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1. 정체불명의 그녀-6-
옥봉사선자의 외모는 지상으로 치면 톱급 아이돌 수준이었다.
도훈은 그녀들이 알몸으로 벗겨져 있다는 말에 흥분했다가, 잠시 후 표정이 구겨졌다.
<가만. 마교 소교주인가 뭔가하는 호색한 새끼는?>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습니다."
<휴, 다행이다. 아직 박히진 않았군. 난 또 벌써 일 치른 줄.>
"…주인님?"
<아니야. 근데 지하층까지 어떻게 잠입하지?>
"오는 길에 통로를 확인했는데, 육중한 철문으로 막혀 있는 구조입니다. 그 외에 침투로는 없군요. 철문 앞에는 경호원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경호원? 혹시 전에 본 그 주방장인가?>
"아닙니다. 처음 보는 자였습니다. 한데 기도가 대단해 보였습니다. 한자리에 꼿꼿하게 서 있는데 미동도 없더군요. 복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안광이 흉흉한게 굉장한 고수로 보였습니다."
지하층 비밀 장소.
통로는 오직 경호원이 지키는 철문.
그곳을 통과하지 못하면 옥봉사선자를 따먹을 수-, 아니 구출할 수 없다.
도훈이 고심에 빠졌다.
그때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이 미친놈들이 불을 질렀다!"
"서쪽이다!"
"아니야, 동쪽이야!"
"양쪽 다 불이 붙었다고!"
도훈의 성동격서 전략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정면으로 쳐들어간 놈들은 순전히 미끼. 이번 작전의 핵심을 측면에서 불을 지르는 것이었고, 방심하고 있던 놈들은 그것을 막지 못한 것이었다.
갑자기 사방이 소란스러워지면서, 일련의 무인들이 불을 끄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좋아. 지금이 기회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도훈은 때를 기다리다 마침 앞을 지나가는 마교의 잔당 한놈을 발견했다.
"어이, 형씨."
"웬 놈이냐!"
놈이 웬 놈이냐고 묻는 순간 도훈은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주먹을 출수했다. 칠성권의 일권에 직격당하는 순간 놈의 얼굴은 그대로 주먹 모양으로 함몰되고 말았다.
푸욱-!
"오우, 깜짝이야. 찰흙인형도 아니고."
의외로 실감나는 손맛에 화들짝 놀란 도훈은 급히 시체를 어둠속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빠르게 놈의 옷을 벗겨 옷을 갈아입었다.
"뭐하시는 건가요?"
<놈들처럼 위장해서 지하로 침투하려고.>
목조 건물에 불이 붙는 바람에 불길을 생각보다 쉽게 잡히지 않았다. 불을 끄는 속도보다 불을 지른 산적들이 잡혀 죽는 속도가 더 빨랐다.
마교의 잔당인 것처럼 꾸민 도훈은 성동격서 작전을 성공시키느라 희생당하는 산적들을 보며 명복을 빌었다.
<부디 다음 생에는 다른 NPC로 태어나길.>
"뭐하시는 건가요? 병주고 약주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나 때문에 희생당했잖아.>
불길이 서서히 잡히는 기색을 보이자 도훈은 지하층 출구를 찾아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지하층은 처음 건물을 만들 때부터 설계가 된 듯 조잡하지 않고 무척 견고한 형태였다.
"넌 뭐야?"
지하층을 지키고 있던 마교 부하 한놈이 도훈에게 물었다.
"위에 불이 나서 소교주님께 상황 보고 드리려고 왔습니다."
"서 총관은 뭐하는데 너 같은 조무래기가… 응? 근데 넌 처음보는 얼굴인데?"
"네?"
"고개를 들어봐."
도훈은 고개를 드는 순간 곧바로 출수했다.
그 소매에 감춰져 있던 비수가 빠른 속도로 날아가 마교 부하의 목덜미에 박혔다.
푸욱-!
"커, 커헉!"
놈은 주변에 경고를 하려고 했으나 성대를 찔리는 바람에 꺽꺽거리는 소리만 겨우 낼 뿐이었다. 도훈이 빠르게 다가가 그의 입을 손아귀로 틀어막았다.
"푹 쉬라고 친구."
바둥거리던 놈은 이내 호흡이 끊어진 듯 축 늘어졌다.
<경호원이 지키는 곳이 어디라고?>
"지하 2층 철문입니다. 근데 주인님 살인을 너무 쉽게 저지르시는 것 아닙니까? 일전에 박회장의 부하들과 싸울 때는 주저하는 것 같더니."
<그때야 사람 죽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해야지. 그건 정당방위였잖아. 나를 죽이려던 놈들을 죽인거니까.
그리고 애들은 어차피 가상이라는 걸 아니까 죄책감이 없는 거고.>
"가상 현실이라고 해도 오감은 똑같이 작동합니다. 살인을 너무 쉽게 저지르다보면 현실에서도 무감각해질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오케이. 그건 유념하지.>
조용히 보초를 처리한 도훈은 발소리를 죽여 지하 2층으로 향했다. 소교주 호위무사의 무공이 고강하다 하였으니,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차라리 기습을 할까? 멀리서 비수를 던지면 한방에 끝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2층의 구조는 일직선으로 된 통로 형태입니다. 계단을 내려가 시면 정면으로 마주칠 겁니다."
<귀찮게 됐군. 불가피하게 정면 대결을 펼쳐야 하나?>
"조심하십시오. 주인님의 내공이 단기간에 폭증하긴 했지만, 이곳 세계에서 어디까지 통할지는 모르니까요."
<놈과의 대결이 내 실력을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되겠어.>
도훈은 곧바로 검을 뽑았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처음부터 전력으로 승부를 걸 생각이었다.
스릉-
묵빛의 검이 뽑혀 나왔다.
주변의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새까만 검신이 인상적이었다.
<이야, 게임 속 아이템이라기엔 너무 아까운 검인데.>
"실제로 존재하는 보검일수도 있습니다."
<실제한다고? 묵향이?>
"네. 게임 제작자들은 실제 아이템을 착안해서 디자인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호오라.>
"경우에 따라선 마켓에서 판매 중인 물품목록을 그대로 불러오기도 합니다. 게임 제작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요."
<신기하구만. 이 게임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정말로 궁금해지기 시작하는데.>
도훈이 계단을 내려가자 10M 전방에 복면인이 전투태세를 갖췄다. 등 뒤에서 빠르게 검을 뽑아드는데, 그 기세가 무척이나 흉흉했다.
"너네 소교주에게 용건이 있어서 왔다."
"침입자는 오랜만이군."
"그러니까. 심심할까봐 놀아주러 왔지."
"죽이기 전에 미리 묻겠다. 어디서 보낸 놈이냐? 자혈단인가?
아니면 흑풍대?"
"?"
도훈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쟤 뭐래는 거냐? 보통 마교를 습격하면 정파쪽에서 보냈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 아니야?>
"아무래도 마교 내부에 권력 다툼이 있나 본데요?"
<아하, 놈이 마교 소교주랬지? 설정보소?>
도훈은 게임의 목적을 떠올렸다. 마교가 지닌 비급을 훔치는것. 그렇다면 현재의 정확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눈치가 빠르군. 흑풍대 소속이다."
"흑풍대 장 노인네가 마침내 노망이 들었구나. 마교의 적통은 오직 장자이신 소교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르신단 말인가!"
"뭐? 여색이나 탐하는 너네 주인?"
"닥쳐라!"
"대충 탐문해 보니 기가 막히더구만? 이번엔 옥봉사선자를 납치하셨던데? 정파의 분노를 어찌 감당하려고?"
"눈하나 깜빡 할 것 같나? 우리의 마교는 결코 약하지 않다."
"그러니까 네놈이 사창가 기도처럼 소교주 떡치는 데 문지기나 서고 있는 거야."
"이, 이!"
냉정하던 놈의 안광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살기를 내뿜는 것이었다.
도훈도 이에 질세라 똑같이 기세를 끌어 올렸다. 현실 세계에서 통하던 살기가 얼마나 먹힐지도 궁금했다.
"뭐? 쳐다보면 어쩔 건데?"
살기 어린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눈에서 레이저를 쏘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도훈이 내공을 응축해 폭발시키자 어마어마한 살광이 뿜어져 나왔다. 심지가 약한 사람은 그대로 주저앉아 똥오줌을 갈길수준이었다.
"크흑, 장 노인네가 대단한 자객을 길렀구나. 네놈 같은 고수가 있다는 소리는 듣도보도 못했는데."
복면인이 기에 눌린 듯 결국 시선을 회피했다.
도훈은 그 순간 자신의 내공이 복면인보다 강하다는 걸 직감했다.
<내가 이긴거지?>
"눈 싸움 1승 감축드립니다."
<장난하지 말고. 놈이 먼저 꼬리를 내렸잖아.>
"주인님의 내공이 더 고강한 것은 증명된 것 같습니다."
<에이, 괜히 쫄았네. 그냥 썰어버리면 되는 건가?>
"하지만 대결이란 결코 내공의 우위로만 결정되진 않는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그거야 당연하고.>
타다닷!
복면인이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달려들었다.
내공의 열세를 깨닫자 기습을 통해 주도권을 잡으려는 시도였다. 도훈도 이에 굴하지 않고 검을 들어 대비했다.
쳉-!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검격이 오고갔다.
도훈은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동작에 스스로 놀랐다.
<오잉? 검술을 배우지도 않았는데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데?>
"일종의 보정 효과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인님의 무공 능력이 게임 내 캐릭터에 맞춰 검술 능력으로 치환된 것이지요."
<오호라. 이건 좀 마음에 드네.>
도훈은 일전에도 검술의 궁금이란 권각의 사거리를 늘린 것이라는 깨달았다. 이를 떠올리자 도훈은 자신이 익힌 칠성권을 검술에 적용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으랏차!"
빠른 속도의 공격에 수세에 몰리던 도훈이 칠성권의 초식을 응용해 강하게 검을 내리쳤다.
차캉-!
묵직한 위력에 놀란 복면인이 뒤로 물러서자 도훈이 연이어 2타를 몰아쳤다.
깡!
이번에는 현격히 힘이 밀리는지 검을 마주댄 복면인이 두 세걸음 물러났다.
"이, 이것은 무슨!"
도훈은 검격이 힘이 배가되는 것을 보고 칠성권을 검술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놀랐나? 다음에도 한 번 막아 보시지."
깡!
3타의 공격은 2타의 두배!
곱절로 위력이 강해지는 칠성권이 묵향을 통해 발현되고 있었다.
복면인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가까스로 검을 세워 막았다.
그러다 몽둥이에 얻어맞은 것처럼 발이 주르륵 미끄러지며 벽에 등을 지고 말았다.
"마, 말도 안되는!"
"이게 바로 칠성검이다!"
도훈이 방금 창안한 검술의 이름을 읊으며 4격을 휘둘렀다.
몸통을 좌우로 쪼깰 듯 내리찍은 검은 복면인의 검을 부러뜨리더니 살짝 비켜나가며 오른쪽 어깨죽지 아래로 떨어졌다.
"크흑!"
검은 견갑골을 부러뜨리고 한뼘 가까이 살을 파고들었다.
칠성검의 무시무시한 위력에 복면인이 가까스로 말했다.
"으윽, 이, 이런 검술이 대체 어디서…!"
"몰랐나? 비밀서고에 있던데?"
"흑풍대가 기어코 마교를 잡아먹는 구나. 선대 교주가 주화입마에만 빠지지 않았어도 결코 네놈들이! 쿨럭!"
복면인의 복면이 피로 물들었다.
아래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면은 실감나다 못해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미안하지만, 이제 잠들라고."
그때였다.
죽어가던 복면인이 씨익 웃는 것처럼 눈매가 비틀린 것은.
"주인님! 위험합니다!"
"응?"
"푸하하학-!"
갑자기 죽어가던 복면인이 복면을 끌어 내리더니 입안에 가득 고인 피를 도훈에게 내뿜었다. 도훈이 빠르게 뒤로 물러나 피했으나, 몇 방울이 얼굴에 튀고 말았다.
"아씨, 이 자식이!"
화가 난 도훈이 어깨에 박힌 검을 뽑아드는 순간 놈의 생명이 끊긴 것처럼 풀썩 쓰러졌다. 도훈은 반사적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하지만 그 순간 혈향이 콧속으로 파고 들었다.
"주인님! 호흡을 멈추십시오!"
<뭔데?>
로시의 조언에 도훈이 급하게 호흡을 중단했으나 이미 혈향을 어느정도 흡입해버린 직후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도훈의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내 몸이 왜 이래?>
"음독입니다. 죽기 전 놈이 어금니에 장착했던 독극물을 깨물어 피에 섞어 주인님께 뿌린 것입니다."
<뭐라고? 아씨, 히드라 새끼도 아니고.>
도훈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기 위해 묵향을 바닥에 꽂으며 지탱했다. 하지만 온 몸에 점점 힘이 빠져 나중에는 똑바로 서 있을수도 없었다.
<젠장! 방심해버리다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도훈은 결국 통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신체 스캔을 통해 독극물의 성분을 분석중입니다. 잠시만 참으십시오."
도훈은 점점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술에 잔뜩 취한 것처럼 얼굴이 벌게지더니 온 몸에 열기로 인해 땀이 수증기처럼 피어 오르는 것이었다.
"크흑, 내 몸이 왜 이러지?"
도훈은 결국 운기조식을 통해 독극물을 몰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내공을 돌릴수록 점점 증세가 심해져왔다.
수증기까지 피어올랐던 체온이 차갑게 식어가더니 이제는 이까지 떨릴 정도로 몸을 떨기 시작했다.
"로, 로시 아직 멀었어?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중이라고. 아니, 지옥탕하고 북해 빙수에 입수한 느낌이야!"
"주인님! 운기조식을 당장 중단해야 합니다!"
"중단하라고?"
도훈이 급히 운기를 중단했지만, 이미 하단전의 내공이 온 몸을 돌고 있었다.
"주인님이 중독된 극독은 환각상태를 일으키는 물질입니다. 온몸의 체온이 뜨겁고 차갑기를 거듭하고 나면, 환각이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운기 조식은 그 속도를 더 빠르게 만들고요!"
"뭐라고?"
그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갑자기 드르릉-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주저앉은 도훈은 감히 일어나 대처할 생각도 못하고 겨우 고개를 들어 문을 열고 나온 상대를 마주 보았다.
'저, 저자가 마교의 소교주?'
그러나 도훈은 눈을 비비고 다시 볼 수 밖에 없었다.
호색한이라던 소교주가 엄청난 미녀였던것.
"호오, 대단하구나. 마령을 해치우다니."
목소리는 간들간들한 것이 옥구슬이 쟁반을 굴러가는 느낌이었다. 도훈은 자신이 벌써 환각에 취했다고 생각하고 로시에게 물었다.
"뭐야, 나 지금 중독 상태인거야?"
"네? 주인님? 지금 어딜 보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로시? 로시 어딨어?"
로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상대가 조금씩 도훈을 향해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