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3. 정체불명의 그녀-38-
* * *
도훈은 소영과 늦은 아침을 먹으며 앞으로의 투자 계획에 대해 상의했다. 소영이 말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인 것 같아. 앞으론 도훈이 네가 거래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자료 다 넘겨줄게. 어플은 다운 받고, 연동된 계좌는 비번도 같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도훈이 네가 말했듯이 나는 주식 전문가지 코인 쪽으론 문외한이거든. 이제 네가 스스로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처음부터 누나가 맡아 주기로 했잖아. 그래서 수익이 나면 인센티브도 주겠다고 한거고."
소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처음엔 자신 있었지. 어차피 같은 투잔데, 코인이나 주식이나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하고. 근데, 이번에 폭락할 때 실시간으로 차트를 보고 있으니까 멘탈이 나갈것 같더라고. 금액도 금액이고···. 암튼 잘 할 자신이 없어서 그래."
소영은 자신감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눈 앞에서 200억이 삭제되는 걸 봤으니 그럴법도 했다. 투자하는 코인에 무슨 실체가 있어서 재무재표를 분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르고 내리는 이유도 불명확했다. 분석적인 가치 투자자인 소영에게는 확실히 부담이 될만한 상황이었다.
"다 잃어도 상관없으니까 누나가 계속 맡아줬으면 좋겠어."
"도훈아. 그게 아니라···."
"정말로 난 괜찮아. 솔직히 그 돈 없어도 사는데 아무 지장 없어서 하는 말이야."
"차라리 내가 코인을 조금이라도 해봤으면 한다고 하겠어. 근데, 경험이 너무 없다보니까 네 돈 가지고 내가 연습하는 기분이라서 그래."
"그럼 연습해."
"뭐?"
"연습해도 되니까 그렇게 하라고."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한 두푼도 아니고 무려 500억이라고. 이젠 300억도 채 안 남았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누나한테 책임지라고 안 할테니까 안심해. 따면 누나도 버는 거고, 잃으면 나 혼자 잃는 거야. 이건 책임없는 쾌락이나 마찬가지잖아. 안 그래?"
"만약 실패하면 네 얼굴 볼 낯짝이 없을 까봐서 그래. 날 원망할지도 모르고."
"그런 걱정은 마. 난 이미 누나와 한 배를 탔으니까."
소영이 살짝 감동했는지 뭐라 대답을 못하고 입만 벙긋 거렸다.
도훈은 심각한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농을 건넸다.
"아니지, 내가 누나 배를 탔다고 해야 하나? 누나가 내 배를 타기도 했고."
"뭐라고? 지금 농담이 나오니?"
그제야 소영의 굳은 표정이 풀렸다.
도훈이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암튼, 이번 폭락은 예상보다 빠르게 반등이 올거야. 어느 정도 익절할 타이밍이 되면 다시 연락줘. 현금화 시켜놓고 금액을 줄여서 연습해 봐. 자신이 붙었다 싶으면 투자금을 천천히 늘리는 식으로."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난 누날 믿으니까. 믿지 않으면 맡기지도 않았어. 맡겼으면 의심없이 믿는 게 낫고."
"치··· 진짜."
"대신 아침은 누나가 사는 거다?"
"알았어. 실컷 먹어. 한 공기 더 시킬래?"
* * *
코인 투자건을 마무리한 도훈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주인님이 직접 하시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뭘?'
[코인 투자 말입니다.]
'이미 끝난 얘기야.'
[제가 볼 땐 주인님이 현자 타임을 이용해서 하는 게 더 승률이 좋을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건 맞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냉철한 판단이 가능하니까.
근데, 코인 시세가 변동할 때마다 현자 타임을 써야 한다면 미션이나 업적은 대체 언제할 건데?'
[아···.]
'나에게 중요한 건 돈이 아니야. 돈은 원하면 얼마든지 벌 수 있어. 그리고 다 날려도 괜찮다고 한 건 진심이었어. 500억을 다 잃어도 어차피 500억이 또 있으니까. 조 단위 부자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평생 놀고 먹어도 상관없다고.'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소영이는 분명 잘 할 거야. 앞으로 시행착오를 몇번 겪겠지만, 나중엔 더 크게 성공할 수도 있겠지. 다른 사람이 잘 할 수 있는 일은, 맡겨두는 게 훨씬 나아.'
[주인님 생각이 그러시다면야, 더 말씀 드리진 않겠습니다.]
'그나저나 오후에 한송이 오기로 한 거 맞지?'
[네. 맞습니다.]
'적당히 집안 인테리어를 손봐야 겠는데.' 도훈은 송이의 방문을 대비해 실내를 다시 정비했다.
퇴임을 앞 둔 노교수가 사는 집으로 보기엔 내부가 너무 휑했다. 도훈은 소나무 분재라든가, 고풍스러운 액자를 주문해서 빈 공간을 적당히 채웠다.
또한 교수 연구실로 꾸몄던 작은 방에서 책장을 끄집어내 거실 한켠으로 옮겼는데, 어느정도 배치가 끝나고 나니 제법 봐줄만하게 변했다. 도훈은 내친김에 마사지 베드도 급히 주문했다. 엎드려 누우면 머리쪽에 구멍이 뚫려있는 업소용 제품이었다.
"요샌 다 배달되니까 참 편하단 말이야? 돈만 주면 당일날 바로 배송도 해주고. 비용이 비싸긴 하지만."
송이가 올 시간이 다가오자 도훈은 역용마스크와 변장아이템도구로 외형을 바꾸었다. 축골공으로 몸을 축소시키자 영락없는 윤창흠 교수로 변신할 수 있었다.
'자, 이제 송이만 오면 되겠군.'
[오늘은 어디까지 진도를 나가실 예정입니까?]
'마시지로 끝을 봐볼까 생각중이야.'
[설마 끝이라면···.]
'물론 직접 하는 건 안되지. 자칫하면 진짜 윤창흠 교수에게 누가 될 수 있으니. 나중에 진짜 윤창흠 교수에게 매달리면 난감하지 않겠어?'
[그럼요?]
'적당히 자극을 줘서 도훈에게 토스 하는 게 목적이야.'
[송이양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도훈군을 만날 수 있을까요?]
'나 하기 나름이지.'
그때 도훈의 전화가 울렸다.
번호를 확인한 도훈은 목소리를 변조해 송이의 전화를 받았다.
"한송이 양인가?"
-네, 교수님. 알려주신 주소에 도착했는데, 여기가 맞는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문을 열어 주겠네."
도훈이 거실에서 버튼을 누르자, 대문이 열렸다.
-열렸어요. 지금 들어가면 될까요?
"내 마중 나가지."
도훈이 현관문을 열고 기다리자, 예쁘게 차려입은 송이가 마당을 지나 현관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언제나 봐도 예쁘단 말이야. 아직 먹어 보지 못해서 더 군침이 도는 것 같아.'
[표정관리 하십시오.]
'알았어.'
"찾아오느라 수고했네. 안으로 들지."
"네 교수님."
송이는 한 손에 과일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이건 뭔가?"
"그래도 집에 오는데, 빈손으로 오면 안 될 것 같아서."
"허허, 거참. 이럴 필요 없는데."
도훈이 과일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송이가 현관에서 구두를 벗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저때문에 다른 가족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지···."
"괜찮네. 나 혼자 사니까."
"네? 사모님은 그럼···."
"몇년 전 사별했네. 애들은 다 독립했고."
"아···. 죄송해요. 제가 실례를···."
"괜찮네. 모를 수도 있지."
집으로 들어온 송이는 혼자 살기엔 너무나 큰 집에 놀란 눈치였다.
"혼자 계신지는 몰랐어요. 집이 너무 커서."
"아, 이 집? 오랫동안 살아온 집이라 마누라를 떠나보내고도 계속 혼자서 지키고 있다네. 나중에 죽으면 자식한테 물려줘야지."
"에이, 그런 말씀 마세요. 아직 정정하신데요."
"하하. 말이라도 고맙구만. 소파에 앉게. 내 차라도 내 오지."
"아니에요, 교수님 제가 할게요."
송이는 나이가 지긋한 노교수가 직접 차를 내준다고 하자 안절부절 하며 앉아 있지 못했다. 그러나 도훈은 괘념치 말라는 듯 말했다.
"그래도 우리집에 왔으면 손님인데, 손님에게 일을 시켜서야 쓰나. 그냥 편하게 생각하시게."
"아···. 네 교수님."
도훈이 주방으로 차를 타러 가는 사이, 송이는 소파에 앉아 거실을 두리번 거렸다. 벽면 한 켠에 세워진 책장에는 오래된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와···. 교수님은 집에서도 저렇게 많이 책을 보시는 구나. 지난 번 연구실에도 책이 엄청 많으셨는데.'
넓은 크기에 비해 내부는 굉장히 심플한 편이었다. 구석에 놓인 소나무 분재와 벽에 걸린 고풍스러운 그림이 노교수의 취향을 짐작케 했다.
'교수님도 쓸쓸하시겠구나. 이렇게 넓은 집에 혼자 살다니. 이 럴 줄 알았으면 과일이 아니라, 집에서 반찬 좀 싸가지고 올 걸.'
송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도훈이 쟁반에 차를 가져왔다. 송이가 벌떡 일어나서 쟁반을 대신 받았다.
"교수님 제가 들게요."
"허허, 괜찮다니까 그래. 아직 정정하네."
"그래두요."
도훈은 외형만 늙은이일 뿐, 실상은 짱짱했으나 마지 못한 척 송이에게 쟁반을 건넸다.
"집에 마실 것이라곤 홍차 뿐이구만. 혹시 브랜디를 살짝 타 줄까?"
송이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브랜디면 술 아니에요?"
"홍차에 곁들여 먹으면 체온도 올리고 좋다네. 생각 있으면 타주고."
"아···. 그럼 조금만."
도훈이 홍차에 브랜디를 섞었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이었는데, 알콜을 통해 송이의 판단력을 흐트러뜨릴 계획이기 때문이었다.
소파에 앉은 도훈은 송이에게 근황을 물었다.
"그래, 지난 번 상담을 한 뒤 좀 변화가 있었나?"
"네. 교수님께서 원인을 정확히 짚어주시고 나서는, 확실히 머릿속이 명쾌해진 것 같아요."
"낯선 남자랑 단 둘이 있는 것은 어떤가?"
"아직은 여전히 어렵지만, 그래도 계속 노력하는 중이에요."
"좋은 태도네. 아무리 상담을 해줘도, 내담자가 극복할 의지가 없다면 결국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거든."
"네."
"결국은 송이양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네. 나는 그걸 도와주는 사람일 뿐이고."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바쁘신데 이렇게 시간도 내주시고."
"나도 논문을 개제해야 하니 서로 도움이 되는 거지."
"아참, 저 어제 교수님 책 찾아서 읽어봤어요."
"오, 그래?"
[책이라뇨?]
'진짜 윤창흠 교수가 쓴 책을 읽어보고 왔나본데?'
[주인님 뭐 아시는 거 있습니까?]
'당연히 모르지. 윤창흠 교수의 책을 읽어보고 올 줄은 몰랐으니까.'
"네, 정신분석학 개정판을 읽어봤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그렇구만."
"저도 심리학을 전공할 걸 그랬어요."
"하하, 심리학은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학문이지. 깊이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저번에 도훈 오빠가 상담심리를 복수전공 하고 있다는데, 혹시 저도 가능한가요?"
'억, 좆됐다.'
[둘러대십시오.]
"흐음, 송이양 지금 전공이 사회체육과라고 했던가?"
"네, 교수님."
"뭐, 복수전공 신청하는 기간에 한 번 학과실에 문의해 보시게. 배워두면 쓸데가 많으니까."
"감사합니다 교수님."
도훈은 더 깊이 얘기했다간 가짜라는 게 발각될까 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이것참 차를 내주고 마실 시간도 주지 않았구만. 한 번 마셔보게나."
"네."
송이가 브랜디를 탄 홍차를 들이켰다.
술은 아니었지만, 마시고 나자 입 끝에 살짝 술맛이 느껴지며 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괜찮네요."
"그렇지?"
도훈도 나란히 홍차를 홀짝거렸다.
"자, 그럼 오늘 상담을 한 번 시작해 볼까?"
"네, 교수님."
"지난 번에 했던 점진적 이완법으로 몸을 한 번 풀어 주겠네."
"여기 엎드릴까요?"
송이는 또 소파에 누우라는 건 줄 알고 도훈에게 물었다.
홍차 때문인지 송이의 두 볼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는데, 은근히 마사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이 소파는 너무 푹신해서 마사지엔 적합하지 않을 것 같군. 그래. 예전에 사 놓은 마사지 베드가 있었지?"
"마사지 베드요? 집에 그런것도 있으세요?"
"사별한 아내가 근육이 자주 뭉쳐서 사놓은게 있다네."
"아···. 그, 그러시구나."
"잠깐만 기다려 보게나. 내가 가져올테니."
도훈은 잠시 방으로 들어가 마사지 베드를 끌고 왔다.
다리에 바퀴가 달려있었기 때문에 손으로 밀기도 수월한 편이었다.
송이는 거실에 등장한 마사지 배드에 살짝 놀란 눈치였다.
'지, 집에 이런게 있다니.'
"자, 여기 누워보겠나?"
"네. 엎드리면 되나요?"
송이가 베드에 오르려고 하는데 도훈이 갑자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 이런. 복장이 근데 마사지를 하기에 적합하지가 않구만."
"네?"
송이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조금은 불편해 보였다.
"안되겠네. 내 자식놈이 어렸을 때 입던 반팔이랑 반바지를 줄테니 그걸로 갈아 입으시게."
"오, 옷을요?"
"이대로는 영 불편해서 말일세."
"네. 알겠습니다."
송이는 도훈이 시키는대로 고분고분 말을 따랐다. 교수의 권위에 눌린것도 있지만, 지난 번 마사지가 너무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실은 오늘 집까지 찾아온 것도, 그때의 기분을 또 한 번 느끼고 싶어서였다.
"화장실에서 갈아 입고 오게나."
"네."
송이는 도훈이 건네준 반팔 티와 반바지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송이가 도훈에게 말했다.
"저, 옷이 좀 큰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도훈의 옷은 송이에겐 빅사이즈였다. 반팔은 팔이 팔꿈치까지 내려왔고, 반바지 또한 무릎을 가렸다. 특히 목 부분이 헐렁하게 내려와, 움푹 들어간 가슴골이 살짝 보일 정도였다.
"그만하면 괜찮구만. 이리 누워보게."
"네, 교수님."
송이가 도훈의 옷을 걸친 채 마사지 베드에 누웠다.
얼굴이 들어가는 구멍에 머리를 쏙 집어 넣자. 거실 바닥만 보여서 뭔가 구속된 기분이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보겠네."
도훈이 어깨부터 천천히 송이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도훈의 손이 닿자 송이는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까 마신 홍차 때문인가? 왜 이렇게 몸이 뜨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