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1. 정체불명의 그녀-36-
* * *
"바쁜데 무슨 마중까지 나왔어? 그냥 서울 가서 보면 되지."
소영이 마음에도 없는 소릴 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아마 배웅을 나오지 않았다면 단단히 삐졌을 터였다.
"나 때문에 고생하고 왔는데 당연히 마중 나와야지."
"히, 괜히 찔리는 게 있는 건 아니고?"
"무슨 찔리는 거?"
"나 없는 동안 도훈이 네가 혼자 보냈을리가 없는데?"
소영은 나의 바람을 의심하고 있었다. 아니 확신하는 듯 했다.
하지만 다행인건 그녀가 그런 방면으로는 무척 쿨하다는 점이다.
나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맞받았다.
"그러는 누나야 말로, 흑형 백형 골고루 만나본 거 아니고?"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으나, 소영이 기분이 상했는지 홱 째려보면서 따졌다.
"뭐? 내가 다른 남자 만났을 거라는 거야 지금? 아니거든? 도훈이 너 나를 그런 여자로 봤니?"
"아, 아니 농담한 거야. 왜 그렇게 화를 내?"
"섭섭하다 진짜. 누군 외국 나가서까지 독수공방 하다 왔는데 ···. 내 마음도 몰라주고."
예상외로 격한 반응에 나만 꼴이 우습게 됐다.
[사실일 겁니다.]
'뭐라고?'
[안소영 양은 현재 주인님의 대물에 중독되어 있으니까요. 마법의 정액 효과 때문에 화학적 정조대가 채워진 꼴이거든요.]
'출국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자고 한 달 가까이 지났는데도?'
[그 정도 기간으로 화학적 정조대 효과가 사라지진 않습니다. 유효기간이 대충 3개월은 되거든요.]
'허, 참. 실언했네.'
"누나, 당연히 농담이지! 내가 있는데 누나가 왜 딴 놈한테 눈길 주겠어? 안 그래?"
나는 일부러 팔짱을 꽉 끼우며 애교를 부렸다. 그리곤 그녀가 끌고 온 캐리어를 잡아 끌며 주차장으로 안내했다.
"가자, 내가 집까지 태워 줄게."
"엥? 너 차 가지고 왔어?"
"어. 당연히 바래다 줄려면 가져와야지."
"나도 주차시켜 놓고 갔는데?"
"앗."
난감한 상황이었다. 생각해보니 안소영도 당연히 차가 있었고, 출국하기 전 장기 주차를 해놓았던 것이다. 사람이 둘인데 차가 두대니 각각 따로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어쩌지 그럼? 따로 가야 하나?"
"아냐. 도훈이 네차로 가자."
"그럼 누나차는 어쩌고?"
"대리 기사 부탁해서 탁송 맡기면 돼. 키만 공항 라운지에 맡겨놓지 뭐."
"라운지에서 그런것도 해줘?"
소영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응. 나 vvip거든."
"아···."
생각해보니 소영은 외국에서 오래 공부한 만큼 비행기를 자주 탔을 것이다. 게다가 직업은 의사. vvip가 아닌게 이상했다.
소영은 라운지에 차키를 맡기더니 나와 함께 공항 주차장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도착한 그녀는 내 차를 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뭐야? 이거 설마 네 차야?"
"응."
"아니 돈도 많은 사람이 무슨 이런 차를 타?"
고급 외제차를 타는 소영의 입장에선 국산 중고차를 타는 내가 이해가 안됐을 것이다.
"일단 가면서 설명할게."
소영의 짐을 트렁크에 싣고 서울로 출발했다. 소영은 실내를 쓱훑어보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와, 연식은 또 얼마나 된 거야? 5년도 넘은 것 같은데? 코인 할 돈으로 차나 한 대 뽑지 그랬어?"
"차는 위장이야."
"위장이라니?"
"돈 많은 거 티 내기 싫어서."
"참나. 네가 무슨 언더커버 보스니? 도훈이 너 대체 진짜 정체가 뭐야? 재벌집 막내 아들 이런 건 아니지? 나중에 누나 놀래키지 말고 솔직하게 불어."
소영의 입장에선 당연한 의문일 것이다.
코인에 무려 현금 500억을 때려박는 20대 대학생이라니.
재벌가 3세 정도 되지 않는 이상 꿈도 못 꿀 금액이니까.
"진짜 재벌가 자식이면 어쩌게?"
"어쩌긴. 얼른 자빠뜨려서 임신 공격해야지. 나 그럼 재벌가 사모님 되는 거 아냐? 호호호."
소영이 질낮은 농담을 날렸다. 하지만 진심은 아닐 것이다.
소영은 주체적인 여성이고, 능력 또한 출중한 재원이다. 남자를 고르는데 있어서 재력 같은건 딱히 고려 대상이 아닐만큼 자수 성가한 사람이기도 하다.
"무슨 마음에도 없는 소릴."
"왜? 누나랑 결혼하려니까 도훈이 네가 아까워?"
"난 아직 결혼 생각 없어. 당연한 거 아니야? 이제 대학생인데 무슨 결혼?"
"하긴. 한창 즐길때구나. 미안. 누나가 마음이 급하다 보니 뻘소리 했네."
"누나 급해?"
소영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짧은 치마가 말려 올라가며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가 훤히 드러났다.
"나도 이제 한국나이로 30대 중반이야. 당연히 급할 수 밖에. 엊그제도 부모님한테 전화 받았다니까? 선 안 보냐고."
"누난 결혼 생각 있고?"
"글쎄. 마음에 쏙드는 남자가 안 나타나면 굳이 서두르고 싶진 않은데."
"누나 마음에 쏙 들려면 어떤 남자여야 하는데?"
소영이 운전 중인 나를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일단 잘생겨야해."
"나처럼?"
"몸도 좋으면 좋겠어."
"딱 난데?"
"그리고 밤일도 잘하면 더 좋고."
"나잖아?"
"근데 도훈이 넌 너무 어리니까. 그림의 떡이지 뭐."
"그림의 떡이라도 떡은 칠 수 있잖아?"
"뭐? 푸하하. 뭐야, 이도훈, 너 쌓여 있구나?"
소영이 그 말을 하더니 불쑥 내 허벅지로 손을 밀어 넣었다.
"워워, 운전중이야. 위험해."
"내 질문에 솔직히 대답해. 그럼 안 괴롭힐테니까."
"뭔데."
"나 외국으로 보내 놓고 몇 명이나 만났어?"
"진짜 솔직히 대답해?"
"응. 화 안낼게."
'로시 몇명이었지?'
[주인님. 근 한달입니다. 카운팅이 힘들 정돈데요?]
'뭐? 그 정돈 아닐텐데?'
[심하면 하루에도 5명을 돌아가며 만났는데, 숫자가 적을 거라고 보십니까?]
'아씨, 너무 솔직하면 안 되겠는데.'
"한 명."
"장난해? 솔직히 말해보라니까? 나 진짜 화 안낼게."
"알았어 두명."
"누군데?"
"여자친구사람."
"여사친?"
"응."
"섹파야?"
"아니 뭐. 그냥 어쩌다보니."
"참나."
소영은 화를 안낸다고 해놓고 두명이라고 대답하자 마자 눈빛이 쌔하게 변했다. 그녀는 심기가 불편한지 팔짱을 낀 채 차창 밖을 쳐다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하여간 일부종사 해봐야 영 헛짓이라니까? 누구는 혼자 외국나가서도 독수공방하고 정조를 지켰더니만, 그 사이에 두 사람이랑 놀아나기나 하고."
"화 안 낸다며?"
"내가 진짜 한 명까진 이해하려고 했는데, 두명은 선 넘었지!"
[스무명이라고 말했으면 살인 날 뻔 했겠는데요.]
'그러게, 줄여서 다행이다.'
"미안. 한명은 원래 부터 알던 사이였고, 한명은 어쩌다 그런 거야."
"무슨 어쩌다 그래? 손뼉도 마주쳐야 짝 소리가 나는 거지."
"아니, 지난주에 대학 축제 기간이었거든."
"축제?"
"응. 축제 기간에 신나서 망나니처럼 술을 마셨더니···."
"햐-. 너 진짜 못 됐다. 누난 코인 계좌 만들라고 외국 보내놓고, 너는 고주망태가 되도록 축제를 즐기셨다?"
"미안 미안.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됐어. 진짜로 실망이야 이도훈."
소영이 질투하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남부러울 것 없는 그녀가 20대 대학생 섹파의 바람에 질투를 보이다니···. 왠지 그녀의 마음을 들었다놨다 할 수 있는 내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미안하다니까 그래. 난 누나가 솔직히 말하래서 한 거라고."
"야. 그래도 두명은 진짜 아니지. 좋았냐? 어린 것들이랑 하니까 좋았어?"
"아니야. 그럴리가. 술먹고 한 애는 기억도 안나. 진짜로."
"아으, 내가 미쳤지. 그때 그 쌔끈한 흑인이 수작 걸때 모르는 척 넘어가 주는 건데."
"흑인? 누가 누나한테 작업걸었어?"
"없겠니? 바에서 혼자 청승맞게 술마시고 있으니까 이 놈 저 놈 다 껄떡대더라."
"정말로?"
"명함 주는데 아주 화려하더구만? 뉴욕 증권 거래소에서 일하는 펀드 매니저도 있었고, 미국 마이너리그 뛰고 있다는 야구선수도 하나 있었고. 그 흑인 선수 팔뚝이 도훈이 너 두배 쯤 됐을 걸?"
나는 기분이 상한 소영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일부러 질투하는 척 했다.
"뭐야. 지금 그 사람들과 못 해서 아쉽다는 거야?"
"네가 다른 여자애들이랑 놀아나는 줄 알았으면 나도 즐겼을 거란 거지. 억울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와, 누나 진짜···. 흑형이 그리 좋아?"
"왜? 질투나? 내가 흑형에게 가서 안 돌아올까봐?"
"누나 진짜 그러는 거 아니야. 난 내 재산의 절반을 누나한테 맡겼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무슨 뜻인데?"
"내가 누나를 그만큼 믿는 다는 거야."
"흠···."
"세상에 어떤 미친 사람이 자기 전재산의 절반을 가족도 아닌 사람에게 맡기겠냐고. 누나라면 그럴 수 있어?"
"그렇긴 하네. 너 나 뭐 믿고 맡긴 거야? 내가 돈 갖고 튀면 어쩌려고?"
"누난 안 그럴 사람인 줄 아니까."
"사람 너무 믿지마. 여자는 더 믿지 말고."
"누나라서 믿는 거야. 다른 이유는 없어."
"칫. 하여간 말은 청산유수라니까?"
소영은 마지막 말에 조금 감동 받은듯 했다. 어쨌든 자신이 단순히 육체적 쾌락만 나누는 섹파가 아닌, 강한 신뢰로 뭉쳐진 관계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 같았다.
"맞다. 네가 시키는대로 존버하고 있긴 한데, 정말 괜찮겠어?"
"뭘?"
"다행히 추가 하락은 없긴 한데, 반등 기미도 안 보여서.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횡보만 하고 있어."
"더 떨어져도 상관없어. 아마 살짝 올랐다가 다시 떨굴거고. 그래야 버티던 사람들도 항복하고 나가거든."
"흠, 알았어. 네 생각이 확고한 것 같으니까, 더 이상 나는 참견 안할 게. 고객의 결정이 최우선이니까."
"믿어줘서 고마워."
"고맙긴. 나야 말로 고맙지. 근데 나 진짜로 궁금한 게 있어."
"뭐?"
"가난한 대학생으로 위장하고, 거액의 재산을 숨기고 사는 이유가 대체 뭐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돼서 그래."
[뭐라고 대답하실 생각입니까?]
'그냥 뻥쳐야지.'
"음, 전부 다 말할 수 없고 아무튼 유산 상속 싸움이라고 보면 돼."
"유, 유산? 너 설마 그럼···."
"그냥 여기까지만 대답할 게. 저번에 궁금해 하지 않기로 했던 거 기억하지?"
"흠, 알았어. 내가 뭐 신경쓸 일은 아니니까."
"고마워."
"아참, 누나 집으로 바로 갈 거지? 비행기 오래 타서 피곤할텐데."
"무슨 소리야? 당연히 호텔로 가는 거 아니었어?"
"집으로 안가고?"
"한달 간 체류했더니 호텔이 집같아."
"하하, 알았어."
나는 차를 끌고 제법 비싸보이는 호텔로 들어갔다. 발레 파킹을 하는 직원은 후진 내 차를 보고도 내색도 없이 공손한 자세로 차키를 받았다. 트렁크을 열자 벨보이가 후다닥 달려와 대신 짐을 내려주었다.
소영이 나를 보고 물었다.
"나, 이정도 대접 받을 자격있는 거지?"
"얼마든지. 더 한것도 충분하지."
"풉-. 하여간. 오늘 밤 잘 생각 하기만 해? 나 진짜 한 달 참았다?"
"아이고, 벌써 부터 겁나네."
체크인을 하고 호텔에서 제일 비싼 룸으로 들어갔다.
하룻밤에 수백만원이 넘는 방이라 그런지, 무척 넓고 쾌적했다.
창가에 서면 한강변에 어우러진 스카이라인이 또렷하게 보이는 곳이었다.
"역시 고향이 최고네. 꼭 외국 나갔다 오면 애국자 된다니까?"
소영은 짐을 풀지도 않고 테이블 위에 놓인 양주병을 깠다. 한 병에 수십만원은 호가하는 양주를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는 그녀를 보자 뭔가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었다.
'소영이는 확실히 씀씀이가 다르구나.'
[주인님 재산을 아니까 더 거침없는 것 같네요.]
'난 가끔 내가 부자인지도 모르겠다니까. 맨날 돈없는 대학생들하고 어울리다보니까, 이런게 적응이 안돼.'
"너도 한 잔 줄까?"
"좋지."
소영이 스트레이트잔에 양주를 가득 따랐다.
우린 양주를 들이키며 지난 이야기를 했다.
"와, 진짜 환전이 그렇게 힘든 건 줄 몰랐어. 명동에서 외환으로 바꿔서 외국계좌로 넘기는데 수수료를 글쎄."
소영은 어떻게 해서 500억이라는 거금을 외국으로 옮겼고, 코인 계좌를 개설했으며 나중에 투자를 하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을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내용을 쭉 들어보니 투자에 밝은 소영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험난한 과정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휴, 이렇게 개고생했는데, 코인이 하루아침에 박살날 줄이야. 어젠 진짜 멘탈 나가는 줄 알았다니까?"
"걱정마. 언젠간 또 오르니까. 누나 잘못도 아니잖아."
"그렇긴 한데···."
종목은 소영이 추천하긴 했지만, 어차피 전 종목이 파란불이었다. 무엇을 골랐어도 의미가 없긴 했다.
"암튼, 수고비는 오늘 호텔 잡아준 걸로 퉁쳐."
"응? 뭔 소리야? 약속한 대금은 받아야지."
"됐어. 내가 염치도 없는 줄 아니? 본전만 챙겼어도 나도 다 받아낼 생각이었어. 근데 반토막이 나버렸는데, 어떻게 너한테 내가 돈을 받니? 그냥 덕분에 해외여행 다녀왔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어쩐지. 소영이 과하게 비싼 호텔을 잡고 양주를 깐다 싶었더니, 이걸로 한달 간 수고비를 퉁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용납이 되질 않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난 괜찮다니까? 받기로 한 건 받아야지."
"괜찮으니까, 나중에 네 말대로 반등하면 그때 얘기하기로 해. 알았지?"
"이러면 내가 마음이 불편해 누나."
"당연히 불편하라고 하는 거지."
"뭐?"
"이걸로 퉁친다는 건, 서비스까지 포함해서거든. 너 오늘 밤 나 재우지 마. 무슨 뜻인 줄 알지?"
소영이 생글생글 웃으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얼마짜리 화대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