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533화 (1,488/2,000)

1516. 정체불명의 그녀-1-

꽁초를 주운 쥔 도훈의 손이 마법처럼 허공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다시 등장한 그의 손엔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인벤토리에 담배 꽁초를 넣으신 겁니까?]

'어쩔 수 없잖아. 흡연 금지 구역에서 몰래 피웠는데, 꽁초라도 챙겨야지.'

[인벤토리를 쓰레기통으로 활용하실 줄이야….]

'인벤토리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쓰레기가 된 기분이라고.' 도훈의 자조적인 표현에 로시가 위로했다.

[왜 그러십니까? 주인님이 쓰레기라뇨? 인성이 그닥 좋은 편은 아니지만, 쓰레기까진 아닌데요.]

'그게 아니라 잦이가 안 서니 삶의 의욕도 안 생긴다는 뜻이었어. 잦이도 못 세우는 남자가 뭘 할 수 있겠어?'

[과거 일부러 내시를 선택한 사람들도 평생 천수를 누렸다고 하더군요.]

'아씨, 말을 해도 쫌! 나보고 평생 내시로 살라는 거야 뭐야?'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주인님의 고통은 일주일이면 해방이라는 소리죠. 평생이 아니라요.]

방금 전 일로 부쩍 예민해진 도훈은 짜증이 치밀었다.

'내가 줘도 못 먹는 병신이 될 줄이야. 진짜 인생의 굴욕이다.'

[근데 방금 그 레깅스녀 살짝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뭐가?'

[어떻게 처음 보는 남자한테 그런 요구를 할 수 있을까요?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요.]

'변태니까 그렇지. 세상에 변녀가 얼마나 많은데?'

[변녀가 많다고요?]

'왜, 일부러 배달 음식 시키고 홀딱 벗고 나가는 애들도 있다잖아.'

[홀딱 벗고요? 속옷도 안 입고?]

'어.'

[대체 왜 그런 답니까?]

'배달원이 강제로 덮쳐주길 바라는 거지. 은근히 자주 있는 일이래. 그런 사람 만나면 계타는 거지.'

[세상 말세로군요.]

'그뿐인 줄 알아? 택시에 무임 승차해서 몸으로 때운다는 여자도 있어. 그것도 뭐 일부러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하-!]

'sns에 야외노출 사진 찍어나 버젓이 얼굴 까고 섹파 구하는 애들은 허다하지. 여자들도 은근 변태 엄청 많다니까? 다들 쉬쉬해서 그렇지.'

[역시 세상은 넓고.]

'변태는 많은 법이지.'

도훈은 레깅스녀에 대한 우울한 기억을 떨쳐버리고 다시 정음에게로 돌아갔다.

* * *

한편 오늘 허탕을 친 레깅스녀는 씩씩거리며 남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아씨, 거지 같네 진짜. 잘생겨서 딱 마음에 들었는데, 하필 골라도 그런 고자 새끼를.'

레깅스녀의 이름은 백송은.

파프리카라는 인터넷 방송국에서 BJ를 하고 있었다.

BJ라곤 하지만 소위 '하꼬'로 불리는 비주류. 송은은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고 몸매를 과시하는 위주의 자극적인 컨텐츠로 근근이 연명해가고 있었다.

주로 야심한 시각에 라방 위주의 별풍 구걸을 하다 보니, 시간이 비는 낮에는 운동 삼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게 그녀의 취미였다. 그러다 마음에 쏙 드는 남자가 있으면 방금처럼 무턱대고 찔러보는 변녀.

'씨발, 그래도 어떻게 이 몸매를 보고 안 설 수가 있지? 덩치 좋고 좆 작은 애들도 서긴 서던데, 서지도 않는 새끼는 또 처음보네.'

기분이 잡친 송은은 남산을 내려오는 길에 핸드폰을 꺼냈다.

울적한 마음에 간만에 친구에게 연락이나 할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송은은 통화버튼을 누르기 주저했다. 전화가 씹히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 씹히면 진짜 존심 상할 것 같은데.'

친구는 송은과 비슷한 시기에 하꼬로 데뷔한 BJ였다.

우연히 다른 사람의 라이브 방송을 둘러보던 송은은 자신과 이름이 비슷한 여자BJ 방에 들어갔다.

예쁘장한 얼굴의 먹방 BJ.

흔히 컨텐츠가 빈약한 초짜들이 주로 도전하는 분야로서 송은은 방송이 어설픈 상대를 보고 처음엔 코웃음을 쳤다.

'조명판 하나 없는 BJ는 오랜만이네. 마이크 볼륨도 너무 작고.

설마 지금 캠이 아니라 핸드폰 촬영인건가?'

그래도 먼저 시작했다고, 송은은 10명도 없는 시청자들을 두고 열심히 방송을 하는 상대를 위해 채팅으로 이런 저런 조언을 남겼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뒤 서로의 방송을 오가며 친분을 쌓고 나중에는 오프라인으로도 이따금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그게 불과 6개월 전이야. 하지만 지금은 나랑 비교도 안 되는 인기 BJ가 되어버렸지. 올 연말에 신인상 후보까지 거론되던데.'

BJ라면 응당 구독자수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6개월이 지나도록 구독자 1000명도 넘지 못한 자신에 비해, 그 친구는 20만을 훌쩍 넘겼다. 라이브 방송만 켜도 만명이 넘는 실시간 구독자가 몰려들 정도였다.

친구의 성공을 축하해주긴 했지만, 송은은 솔직히 말해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서로 어려움을 함께한 사이라 더 그럴지도 몰랐다.

이제 안드로메다까지 벌어진 둘 사이의 격차로, 송은은 연락마저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자격지심이었다.

'아씨, 구질구질하다. 그만둬야지. 이게 뭐하는 짓이람.'

송은이 다시 핸드폰을 집어 넣으려고 하는데 거짓말처럼 전화가 걸려왔다. 공교롭게도 발신인은 바로 방금 전화를 걸려고 했던 그 친구였다.

'헉! 이게 무슨 일이람?'

송은이 다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송이! 무슨 일이야? 오전부터 전화를 다 주시고?"

-보고 싶어서 전화했지! 잘 지냈어?

송은은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격지심 때문에 연락을 못했던 자신의 기우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하하! 나야 늘 잘 지내지. 간만에 남산에 등산하고 오는 길이야."

-헉? 그럼 혹시 라방중?

"아니아니. 그냥 혼자서. 난 스튜디오에서만 촬영하잖아."

-아하, 난 또 방송하는 중인가 했네.

"방송 중이면 더 대박이지. 파프리카 인기 BJ 한송이가 몸소전화까지 걸어준 건데."

-에이, 너무 띄운다. 민망하게.

"띄우다니? 펙트잖아. 나 같은 하꼬BJ한테 너처럼 잘나가는 친구가 있다면 우리 구독자들 난리날 걸?"

송은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 씁쓸해했다. 사실 그녀는 단 한번도 한송이와의 관계를 자신의 구독자들에게 밝히지 않았다.

첫째는 유명인에게 빌붙고 싶지 않다는 알량한 자존심 같은 것이었고, 둘째는 그나마 그녀의 몸매 때문에 붙어있던 1000여명의 구독자들이 한송이 채널로 넘어가지 않을까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여간 얄미운 계집애. 먹방 BJ 주제에 몸매는 나보다 좋아가지고.'

처음 오프라인에서 송이를 만나던 날을 송은은 잊지 못했다.

방송할 땐 늘 몸매를 숨겨온 송이가 직접 보니 엄청난 글래머에 말도 안 되게 잘빠진 몸매의 소유자였던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방송에서 의도적으로 몸매를 감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화했는데.

"응? 그것 때문이라니."

-나 한 달 전 소속사 들어간 거 알지?

"응, 친오빠 혼자 매니지 하기 벅차다고 전문 업체랑 계약했다며?"

-거기 PD가 콘텐츠도 짜주는데 갑자기 합방으로 나친소 특집을 하자더라고.

"나친소? 그게 뭐야?"

-나의 소중한 친구를 소개합니다 코너?

한송이의 말에 울컥한 송은은 잠시 핸드폰을 입에서 떼야 했다.

감정이 복받쳐 울먹이는 소리가 나올까 창피했던 것이다.

'아아, 소중한 친구라니. 송이는 여전히 나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난….'

송은은 하꼬에 불과한 자신을 여전히 챙겨주는 송이에게 감격했다. 송은이 잠시 말을 않자 송이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너 아니었으면 난 방송 시작도 못 했을 거야. 조명이고 음향이고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핸드폰 카메라로 무턱대고 시작했으니까.

송이가 과거의 일을 회상하듯 말했다.

-그때 네가 이것저것 다 알려줘서 여기까지 왔어. 그러니 이번 합방에 꼭 널 초대하고 싶어.

"에이, 뭘 또 그런 걸 가지고…."

송은은 민망했다.

당시엔 이름도 비슷하고 먼저 시작했다고 아는 척하며 몇 마디 훈수해준 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런 조언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금방금방 적용해가는 송이가 기특해 좀 더 선심을 썼을 뿐이었다.

실제로는 송이 전부 혼자 이룩했다고 해도 무방했다.

구독자가 백명에서 천명이 되고 만명이 돌파하더니, 어느덧 20만을 찍은 인기 BJ로 올라서기까지 송은이 직접적으로 도움을 줬다기엔 지나친 과장이었다.

-내가 고마워서 그렇지. 암튼 시간 내줄 수 있어? 내일 바로 영상 찍자던데.

"으, 음. 생각 좀 해볼게. 우리 구독자들한테도 물어는 봐야 하니까."

-응! 좋은 소식 기대할게!

"그래. 암튼 챙겨줘서 고마워."

-당연한 소릴. 우리 사이에 챙기고 말게 어딨니?

송은은 민망함에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 착한 송이를 조금이나마 시기하고 질투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릇의 크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번 달까지 잘 안되면 그냥 성방으로 넘어가 버릴까 생각했었는데….'

송은은 사실 벗방까지도 고려 중이었다.

변녀인 것과 별개로 송은은 솔직히 만천하에 얼굴을 까고 벗방까지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모든 변녀가 창녀를 직업삼지 않는 것처럼, 송은 역시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성적 취향을 공개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물론 한다면 누구보다 잘할 자신은 있었지만, 그래도 알량한 자존심에 끝까지 미뤄왔던 일이었다.

그랬던 송은에게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다.

'이건 송이가 나한테 동아줄을 내려준 것이나 다름없어. 이번 합방이 잘 되면 분명 구독자도 엄청 늘어날 거야. 맞아, 이럴 때가 아니다. 얼른 미용실 가서 새로 머리해야지.'

송은은 기쁜 마음으로 남산을 뛰듯이 내려갔다. 어느새 고자 도훈을 만난 일은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진 상태였다.

* * *

"오빠 또 담배 피우고 왔죠?"

"으, 응? 아니야. 화장실 다녀왔는데?"

정음이 가슴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코를 킁킁거렸다.

"으음, 냄새가 나는데요?"

"그, 그래?"

'나는 다른 냄새가 나는데.'

정음이 바짝 얼굴을 들이밀자 그녀의 몸에서 아찔한 육향이 올라왔다. 바디워시 냄새? 아니 그보다는 살냄새에 가까웠다.

'미치겠네 진짜. 일부러 저러는 걸까?'

[누가요? 정음양이요?]

'왜 저렇게 나를 도발하지?'

[그보다는 주인님이 너무 의식하는 게 아닐까요?]

'그런가 보네. 미치겠어. 떡을 못쳐서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아.'

[마지막으로 관계하신 지 24시간 조금 지났을 뿐입니다만?]

'솔직히 잦이에 물 마를 날이 없었잖아. 원하면 어느 구멍에든 담글 수 있었다고. 심지어 지나가는 여자 바로 헌팅해서라도. 이런 상태로 일주일을 어떻게 버티지?'

[이제 6일 남았습니다. 힘내십시오.]

"담배 좀 줄여요. 몸에도 안 좋은걸."

"응. 알았어."

"말로만 그러지 마시고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야죠."

"하하. 무슨 마누라처럼 말한다, 너?"

나도 모르게 '마누라'라는 말을 언급했다가 스스로 당황하고 말았다. 정음의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이런 젠장. 마누라란 말은 왜 꺼내가지고.'

[정음양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아마도 그렇겠지. 정음이는 사귀면 결혼해야 하는 줄 알잖아.'

[저런.]

"큼큼, 암튼 줄일게."

"…네."

정음은 무슨 생각하는 지 얼굴이 빨개진 채 땅만 쳐다보았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차는 모습에 나는 속으로 크게 후회했다.

'망했다. 이미 정음이는 나랑 결혼해서 애를 몇 명 날지까지 생각하는 모양이야.'

[큰일 났군요.]

'애를 낳을 땐 섹스를 해야 하니까 또 섹스까지 생각이 미칠거고 그러면 오늘의 데이트 끝은 무조건….'

[주인님 치망순역지(齒亡唇亦支)의 묘를 발휘할 때인 것 같습니다.]

'뭐라고?'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버텨야 한다는 뜻이지요. 대물을 못 써도 주인님의 섹스킬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혓바닥과 손가락만 있으면 누구든 절정으로 보내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게다가 주인님껜 실제와 비슷한 느낌을 내는 딜도도 있습니다. 정음양이 정 원하면 그렇게라도 만족시켜주시는게, 외면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요?]

음, 확실히 로시의 조언도 나름의 해결책이 될 수 있었다.

축제 때 제대로 못 챙겨줘서 일부러 주말에 데이트까지 했는데, 막상 마무리가 흐지부지하면 정음이 상처 받을지도 모른다.

만날 때마다 박아주던 오빠가, 갑자기 안 박아주면 자신의 성적 매력이 떨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면 어떻게든 데이트의 끝은 호텔 침대여야 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좆이 없으면 불알이라도 써야 하는 것이다.

"이제 타워에 올라볼까?"

"네."

정음이 손을 잡고 쫄래쫄래 따라왔다.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설사 내가 만족 못해도 정음이라도 보내주는 섹스를 해보자고.

무발기 사정이라도 좋으니, 온몸으로 그녀를 보내주자고.

처음부터 그렇게 마음을 먹었어야 했다.

좆이 안서다 보니 자신감까지 잃어서 괜히 피할 생각만 했다.

난 잦이만 큰 초짜가 아니다.

온갖 섹스킬로 무장한 난봉왕이다.

오늘 밤, 쾌락 없는 책임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줄 참이다.

남산타워 구경을 마치고, 남산 아랫자락의 왕돈가스 집에서 식사를 마친 나는 정음을 태우고 차를 몰았다.

딱히 어디를 가자고 말하지도 않았고, 정음도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았다.

어느새 우린 무인텔에 차를 주차하고 모텔로 입성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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