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9. 정체불명의 그녀-4-
[숙제요? 업적이나 미션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전에 말씀드렸듯이 아직 여유가 있습니다. 굳이 신벌을 받는 상황에서 무리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요?]
'좆도 안 서는데 업적은 무슨 업적? 실패하면 개쪽인데.'
[그게 아니면 주인님께 남은 숙제라는 게 무엇인가요?]
'왜, 축제 때문에 미뤄 둔 것 있잖아.' 집에 도착한 도훈은 담벼락 옆에 차를 대고 곧바로 담장을 뛰어 넘었다. 도둑으로 오해할 법한 행동이었으나, 도훈에게는 굳이 대문으로 돌아 들어가는 것조차 귀찮았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함부로 담장을 넘으십니까?]
'어차피 날 따라 하지도 못할 건데 뭘.' 도훈의 말은 사실이었다. 단독주택의 담장은 무려 2M가 넘었는데, 도훈은 가벽게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써전트 점프만으로 3M를 훌쩍 뛰어넘은 것이었다.
특히 무릎을 굽히는 등 예비동작도 없이 붕- 떠오른 것이라, 얼핏 보면 몸을 실로 매달아 들어 올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물론 발목을 살짝 굽혔다 펴는 동작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말도 안 되는 신체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주인님의 무공이 날로 고강해지는군요.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괄목상대가 이런 것이랄까?'
[미호에게서 얻은 막강한 내공 덕분 아닙니까?]
'가끔 나도 놀란다니까? 단기간에 너무 강해져서.' 도훈은 1층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또다시 점프를 통해 2층의 테라스에 올랐다. 담벼락을 뛰어넘어 2층 테라스까지 도약하는 일련의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서 마치 무협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현대에 무림 고수가 존재한다면 딱 도훈과 같을 것이다.
[한데 2층에는 왜요?]
'아직도 모르겠어? 아까 말했던 숙제 말이야. 체력단련실에서만 할 수 있거든.'
[아아! 천상 크래프트에 들어가시려는 거군요!]
'빙고. 지난번 일주일 재접속 불가 페널티는 끝났을 거야.' 도훈은 마지막 도전 때 음독에 빠지는 바람에 첫 번째 주막에서 사망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연속 사망의 페널티로 일주일 재접속금지를 받았으나 축제 기간을 거치면서 자연히 접속금지가 풀렸고, 그 사이 가상세계에서 사용할 포인트까지 쏠쏠히 적립해 놓은 상태였다.
'현실에서 미션 수행이 불가능하면 가상으로 옮기면 되는 거잖아? 이게 요새 유행하는 메타 버스같은 건가?'
[무슨 버스요?]
'암튼 그런 게 있더라고.'
2층 베란다 문을 열고 체력단련실로 들어온 도훈은 한 가운데서 가부좌를 틀었다.
'로시. 내가 가상 현실에 접속하는 동안은 호법 부탁해.'
[알겠습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강제로 주인님을 깨우겠습니다.]
'그래.'
도훈이 눈을 감더니 천상크레프트에 접속했다.
이번만큼은 쉽게 죽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 * *
"합방 상대는 구했어?"
"응, 오빠. 저번에 말했던 친구 있잖아. 나랑 이름 비슷하다는."
"누구? 설마 백송은? 야, 걔는 좀 아니지."
"왜? 송은이가 얼마나 착한데."
"그게 아니라…. 솔직히 사람 없는대서 험담하는 거 싫어하는 건 아는데, 걔는 좀 천박하던데."
"오빠!"
"아니. 그냥 남자가 느끼기에 말이야. 너도 알잖아. 걔가 별풍하나 받아보려고 얼마나 옷을 야하게…."
"그런 소리 하지 마. 나름 열심히 사는 친구니까."
한송이가 정색하자 그녀의 오빠인 한승훈이 두 손 들고 물러섰다. 동생이 워낙 고집이 센 편이라 말싸움 해봐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결정을 고민하는 중이면 모를까, 이미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 알았어.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대신 의상 좀 신경써달라고 해줘. 괜히 너까지 이미지 망가질라."
"송은이가 알아서 할 일이야. 난 송은이 결정을 존중할래."
"어휴, 참. 네 알아서 해라. 네 방송이니까."
승훈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스튜디오 밖으로 나갔다.
인기 BJ인 동생의 매니저를 자처하며 살아온 지 어언 6개월.
하꼬에 불과했던 그녀가 인터넷 검색창에 연예인보다 윗줄에 나오게 될 정도로 유명해진 건 순전히 동생 스스로의 역량 덕분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동생의 선택은 늘 옳았다. 무리하다고 생각했던 콘텐츠도, 소속사에서 제발 말려달라고 부탁했던 콘텐츠도 결과는 늘 정반대였다.
계속된 연전연승에 소속사는 더 이상 동생을 터치하지 않았다.
승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 송이가 나름 생각이 있겠지.'
소속사가 제공한 방송 스튜디오 건물 밖으로 나온 승훈은 간만에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지방 3류 대학을 나와 취직도 못 하고 알바를 전전하던 그를 구원한 것이 바로 동생이었다.
솔직히 송이에게 매니저는 불필요할지도 몰랐다. 자신이 하는 일이라곤 가끔 송이에게 과도하게 달려드는 극성팬들을 밀어내는 게 전부.
그것은 자신보다 덩치도 좋고 힘 센 남자 아무나 뽑아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가족기업이라도 월급 500씩이나 받을 필요는 없었다.
'참, 대견하단 말이지.'
승훈이 담배를 피우며 생각했다.
한승훈, 한송이.
6년 터울의 친남매.
송이가 초등학교 1학년 입학을 할 때 자신은 중학교에 들어갔다. 나이 차 많은 여동생이라, 어릴 때부터 늘 챙기고 보살펴 줘야 했다. 남매가 터울이 많으면 업어 키운다고 하던데, 승훈의 경우가 딱 그랬다.
그는 공부는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심성은 착했고 하나뿐인 동생을 늘 아껴주었다.
'내 동생이라고 해도 그땐 참 못났었는데.'
송이가 예뻐서 아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가족이니까.
6살이나 어린 동생이니까.
남들이 못난이라고 하도 놀리는 통에 발끈해서 싸운 적도 더러 있었다.
그랬던 동생이 어느날 갑자기 달라졌다. 여중을 다닐 때만 해도 은둔형 외톨이에 가깝던 동생이 고등학교에 이르러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완벽하게 변신한 것이었다.
처음엔 젖살이 빠지는 과정인 줄 알았다. 얼굴선이 점점 갸름해 지더니 점점 예뻐졌다. 몸매도 자연스럽게 늘씬해졌는데, 오빠인 자신이 보기에도 낯뜨거울 만큼 몸매의 굴곡이 변화되었다.
유전자 몰빵.
그런 말이 딱 어울리는 변화에 가족들이 모두 놀랐다.
놀라운 건 신체만 변한 것이 아니었다. 방에서 혼자 흥얼거리던 노래가 점점 들을만해 지더니, 나중에는 가수 뺨치게 잘 부르게 된 것이었다. 사람이 갑자기 180도 달라지자 오빠인 승훈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업어 키웠던 한송이가 아닌 것 같았다.
코찔찔이, 소심한 은둔형 외톨이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친구들이 진짜 친동생이냐고 물어볼 정도로 빼어난 미녀로 탈바꿈되었다.
'그때 그 과외 선생 덕이라고 했던가?'
언젠가 한 번 승훈은 친동생에게 궁금해서 물었다.
갑자기 이렇게 달라진 연유가 무엇이냐고.
오빠지만 너무 궁금해서 그렇다며.
그때 송이가 말했다.
중3 때 부모님이 붙여준 과외 선생 덕분이라고.
전문 과외 선생이었던 그녀는 송이를 자신의 오피스텔로 불러 다 가르쳤다. 여자선생님이었기에 부모님은 안심하고 송이를 과외를 보냈다. 성적은 나날이 올랐고, 부모님은 고등학교 때까지 쭉 송이를 맡겼다.
그리고 송이가 달리진 기간은 그 과외선생과 만나던 시기와 거의 맞아떨어졌다.
'나도 그 선생님한테 과외를 받았으면 인생이 달라졌으려나?'
하지만 부모님이 송이를 과외에 맡긴 것은 순전히 자신 탓이었다. 게임을 좋아하고 공부를 등한시한 덕에 지방 3류 대학에 진학한 장남을 지켜본 부모님이 동생만큼은 저렇게 키우지 말아야겠다며 없는 형편에 과외를 붙인 것이었으니까.
송이도 한 번은 그런 뉘앙스로 말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인생이 바뀐 건 오빠가 지독하게 공부를 안했기 때문이라고.
'풉-. 뭐 어쨌든, 나도 결과적으로 잘 된 편이니까.'
승훈은 송이를 무한 신뢰했다. 송이는 못하는 게 없었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노래에 인터넷 방송까지. 갈수록 잘하는 분야가 많아졌고, 손대는 족족 모두 대박이 났다. 덕분에 아무런 비전도 없던 한량인 자신도 인기 BJ의 매니저라는 감투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래. 송이가 알아서 잘하겠지. 나는 조용히 송이 뒷바라지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무능한 오빠라도 불려도 상관없어. 잘난 사람의 핏줄이 나라는 게 중요한 거지.'
승훈은 자신의 동생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 * *
백색의 세계.
지평선도 수평선도 보이지 않는 무한의 공간.
그곳에 갑자기 또 다른 세상이 창조되었다.
나의 발끝에서 뻗어나간 대지가 저 멀리 산봉우리를 만들었고, 아무것도 없던 천장이 갑자기 푸른 하늘로 변했다. 아무것도 없던 무의 공간은 빽빽한 대나무 숲으로 바뀌었다. 풀 내음, 벌레 소리, 서늘한 바람 마저 현실과 똑같은 감각이었다.
"어우씨, 여긴 올 때마다 놀랍단 말이지? 가상과 현실을 구분 못 하면 메트릭스 안에서 뇌만 둥둥 떠있는 거랑 뭐가 다른 거야?"
검은색 무복.
옆에 찬 장검.
전형적인 무협 소설의 주인공 차림이 된 나는 간만에 높이 점프를 했다. 확인해 볼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너무 높이 뛰었던지 하늘 높이 솟은 대나무 위로 솟구쳐버렸다.
"우어엇!"
놀라운 일이었다. 일전에 천상크래프트에 들어왔을 때와 몸 컨디션 자체가 달랐다. 혹시나 늘어난 내공이 가상 현실에도 반영되나 싶어서 시험해 본 건데 진짜였다.
쿵-!
추락에 가까운 낙하였지만, 무릎을 굽힘으로써 충격을 완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리가 요란했는지 곧바로 산적들이 몰려왔다.
"웬 놈이냐!"
"여기가 어디라고 소란을 피우느냐!"
"어? 대사가 달라졌네?"
"이 자가 광인이 틀림없구나!"
그동안 회차를 거듭한 결과 놈들의 행동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특히 첫 산적 등장 씬은 판에 박힌 듯 한결 같았는데, 이번엔 대사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오호. 내 행동에 따라 실시간으로 바뀌는 거구나?'
예상은 했지만 가상 현실 세계의 NPC들은 완벽한 인공지능이 적용되어 있었다. 즉, 나의 대사와 행동에 따라 게임의 양상이 실시간으로 바뀌는 것이다. 선택지에 따라 몇 개의 분기를 만들어내는 게임은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완벽하게 AI가 적용된 게임은 현실에 없을 것이다.
하긴 천상계와 인간계의 기술격차가 어마어마하다고 했으니.
'가만. 그렇다면 혹시 이 산적들을 이용할 수도 있을까?'
어차피 산적 이벤트는 튜토리얼에 불과하다. 게임 안에서 가상현실의 물리법칙을 적용하기 위한 일종의 몸풀기인 셈이다.
이제까지는 놈들을 물리치기만 했는데, 생각해보니 이놈들을 활용하는 방법이 주막의 열쇠를 푸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야, 잔챙이는 됐고 두목 불러와."
"뭣이라?"
"네놈이 간이 배밖으로 나온… 컥!"
나는 검을 뽑지도 않고 순식간에 놈들을 제압했다.
강화된 내공은 이제 맨손으로도 산적을 상대할 수 있게 만들었다. 놈들을 사로잡아 본거지를 털었다. 신기하게도 산적은 산채까지 가지고 있었고, 산채 내부도 디테일있게 묘사되어 있었다.
즉 이 산적들은 난데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이 산을 점거하고 있던 산적 무리라는 설정인 것이다.
'놀랍군. 이정도로 디테일이 있게 게임을 구성하는 게 가능한 것인가? 플레이어가 어떻게 행동할 줄 알고 여기까지 예측해 놓은 거지?'
산적들을 꽁꽁 묶은 나는 두목을 상대로 담판을 벌였다.
"산 아랫자락 주막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물론 산적 두목이 고분고분 말을 들을리 없었다.
놈은 저항했고, 나는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뼈져리게 느끼게 해주었다.
상대가 실제가 아니란 걸 알고 있으니, 나는 더없이 잔혹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사이코패스가 이래서 무서운 거구나.
"흐, 흐흑 살려주십시오."
"그래, 살려는 드릴게."
"객잔은 인육 만두를 만들어 파는 곳입니다. 미혼약을 먹여 손님을 기절시킨 다음…."
"그만. 역겨워서 토할 것 같군. 놈들의 정체가 뭐야?"
"마, 마교의 비밀 지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비밀 지부? 정확히 뭐하는 곳인데?"
"저, 저도 그것까진 모릅니다. 살려주십시오. 저도 이곳에 오래 자리 잡고 있다 보니 귀동냥으로 들었을 뿐 마교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놈들중 하나가 굉장한 고수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굉장한 고수라고?"
"네."
놈이 피를 철철 흘리며 대답했다. 저 말은 결코 거짓은 아닐 것이다.
'흐음. 그랬구나. 혹시 식칼 던지던 주방장 그 새끼인가? 만만 치 않은 실력이긴 했는데.'
미호에게 내공을 얻기 전에 싸울 땐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것같다.
다만 옥봉사선자와 동선이 겹친다는 게 문제다.
'아하. 가만있자. 이게 실시간으로 내용이 바뀌는 게임이라면 내가 지금 주막으로 가지 않고 저녁이나 더 늦게 가게 되면 양상이 전혀 달라지는 거 아닌가?'
생각해보니 옥봉사선자와 그곳에서 마주칠 필요가 없었다.
어쩌면 한 발 늦게 진입해서 그녀들을 구출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정답이 아닐까?
나는 정면 대결을 펼치는 무사가 아니라, 사실 야간에 적을 기습하는 암살자 였던 것이다.
"오호라, 공략법을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