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0. 정체불명의 그녀-35-
도훈의 확고한 선언에 당황한 것은 안소영이었다.
그녀는 주식에 있어서 전문가 수준이었기 때문에, 도훈의 생각이 무모하다고 여겼다. 주식이든 코인이든 가장 위험한 판단이 떨어지는 칼날을 잡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200억 넘게 손해 봤는데, 여기서 물을 더 탄다고? 난 절대 반대야."
"왜?"
"왜냐니? 아까 설명 못 들었어? 장이 완전히 패닉이라니까? 지금 고래(*코인 용어로, 개미와 반대되는 큰 손을 일컫는 은어)가 보유한 비트를 싹 다 던졌다는 소문이 무성해. 그 바람에 기관들까지 함께 던지고 있다고. 그게 사실이라면 반등이 안 올지도 몰라."
소영은 도훈이 크나큰 손실에 충격을 받아 합리적인 판단을 못한다고 여겼다. 물을 타더라도 시기가 있는 법. 소영은 당장의 실패를 인정하고 현금보유로 전환할 때라고 믿었다.
그러자 현자로 변한 도훈이 시니컬하게 반문했다.
"그럼 누난 하락한다고 보는 거네?"
"그렇지. 당분간은."
"그럼 레버리지 최대한 당겨서 숏치면 되겠네. 100배 쯤 걸까?"
"무슨 소리야?"
"누나 말대로 장이 하락한다고 굳게 믿는다면 그게 맞지 않아? 선물을 하면 하락장에도 수익을 볼 수 있으니까. 내 말이 틀려?"
"그, 그렇지만 만에 하나 반등하면···."
"거봐. 누나도 확신 못하지?"
"아니 그래도 지금은 대세 하락이···."
"대세 하락이 아닌 일시적 조정이야."
"아니, 도훈아. 내가 오랫동안 주식을 해 본 경험에서 조언하는 건데···."
"누난 주식의 고수지 솔직히 코인은 잘 모르잖아. 안 그래?"
"도훈아. 지금은 그 어느때 보다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시기야.
괜히 손실 본게 억울해서 무턱대고 물을 탔다간···."
"아니. 나는 그 어느때보다 냉정해.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해."
"도훈아, 단순히 1, 2억 수준이 아니라고. 까딱하면 수백억을 잃을 수도 있어!"
"반대로 수백억을 딸 수도 있겠지."
도훈이 계속 고집을 피우자 소영이 짜증내듯 물었다.
"그럼 넌 대체 무슨 근거로 확신하는 건데? 말이나 들어보자."
"거두절미하고 이 상황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큰 손들의 개미털기라고 봐."
"개미 털기라고?"
"응. 아무리 찾아봐도 코인이 이렇게까지 하락할 악재는 없거든. 물론 언론이 만들어낸 소소한 악재들은 있겠지. 근데 그건 그냥 일이 터지니까 갖다 붙인 것뿐이야. 모두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니까, 동시에 내 던지면서 시장이 일시적인 패닉에 빠진 거라고."
"그러다 지금보다 더 떨어지면?"
"그럼 숏을 치라니까?"
"도저히 말이 안 통하네···."
"누나. 외국에 계좌 열고 코인 지갑 만들어 투자를 해준 건 정말 고맙게 생각해. 큰돈을 환전까지 해서 코인 계좌에 넣어준 것에 대해선 정말 감사하다고. 하지만 누나는 내 돈을 불려주는 사람일 뿐, 최종 결정은 내가 하는 거잖아. 안 그래?"
"음···. 그렇게까지 말해버리면."
"손해를 봐도 내가 볼 거야. 그러니까 이번엔 시키는 대로 해줘."
"후-. 진짜 말이 안 통하네. 너 나중에 후회하지 마?"
"내 말 맞다니까 그래. 그나저나 200억을 더 물탈 건데 송금할 방법이 있을까?"
"국내계좌로 그 만한 돈이 한번에 해외 송금되면 금융당국에서 바로 추적 들어 갈거야."
"다른 방법은?"
"돈 세탁 방식으로 해야 하는데, 수수료가 너무 비싸. 비용이 적게 드는 안전한 방법이 있었으면 내가 직접 해외까지 날아오지도 않았겠지."
"대충 얼마나 드는데?"
"엄청 비싸. 200억을 환전 하려면 시간도 시간이고···. 암튼무리야. 그건 하지 마. 중간에 배달사고 나면 답도 없으니까."
"배달 사고?"
"세탁하는 돈은 대개가 출처가 불확실하잖아. 중간에서 누군가 딴 마음먹고 빼돌리면 찾을 수도 없어. 너무 위험부담이 크다고."
도훈은 잠시 생각하다 혼자서 중얼거렸다.
"혹시나 누가 중간에 장난질 하면 찾아서 죽여 버리면 되는데 ···."
"뭐, 뭐라고?"
"아니야. 아무튼 당장 돈을 보낼 방법이 마땅치 않으면 그냥 빼지만 마. 분명 강한 반등이 다시 올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난 분명히 너한테 경고했다?"
"걱정마. 그 돈 없어도 안 죽으니까. 근데 누나는 계속 거기 있을 거야? 코인까지 다 사들였으니 이제 한국 와도 되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내일 귀국하려고 비행기 티켓 끊어 놓고 기다리던 중이었어. 못했던 쇼핑도 좀 하고. 근데 오늘 장이 폭락하는 바람에 내 일정까지 엉망이 됐다고. 아으, 병원에서 몇 년 만에 준 장기휴가였는데."
"미안. 대신 보상은 확실히 해줄게. 귀국할 때 연락해."
"알았어. 일단은 차트 좀 보고 있을게. 대응해야 하니까."
"대응할 필요 없다니까 그래? 신경쓰지 말고 푹 쉬어."
할말은 마친 도훈은 무심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하룻밤만에 200억 가량 날린 사람이라곤 믿기 어려울 만큼 덤덤한 표정이었다.
[주인님, 진짜로 괜찮으십니까? 소영양 말대로 패닉으로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니죠?]
'로시, 까불지마. 난 지금 현자야.'
[아니, 아무리 현자라도 코인의 방향성을 맞추진 못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투자에 자신이 있었으면, 현자 타임 스킬 써서 직접 하셨어야죠.]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지. 국내에서 무슨 수로 500억짜리 계좌를 트고 코인에 옮긴다는 거야? 그 정도 금액이면 무조건 당국에서 추적 들어간다고.'
[그렇게 따지면 어차피 소영양이 대신 만든 계좌도 추적당하긴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니지. 이건 애초에 계좌가 외국에서 만들어진 거잖아. 우리 나라 금융당국에서 보면 '외인'으로 취급된다고. 외인 계좌를 무슨 수로 깔거야? 범죄 연루 의혹이 없으면 협조도 안들어 줄텐데.'
[근데 정말 자신있으십니까? 코인이 다시 오를 거라고 확신하시나요?]
'아니?'
[네? 아니 그럼 방금 소영양에게 했던 얘기는···.]
'내 말은 세상에 100% 확률이란 없다는 소리야. 그건 누구라도 마찬가지지. 대세 하락이라던 소영이도 막상 하락에 쉽게 베팅을 못 하잖아. 혹시라도 반등해서 청산 당하면 그땐 정말 쪽빡차는 거니까.'
[그럼 무슨 근거로 반등을 확신하셨던 건가요?]
'확률이지.'
[확률요?]
'그래. 확률적으로 반등이 세게 온다고 판단했어. 물론 내가 틀릴 수도 있지. 갑자기 지구적인 천재지변이 난다거나, 전쟁이 벌어진다거나, 혹은 그 밖에 여러 이유로든. 근데 그럴 확률보다는, 조정을 마친 코인이 한 번 더 날아갈 확률이 더 커보였거든. 난 더 승률이 높은 게임에 베팅한 것 뿐이야.'
[하-. 게임이라고 말하기엔 금액이 너무 크지 않습니까? 수백억을 잃을 수도 있는데.]
'수백억을 벌려는 사람은 혹시 모를 손실을 두려워해선 안 돼.
분석이 끝나면 판단에 모든 걸 걸어야지. 그게 맞아.'
[흐음, 현자 타임이 맞기를 빌어야 겠군요.]
잠시 후 현자 타임 스킬이 끝난 도훈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으, 으윽!"
너무나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킨 후유증에 머리가 빠개질 것 처럼 아파 왔다. 어찌나 골이 울리는 지 균형을 잡지 못할 정도였다.
도훈은 겨우 소파로 가 쓰러졌다. 그리고는 내리 3시간을 넘게 잠에 빠져들었다.
* * *
"젠장. 식욕마저 없어질 줄이야."
혼자 저녁에 밥을 먹는 도훈은 무기력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떴다. 현자 타임이 끝나고 밀려온 후유증은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성욕은 물론, 식욕까지 감퇴되었고,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이번에 너무 머리를 많이 쓰신 것 같습니다. 정신력 소모가 극심했기 때문에 한동안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으으. 젠장. 이럴 줄 알면서도 현자타임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다시 생각해도 아찔했다.
코인에 투자한 자산의 절반 가까이가 실시간으로 타들어가는 상황. 맨정신이었으면 거의 졸도할 뻔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현자 타임 상태로 변한 도훈은 누구보다 냉정했고, 냉철한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현자 타임이 풀린 지금은 코인만 생각해도 심장 한쪽이 아려왔다.
'젠장. 만약 내가 틀렸으면 어쩌지?'
[의심하지 마십시오. 주인님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이 대신 결정한 일이니까요.]
'그런가? 그냥 잊고 있는 게 낫겠지?'
[차라리 그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송이양 공략은 언제 재개할 예정인가요? 시간이 계속 가고 있습니다만.]
'몰라. 지금은 생각도 하기 싫어.'
도훈은 추진력을 잃은 범선 같았다. 무풍지대에 들어선 것처럼 집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멍하니 있기만 했다.
[후우-. 한동안은 개점휴업이겠군요.]
'내일 소영이 마중 나가야겠지?'
[당연하죠. 주인님 때문에 거의 한달 짜리 휴가를 쓰고 귀국하는데요.]
'내일은 좀 컨디션이 올라와야할텐데. 이대로 소영이 만났다간 나한테 엄청 실망할 듯.'
[아무 생각 없이 푹 쉬십시오. 성욕을 잃은 주인님은, 주인님 같지가 않습니다.]
'내 생각도 그래.'
도훈은 모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푹 쉬었다.
다음날 학교를 가서도 조용히 공부만 했다.
오후쯤 되자 현자 타임의 후유증이 제법 가셨는지, 도훈의 얼굴이 생기를 띠었다.
'인천 공항 8시 도착이라는데? 지금쯤 출발해야 할듯.'
[컨디션은 회복하셨습니까?]
'100%까진 아니지만 80%는 올라온 거 같아.'
[그나마 다행이군요.]
도착시간에 맞춰 인천공항으로 출발하던 도훈은, 불쑥 한송이 생각이 났다. 하루를 허무하게 날린 탓에 이제 공략 시간은 4일로 줄어 있었다.
'내일 다시 상담 잡아야겠어.'
[한송이양 말씀이시죠? 근데 송이양이 또 올까요?]
'당연히 오지. 아마 그때 내 손 맛을 잊지 못하고 있을 걸?'
[상담을 빙자한 못된 손장난 말씀입니까?]
'응. 송이는 타고 나길 강한 성욕이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 억눌려 있는 상태야. 그러니 명분만 생기면 충분히 스스로를 내려놓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상담을 빙자한 추행을, 송이양이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다고 봐야지. 남자의 손맛을 봐버렸으니까.'
[그렇다고 주인님을 남자로 여기진 않을텐데요? 70에 가까운 노인을 남자로 느끼는 20대 여성이 있을까요?]
'노골적으로 말하면 도구로 생각하는 거겠지.'
[도구요?]
'응. 자신의 몸을 구석구석 어루만져주는 도구.'
도훈은 목소리를 변조해 송이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윤창흠 교수님이세요?
"그래, 송이양. 다음 상담 약속을 잡으려고 전화했다네."
-다음 상담이요? 네, 언제가 시간 괜찮으세요?
"내일은 어떤가?"
-내일 수업 끝나고요? 지난번처럼 교수님 연구실로 가면 될까요?
송이는 마치 도훈의 연락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반응이 빨랐다.
그녀의 태도에 도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음, 내일은 상담장소를 바꿔볼까 하네. 학회가 있어서 오후 늦게나 돌아가거든."
-아, 그럼 어디로 갈까요?
"학교에서 하기엔 너무 늦을 것 같으니, 우리 집은 어떤가?"
-교수님 집에서요?
"요샌 따로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지 않아서 말일세. 장소가 마땅치가 않구만."
-아···.
"혹시 부담되면 송이양이 장소를 직접 골라도 괜찮다네."
-아, 아니에요. 그럼 몇 시에 찾아뵈면 될까요?
"학회가 끝나고 올라가는 길에 다시 연락 남기겠네. 정확히 끝나는 시간을 알 수가 없어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교수님.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내일 보세."
통화를 마친 도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를 너무 믿는 것 같은데. 아무 의심 없이 집까지 찾아오겠다니.'
[근데 정말 집으로 초대하시려고요?]
'왜? 원래 내가 살던 주택은 교수님 집이었잖아. 적당히 꾸미면 전혀 의심 못 할 걸?'
[하긴 그렇겠군요.]
'송이 공략도 공략이지만, 얼른 송이 과외 선생을 찾아야 하는데 말이야.'
[경찰대 출신이 아니라면 너무 복잡해 집니다. 관련 직업도 너무 많고, 그 안에서 사람을 찾는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겁니다.]
'그러니까 말이야. 차라리 이건 어떨까?'
[좋은 방법이 생각나셨습니까?]
'송이가 윤보미라는 경찰대생에게 고등학교 때 과외를 받았다고 했잖아.'
[네. 그리고 나중에 유학가면서 연락이 끊겼다고 했죠.]
'어쨌든 송이에게 그때 연락했던 윤보미의 연락처가 있다는 소리잖아. 지금은 연락이 안 되더라도 이력은 추적할 수 있겠지.'
[그렇겠군요. 하지만 당시 번호를 없애버렸으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번호를 바꿨다거나.]
'설사 바꿨더라도 범죄기록 조회를 위해 이전 사용자의 데이터베이스는 통신사에서 몇년간 지우지 않고 관리하게 되어있어. 뛰어난 해커라면 충분히 찾아낼 수 있겠지.'
[그럼 송이양에게서 윤보미의 번호만 알아내면 되겠군요.]
'그거야 식은 죽 먹기지. 송이는 지금 나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으니까.'
로시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도훈은 어느새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차를 주차하고 국제선 입국장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잠시 후 밀짚 모자에 선글라스를 쓴 여성이 등장했다.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특유의 몸매 라인과 걸음걸이를 보고 도훈은 곧바로 소영임을 알아챘다.
"누나!"
도훈이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소영을 반갑게 맞았다.
소영은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더니 도훈을 보고는 캐리어도 팽개치고 뛰어왔다.
"꺄아! 오랜만이야!"
두 사람은 입국장 가운데서 뜨겁게 포옹했다.
도훈은 풍만한 소영의 가슴을 느끼며 생각했다.
'후우-. 성욕 충전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