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0. 정체불명의 그녀-5-
"네?"
"아니야. 혼잣말한 거니 대꾸하지 않아도 된다."
"넵."
"이봐 두목."
"네?"
"배고픈데 먹을 것 좀 가져와봐."
"머, 먹을 것이라면."
"너희들도 뭔가 먹고 살 거 아니야? 안 그래?"
일전에 기억을 떠올려보면 주막에서 마신 술과 음식은 실제와 똑같았다. 심지어 일정량을 먹으면 포만감까지 주었는데, 어떤 방식을 응용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게임에서의 모든 행위가 현실과 똑같이 적용되는 것 같았다.
"아,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눈 주위가 시퍼렇게 부은 산적 두목이 허겁지겁 달려나갔다.
두목의 초소에 홀로 남은 나는 뭔가 확인해 볼게 생겼다.
'가만. 모든 것이 현실과 똑같다면 설마?'
오감이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다. 즉, 여기서 섹스를 해도 현실의 섹스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이다.
나는 곧바로 바지춤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묵직한 대물이 만져졌다.
천천히 주무르는데 별안간 후끈한 느낌과 함께 대물이 발기되기 시작했다.
"서, 선다!"
"저, 술도 같이 올릴…. 아앗, 죄송합니다! 못 봤습니다!"
난데없이 돌아온 산적 두목은 혼자서 대물을 주무르는 나를 보더니 부리나케 도망쳤다.
'아씨, 좆됐네.'
그때 허공에서 팅커벨을 닮은 요정이 떠올랐다.
날개가 달린 조그만 몸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예쁜 요정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로시?"
"네."
"가능."
"뭐가 가능인가요?"
"아, 아니야. 근데 이렇게 불쑥 게임속으로 등장해도 되는 거야?"
"저의 모습은 주인님만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제 목소리도요."
"오호, 신기하군. 요정 모습은 이렇게 생겼구나."
손을 뻗어 요정의 몸을 붙잡으려는데 그녀는 유체화가 된 것처럼 허공을 스쳐 지나갔다.
"오잉?"
"물론 만질 수도 없습니다. 일종의 유령과 같은 상태랄까요?"
"아하, 불가능이구나."
"아니 주인님 지금!"
"그게 아니라 궁금한게 생겼어. 방금 확이했는데 여기선 발기가 되는데?"
"맞습니다. 신벌은 현실계의 주인님의 신체에 내려진 것이지, 가상에서의 주인님께 내려진 게 아니기 때문이죠."
"오오오! 그럼 여기선 폭풍섹스 가능하다는 거야?"
"주인님은 지금 19금 게임에 들어오신게 아닌데요?"
"그렇긴 한데…."
물론 게임의 목적은 무공의 비급을 찾는 것이다.
보상 또한 실제로 무공 비급을 준다고 했다. 하지만 음식의 식감마저 완벽하게 구현되는 가상 현실에서 19금이 행위라고 다를 리가 없다.
기왕 산채까지 차지한 김에 진짜로 산적두목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삶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악당이 되어 볼까?"
"네? 갑자기 악당이요?"
"왜, 어차피 게임 속이잖아. 길가는 유부녀 희롱하고 양갓집 규수나 따먹고 다녀도 충분히 재밌을 것 같은데. 현실에서 써먹지도 못한 대물 실컷 휘두르는 거지."
"역시 주인님은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시는 군요. 인벤토리를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인벤토리?"
"말로 안 하시고 생각만 하셔도 됩니다."
인벤토리라고 외치자 한쪽 귀퉁이에 게임속 아이템창처럼 보이는 창고나 나타났다. 기본적인 소지품이 도트 그래픽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일전에 한번 봤기 때문에 그렇게 신기하진 않았다.
"근데 이건 왜?"
"메뉴를 확인해 보시면 카운트되는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메뉴?"
손을 뻗어 상단에 있는 메뉴를 누르자 진짜로 시간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게 뭐야?"
"다음 퀘스트까지 남은 시간입니다."
"시간? 뭐야 이거 타임 어택이었어?"
"네. 플레이어가 일정 시간까지 해당 퀘스트를 종료하지 못하면 자동으로 게임이 종료되도록 설정되어 있습니다."
"아앗! 무슨 이딴 규칙을!"
"주인님처럼 자꾸 게임 목적과 다르게 딴짓을 생각하는 플레이 어가 많아서 넣은 강제 옵션입니다. 예전에 어떤 플레이어는 잔뜩 포인트를 쌓아와서는 게임 속에서 일생을 보내기도 했거든요."
"뭐라고?"
"과거 몇몇 플레이어들이 면벽수련이라는 미명 하에 실제로 오랜기간 게임속에 빠져 있기도 했습니다. 아예 폐관 수련이라고 해놓고 몇 년식 게임을 바꿔가면서 플레이하기도 하고요. 실제로 3년만 폐관을 해도 몇 번씩 인생을 되풀이 할 수 있거든요."
"헐!"
남은 시간은 24시간에서 조금 모자랐다.
즉, 내가 게임을 시작한지 하루 안에 다음 퀘스트로 넘어가지 않으면 자동으로 게임이 종료된다는 뜻이었다.
"유희니 뭐니 집어치우고 닥치고 게임의 목표에 집중하라는 소리구만. 여유를 부릴 시간도 없겠네."
"퀘스트와 퀘스트 사이 시간이 계속 늘어나는 구조기 때문에 조금씩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설마하니 게임 제작자도 들어오자마자 딴 생각을 품을 거라곤 예상 못 했겠지만요."
"오케이."
그때 산적 무리들이 커다란 상을 대령해 왔다.
온갖 음식이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져 있었는데, 상이 어찌나 큰지 두 사람이 좌우에 들고 올 정도로 음식이 많았다.
"뭐냐 이게?"
"시, 식사를 대령하라고 하셔서."
"그게 아니라 너희들 이렇게 잘 먹고 사는 거였어?"
"네, 통행료 수입이 쏠쏠하다 보니…."
나는 혹시나 생각이 미쳐 물었다.
"여자는?"
"네?"
"아니 돈도 뺏고 여자들 겁탈하고 그런 거 아니야?"
"저희는 돈만 받고 인질은 풀어 줍니다. 딱히 가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요."
"하-. 이 새끼들 진짜 근본도 없는 산적놈들이네."
혹시나 여자 포로가 있을까 물어봤지만 역시나였다.
"아니 주인님.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농담 좀 한 거야."
"네?"
나와 로시 사이의 대화를 전혀 들을 수 없었던 산적이 놀라서 물었다. 자기들끼리 눈짓으로 주고 받는 걸 봐선 나를 여전히 광인으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됐고, 나가봐."
"아, 알겠습니다. 근데 저희는 이제 무엇을 할까요?"
"무엇을 하다니?"
"새로 두목님을 모셨으니 이제 새로운 임무를 주시지 않을까 해서…."
어느새 놈들은 나를 두목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긴, 약육강식이 통용되는 곳이기 때문에 곧바로 서열이 정리 된 것이었다. 이전의 두목은 부두목 행세를 하고 있었다.
"두목님 식사도 하시기 전에 무슨 짓들이냐. 썩 물러가라."
"아니야. 잠깐만."
"네?"
"해야 할 일이 생각났어."
"뭐, 뭡니까?"
"우린 객잔을 친다."
"개, 객잔이라면…. 서, 설마 용문 객잔 말씀입니까?"
"어. 저녁에 쳐들어갈테니까, 미리 한 숨 푹 자두라고 해."
마교의 지부를 습격하겠다는 소리에 부두목을 비롯한 산적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두, 두목 거긴 아까 말씀드렸듯이 마교의…."
"그래서? 싫으면 내 손에 뒤지던가."
나는 묵빛 장검을 뽑아 그대로 허공으로 날렸다.
장검은 일직전으로 날아가더니 산채의 대들보에 자루만 남기고 쑥 박혀버렸다. 두꺼운 원목으로 만든 나무에 장검이 뿌리까지 박히는 모습은 내가 봐도 놀라울 정도였다.
"허, 허헉!"
"아, 알겠습니다 두목. 준비 시키겠습니다!"
무력시위에 겁을 먹은 산적들이 머리를 바짝 조아리며 물러났다. 로시가 내 머리 위를 위성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말했다.
"무슨 생각이세요, 주인님?"
"뭐가?"
"아니, 산적들을 데리고 객잔을 쳐들어간다니요? 저들이 무슨 도움이 된다고."
나는 상차림에 올라온 백숙을 뜯으며 말했다.
"혹시 성동격서라고 들어봤어?"
"네?"
* * *
밤이 되자 용문산에 자리잡은 산적 때들이 검은 복장을 하고 산자락 아래로 내려왔다. 대략 스무명 정도의 인원들은 저마다 복면을 쓰고 험상궂게 생긴 무기를 쥐고 있었다.
맨 앞에서 복면을 쓴 도훈이 말했다.
"다들 잘 들어라. 언제까지 산속에 숨어서 거지처럼 살 것이냐? 우리도 이제 산 아래로 세력을 확장해 녹림의 힘을 보여줄 것이다."
"……."
"죽고자 하면 살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는다. 나만 따라와."
"……."
"대답 없어?"
"아, 아닙니다!"
"오늘 밤, 우린 용문 객잔을 빼앗는다. 드가자."
"네, 넵!"
도훈의 협박에 굴해 산 밑으로 내려가는 산적들은 모두 죽을 상이었다. 아무리 도훈이 일신에 강력한 무공을 지녔다고 한들, 거대한 마교 세력의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마교는 개개인의 무력도 무력이지만, 집단 전체가 마피아처럼 피의 보복을 하는 단체였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개죽음을 예감한 부두목은 속에 쥔 곡도로 도훈의 뒤통수를 내리찍고 튈까 몇 번을 고민했다. 하지만 도훈은 그가 움찔하기만 했는데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혹시나 딴생각 품는 새끼들은 그냥 내손에 죽는 거야. 나한테 죽을지 마교놈들하고 싸우다 죽을지만 선택하면 돼."
"…네, 넵!"
객잔으로 다가갈수록 도훈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여전히 요정으로 변한 로시가 주변에서 알짱거렸다.
"정말 이 방법이 먹힐까요?"
<일단 시선을 끌 순 있겠지.>
"갑자기 웬 전음이신가요?"
<네 목소리는 다른 사람이 못들어도 내 대답은 다른 놈들이 들을 수 있거든. 아까부터 계속 혼잣말 하니까 나를 미친놈 취급하더라고.>
"게임 속에 들어온 직후부터 주인님은 살짝 미친 것 같긴 합니다만."
"죽을래?"
"네?"
"사, 살려주십시오."
도훈의 말에 갑자기 한 산적이 칼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겁이 나서 바지에 오줌을 지렸는지 바지위가 축축했다.
"하- 새끼, 쫄기는. 난 계획대로 뒤로 돌아갈테니까 정면에서 공격하라고. 측면조는 불부터 지르고."
"네, 넵!"
"쫄지마. 오늘 전투만 승리하면 더이상 산속에서 풍찬노숙과 이별이니까."
물론, 그 전에 세상과 이별할 확률이 높겠지만.
이라는 말은 도훈은 굳이 하지 않았다.
객잔의 뒤로 빠르게 돌아간 도훈은 정면에서 산적들이 공격하길 기다렸다. 귀를 쫑긋 세우니 부두목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 여기는 이제 우리 구역이다! 세금을 바쳐라!"
떨리는 음성으로 소리치는 부두목은 누가봐도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이것들은 뭐하는 잡것들이야?"
동시에 상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야밤인데도 누군가 곧바로 대꾸를 한 걸 보면, 객잔 주제에 보초까지 세워두는 모양이다. 비밀 지부 티내는 것도 아니고.
앞에서 투닥거리게 넵두고 나는 곧바로 객잔의 뒤편에서 담장을 넘었다. 한팔로 담을 짚고 훌쩍 뛰어오르는데 바닥에 닿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우시네요."
<내가 우리집 담장을 넘은게 이때를 위해서였다고.>
"갖다 붙이진 마시고요."
<너 자꾸 쫑알거리면 인벤토리에 넣어 버린다.>
"아앗, 주인님 누군가 옵니다."
<응?>
정말이었다.
앞에서 옆구리에 칼을 찬 사내 둘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객잔은 전체적으로 3층 정도의 목조 건물이었는데, 식당겸 모텔을 겸하다보니 규모가 상당했다.
나는 어둠속에 몸을 숨기며 놈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용문산 산적 때 놈들이 정문으로 쳐들어왔다는데 안 가봐도 되려나?"
"돌았군. 됐어, 문지기 선에서 그냥 처리될 건데 뭐하러. 요새 영업이 잘 안되는 모양이야. 하긴 사람이 배고 고프면 눈에 뵈는 게 없는 법이거든."
"개방 놈들처럼 대놓고 동냥이라도 했으면 몰라. 멍청하면 용감하다더니 제 발로 고깃감 되러 왔구만 껄껄."
"으으, 산적 놈들로 만든 만두는 먹고 싶지 않은데."
숨어서 대화를 엿듣고 있던 도훈은 순간 살의가 피어 올랐다.
<미친놈들 아니야? 인육 먹는 걸 무슨 농담삼아 얘기하다니. 게임 만든 새끼 완전 또라인가?>
"저들은 설정에 충실할 뿐입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니 너무 분개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암튼 역겨워 죽겠군. 한 번만 더 저딴 소리하면 그냥 목을 따버려야지.>
"아참, 그 야들야들한 미녀들은 어떻게 하기로 했지?"
"옥봉사선자 말이야?"
"어. 월척이 걸려들었지 뭐야?"
"옥봉에 육봉 박히게 생겼지 뭐. 소교주님이 워낙에 호색한 이 어야지. 미혼약을 잔뜩 먹여서 재웠다던데, 아마 깨어나면 탈탈 털리고 있을 걸."
"부럽네, 쩝. 하나같이 미인이던데."
"미혼대법에 당하면 별수 있나. 나중에 별궁에서 소교주님 시중이나 드는 신세로 전락하는 거지."
<옥봉 사선자가 생포당한 모양인데?>
"그런가 보네요. 고강한 무인이라도 미혼약 앞에선 별수가 없군요."
<나도 한번 당했잖아. 저거 진짜 먹으면 힘이 쭉 빠져서 정신 못차린다니까?>
"이제 어쩌실 계획입니까?"
<용사라면 당연히 미녀를 구해야지.>
"퀘스트 깰 생각은 있으신거죠?"
<어차피 옥봉인지 육봉인지 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교 퀘스트로 넘어가지 않겠어? 그나저나 소교주라는 놈은 누구지? 그때 그 주방장은 아닌 것 같은데?>
"아마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제가 한 번 보고 올까요?"
<오잉? 그게 가능해?>
"당연하죠. 저는 누구에도 보이지 않고, 장애물 없이 이동하는 게 가능하니까요."
도훈은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얼래? 완전 무인 드론이네?>
"네?"
<아니야. 정찰 좀 해줘. 기다리고 있을 게.>
"넵!"
로시가 날개를 퍼덕이더니 벽을 뚫고 사라졌다.
유체화를 쓸 수 있다는 게 저렇게 유용할 줄이야.
잠시 후 요정 로시가 지면을 뚫고 땅속에서 튀어나왔다.
<흐익, 놀랐잖아? 왜 밑에서 나오는데?>
"주인님. 객잔에 지하층이 있었습니다!"
<지하층?>
"네. 감옥처럼 설계되어있는데 거기 옥봉사선자가 묶여 있습습니다."
<거기 있었구나!>
"저 근데… 알몸이던데요?"
<역시, 겜잘알! 업계 포상을 준비해 놓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