앗, 네 저쪽이에요."
"나도 알아. 너보다 많이 와봤으니까."
도훈이 씩 웃으며 화장실로 갔다.
혼자 거실에 남겨진 송이는 뻘쭘함에 핸드폰을 켜고 송은에게 말을 걸었다.
-송이 : 송은아 뭐해?
-송은 : 곧 라방있어서 준비 중. 넌?
-송이 : 아, 바쁘겠네. 난 교수님이랑 상담 기다리는 중이야.
-송은 : 너 엄청 자주 간다? 교수님 되게 잘생겼나봐? 혹시 딴맘 품고 있는 건 아니지?
-송이 : 무슨 소리야. 완전 할아버진데.
-송은 : 은교 못봤어? 40살 차이도 쌉가능.
-송이 : 미쳤어 진짜. 아참 너네 사촌오빠랑 같이···.
송이가 톡을 쓰고 있을 때였다.
도훈이 들어간 화장실에서 갑자기 비명이 들려왔다.
"으악!"
너무나 커다란 비명에 놀란 송이가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뭐, 뭐지?"
놀란 송이가 벌떡 일어나 화장실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오, 오빠?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송이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문 밖에서 도훈의 안부를 물었다. 도훈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윽, 괘, 괜찮아. 미안. 놀랐지?"
"왜 그러시는데요? 어디 다쳤어요?"
"어. 다치긴 다쳤는데···. 아니야 아무것도 금방 나갈게."
"대체 무슨 일이신데요?"
도훈이 괜찮다고 했지만, 비명소리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에 송이는 분명 뭔가 사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 정말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하고 나갈게."
"오빠 제가 들어갈게요."
송이는 도훈이 크게 다쳤다고 생각하고 실례를 무릅쓰고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도훈이 변기 앞에 쓰러져 있었다.
"오, 오빠!"
"오, 오지마."
"지금 쓰러지셨잖아요. 대체 무슨···."
그런데 바닥에 쓰러진 도훈의 바지 춤에 커다란 뭔가가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도훈의 잦이였다.
"꺄, 꺄악!"
"하윽, 오지 말라니까."
"뭐. 뭐하시는 건데요!"
"그, 그게···. 지퍼에 씹혀가지고."
"네?"
도훈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 지퍼에 이게 씹혀버렸다고."
"아, 아니!"
잦이를 밖에 꺼낸 채 넣지도 빼지도 못하는 도훈과, 이를 황망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송이가 서로 마주보며 눈만 껌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